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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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001년 4월 25일 부산대학교 페미니즘 웹진 『월장』 의 "예비역이 싫은 몇 가지 이유" 기사에서 예비역 문화를 주제로 다루었다가 남성들의 반발에 직면한 사건. 남녀 간의 갈등은 이미 1999년에 군가산점 제도가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오프라인에서는 싹트고 있었으나, 온라인에서의 충돌은 사실상 처음이며, 사이버 세계가 2010년대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던 그 당시 환경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2. 경과
2001년 부산대학교 여성 웹진, 『월장』 이 예비역(복학생)들을 가리켜 대학의 적이라는 창간호 기획기사를 냈다. 해당 내용은 예비역들은 매춘, 음담패설 등을 일삼으며 똥군기를 당연한 듯 여긴다는 내용이었고 이것이 온라인으로 알려지자 수많은 남성 네티즌들이 반발했다.
이에 월장 멤버들은 사태 수습을 포기하곤 교수에게 구조요청을 날리지만 해당 교수가 이를 거부[1] 하여 훗날 루저의 난과 비슷한 형태로 월장 사건이 진행되었다. 월장 측은 4월 30일부터 모든 토론을 프리챌 월장 커뮤니티에서 실명으로 진행하였다. 그럼에도 사이버 공간을 무대로 『월장』 편집인들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와 인신공격, 신상털이, 성적 폭언과 스토킹, 밤길 조심하라는 등의 테러 위협이 난무하였다. # 급기야 프리챌 월장 커뮤니티 회원들의 신상 정보가 무단으로 성인 사이트 폰섹스 게시판에 공개되기에 이르러 경찰 사이버 수사대가 명예훼손 혐의로 조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월장의 문제 제기에 합리적인 토론을 해보자는 취지로 프리챌에 '안티월장' 커뮤니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안티월장 측은 "처단" 이라는 문구를 내걸고 '''여학우들을 학칙에 따라 제적시켜야 하지 않느냐'''는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그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야 한다며 고소장까지 만들었다.'''
한편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의 발간으로 사회평론가로서 화려하게 데뷔했던 진중권은 문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군사독재적 집단폭력 문화'''에 대해서 가열찬 비판을 하는 글을 게시했다. 그러다가 이것이 일부 사이트들에 알려짐에 따라 진중권은 본격적으로 논객으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는 이 당시 딴지일보 독자투고를 통해 '''좌파''' 시절의 변희재와 키배를 벌이기도 했다.
5월 9일 경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는 월장과 안티월장 양측에, 양측을 대변하는 각각 3명이 참석하고 총여학생회와 총학생회가 참관자로 배석하는 토론회를 열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안티월장의 한준희는 부산대학교 홈페이지 자유 게시판에, 『월장』 의 기사가 명백하게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상대로 한 명확한 명예훼손" 이라 주장하며, 이미 월장을 경찰에 고소하였다고 밝히면서 사실상 제안을 거절하였다.
이에 부산대학교 총여학생회와 부산성폭력상담소는 월장 회원의 신상 정보가 공개되고 회원 전용인 월장 커뮤니티의 여성 전용 게시판의 글이 타 게시판에 유출되는 등의 피해 상황에 대한 대책으로 '''월장 관련 사이버 성폭력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이에 따라 6월 4일 부산대학교 인덕관 대회의실에서 '부산대학교 여성주의 웹진 『월장』 관련 사이버 성폭력 근절을 위한 사이버 성폭력 토론회' 가 열렸다.
6월 23일 월장과 안티월장은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안티월장 측은 토론회 직전에 돌연 안티월장의 공식 해체를 선언하는 성명서를 낭독하고, 일방적으로 토론회에 불참하였다. 결국 토론회는 안티월장 측이 빠진 채 『월장』 편집인 2명과 진중권을 토론자로, 부산대학교 여학생 이성희를 패널로 하여 진행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사이버 성폭력의 정의와 양상 및 향후 대안이 논의되었고, 특히 월장 사건의 폭력성과 피해자에 대한 인권 침해 문제가 제기되었다.
2.1. 페미니즘 동향
당시 나우누리에 존재하던 최대 규모의 페미니즘 커뮤니티 "미즈" 에서는 이전부터 펄펄 끓고 있던 군가산점 제도 위헌 판결에 관련된 논쟁까지 겹쳐서 '''남녀간의 전면적인 키배'''가 벌어지는, 대한민국 사이버 세계 역사상 거의 최초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극심한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인터넷이 2010년대 수준으로 보급화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인터넷 접근성이 현대 수준이었다면 그 양상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단적으로 그 당시에도 '''나우누리 운영측에게 미즈 폐쇄시켜 달라는 청원이 빗발쳤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이지 않은가?'''
이때 활동하던 신정모라 등의 기존의 페미니스트들은 새롭게 떠오르는 일명 '''"넷페미", "영페미"''' 집단을 발견하게 되었는데,[2] 기존의 페미니스트들과는 달리 이들은 운동권 특유의 진지하고 심각하며 비장한(…) 분위기에 거부반응을 보였고, 발끈하는 남성들에게 가볍게 맞받아치거나 비웃고 조롱하는 패턴이 주가 되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상대방 남성을 향해 "어 개소리 잘 들었고 넌 남자니까 특별히 가산점 3점 줄게" 의 댓글로만 일관하는 식. 남성 자체를 조롱하는 덧글들 중 일부는 그때도 이미 "PC하지 않다" 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워딩도 많이 담고 있었으며, 기존 페미니스트들 중 일부는 이들의 도덕 따위 상관하지 않는 거침없는 행보에 대해 "자유분방한 N세대", "유쾌한 몸짓", "발랄한 도전", "발칙한 반란" 같은 찬사를 늘어놓기도 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수사 같다면 정답.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2016년에 여가부 주최로 모였던 '올드' 페미니스트들이 메갈리아와 워마드를 괜히 구태여 '''"영영페미"''' 라고 구분해 부른 게 아니다.
또한 이 사건은 사이버 공간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인식이 바뀌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당초 PC통신을 접한 페미니스트들은 현실의 젠더 질서로부터 탈피하거나 적어도 자신의 젠더를 가릴 수 있는 사이버 공간에 대해서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즉 젠더블라인드 환경이 도래했으니 이제 이곳으로부터의 변화가 현실의 변화로 연결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 주디 와이즈먼은 이를 "테크노페미니즘" 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상기했듯이 월장 기고자들의 신상이 털리고 미즈 폐쇄 청원이 빗발친데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키배가 벌어지는 걸 목도한 뒤로는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후로 대개의 중론은 '''사이버 공간이 여성에게 좀 더 적대적'''이라는 쪽으로 이야기가 나오는 중인데,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썰들이 제시되고 있는 중이다. 예를 들면 어떤 학자들은 사이버 환경에 깊게 천착하는 남성들일수록 더욱 성차별적 인식이 강하다고 보았으며,[3] 현실의 공적 영역에서 좌절한 남성들이 남성성을 확인받기 위해 사이버 환경을 활용한다는 설도 있고,[4] 사이버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성배제적 분위기를 유지한다는 설도 있다.[5] 그 이외에 《대한민국 넷페미史》 라는 책에서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악성 이용자들이 주기적으로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커뮤니티가 남초화된다는 가설[6] 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성시대 고발 대란 당시에 나왔던 반응인 "여초 사이트가 이런 곳이었던가?!" 같은 탄식들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2003년~2015년 사이에 웹상의 젠더 지형은 단순히 남초 대 여초 사이트로 분리(또는 격리조치)되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젠더가 섞여있다고 할 만했던 사이트는 오늘의유머 정도뿐.
2.2. 그 이후
안티월장이 예정됐던 오프라인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고 자진 해체한 이후 월장 사건은 점차 진정되었다. 이후 월장은 2003년 8월까지 프리챌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월장』 8호까지 업데이트하였다.
월장 사건 이후부터 영남권의 학내 여성운동은 정체 또는 하락세를 보였고 부산대의 여성주의 운동은 거의 붕괴되었으며 부산대 총여학생회는 일찌감치 없어졌다. 2010년대에 총여가 사라지는 타 지역보다 10여년 더 빨랐다. 실제로 국내의 전반적인 페미니즘의 동향은 그 이후 2003년 무렵까지 일명 100인위원회[7] 등의 활동으로 기존 운동권과 여성운동의 대립각을 세우던 것 이후에는 사실상 침묵기에 접어들었다. 많은 논자들이 2005년에서 2015년에 이르는 10년간의 세월 동안 국내의 페미니즘이 사회적 담론에서 수면 아래에 잠겨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다가 온라인 상의 남녀 간 갈등이 다시 본격화된 것이 2015년 5월 12일에 발발한 여성시대 고발 대란 및 같은 해 7월의 메르스 갤러리이고, 사회 전반적으로 터져나온 것이 이듬해의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이니 거진 10년 주기로 다시 돌아온 이슈인 셈.
이 시기 동안 여성계가 왜 조용했는지, 뭘 하고 있었는지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논쟁적인 사안이지만, 확실한 것은 월장 사건을 위시한 2000년대 초엽의 젠더 갈등과, 2010년대 후반의 젠더 갈등에는 상당한 연속선이 있다고 할 만큼 유사한 점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논자들은 당시의 문제의식이 해결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경쟁 사회 풍토 속에서 잠시 억눌려 있다가, 세대가 바뀜에 따라서 2010년대에 재점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3. 관련 문서
[1] 구체적인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해당 교수가 남자라는 설, 혹은 창간호 나온 거 보곤 월장을 포기했다는 설등이 있다.[2] 2010년대 들어 이런 수사들은 보통 메갈리아 · 워마드 류의 여성들을 지칭하지만, 실상 넷페미라는 표현은 이미 그때부터 있어 왔다.[3] Kendall, L. (2000). “Oh no! I'm a nerd!” Hegemonic masculinity on an online forum. Gender & Society, 14(2), 256-274.[4] 엄기호 (2017).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권김현영 편저,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교양인, 서울.[5] 이길현 (2010). 우리는 디시 인사이드-사이버 공간에서의 증여, 전쟁, 권력.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석사학위논문, 서울.[6] 단, 해당 저서에서는 이 가설을 반박하면서 "트롤링을 버티지 못한 여성들이 우애와 연대가 강한 여초 사이트로 도망치는 것" 이 아니라, 단지 "남초 문화에 편승하면서 자신이 여성임을 숨기고 남성들의 언어로 스스로를 위장했을 뿐" 이라고 하였다.[7] 대학 운동권이 극단적인 남초 문화와 상명하복, 독재적 의사결정, 군대식 조직운영, 운동권 내에 만연한 성추행 및 성폭행 사건 등등으로 문제가 되자 결성되었다. 그리고 운동권은 이들 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투쟁의 적", "프락치의 음모", "배후세력의 이간질"(…) 등을 제기하면서 반발했다. 이는 훗날 2008년이나 2017년 촛불집회 등지에서 "우리는 운동의 꽃이 아니다" 라는 플래카드를 들었던 여성 참가자들의 활동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