자유민주연합

 

'''대한민국 연립여당'''
유신정우회
,(1973.3.~1979.10.),

'''자유민주연합
(1998.2.~2001.8.)
'''

더불어시민당
,(2020.3.~2020.5.),
'''민주국민당
(2001.4. ~ 2001.8.)
'''
[image]
[image]
'''자유민주연합'''
'''공식 명칭'''
자유민주연합
(自由民主聯合, United Liberal Democrats)
'''등록 약칭'''
자민련
'''창당일'''
1995년 3월 30일
(민주자유당에서 분당)[1]
'''해산일'''
2006년 3월 10일
(해산 직후 한나라당에 일괄합류[2])
'''등록 약칭'''
자민련
'''선행 조직'''
(1990년, 3당 합당)
'''통합 정당'''
, (1995년 5월 31일)
'''이념'''
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
반공주의
충청 지역주의
'''스펙트럼'''
우익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로 70
(신수동, 화수목빌딩[3])
'''의석 수'''
'''1석 / 297석''' (17대 국회, 해산 직전)
'''당 색'''
녹색 (#1B5B40)
녹색 (#289020)
'''홈페이지'''

1. 개요
2. 강령 및 기본정책
3. 역사
3.1. 창당과 약진
3.3. DJP연합 균열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3.4. DJP연합 시즌 2 그리고 파탄
3.5. 분당과 소멸
4. 역대 지도부
6. 여담
7. 역대 선거결과
7.1. 재보궐선거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자민련의 당색(黨色)과 로고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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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5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지역정당의 대명사'''.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 나온 두 번째 제2야당(원내3당)'''[5]이자 한국 정치사에 흔하지 않은 '''최장기 연립여당'''이었다.[6] 약칭은 '''자민련'''(自民聯: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을 중심으로 창당한 정당으로, 충청도 지역[7]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정당이었다. 충청권 보수정당의 핵심으로 분류된다. 이념적 성향은 자유민주주의, 보수주의.[8]
연합이 두음법칙 문제상 /련/ → [연]이지만 약칭에서는 접미사 비슷하게 되면서 원래의 [련] 발음이 되살아나서 그렇다.[9] 발음은 /ㄴㄹ/ → \[ㄹㄹ\] 자음동화 규칙이 적용된 \[자밀련\]이 아니라 /ㄴㄹ/ → \[ㄴㄴ\] 자음동화 규칙이 적용된 \['''자민년'''\]이니 주의.[10]

2. 강령 및 기본정책


우리는 근대화로 이룩된 광복 50년의 국가저력을 바탕으로 하여 의회민주정치를 확립하고 민족 재도약의 웅대한 역정을 펼쳐야 할 신세기 앞에 다가서 있다. 여기, 우리 자유민주연합은 이 시대의 소명을 수행할 가장 책임있는 정치세력으로서 의회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이념을 토대로 모두가 훈훈하고 보람있게 사는 선진문화복지국가를 건설하고 민족대통합의 위업을 이루어 낼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의 강령을 밝힌다.

1. 우리는 의원내각제를 추진하여 권력의 독선과 전횡을 막고 의회의 권능을 확립하여 주권재민의 참된 책임정치를 실현한다.

2. 우리는 완벽한 지방자치의 실시로 주민자치의 시대를 열고 지방의 특색과 토양에 맞는 생활정치를 실천한다.

3. 우리는 질 높고 안정된 성장 속에서 중산층의 권익을 보호∙신장하고 농어민∙노동자 및 저소득층 모두의 중산층화를 위하여 지원과 복지를 확충한다.

4.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하여 국제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정보화시대, 고도지식산업사회에 부응키 위하여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진흥시킨다.

5. 우리는 도덕과 신의가 지켜지며 자율과 책임이 강조되는 사회를 건설하여 모두가 서로 믿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게 한다.

6. 우리는 교육의 기본을 인성의 함양에 두고 교육의 자율화로 개성과 창의를 제고하며 문화예술의 창달에 진력한다.

7. 우리는 민족에 대한 존엄과 사랑을 견지하는 가운데 자유민주체제를 토대로 한 평화통일을 차분하게 추구한다.

8. 우리는 안보를 굳건히 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한 능동적 외교로 국제사회에서 성숙한 성원이 된다.

기본정책 10가지

책임정치의 실현

경제정의의 실현

중소기업의 육성

국제화, 개방화를 대비한 농림수산업의 진흥

교육 개혁과 문화의 창달

창조적인 연구와 과학기술 진흥의 지원

국토개발의 질적 전환과 균형 있는 지방사회 발전

안정된 복지사회 구현

환경복지와 환경창조의 사회 실현

외교주권의 확보와 민주평화통일


3. 역사


1995년 3월 30일에 창당돼 2006년 3월 10일에 소멸하여[11], 11년 8일 존속한 꽤나 장수한 정당이었다. 한나라당이 이 기록을 깼지만[12], 2004년 3월 23일에 로고를 변경한 것을 감안하면 로고의 지속성 등의 정체성은 더 길었던 정당이다.[13][14]
특기할 점은 새정치국민회의와 '당'으로 끝나지 않은 이름을 가진 정당끼리 정부를 이뤘는데, '당'으로 끝나지 않는 정당 후보의 대선 당선 역시 국내 정치사에 유일무이하다.[15] 굳이 '당'이라고 하지 않고 '연합'이라고 한 까닭은 민주자유당에서 분당돼서 나왔는데 자유민주당이라고 하면 구분이 잘 안 될 것이고 일본 자민당의 한국 내 부정적인 이미지가 전이될 가능성이 있어서 자유민주연합이 당명으로 결정되었을 수도 있다.


3.1. 창당과 약진


1994년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해 민정계[16]+민주계[17]+공화계[18] 크게 3계파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런데 YS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민주계가 높은 정권 지지율을 등에 업고 본격적인 당권 장악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민주계의 젊은 의원들은 1994년 말 당시 민자당 대표위원이던 김종필을 '개혁정권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 인사'라고 몰아세우며 강력하게 퇴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결국 김영삼 대통령 및 민주계와 갈등을 겪던 김종필 대표위원은 1995년 1월 자신을 따르는 공화계 의원들을 데리고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을 창당하였다. 여기에 민주계에 밀렸다고 생각한 민정계 일부가 가담했다.
그렇게 창당한 자민련은 창당 직후 열린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충청권을 석권하고 대구, 경북 일부지역에서 선전하는 한편 강원도지사와 강원도 지역의원 다수를 당선시킨다. 당시 주된 선거 전략은 김종필 총재의 '당 대표 쫓아내는 게 세계화냐', '다른 지역에서 충청도핫바지로 보고 있다' 등의 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충청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핫바지론'과[19], '북한 쌀 보내기 결사 반대'[20], '문민정부는 사이비 보수, 내가 원조보수다'라는 '원조보수론'으로, 강원도수도권 보수층의 민심을 얻은게 주효했다. 당시 선거 직전 노태우 대통령의 처남인 김복동의 신민당과 합당하는 등 4·5공 세력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당시 PK정권이라 불리던 YS 집권기 소외감을 느끼던 TK 지역을 공략했다.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선 충청권을 석권하고, 당시 반신한국 정서가 팽배했던 TK 지역에서 원조보수론을 내걸고 선전하면서[21] 강원도와 수도권 당선자까지 합쳐서 총 50석으로 DJ의 새정치국민회의 다음가는 제2야당의 지위를 굳히며 리즈 시절을 찍게 된다. 다만 여기서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보통이면 젊은 의원이나 정치신인에게 주는 전국구 의원 상위순위들을 정상구, 정상천 등 줄줄이, 민정·공화계의 노장들로 채워버리는 짓[22]을 했다.[23] 반면 신한국당·국민회의는 비교적 젊은 정치신인들에 전국구 공천을 주었다.[24]
당시 자민련 소속인사들을 보면 대다수가 공화계 - 민정계이거나 관료, 군인 출신들이 많았다. 공화계의 수장이자 총재 '''김종필''', 이병희, 정석모, 김용환, 이인구, 김칠환, 김종학 등이 공화계열, '''박준규''', '''박태준''', '''박철언''', '''김복동''', '''강창희''', '''박준병''', 이태섭, 이정무, 김일주, 박구일, 구천서, 김현욱, 이긍규 등이 민정계에서 넘어왔다.
정우택[25], 이의익[26], 허남훈, 이양희, 김의재, 박종근, 류종수[27], 김선길, 함석재[28], 오용운, 이재창[29], 조종석, 김화남[30], 이근영[31], 이상만 같은 관료 출신들, 변웅전 같은 유명인사, 박신원, 어준선, 정일영, 김범명, 권수창, 김고성 같은 지역유지 출신들도 있었으며, 이원범같이 의외로 민주계 인사가 가담한 경우도 있다.
황학수 정도가 신진인사였다고는 하는데, 막상 이상만과 김고성은 훗날 김용환을 따라 희망의한국신당으로 2000년에 이탈하면서 무소속으로 이탈한다.
보면 알겠지만 과거 운동권에서 종사했던 인물이나 젊은 인물들은 전혀 없었다. 그나마 젊은 사람이 44세의 정우택[32]이었으니... 장기적으로 생존하기엔 힘들어보였다.

3.2. DJP연합 시즌 1


15대 총선이 끝나고 바로 다음 해인 1997년 치뤄질 15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DJ와 JP는 각각 단독 집권이 어렵다는 공통인식을 갖게 되었고[33], 김종필과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로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하고, 집권시에 내각을 공동구성한다는 일명 DJP연합에 합의해 15대 대선에서 DJ를 지지했다. 이후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자민련은 공동여당이 되었다.[34] 반대로 한나라당(신한국당)은 이인제가 경선불복을 선언하면서 국민신당을 창당해 출마하는 바람에 표가 분산돼버렸다. 마치 10여 년 전 김영삼, 김대중이 서로 아웅다웅하던 통에 표가 분산되고 그 결과 노태우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과 비슷한 일이 다시 재현된 것.
정권교체 후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국무총리 3명을 배출하고[35] 국무위원 다수를 배당받는 등 명실상부한 공동여당으로 위세를 떨쳤다. '''이한동'''[36], '''김학원'''[37], '''이완구'''[38], 노승우, 백남치, 이상현, 오세응[39], 이택석, 김종호[40]등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대거 탈당하고 자민련으로 옮겨온 것도 이때.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 열린 1998년의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DJP연합의 연장선상에서 새정치국민회의와 전 지역에서 후보를 단일화하였다. 이런 연합공천의 위력으로 자민련은 자신들의 텃밭인 대전광역시, 충청북도, 충청남도는 물론 인천광역시에서도 승리했다.[41] 강원도에서도 무소속 후보 난립이 아니었으면 승리했을 것이다. 이로서 여당야당이 국토 좌우를 딱 나눠먹은 모양새가 되었다. 합산 지지율 시·도지사 선거 49.8%, 시·도 의원 49.6%, 시장·군수·구청장 선거 45%. 부산에서도 보궐선거에서 김동주 후보가 당선되었다.[42]
이 시기에는 대선과 지방선거의 연이은 승리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간의 '''합당이 거론[43]'''될 정도로 두 당 사이의 관계가 매우 화기애애했다. 오히려 한나라당이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안을 부결시키는 등 자민련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공세를 펼치고, 서로서로 의원 빼가기를 하는 등 날선 각을 세웠다.

3.3. DJP연합 균열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그러나 DJP연합이 2년차에 접어들던 1999년 자민련과 국민회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다. 두 당은 내각제 개헌, 햇볕정책, 남북정상회담, 재벌개혁 등 여러분야에서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7월 내각제 개헌 추진 포기를 합의하자 자민련내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고, 공동정권 철수 같은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왔다.[44] 이런 연장선상에서 결국 합당은 물건너 갔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의 양당 연합공천이 무산되었다.[45][46]
그러나 자민련이 연합공천을 거부하고 호기롭게 16대 총선에 나선 결과는 '''대참패'''였다.
일단 '''비충청권 지역에선 모조리 망했다.''' 지난 15대 총선에서는 반민자비민주 정서에 힘입어서 수도권과 강원도, TK(대구경북) 지역에서 보수표를 끌어모아서 다수의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50석을 차지했었다. 하지만 16대 총선에서 비충청권 지역구에서 승리한 자민련 후보는 경기도 연천군·포천군의 이한동 총재 단 한 명 뿐이었다.[47] 지난 총선과는 달리, 김대중 정부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비충청권 지역의 보수유권자들이 제1야당인 한나라당에 몰표를 던지고 연립정권의 공동여당이었던 자민련은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48]
그러면 충청권은 석권했느냐? 그렇지도 않았다. 연합공천이 무산된 이후 새정치국민회의는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을 개편하고 충청권 출신의 유력 대권주자 이인제를 앞세워 충청권 공략에 나서 8명의 당선자를 배출한다.[49] 한나라당도 4석을 차지하면서 나름 선방. 반면 자민련은 자신들의 텃밭인 충청권에서조차 절반도 안 되는 11석을 얻는 데 그쳤다.
결국 전국구 5석을 포함하여 총 17석을 획득하면서 15대 총선의 50석에 비하면 1/3로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20석도 얻지 못하여 원내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는 굴욕[50]을 겪게 된다.

3.4. DJP연합 시즌 2 그리고 파탄


2000년 말 민주당 측이 '연정은 아직 깨진게 아니다'면서 의원 4명을 '''꿔주는''' 희대의 정치사건이 벌어진다.[51] 이때 송석찬 의원이 한 그 유명한 "여당으로 한 마리 연어가 되어 돌아오겠다."란 말이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했다.[52] 결국 자민련은 아슬아슬하게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할 수 있었고,[53] 이에 다시 만족한 자민련은 김대중 대통령 임기말까지 연정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54] 하지만 연정 후에도 민주당 115석 + 자민련 20석 = 135석으로 절반(137석)에서 2석 모자랐던 민주당은 민주국민당(2석)[55]에도 손을 벌려야했고, 민국당의 한승수 의원(강원 춘천)을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입각시키며 간신히 원내 과반수를 채웠다. 사실 보면 알겠지만 DJ정부 중기쯤부턴 사실상 내각책임제처럼 운영된 감이 있다.
그럭저럭 유지되던 DJP연정은 2001년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56]에 자민련이 동조하면서[57]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결국 붕괴되고 만다[58]. 자민련으로 갔던 민주당 의원 4명(송석찬, 배기선, 장재식, 송영진)은 민주당으로 원대복귀했으며, 입각했던 자민련 소속 장관(농림부 한갑수, 건설교통부 김용채, 해양수산부 정우택)들도 사퇴하였다.[59] 그러나 자민련 총재인 이한동 국무총리는 오히려 내각 잔류를 결정했고, '''자민련은 현직 총재이자 국무총리인 이한동을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한다. DJP연정이 붕괴되면서 민주당은 국민의 정부 말기 들어서 국정운영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고, 자민련은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하며 당의 존립 여부조차 위태해지게 된다.
자민련의 안습한 상황은 계속되어 2002년 제3회 동시지방선거에선 텃밭이었던 충북[60]과 대전까지 한나라당에 내주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61] 그리고 2002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 정국이 되자 한나라당과의 협력론이 고개를 들었으나, 과거 자신의 국무총리 인준안 거부, 자당의원 빼가기 등으로 한나라당에도 제대로 화가 나있던 김종필은 중립을 선언하며 끝까지 이회창 지지를 거부한다. 이때 이완구, 송광호, 함석재, 이재선, 이양희 의원이 자민련을 탈당하고 한나라당으로 옮겨갔다.
결국 자민련은 대선 후보조차 내지 못했고, 노무현 후보가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2003년 11월 새천년민주당의 범친노계와 한나라당 탈당파 5인[62]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여권발 정계 개편이 시작되면서 자민련의 입지는 점점 더 애매해져갔다. 그리고 그렇게 '''자민련의 마지막 시련이 다가오게 되었다'''.

3.5. 분당과 소멸


탄핵 열풍이 몰아치던 2004년, 총재이자 당의 구심점이던 JP는 마지막 순간까지 탄핵을 원론적인 측면에서 반대했으나 '''소속 당원들은 일제히 탄핵에 찬성했다'''. 이때 JP를 제외하면 민정계 출신의 비례대표 김종호 의원만이 반대표를 던졌다.[63][64] 내각제 합의 등이 뒤에서 오간 거 아니냔 관측들도 있었는데, 어차피 탄핵과 마찬가지로 내각제도 정족수의 2/3 이상 동의로 개헌이 가능한 것인지라....하지만 탄핵 역풍은 예상보다 거셌고 국민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한나라당민주당내각제의 ㄴ자도 안 꺼내면서[65] 자민련이 가장 피를 봤다.
이후 열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10선에 도전하던[66] 당 총재 김종필이 무려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선 상황에서 득표율 2.82%를 얻어 딱 0.18%차로 3%를 채우지 못해 비례대표 의석을 1석도 획득하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실 지역구 의석이 5석 이상인 정당은 3% 제한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저 득표율로도 비례대표 당선자를 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한 석이 모자라면서 실패하여 더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17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에 50%이상의 여성을 홀수번에 꼭 배정하도록 정당법이 개정되었는데[67], 김종필은 본인을 1번으로 공천하고[68] 법까지 어겨가면서 뒷번호도 당장 당선이 급한 남성 정치인들로 채워 버린다. 대표적으로 비례대표 2번이 경남기업 회장인 성완종이었다. 어쨌든 이런 결과에 충격을 받은 김종필은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결국 자민련은 충청권 지역정당임에도 불구하고 4석의 충청권 지역구 당선자로 막을 내렸다. 그렇게 한때의 여당이자 제2야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은 함께 몰락한다. 이 선거로 양당은 원내 제3당의 자리를 민주노동당에게 내준다.
김종필의 정계 은퇴로 자민련은 당내 구심점이 사라졌고, 당시 부총재이자 충남지사였던 심대평이 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을 대신하는 중부권신당인 국민중심당 창당에 나서면서 급속히 무너진다. 자민련은 결국 중부권신당에 흡수되는 식의 합당합의를 했으나, 이 합의가 파기되면서 지역구 의원 4명 중 당 대표를 제외한 3명이 탈당의 방식으로 중부권신당으로 가버렸다. 결국 자민련은 마지막 의원 1명(김학원 대표)과 조직, 당 자산 등을 갖고 한나라당과 합당[69]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형식은 한나라당과의 합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중심당이 자민련의 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후 이회창과 심대평을 중심으로 2000년대 후반 충청 지역을 잠시 석권했던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국민중심연합의 전신이라고도 볼 수 있다.
2010년대 들어선 선진통일당도 2012년 새누리당과 흡수합당되면서 충청지역 기반정당은 사실상 사라졌고, 구성원 전원이 현재는 민주당계 정당, 민자당계 정당으로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4. 역대 지도부



'''대수'''
'''이름'''
'''직책'''
'''임기'''
초대
김종필
총재
1995년 3월 30일 ~ 1997년 6월 23일
제2대
1997년 6월 24일 ~ 1997년 11월 21일
제3대
박태준
1997년 11월 22일 ~ 2000년 2월 8일[70]
제4대
이한동
2000년 2월 9일 ~ 2001년 10월 8일
제5대
김종필
2001년 10월 9일 ~ 2004년 4월 16일
권한대행
이인제
2004년 4월 16일 ~ 2004년 4월 20일
비대위
조부영
비상대책위원장
2004년 4월 21일 ~ 2004년 6월 7일
제6대
김학원
대표최고위원
2004년 6월 8일 ~ 2006년 2월 9일
제7대
2006년 2월 10일 ~ 2006년 3월 10일


5. 자민이


해당 정당의 마스코트 캐릭터.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조.

6. 여담


  • 특이점으로는 창당 후 한 번도 당명과 로고를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다.[71] 정당명을 자주 갈아치우는 한국 정치에서는 참 희귀한 경우. 덕분에 한나라당과 합당될 당시를 기준으로 존재했던 정당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같은 이름을 써온 정당으로 기록되었다.
  • 자민련 이후 참여정부 시기엔 원내교섭단체를 이룬 제2야당은 없었으나[72],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각종 야당이 난립하고 특히 그 중 자유선진당이 제2야당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73] 이후 2016년엔 국민의당이 38석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가뿐히 넘기며 제2야당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다만 국민의당은 안철수라는 구심점과 기타 호남기반 정치인들이 뭉친 정당으로 자유민주연합-자유선진당과는 뿌리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충청도 지역보수 정당의 맥은 선진통일당에서 끊겼다는 것이 중론이다.[74][75] 이후부터 충청 지역은 반기문, 안희정 등 그냥 충청 지역 정치인을 당가리지 않고 밀어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 자민련이 등장한 이후, 지역 기반에만 안주하는 정당을 가리켜 앞에 지역명을 붙인 'XX 자민련'이라는 조롱성 표현도 생겨났다. 1995년에 창당된 정당 이름으로 쓰인 고유 명사에서 현재에는 지역 기반에만 안주하고 전국 정당이 되지 못하는 정당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로 쓰이는 셈. 예를 들어 충청을 기반으로 했던 자유선진당이 그러한 멸칭으로 불리었었고, 국민의당(이후 민주평화당)과 자유한국당(이후 미래통합당)이 각각 호남 자민련, TK 자민련으로 불리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바른정당바른정당 탈당사태이후 합당전까지 지방선거에서 원희룡을 제외하곤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 없게 되자 눈물의 제주 자민련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76][77] 단, 자민련의 마지막이 비참해서 그렇지 초기 충청은 물론 대구, 경기 북부를 아울렀던 초기 기세와 더불어 아직까지 그 어느 원내 3당 중에 자민련처럼 공동정권의 한 축에 활동한 당은 없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지역기반에 안주했다는 이유로 'XX자민련' 이런 식으로 부르기에는 가벼운 감이 없지 않다.
  • 새정치민주연합은 새정치연합이 공식 약칭이었으나 비공식 약칭으로 새정연, 새정련, 새민련(...), 아니면 그냥 다 무시하고 민주당 등이 있었는데 이 중 어감이 가장 이상한 새민련이 끝이 안 좋았던 자민련의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만들어낸 멸칭이었다. 당연히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새민련은 금기시되는 표현이었다.
  • 의외로 대구경북 출신 비보수계열 정치인들이 자민련 소속으로 많이 뛰었다. 특히 이 경향은 DJP연합 이후에 더 짙어졌는데 이유는 박태준 전 국무총리의 자민련 입당과 함께 포항을 비롯한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입당했기 때문. 게다가 이 당시 대구 경북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민주당의 지지세가 매우매우매우 약했기 때문에 그나마 연립여당이면서 대구경북에서 이름 좀 먹히는 자민련으로 많이 활동했다. 이 중 현재까지 정치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바로 허대만 전 더불어민주당 포항시장 후보.
  • 민주자유당에서 떨어져 나와 자립에 성공한 자민련과 달리 자민련에서 분당한 정당은 모두 실패했다. 하나로국민연합, 희망의한국신당은 거의 폭망 수준으로 떨어졌고[78], 국민중심당은 골수 자민련 지지 지역을 제외하고 기반을 흡수하지 못했다. 결국 국민중심당이회창자유선진당에 흡수 합당된다.

7. 역대 선거결과



7.1. 재보궐선거


'''연도'''
'''국회의원'''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1996년 4월

2 / 9

1996년 9월

1 / 1

1996년 10월

1 / 2

1996년 11월

1 / 1

1996년 11월

1 / 1

1997년 3월
1 / 2

1997년 7월
0 / 2

1997년 9월
1 / 1

1998년 4월
0 / 4

1998년 7월
1 / 7

1998년 11월

0 / 1

1999년 3월
1 / 2

0 / 1

1999년 6월
0 / 2

1999년 6월

0 / 1

1999년 8월

0 / 1

1999년 9월

0 / 1

1999년 9월

0 / 2

1999년 10월

0 / 1

1999년 10월

0 / 1

1999년 11월

1 / 1

1999년 12월

0 / 2

2000년 1월

0 / 2

2000년 6월

2 / 7
0 / 32
0 / 57[79]
2000년 10월

1 / 2
1 / 9
0 / 37[80]
2001년 4월

1 / 7
0 / 6
0 / 14[81]
2001년 10월
0 / 3

2002년 8월
0 / 13

2002년 12월
0 / 1

0 / 1
0 / 3
0 / 4[82]
2003년 4월
0 / 3

0 / 2
1 / 4
0 / 23[83]
2003년 10월

2 / 4
0 / 9
0 / 66[84]
2004년 6월

0 / 4
0 / 19
1 / 38
0 / 53[85]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신민당
새한국당
(개별 합류)

하나로국민연합
국민신당
(개별 합류)

희망의한국신당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국민중심당
하나로국민연합

한나라당

[1] 1차 창당 기준. 법적으로는 1995년 5월 31일 신민당과 합당 이후의 자민련을 별개의 당으로 집계하고 있다. 비슷한 케이스로 자유선진당이 있다. 참조[2] 참조. 다만 당 재산은 귀속되지 못했다.[3] 당시엔 인산빌딩. 2016년에 리모델링을 해서 자민련 당사시절과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자민련이 해산되면서 발생한 52억원의 당사 매각대금은 당 사무처 직원의 퇴직금 지급 및 부채상환에 쓰였으며 남은 금액 수억원은 다시 사회로 환원되었다.[4] 진한 초록색을 주 색으로 썼지만, 간혹 청록색이나 연두색을 쓰는 등 당색이 통일되지 못한 면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당측에선 김종필 총재가 선호하는 진한 초록을 주로 썼고, 시도당위원회 등에서는 연두색도 간혹 썼다. 여담이지만, 이 점은 피플그린-해피그린 두 당색을 혼용했던 국민의당과 기막히게 각각 사용한 색채까지 닮았다.[5] 첫 번째 제2야당은 통일국민당.[6] 유신정우회는 아예 대통령에게 지명되는 의원들이라 교섭단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정당이라고 말하는 건 불가능했다. 더불어시민당더불어민주당이 사실상 본체였던데다가 선거가 끝난 직후 흡수합당되었다.[7] 정확히는 대전광역시충청남도. 반면 충청북도는 무려 6개의 광역자치단체와 접하며 국토의 정중앙에 있기 때문에 외지인의 유입이 많아 충청 지역주의가 힘을 쓰기 어려웠다. [8] 보수주의를 표방하지만 의외로 반(反) 신한국당에 가깝고, 자민련이 살아있는 동안 아주 가끔은 농담삼아 '반(半)신한국당'으로 불렸다. 그래서인지 자민련과 자민련의 후신인 자유선진당 모두 해체 후 한나라당으로 안 가고 민주당계 으로 넘어간 의원(권선택 대전시장, 류근찬 전 의원 등)도 많이 있다.[9] 요즘에는 각종 단체 이름에 들어간 '연합(聯合)', '연대(連帶)' 등을 약칭에서 이런 법칙을 무시하고 원래 명칭의 발음 그대로 '연'으로 적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자 사용이 희박해지면서 두음법칙에 따르는 경우와 안 따르는 경우를 엄격히 지키려는 의식이 희박해진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10] 보통 자립적으로 발화되는 한 단어 내부에 /ㄴㄹ/ 연쇄가 있을 경우 \[ㄹㄹ\]로 동화되고(신라[실라\]) 자립적으로 발화되는 단어와, 그와는 다른 단어 또는 그 단어에서 유래한 약칭 음절의 경계에 /ㄴㄹ/ 연쇄가 걸쳐 있을 경우 \[ㄴㄴ\]로 동화되는 경향이 강하다(임진-란[임ː진난\]) 다만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다.[11] 탄핵으로 인해 열린우리당이 선전하자 '''김종필'''까지 낙선하고 4석만을 얻고 막을 내렸다.[12] 1997년 11월 21일~ 2012년 2월 12일까지 약 14년 2개월 21일.[13] 참고로 광복 이후 국내에서 오래 존속한 정당1963년 2월 26일 창당하여 19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산당한 민주공화당(17년 8개월)이고, 2위는 신민당으로 13년 8개월, 1969년의 재창당을 고려하면 11년 1개월 존속했다. 물론 국내 기준. 미국과 서유럽 등의 민주주의 선진국에선 한 정당명으로 역사가 백 년이 넘어가는 정당도 여럿 있다.[14] 참고로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정당은 1834년 창당된 토리당에서 당명을 바꾼 영국 보수당이다. 그리고 아시아를 통틀어서 중국국민당이 1919년을 기준으로 102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15] 최초로 '당'으로 끝나지 않는 정당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다.[16]민주정의당 출신. 군부와 대한민국 검찰청/고참 판사/정보기관/경찰/관제 언론인/기업인/사학재단 오너/족벌 언론인/원로 교수/원로 문화인 출신이 상당수였다. 다만 민정당 출신 중에서도 김윤환을 중심으로 김영삼을 지지했던 통칭 '신민주계' 의원들이 대략 20여 명 존재하였다.[17]통일민주당 출신.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 민자당의 주류가 되었다.[18]신민주공화당 출신. 김종필이 당대표이긴 했으나 세 계파 중에서 가장 세력이 미약하였다.[19] 그러면서 당 신문 광고에는 지역주의를 배격한다고 했다.[20] 대북 식량지원을 시작한 것은 의외일지 모르지만 문민정부 시기였다. 1995년 북한에 15만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대북식량지원이 시작된다. 사실 이건 우루과이 라운드 관련(WTO가 1995년 1월 출범했다)으로 쌀수입문제와 추곡수매 등이 엮여서 남아도는 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 때문이기도 했다.[21] 대구광역시 총 13석 중 무려 8석을 휩쓸어 대구 제1당이 되었다. 다만 경상북도는 신한국당이 11석으로 무난히 1당을 차지했다.[22]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는 함정.[23] 특히 비리 문제에 연루되었던 이건개가 전국구 3번, 한호선이 7번을 받은 데에 반발해 당시 당에 몇 안 되는 민주당계 정당 출신 인사였던 이필선은 사실상 정계 은퇴를 택하게 된다.[24] 물론 신한국당도 공화계 중진인 이만섭(14대 하반기, 16대 상반기 의장), 민주계의 김수한(15대 상반기 의장), 김명윤, 민정계의 강용식, 정재철, 그리고 국무총리 직에서 물러났던 이회창, 이홍구 같은 중량감있는 인사들에게 전국구 공천을 주었다. 그렇지만, 황우여김영선, 박창달 등의 신인들을 발굴했으며, '''만 31세였던 IT기업계의 신화인 이찬진'''을 공천하는 흠좀무한 일도 있었다. [25] 아버지가 신민당 총재 대행인 정운갑이었다.[26] 전 관선 대구직할시장.[27] 공천탈락에 불복해서 자민련 입당[28] 법조인 출신[29] 관선 인천시장, 경기지사[30] 둘 다 치안본부장(조종석), 경찰청장(김화남) 역임.[31] 11대,14대,18대,19대 천안시장으로 천안시를 특례시 반열까지 올려놓은 시장[32] 그나마 정우택도 충북 진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재임하던 정운갑의 아들로 2세 정치인이라서 그다지 신선감은 없었다.[33] 두 당의 연합은 이미 15대 총선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총선이 끝나자 두 당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가 신한국당으로 입당한 의원들을 향해 '민의를 저버리지 말고 무소속으로 되돌아가라'고 촉구했다. [34]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안택수 '''당 대변인'''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DJP연합에 반발해 탈당하기도 했다. 참고로 안택수 당 대변인은 대구 지역 의원이었다. 헌데 의외로 자민련내에서 DJP연합을 처음 적극 권유한 것도 TK중심의 민정당계였다고 한다. 자세한건 DJP연합 항목 참조.[35] 다만 이한동 국무총리는 2001년 DJP연합이 무너진 뒤에도 계속 총리직을 유지하다가 자민련에서 제명당한다.[36] 2000~2002 국무총리. 2001년 9월에 연합내각이 붕괴되자, '''현직 총재신분임에도 자민련에서 제명되었다.''' 다시 야당이 된 자민련은 김종필 총재가 다시 총재직으로 돌아온다. 이한동 총리는 무소속으로 2002년까지 총리직을 맡았고, 대선을 앞둔 4월에 사직했으며, 2007년에 한나라당에 복당한다.[37] 2004~2006 자민련 대표최고위원. 이후 자민련이 해산되고 한나라당에 8년만에 복당[38] 이후 한나라당에 2002년에 복당. 충남지사, 국무총리 역임.[39] 신민당 - 민정당 - 민자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을 거친 7선 의원. 15대 하반기 국회의장 선거에 나갔으나, 자민련 박준규 의원(9선)에게 패배. 2000년에 이회창 총재에 의해 김윤환, 이기택 등과 함께 공천 탈락을 당하고, 민주국민당 대신 자민련에 입당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정치신인인 임태희에게 져서 낙선하고 정계은퇴.[40] 16대 총선에서 전국구 출마.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반대표를 던진 후 의원직 사직(자민련 탈당).[41] 단 인천의 최기선 당선자의 경우 애초에 국민회의 간판을 원했다가 막판에 양당간의 조율로 자민련 후보로 결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항목 참조.[42] 다만 김동주 의원은 부총재 자리까지 올랐으나, 2000년 3월에 탈당해서 민주국민당에 입당했다.[43] 실제로 1999년 초만해도 어느 정도까지 진척되었지만, 99년도의 내각제 개헌 연내 불가 선언 후 연말에 흐지부지되었다.[44] 김종필 총재의 최측근으로 DJP연합 성사의 일등 공신이었던 김용환(1932) 의원은 아예 자민련을 탈당해서 희망의한국신당을 창당했다. 김용환은 이후 극렬JP까로 변신해서 계속 김종필에게 부담이 되었다.[45] 다만 김대중이 약속대로 내각책임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하더라도, 개헌엔 전체 의원의 2/3 동의가 필요한 만큼 야당인 한나라당이 반대하는 한 통과는 불가능했다. [46] 합당을 고려하고 지연 추진되던 국민회의의 재창당은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의 창당으로 현실화 된다.[47] 이한동은 1981년 11대 총선부터 계속 당선될 정도로 지역기반이 탄탄한 거물이었다.[48] 박철언이 대표적인 예다. 항상 과반이 넘는 득표를 하다가 24%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49] 경기도 안양에서 두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경기도지사를 지냈던 이인제가 지역구를 옮겨서 자신의 고향인 충남 논산에 직접 출마하면서 대전, 충남에서 민주당 바람을 일으켰다. 자민련은 이인제의 상대로 현역 의원 김범명을 그대로 공천했고, 졌다.[50]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면 국가로부터 각종 보조금을 지원받지 못하고, 국회 상임위의 위원장이 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불이익이 있다.[51] 말 그대로 남의 당 국회의원을 빌려왔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4명이 탈당하고 자민련에 입당하는 식. 송석찬 의원(대전 유성), 배기선 의원(경기 부천원미 을), 송영진 의원(충남 당진)이 자민련으로 1차 입당했다. 그런데 자민련 부총재인 강창희 의원(대전 중구)이 이에 반발하여 교섭단체 등록을 거부하자, 당시 원내 교섭단체의 자리가 급했던 자민련은 강 의원을 제명시키고 민주당에서 다시 장재식 의원(서울 서대문 을)을 데려와 20석을 채웠다. 이들의 당적 자체는 당연히 자민련이지만 소속은 사실상 민주당이었다. 이 행위 자체를 막을 법적 수단이 없는, 편법적인 수단이다. 이때 의원 꿔주기를 반대하다 제명된 강창희 의원은 2001년 말에 당시 자민련을 떠나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던 김용환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했다.[52] 이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의 장자인 김홍일(전남 목포)를 보낼 예정이었다고는 하는데, 막상 이뤄지지는 않았다.[53] 정말 간신히 20석. 재밌는 사실은 이미 민주당이 16대 국회 개원 이후 자민련을 위해 원내 교섭단체의 조건을 10석으로 낮추려고 날치기를 시도하다 당시 '''민주당 출신 이만섭 국회의장이 거부해서''' 날치기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만일 성공했다면 2004년 민주노동당도 덕을 봤을 것이고, 2008년 자유선진당도 20석 만드느라 창조한국당과의 연합을 안 해도 되었을 것이다.[54] 이후 자민련은 김대중의 배려로 장관 3명을 입각시켰다.[55] 당 창당의 주역은 허주 김윤환이었으나 암과 낙선 때문에 정치적인 행보는 보이지 않았다. 당시 민국당 소속 의원은 한승수(강원 춘천), 강숙자(비례) 단 두명이었다.[56] 8.15 평양축전에 사람들의 방북을 허용했다는 이유였다.[57] 새천년민주당과 연정 상태였으나 대북관에 관해선 의견차이가 컸다. 기본적으로 자민련은 한나라당보다도 더 오른쪽으로 치우친 보수정당이라 햇볕정책에 회의적으로 대북강경책을 주장하였다.[58] 연이은 의원들의 의원직 상실로 과반 붕괴가 확실시되자 자민련과의 관계를 끊어내기 위한 민주당과 자민련을 붕괴시켜 의석 수를 늘리고 충청권 기반을 흡수하려던 한나라당의 전략이었단 설도 있다. 당시 한겨레 21 참조.[59] 참고로, DJP 연합이 깨진 무렵에 민주국민당도 새천년민주당과는 사실상 결별했다.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은 연합내각이 해체되자 2002년에 사임하고, 같은 해 말에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60] 당시 자민련 소속 현직 충북지사 이원종이 선거를 코앞에 두고 한나라당에 가버렸다.[61] 충북지사 자민련에서 한나라당으로 이적한 이원종, 대전시장 한나라당 염홍철이 당선.[62] 김영춘(정치인), 김부겸, 이부영, 안영근, 이우재(1936)[63] 당시 충북 괴산.진천.음성 지역구에 출마하려고 정치적 계산을 했다는 비아냥이 있긴 했지만, 일단 김의원 본인은 '''탄핵 사유가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해서'''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 이후 탈당했으며, 변웅전 전 의원이 승계받았다. 또한 17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64] 당시 탄핵 반대표가 2표였는데, 나머지 하나는 이낙연 새천년 민주당 의원. 이낙연 의원은 대선 직후에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의 대변인을 지낸 이력이 있었다. 이후 전남도지사를 거쳐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직에 오르게 된다.[65]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내각제 개헌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연구를 했다. 당시 기사를 보면,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내각제를 암시하는 발언(: '''2007년엔 내가 나이가 너무 많지만, 2004년은 아니다.''')을 하기도 했다.[66] 9선으로 YS, 박준규와 함께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이었다.[67] 20대 총선까지는 강제력이 없는 허수아비 규정이었다. 21대 총선부터 강행 규정.[68] 사실 16대 총선에서도 김종필은 전국구 1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69] 정확히 말하자면 해산 직후에 모든 당원들이 한나라당으로 일괄 합류하였다. 법적인 합당은 아니나 실질적인 흡수합당인 셈.[70] 김대중 정부 국무총리 임명으로 인한 당 총재직 사임[71] 자민련보다 장수 정당이었던 한나라당도 로고를 바꾼 적이 있다.[72] 교섭단체는 아니었지만 원내3당은 민주노동당이었다.[73] 다만 자유선진당만으론 원내교섭단체 수립이 안되어서 창조한국당연합해야 했다. 그나마도 1년만에 다시 비교섭단체가 된게 함정이지만.[74] 다만 JP는 안철수 의원에게 관심이 있는지 2016년 본인이 먼저 냉면 회동을 제안하기도 했다.[75] 2020년에 충청권 보수정당을 맥을 있겠다고 주장한 충청의미래당이 생겼으나, 군소정당이라는 한계 탓에 영향력은 크게 못미친다.[76] 다만 이 사례의 경우 XX 자민련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좀 많이 확대하여 사용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 바른정당이 제주도에 특별한 지역기반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제주도 내에 강한 지역 지지기반을 갖추고 있던 원희룡이 바른정당에 소속되어 있던 것일 뿐이다. 정작 원희룡이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된 7대 지선에서 (바른정당의 후신인) 바른미래당 장성철의 득표율은 무소속 원희룡, 민주당 문대림, 자유한국당 김방훈은 커녕 녹색당 고은영의 절반도 안되는 1.5%에 불과했다. (물론 당시 제주도지사 선거에서 녹색당이 원외 군소좌파정당으로써는 이례적으로 높은 득표를 올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사실상 전혀 지역기반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볼 수 밖에 없다. 즉 기본적으로 XX 자민련이라는 표현은 전국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특정 지역 기반에만 의존하여 연명하는 정당에 대한 멸칭으로 사용되지만 7대 지선 당시 바른정당(이후 합당으로 탄생한 바른미래당까지)의 처지는 그 멸칭조차도 과대평가가 되어버릴 정도로 취약했고 단지 해당 표현이 '이 당은 한 지역에서밖에 못 이길 것 같다' 는 의미로 확장되어 사용되었던 것.[77] 대한민국뿐 아니라 말레이시아민중운동당도 한때는 풀라우피낭 자민련이라 불리곤 했다.[78] 하나로국민연합이한동은 대선에서 0.3%로 4위 낙선, 희망의한국신당은 1석.[79]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80]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81]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82]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83]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84]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85]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