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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Łódź. '우지'가 아니라 '우치'가 도시 명칭의 정확한 발음이다. 영어식 발음은 로지.
1. 개요
폴란드 내에서 인구 규모 3위인 도시. 폴란드의 맨체스터로 불렸을 정도로 과거 섬유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715,360명이며 인접 지역까지 포함하면 1,428,600명이다.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까지는 바르샤바의 교외지역이었으나,[2] 폴란드 인민 공화국 수립 이후 섬유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그러나 유럽연합 가입 이후 주력 산업은 섬유 제조업에서 '''영화 산업'''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2019년 기준 우치의 최대 산업은 도시 GRDP의 무려 20%를 독차지하는 영화산업. 폴란드 영화의 80%가 우치 지역에서 촬영되고, 우치 영화학교는 동유럽 최고의 영화 전문대학이 되었으며, 한국의 영화의전당에 해당하는 폴란드 영화 박물관도 우치에 있다. 미국 영화나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등 다른 나라의 영화들도 폴란드에서 촬영할 일이 있으면 무조건 우치에 와서 촬영한다. 그 정도로 동유럽권에서 손꼽히게 영화 기반이 잘 닦여 있다. 동유럽판 할리우드.
2. 인구 추이
3. 역사
우치에 대한 기록은 1332년 처음 역사책에 등장했으며 17세기까지 실레시아(폴란드어로는 실롱스크) 지역의 주요 무역도시로 기능했다. 이후 1793년 폴란드 분할에 따라 프로이센에 귀속되었으나 1815년 빈 회의의 결과로 다시 러시아 제국에 귀속되었다. 19세기 중반 섬유 산업이 이곳에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우치는 섬유 산업의 중심지로 급부상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폴란드 제2공화국이 다시 성립됨에 따라 우치는 신생 폴란드의 도시가 되고 여전히 폴란드의 주요 도시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에 따른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우치는 나치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나치당원 칼 리츠만의 이름을 붙인 리츠만슈타트로 불렸고, 이곳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었다. 1945년 1월 18일 소련군이 독일군을 몰아내고 이곳을 점령했고 도시 이름도 다시 우치로 돌아왔다. 영국이 지지한 폴란드 공화국의 수도인 바르샤바가 바르샤바 봉기로 인해 재기불능 수준의 피해를 입으면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우치는 소련이 지지한 폴란드 공화국의 임시수도였다. 소련의 개입으로 공산당이 집권해 사회주의 체제로 헌법을 개정한 1952년 이후에도 우치는 섬유 공업 도시로 기능하였으나 계획 경제의 한계 속에서 그 명성은 계속 쇠락했다. 1989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현지 시정부는 해외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면서 통한 도시 부흥에 힘쓰고 있다.
4. 대중매체
- 폴란드 영화계의 거장 안제이 바이다가 1975년에 제작한 '약속의 땅(Ziemia obiecana)'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19세기 러시아령 폴란드 시절의 고증과 급부상하는 부르주아와 노동자 계급간의 갈등, 탐욕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어두운 면과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꿰뚫는 치밀한 묘사가 일품이다. 참고로 감독이 나온 영화학교도 이 도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