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게이타로
[image]
우치다 게이타로의 수필집 <흐르는 수초, 1983>에 나온 사진[1]
1896년~1982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민물고기와 바닷물고기를 연구한 어류학자
우리나라 어류 연구의 기초를 닦은 일본인 과학자
우치다 게이타로는 1896년에 도쿄(東京)의 간다(神田) 오가와마치(小川町)에서 태어났다. 우치다는 그곳에서 소학교 1년까지 살다가 1911년 즈음에 가나가와현 미우라시 미사키의 작은 섬인 조가시마(城ケ島)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곳에서의 유년시절이 훗날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섬 소년 우치다는 학교가 끝나면 바다에 나가 놀았고 바닷물고기와 소라를 잡으며 놀다가 자연스럽게 그들의 형태와 습성을 관찰하게 된다. 그곳에서 우치다는 물고기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게 된다.[2]
우치다는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수산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거쳐 도쿄제국대학 수산학교실에서 부수(오늘날의 조교)로 근무하다가 1927년 12월 조선 부산 영도[3] 에 있는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에 기사로 부임하면서 조선과 인연을 맺는다.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은 조선의 수산업을 개발하기 위하여 일본 본토의 수산시험장과 독립된 조선총독부 직속 연구기관이었다. 우치다는 수산시험장에서 생물학에 관한 기초 연구를 수행하는 양식부 주임기사로 부임한 뒤 곧바로 함경도 원산으로 가서 명태의 어업 시험에 착수했다.[4] 우치다는 명태 연구를 시작으로 대구, 가자미, 넙치, 조기, 멸치 같은 여러 종의 바닷물고기를 연구하다가 연구 범위를 민물고기까지 확대하였다.
그가 조선에 머문 기간은 만 15년이 넘는다. 15년 동안 우치다는 조선 팔도를 유랑하듯이 출장을 다니면서 민물고기와 바닷물고기를 가리지 않고 채집하고 관찰하고 연구하였다. 우치다는 그동안 연구하여 정리한 수많은 자료를 <조선어류지 제1책>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조선의 물고기 도감이자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에서 수행한 어류 형태 및 생태 연구 과제 보고서[5] 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까지 알려진 조선의 모든 물고기 약 650종을 조선어류지 8권의 책과 조선 어류 개론편 1권으로 정리하여 출간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은 그의 소망을 허락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1941년 전쟁의 마수가 우치다와 그의 연구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동남아까지 침공하면서 전선은 점점 확장되었고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어 경제제재까지 받으면서 일본의 경제 상황은 점점 궁핍해졌다. 연구에 필요한 물자 조달이 어려워지고 여러 가지 훈련 등으로 허비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치다는 연구실에 앉아있을 시간이 줄어들었고 심리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았다. 그러던 때에 1941년에 신설된 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수산학과에서 우치다에게 수산학과 교수직을 제안하였다. 우치다는 교수직 제안을 두고 많이 고민하였다. 조선의 어류를 계속 연구하려면 조선에 체류해야 하고 교수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려면 규슈제국대학이 있는 후쿠오카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치다는 부산 수산시험장을 겸직한다는 조건을 걸고 규슈제국대학 교수직을 수락한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그는 후쿠오카에서 조국의 패전 소식을 듣는다.
그가 조선에서 보낸 15년이란 세월은 참 꿈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잠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도 줄여가며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조선의 아름다운 물고기를 채집하고 또 열정을 쏟으면서 연구에 매진하던 세월이었다. 그리고 부산의 수산시험장에는 아직 그가 정리하지 못한 연구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렇게 옆 동네처럼 드나들던 조선이었건만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되면서 조선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훗날의 회고에서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다음은 2004년 한국역사민속학회에 게재된 이기복 저 <일제강점기 內田惠太郞의 조선산어류조사와 '바다식민'의 잔재> 논문에 소개된 우치다 게이타로의 연구행적이다.
1927년 12월, 부임하자마자 시험선 오오도리호를 타고 원산 주변 해역에서 명태 어업시험(우치다는 명태 산란조사 담당)을 수행하였다. 영하 20도에 가까운 12월 말의 조선 바다를 경험하고, 동해상에서 금강산 해돋이 모습에 감격한다. 이후에는 수산시험장의 왕게 어획 시험에도 참여하였다. 동해의 어업 현장을 샅샅이 뒤진 인물로 확인된다.
1928년 1월, 부산 인근의 진해만이 대구의 주 어장이므로 대구의 산란과 초기 생활사 연구에 착수한다. 대서양 산 대구와는 달리 바닷물에 부유하지 않는 조선 산 대구의 알을 분석하고 대구의 초기 생활사를 연구하였다.
1928년 1월, 가자미 자어(仔魚)를 채집하고 변태 과정을 조사한 결과 채집 어종을 '문치가자미'로 동정하였다.
1929년 4월, 노래미 치어를 채집하여 쥐노래마과 어류의 생활사를 연구하였다.
1929년 4월 30일, 우렁쉥이(멍게)의 체내에서 물고기의 알 덩어리를 발견하고 그 알의 정체가 실비늘치의 알임을 확인하였다.
1930년 5월, 시험장의 조기 어업 예비조사를 위해 서해에 첫발을 내디뎠다.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근해의 조기 어장을 순회하였다.
1930년 9월 22일, 진해만 내의 마산만에서 뱀장어의 유어인 렙토세팔루스(Leptocephalus)를 채집하였다.
1931년, 학꽁치의 표본을 채집하고 생활사를 정리하였다.
1931년 1월, 진해만에서 채집한 우렁쉥이(멍게)의 체내에서 독특한 알 덩어리를 발견하였으나, 정체를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1931년 4월 7일, 마산만의 멸치 어선에서 변태중인 렙토세팔루스를 채집하고 산 채로 부산 연구실로 가져가 표본을 제작하고 변태 과정을 연구하였다.
1931년 6월, 쏘가리 연구를 위해 대동강 상류 성천에서 일주일가량 머물면서 맹인 한씨의 도움으로 쏘가리 표본을 채집하였다. 쏘가리 알을 분석한 결과 물체에 붙지 않고 하나씩 분리되는 성질을 발견하였다.
1932년 5월 중순, 2주간 성천에 머물면서 쏘가리 자연부화에 성공하였다.
1933년 6월 상순, 쏘가리가 자연 산란한 수십 개의 알을 채집하였다. 쏘가리를 일본에 이식하면 유용한 어류 자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1933년 6월 15일 새벽에 진남포를 출항하여 유자망 시험을 되풀이하고 자어, 치어 채집을 하였다.
1933년, 가물치를 채집하고 생활사를 정리하였다.
1933년~1934년경, 난태생 어류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부산 어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어부터 연구하였다.
1934년 6월 28일, 부산대교 근처에서 방어(어류) 치어를 채집하였다. 방어의 치어는 원래 금색인데 유조(流藻)[10] 에서 이탈했을 때는 청록색으로 변하고 죽으면 다시 금색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34년 12월~1935년 4월, 가덕도의 간석지를 조사하였다. 망둑어의 생태와 형태를 조사하였다. 가덕도 부근은 군사지역이므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지형이나 사진을 발표할 수 없었다.
1935년, 꺽지를 채집하고 생활사를 정리하였다.
1937년 5월, 어릴 때부터 친숙한 복어의 치어를 찾아 대동강 근처로 갔다. 황복 치어는 관상어로써의 가치가 훌륭하다고 판단하였다.
1938년 4월~1941년 3월, 서해에 서식하는 조기과와 기타 어류의 번식과 발육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3개년 계획에 착수하였다.
1942년 12월, 규슈제국대학의 수산학과 교수가 되어 15년의 조선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을 떠났다.
우치다의 연구 행적 기록을 보면 민물고기나 바닷물고기가 있는 곳, 알과 치어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그의 답사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장황하게 그의 활동사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그가 저술한 책과 보고서에 등장하는 물고기 자료가 그의 연구 행적을 말해주고 있다.
우치다 게이타로의 수필집 <흐르는 수초, 1983>에 나온 사진[1]
內田惠太郞, Uchida Keitaro'''조선 어류 연구의 숨은 공로자'''
1896년~1982년
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민물고기와 바닷물고기를 연구한 어류학자
우리나라 어류 연구의 기초를 닦은 일본인 과학자
2. 생애
우치다 게이타로는 1896년에 도쿄(東京)의 간다(神田) 오가와마치(小川町)에서 태어났다. 우치다는 그곳에서 소학교 1년까지 살다가 1911년 즈음에 가나가와현 미우라시 미사키의 작은 섬인 조가시마(城ケ島)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곳에서의 유년시절이 훗날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섬 소년 우치다는 학교가 끝나면 바다에 나가 놀았고 바닷물고기와 소라를 잡으며 놀다가 자연스럽게 그들의 형태와 습성을 관찰하게 된다. 그곳에서 우치다는 물고기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게 된다.[2]
우치다는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수산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거쳐 도쿄제국대학 수산학교실에서 부수(오늘날의 조교)로 근무하다가 1927년 12월 조선 부산 영도[3] 에 있는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에 기사로 부임하면서 조선과 인연을 맺는다.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은 조선의 수산업을 개발하기 위하여 일본 본토의 수산시험장과 독립된 조선총독부 직속 연구기관이었다. 우치다는 수산시험장에서 생물학에 관한 기초 연구를 수행하는 양식부 주임기사로 부임한 뒤 곧바로 함경도 원산으로 가서 명태의 어업 시험에 착수했다.[4] 우치다는 명태 연구를 시작으로 대구, 가자미, 넙치, 조기, 멸치 같은 여러 종의 바닷물고기를 연구하다가 연구 범위를 민물고기까지 확대하였다.
그가 조선에 머문 기간은 만 15년이 넘는다. 15년 동안 우치다는 조선 팔도를 유랑하듯이 출장을 다니면서 민물고기와 바닷물고기를 가리지 않고 채집하고 관찰하고 연구하였다. 우치다는 그동안 연구하여 정리한 수많은 자료를 <조선어류지 제1책>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조선의 물고기 도감이자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에서 수행한 어류 형태 및 생태 연구 과제 보고서[5] 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까지 알려진 조선의 모든 물고기 약 650종을 조선어류지 8권의 책과 조선 어류 개론편 1권으로 정리하여 출간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은 그의 소망을 허락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1941년 전쟁의 마수가 우치다와 그의 연구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동남아까지 침공하면서 전선은 점점 확장되었고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어 경제제재까지 받으면서 일본의 경제 상황은 점점 궁핍해졌다. 연구에 필요한 물자 조달이 어려워지고 여러 가지 훈련 등으로 허비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치다는 연구실에 앉아있을 시간이 줄어들었고 심리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았다. 그러던 때에 1941년에 신설된 규슈제국대학 농학부 수산학과에서 우치다에게 수산학과 교수직을 제안하였다. 우치다는 교수직 제안을 두고 많이 고민하였다. 조선의 어류를 계속 연구하려면 조선에 체류해야 하고 교수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려면 규슈제국대학이 있는 후쿠오카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치다는 부산 수산시험장을 겸직한다는 조건을 걸고 규슈제국대학 교수직을 수락한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그는 후쿠오카에서 조국의 패전 소식을 듣는다.
그가 조선에서 보낸 15년이란 세월은 참 꿈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잠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도 줄여가며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조선의 아름다운 물고기를 채집하고 또 열정을 쏟으면서 연구에 매진하던 세월이었다. 그리고 부산의 수산시험장에는 아직 그가 정리하지 못한 연구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렇게 옆 동네처럼 드나들던 조선이었건만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되면서 조선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훗날의 회고에서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조선이 해방된 이후 우치다 게이타로의 도쿄제국대학 같은 과 7년 후배이자 같은 수산학 분야에서 활동한 정문기(鄭文基, 1898~1995)[7] 가 우치다의 연구 자료를 참고하여 한국의 어류 연구를 이어간다.[8] 그리고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은 '중앙수산시험장'으로 개편되어 초대 장장으로 정문기가 선임된다. 정문기는 이후 많은 책과 논문을 작성하며 한국 어류학의 권위 있는 학자가 된다.[9] 한편 우치다는 일본 규슈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1970년대까지 한국의 어류학자와 학문 교류를 하였다.조선 거주 만 15년이었다. 조선에 있는 시험장에 집적해 있던 어류 생활사 연구 자료는 표본도, 사진 원판이나 기록, 문헌 따위도 거의 그대로 두고 왔다. ......중략...... (패전으로 말미암아) 이웃이라고 여겼던 조선반도는 멀리 떨어져 그곳에 남긴 오랜 세월 쌓아온 노력의 결정은 손이 닿지 않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를 생각하며 나는 내 몸의 일부가 찢겨나간 듯한 고통을 느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도 틈틈이 생각이 난다. 뒤척이다가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 계속되었다.[6]
3. 연구 행적
다음은 2004년 한국역사민속학회에 게재된 이기복 저 <일제강점기 內田惠太郞의 조선산어류조사와 '바다식민'의 잔재> 논문에 소개된 우치다 게이타로의 연구행적이다.
1927년 12월, 부임하자마자 시험선 오오도리호를 타고 원산 주변 해역에서 명태 어업시험(우치다는 명태 산란조사 담당)을 수행하였다. 영하 20도에 가까운 12월 말의 조선 바다를 경험하고, 동해상에서 금강산 해돋이 모습에 감격한다. 이후에는 수산시험장의 왕게 어획 시험에도 참여하였다. 동해의 어업 현장을 샅샅이 뒤진 인물로 확인된다.
1928년 1월, 부산 인근의 진해만이 대구의 주 어장이므로 대구의 산란과 초기 생활사 연구에 착수한다. 대서양 산 대구와는 달리 바닷물에 부유하지 않는 조선 산 대구의 알을 분석하고 대구의 초기 생활사를 연구하였다.
1928년 1월, 가자미 자어(仔魚)를 채집하고 변태 과정을 조사한 결과 채집 어종을 '문치가자미'로 동정하였다.
1929년 4월, 노래미 치어를 채집하여 쥐노래마과 어류의 생활사를 연구하였다.
1929년 4월 30일, 우렁쉥이(멍게)의 체내에서 물고기의 알 덩어리를 발견하고 그 알의 정체가 실비늘치의 알임을 확인하였다.
1930년 5월, 시험장의 조기 어업 예비조사를 위해 서해에 첫발을 내디뎠다.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근해의 조기 어장을 순회하였다.
1930년 9월 22일, 진해만 내의 마산만에서 뱀장어의 유어인 렙토세팔루스(Leptocephalus)를 채집하였다.
1931년, 학꽁치의 표본을 채집하고 생활사를 정리하였다.
1931년 1월, 진해만에서 채집한 우렁쉥이(멍게)의 체내에서 독특한 알 덩어리를 발견하였으나, 정체를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1931년 4월 7일, 마산만의 멸치 어선에서 변태중인 렙토세팔루스를 채집하고 산 채로 부산 연구실로 가져가 표본을 제작하고 변태 과정을 연구하였다.
1931년 6월, 쏘가리 연구를 위해 대동강 상류 성천에서 일주일가량 머물면서 맹인 한씨의 도움으로 쏘가리 표본을 채집하였다. 쏘가리 알을 분석한 결과 물체에 붙지 않고 하나씩 분리되는 성질을 발견하였다.
1932년 5월 중순, 2주간 성천에 머물면서 쏘가리 자연부화에 성공하였다.
1933년 6월 상순, 쏘가리가 자연 산란한 수십 개의 알을 채집하였다. 쏘가리를 일본에 이식하면 유용한 어류 자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1933년 6월 15일 새벽에 진남포를 출항하여 유자망 시험을 되풀이하고 자어, 치어 채집을 하였다.
1933년, 가물치를 채집하고 생활사를 정리하였다.
1933년~1934년경, 난태생 어류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부산 어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어부터 연구하였다.
1934년 6월 28일, 부산대교 근처에서 방어(어류) 치어를 채집하였다. 방어의 치어는 원래 금색인데 유조(流藻)[10] 에서 이탈했을 때는 청록색으로 변하고 죽으면 다시 금색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34년 12월~1935년 4월, 가덕도의 간석지를 조사하였다. 망둑어의 생태와 형태를 조사하였다. 가덕도 부근은 군사지역이므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지형이나 사진을 발표할 수 없었다.
1935년, 꺽지를 채집하고 생활사를 정리하였다.
1937년 5월, 어릴 때부터 친숙한 복어의 치어를 찾아 대동강 근처로 갔다. 황복 치어는 관상어로써의 가치가 훌륭하다고 판단하였다.
1938년 4월~1941년 3월, 서해에 서식하는 조기과와 기타 어류의 번식과 발육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3개년 계획에 착수하였다.
1942년 12월, 규슈제국대학의 수산학과 교수가 되어 15년의 조선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을 떠났다.
우치다의 연구 행적 기록을 보면 민물고기나 바닷물고기가 있는 곳, 알과 치어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그의 답사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장황하게 그의 활동사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그가 저술한 책과 보고서에 등장하는 물고기 자료가 그의 연구 행적을 말해주고 있다.
4. 저서
5. 일화
[1] 이미지 출처: 다케쿠니 도모야스 저, 오근영 역,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교토까지, 따비 (2014) 220쪽[2] 출처: 이기복(2004) 일제강점기 內田惠太郞의 조선산어류조사와 '바다식민'의 잔재, 한국역사민속학회[3] 당시 영도는 '마키노시마'로 불렸다.[4] 출처: 다케쿠니 도모야스 저(2014)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교토까지 220쪽, 따비[5] 당시 조선총독부는 어업과 어류 양식 등 수산기술 개발연구에 투자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연하게도 물고기를 많이 잡아 조선인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함이 아닌 조선의 생선을 일본 본토로 많이 수탈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우치다의 연구도 결국은 조선을 수탈하기 위한 도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우치다의 연구가 조선 수탈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해도 우치다를 비난하는 건 곤란하다. 그는 진심으로 조선의 물고기를 사랑하였고 열정을 바쳐 연구하였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그는 목표 어종을 채집하기 위해 조선인 어부에게 정중히 부탁하였고, 대부분의 조선인 어부들은 이에 긍정적으로 화답하였다. 그리고 그의 조선 어류 연구 자료는 훗날 대한민국의 어류 연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6] 출처: 다케쿠니 도모야스 저(2014)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교토까지 224쪽, 따비[7] 우치다 게이타로와 정문기는 같은 학교 같은 과 출신이고, 우치다는 대학원 졸업 이후에 한동안 수산학교실에서 조교로 일했으니 정문기는 수산학교실에서 우치다의 강의를 수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문기는 우치다를 자신의 스승이라고 칭했으며, 우치다가 부산 수산시험장에 근무하던 때에 수차례 학문적인 교류를 하였다고 한다.[8] 이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다. 정문기는 우치다의 연구 성과를 극찬하였고, 그가 저술한 <한국어도보>라는 책의 서문에서 "K. UCHIDA 선생이 부산 수산시험장에 재직했던 15년 동안 작성한 자료 가운데 일부도 활용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가 '활용한' 것은 그 흑백사진만이 아니었다. 논문 <일제강점기 內田惠太郞의 조선산어류조사와 '바다식민'의 잔재, 2004>를 저술한 이기복은 그의 책에서 정문기가 우치다가 작성한 어류 형태 서술문을 무단으로 도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기복의 주장은 다케쿠니 도모야스 저<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교토까지, 2014>라는 책에서도 언급된다.[9] 정문기는 사실 운이 매우 좋은 학자이다. 우치다를 비롯한 일본인 수산 과학자들이 조선 어류 연구의 터를 닦고 발전시켜 나갔지만 조선인 수산 과학자는 정문기를 제외하고는 전혀없는 실정이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인 과학자들이 모두 떠나자 미군정 당국은 조선에 남아있는 기존의 연구시설을 책임질 수 있는 조선인 전문가에게 관련 업무와 운영권을 부여하였고, 이 과정에서 정문기는 한국 어류 연구 분야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10] 표층을 떠다니는 모자반과 같은 해조류를 말하며 ‘뜬말’이라고도 한다. 유조에는 방어류, 쥐치류, 볼락류 등 많은 어린 새끼 고기들이 모여 살아가므로 어류 치어의 성육장, 산란장의 역할을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