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영화
폴란드 우치 영화 박물관 홈페이지
폴란드 영화 연구소(바르샤바) 홈페이지
우치 영화 학교 홈페이지
1. 개요
폴란드의 영화에 대한 문서.
폴란드 영화는 수도인 바르샤바가 아닌 교외지역인 우치가 주도한다. 미국 영화를 워싱턴 D.C.나 뉴욕이 아닌 캘리포니아의 할리우드가 주도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할리우드와 우치는 영화 산업으로 급성장한 도시인 건 공통점인데, 할리우드가 있는 로스 앤젤레스는 이미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였던 반면, 폴란드의 우치는 제조업으로 크긴 했지만 지역 중견도시였는데, '''순수하게 영화 산업만으로 대도시로 성장한 도시'''이다. 2019년 현재 폴란드의 대도시는 바르샤바, 크라쿠프, 우치 순이다. 우치가 그단스크를 제쳤다!
2. 영화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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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AA(미국영화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2019년 폴란드 영화 시장은 북미 영화, 중국 영화, 일본 영화, 한국 영화,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인도 영화, 독일 영화, 멕시코 영화, 러시아 영화, 호주 영화, 이탈리아 영화, 스페인 영화, 브라질 영화, 대만 영화, 네덜란드 영화, 인도네시아 영화 시장에 이어서 '''세계 18위'''로 나타났다. 위의 그래픽에서는 북미 영화 시장(114억 달러)이 따로 표시되어있지 않은데, MPAA가 미국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만 표로 따로 나온 것이다.
2016년 기준 폴란드 영화 시장은 2억 달러로 세계 20위이다. 2016년 연말 기준 영화관 스크린 개수는 1,224개. 2015년 처음으로 1,000개 스크린을 돌파하였다. 2009년에는 폴란드 전국에 177개 스크린이었던 것에 비하면 정말 '''폭발적인 성장'''이다.
자국 영화의 비중은 2010년 기준 6.2%, 2011년 기준 29.3% 등 널뛰기가 극심한 편이다. 보통은 10% 내외로 잡고 계산한다. 대부분 미국 영화가 차지하며, 영국 영화, 프랑스 영화, 독일 영화 등 유럽 주변국가 영화들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개방 전 폴란드 영화 포스터는 일반 영화 포스터랑 달리 독특하기로 유명하다. 마치 회화 그림을 연상케 하는 자유로운 화풍으로 유명한데 검열과 서방 세계랑 단절되어 있던 상황 때문에 꽤나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개방 이후로는 다른 나라 영화 포스터들처럼 평범해졌다.
공산 시절부터 TV에서 외국 영화와 드라마를 방영할 때 남자 해설자 한 사람이 모든 대사를 "읽는" 방식으로 더빙하는 전통이 있다(...) 소련의 내레이션 시스템을 수입한 것이기는 하지만 소련에서도 남자 배역은 남자 해설자가, 여자 배역은 여자 해설자가 맡았는데 폴란드는 그런 거 없이 남자 해설자 한명이 '''대사에 아무런 감정을 싣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읽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사라진 변사 시스템이 남아있는 셈. 물론 2000년대 와서는 자막으로 방영하거나 다른 나라에서처럼 평범하게 더빙하는 경우도 늘어났지만(주로 저연령층 대상 영화나 가족용 영화) 그럼에도 중장년층들이 해설 스타일의 더빙을 선호하다 보니 현재도 TV에서 영화를 틀 때마다 이런 형식의 더빙을 하는 경우가 많다.
폴란드 자국 영화는 '''전쟁 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가 많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폴란드라는 나라가 없을 때부터의 장르적 특징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업영화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경우는 없다시피한데, 폴란드 내에서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업영화"로 많이 만든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 최전성기부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패망까지 온갖 역사를 다 겪어온 폴란드였기에, 상업영화로 그 시대를 담은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서 자국에서 개봉시킨다. 물론 드라마 영화 등 일반적인 영화도 엄청나게 만든다.
영화학교로는 우치 영화학교(National Film School in Łódź)가 상당히 유명하다.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 계획이 잡혔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폴란드 제2공화국이 패망하면서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세워지고 난 1948년 3월 8일 설립되었다. 동유럽에서는 손꼽히는 영화학교로, 한국의 독립영화 영화 감독인 민병훈 감독도 이 곳에서 유학했다고 한다. 우치 영화 학교 홈페이지 한국의 대학원 석사, 박사급의 교육기관에 해당한다. 학부를 다른 데서 졸업하고 이 곳으로 진학해서 영화 공부를 한다. 폴란드 영화관 중 가장 많은 스크린 수를 보유한 곳이자 동유럽에서 가장 스크린이 많다고 한다. 2016년 대대적인 확장공사 이후 우치 영화 학교에서 운영하는 '''스크린이 27개'''. 상업용으로 쓰는 곳은 8개라 8개만 스크린으로 인정되고 나머지 스크린은 교육/연구용이다. 실제로 2019년 1월 19일 기준 대학 안에서 보헤미안 랩소디, 아쿠아맨같은 미국 상업영화를 잘만 튼다!
3. 역사
3.1. 초창기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제국에 의해 지배되던 1899년 폴란드에 처음으로 영화관이 설립되고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다. 폴란드 서쪽은 독일 제국이 점령한 상태였는데 독일 제국이 지배하던 곳은 1903년이 되어서야 영화관이 생겼다. 유럽 대륙에서 폴란드는 영화 문화 도입이 늦은 나라이다. 독일과 러시아 모두 폴란드의 강한 민족성향때문에 영화 산업이 발달하면 반드시 독일, 러시아한테서 독립하려고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1908년이 되면 바르샤바, 크라쿠프, 슐리지엥 등에 영화관이 세워지고 독일 영화, 러시아 영화 위주로 상영되고 있었다. 폴란드 최초의 영화 제작자는 Kazimierz Prószyński로, 다큐멘터리 영화에 능통하였다. 최초의 폴란드 영화는 1902년 Powrót birbanta이다.
3.2. 폴란드 제2공화국(1919년 ~ 193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폴란드는 폴란드 제2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맞는다. 독립하자마자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겪고, 폴란드가 소련을 물리치고 대승을 하여 빌노, 르부프 등 동부의 땅을 대규모로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1925년부터는 서부 실레시아 및 단치히 자유시(그단스크) 관련 국경 분쟁으로 독일과의 무역 전쟁에 돌입했다. 1929년에는 세계 대공황까지 맞았는데 그 때 하필 독일이 폴란드한테 관세 장벽을 더 높이면서 농업국인 폴란드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이런 제2공화국 사정 때문에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에는 '''강한 민족성을 표출한 영화들이 대량 생산'''된다.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독일은 폴란드 제2공화국과 불가침조약과 국경 개방조약, 무역전쟁 철회 등을 담은 여러 조약을 맺게 된다.[1] 하여튼 덕분에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 영화들은 베니스 영화제에 대거 수출되고, 반대로 독일 영화들이 폴란드에 수출되어 바르샤바, 크라쿠프, 빌노, 르부프 등에 폴란드어와 독일어 자막을 달고 상영되었다.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도 선전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1921년 폴란드 영화법을 제정하고 영화 산업 진흥책을 내놓으며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 온갖 영화들이 시도되었다. 이 때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는 바르샤바 교외인 우치에 당시 폴란드 영화들을 모아놓는 폴란드 영화 박물관을 세우고 제2공화국의 네거티브 필름들을 저장하였다.
3.3. 제2차 세계 대전
1938년 아돌프 히틀러가 안슐루스, 뮌헨 협정 등으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처묵처묵하고 나자, 당연히 히틀러는 1939년 2월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폴란드 회랑을 내놓으라며 생떼를 쓰기 시작'''한다. 독일 - 폴란드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1939년 8월 24일 독일과 소련 간의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시간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그 유명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다. 폴란드 제2공화국은 독일을 맞아 항전했지만 뒤통수를 날려버린 스탈린의 침공으로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
독일-소련이 지배하던 시기 폴란드 영화는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제2공화국 시절 바르샤바에 위치했던 폴란드 영화 박물관은 나치 독일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 만들어졌던 수많은 영화들이 영원히 소실되었다. 이 때는 쇼팽 음악 들었다고 폴란드인들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고 소련 쪽에서는 카틴 학살을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폴란드 영화는 철저히 탄압받았다.
그 와중에 폴란드 망명 정부로 넘어간 쪽에서는 골때리게도(...) 나치 독일과 소련을 비난하는 여러 선전영화를 만들어냈다. 1939년 ~ 1945년 폴란드 국내가 아닌 런던 소재 망명정부에서 만든 영화는 대략 40여 편으로, 나중에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붕괴하고 폴란드 제3공화국이 성립하자 해당 영화들을 다시 폴란드 제3공화국에 인계하기도 했다.
3.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4.1. 1940년대
종전 이후 생존한 감독들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꽃피우기 시작했다. 여성 감독인 완다 야쿠보스카라던가 레오나드 부츠코우스키 같은 감독들은 종전 후 영화를 만들어 엄청난 히트를 치기도 했다. 이 둘은 사망할때까지 꾸준히 활동했으며 특히 야쿠보스카는 우치 영화학교에 취임해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3.4.2. 195-60년대 : 폴란드 학파의 도래
하지만 스탈린 체제가 들어서면서 폴란드 영화계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등장한 것이 폴란드 학파로 불리는, 폴란드 뉴웨이브였다. 이들은 네오 리얼리즘에 영향을 받은 안제이 바이다나 보이치에흐 하스, 예지 카바레로비치 같은 감독은 폐허가 된 조국의 현실을 고찰하고, 현실을 반영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특히 로만 폴란스키는 폴란드 학파가 배출한 세계적인 감독이다. 특히 안제이 바이다의 초기작 재와 다이아몬드는 전후 폴란드 영화의 시금석으로 평가받는다.
폴란드 학파는 1963년부터 제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안제이 바이다는 민주화 운동과 리얼리즘에 경도된 모습을 보였으며, 반대로 보이치에흐 하스와 로만 폴란스키, 발레리안 보로비츠크는 좀 더 환상적이며 장르적으로 변모해갔다. 특히 보이치에흐 하스의 사라고사 메뉴스크립트와 브루노 슐츠의 소설을 영화화한 모래시계 요양원은 리얼리즘과 대비되는 환상적인 색채로 동유럽 초현실주의의 대표작이 되었다.
하지만 폴란드학파의 영화에 감명을 받고 영화계에 투신한 젊은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폴란스키의 동료로 시작해 정치적 불만족과 욕망을 영화에 투영한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사실주의와 여성주의를 표방한 아그니에슈카 홀란트, 도덕과 신념, 가치관에 대한 고찰을 담은 영화를 만든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그로테스크한 호러와 광기로 폴란드의 암울한 과거를 다룬 안드레이 줄랍스키가 1960년대부터 데뷔를 준비하거나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폴란드 학파와 이후 감독들은 국제 영화제에 소개되면서 파란을 불러일으켰고,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지금도 폴란드 영화는 세계적으로 팬이 많다. 아예 마틴 스콜세지가 이 시기 폴란드 영화들을 발굴 복원하는 프로젝트도 만들었을 정도.
3.4.3. 197-80년대: 침체와 저항
하지만 1970년대부터 정치적인 상황이 험악해지면서, 폴란드 학파는 국내에서 탄압 받으면서 영화를 만들던지 아니면 망명하던지 선택해야 했다. 바이다는 철의 사나이를 만들면서 레흐 바웬사를 지지하는 등 민주 운동가로써 활동하기 시작했다. 반면 예지 스콜리모프스키라던가 안드레이 줄랍스키, 로만 폴란스키는 폴란드를 떠나 망명객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망명 폴란드 감독 영화들은 특유의 어두운 정서를 찾아볼 수 있는게 특징이다.
이 와중에 폴란드에 남아있던 리샤르드 부가이스키는 암울한 폴란드 현실을 다룬 신문으로 검열기관과 스캔들을 불러일으켰으며, 틈틈히 영화를 만들어오던 키에실로프스키는 맹목적인 기회와 폴란드 드라마 역사상 걸작으로 손꼽히는 TV시리즈 데칼로그로 1990년대 짧게 펼쳐질 전성기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1980년대 말 서서히 민주화되면서 망명했던 폴란드 감독들이 돌아오기 시작하는데, 안드레이 줄랍스키는 오랜기간 미완성 프로젝트였던 은빛 지구를 완성해 발표해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3.5. 폴란드 제3공화국(1990년 ~ 현재)
민주화가 된 1990년대 초반은 키에실로프스키의 짧은 전성기와 자국 감독들의 선전으로 요약 가능하다. 키에실로프스키는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 같은 영화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으며 프랑스의 러브콜을 받아 최후의 걸작 세 가지 색 연작을 완성했다. 한편 크쉬지토프 크라우제는 빚이라는 영화로 자국 박스 오피스 히트를 기록했으며, 아그니에슈카 홀란트는 유로파 유로파로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했다.
폴란드 제2공화국 때 우치에서 만들었다가 나치 독일에 의해 파괴된 폴란드 영화 박물관은 제2공화국 시절 바로 그 위치에 1998년 재건되었다. 규모를 제2공화국 때의 5배로 늘려서. 독소 폴란드 점령 기간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는지를 알 수 있다.(...) 폴란드 우치 영화 박물관 홈페이지 그 이후로 제2공화국 때처럼 수많은 폴란드 영화들의 저장고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의 영화의전당 같은 역할이다. 폴란드 망명 정부 시절 만들어진 영화들을 이곳에 보존하고 있다.
2005년 바르샤바에 국영 영화 지원 재단인 폴란드 영화 연구소(Polski Instytut Sztuki Filmowej, Polish Film Institute)를 설립하였다. 홈페이지
3.5.1. 2010년대
다만 2010년대부터는 신진 감독 면에서는 다소 침체 상태다. 마우고시카 슈모프스카를 제외하면 촉망받는 인재가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2010년대에 대대적으로 주목받은 폴란드 영화는 파벨 파블리코프스키의 이다가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영국 영화계에서 데뷔한 폴란드계 영국인이 만들었다.
파벨 파블리코프스키는 이후 2018년 콜드 워를 통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폴란드 영화계의 새로운 희망으로 부상하고 있다. 문제는 파블리코프스키도 환갑이 된데다 폴란드 영화는 겨우 두 편만 만들어서 뭔가 입지가 애매한 편.
파블리코프스키 이외엔 요안나 코스-크라우제, 인어와 함께 춤을을 감독한 아그니에슈카 스모친스카, 보이체크 스마조프스키, 문신을 한 신부님으로 2019년 아카데미 국제 영화상 후보로 오른 얀 코마시가 두각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