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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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윌리엄 2세
(William II of England)
'''별칭'''
홍당무 윌리엄
(William Rufus / William the Red / Guillaume le Roux)
'''생몰년도'''
1056년경 ~ 1100년 8월 2일
'''재위기간'''
1087년 9월 9일 ~ 1100년 8월 2일
1. 개요
2. 왕위에 오르다
3. 성공적인 원정
4. 사망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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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노르만어: Williame II
고대 영어: Willelm II
영어: William II
프랑스어: Guillaume II
라틴어: Gulielmus II, Willelmus II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왕국 노르만 왕조의 2대 왕으로 정복왕 윌리엄 1세삼남으로 태어나 그의 왕위를 이었다. 생몰년도는 1056년경 ~ 1100년 8월 2일, 재위 기간은 1087년 ~ 1100년. 얼굴이 붉었기 때문에 윌리엄 루푸스(Rufus, 라틴어로 red)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2. 왕위에 오르다


잉글랜드노르망디를 모두 통치하던 아버지 윌리엄 1세가 죽자 영토 중 잉글랜드를 물려 받으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래 왕위를 물려받았어야 할 큰형 로베르가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밀고 반역을 저지른 까닭에 상속권을 박탈당했고 작은형 리샤르는 이미 죽었으므로 삼남인 윌리엄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쫓겨났던 로베르는 윌리엄 1세가 죽기 직전 남긴 유언에서 노르망디 공국을 물려받았다. 잉글랜드와 노르망디가 갈라진 셈인데 양쪽 모두에 토지를 가지고 있던 귀족들은 지역별로 각각 다른 군주가 생긴 상황이 상당히 불편했고 하나의 군주로 통합하고 싶어 했다.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1088년 권력자인 오도 주교의 주도로 윌리엄 2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윌리엄 2세에게 진압당했고 승자인 윌리엄 2세의 입지는 도리어 탄탄해졌다. 1091년에는 오히려 노르망디로 쳐들어가 형의 영토를 상당 부분 빼앗았다. 이후 윌리엄 2세와 로베르 2세는 적당히 화해했고 이때부터 윌리엄은 프랑스 카페 왕조로부터 노르망디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이 무렵쯤에는 잉글랜드에서나 노르망디에서나 윌리엄 2세의 지위가 공고해졌다.
그러나 윌리엄 2세는 교회와의 사이가 나빴다. 그의 즉위 후에 대주교가 죽었는데 후임을 몇 년간이나 뽑지 않고 방치해 두었고 그동안 교회의 수입을 가로챘다. 그가 큰 병에 걸렸을 때에야 겁이 나서인지 이탈리아계 노르만족인 앤설름(Anselm)을 새 대주교로 임명했지만 이미 교회와의 사이는 틀어져 버렸고, 새로 임명된 앤설름 또한 윌리엄과의 사이가 매우 나빴다. 대주교 앤설름은 왕과 여러 사안에서 의견 충돌을 벌이다가 결국 국외로 추방 크리되었다. 추방당한 앤설름은 교황에게 가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반 2세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4세와 대립 중이라 잉글랜드마저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교황은 윌리엄과 정교조약(政敎條約)을 맺고 윌리엄 측 교회 상황을 인정하였으며 윌리엄은 그 댓가로 우르반 2세를 교황으로서 인정했다. 하지만 앤설름의 추방이 풀린 것이 아니었기에 앤설름은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못했고 윌리엄이 교회의 수입을 가로챌 수 있게 된 건 덤이었다. 다만 이런 교회와의 갈등은 중세 잉글랜드 정치에서 늘상 있는 일이었고 윌리엄의 경우는 특별한 축에도 들지 못한다. 예를 들어 후대의 헨리 2세 때는 잉글랜드의 대주교가 기사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정도로 훗날 튜더 왕조헨리 8세는 아예 교황과 싸우다 이기지 못하자 영국 국교회를 만들어 버렸으니 뭐...
윌리엄은 둠즈데이 북에 명시되어 있는 노르만족의 정착지이자 정복지를 몰려 받았다. 둠즈데이 북은 일종의 토지 대장으로서 아버지인 윌리엄 1세가 작성한 것이다. 세금을 걷는 것이 작성 목적의 하나였으며, 당시로서는 유럽 어느 지역에서도 이러한 대장을 만드는 것을 시도하지 못했기에 둠즈데이 북은 잉글랜드 왕의 권위의 상징이 되고 있다. 윌리엄은 노르만 왕조를 창업한 아버지만큼의 카리스마는 없을지 모르나, 노르만 영주들의 반란을 막는 데는 문제를 겪지 않았다. 비결은 무력. 한 귀족이 영주들을 모이는 정기적인 궁정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쳐부순 적도 있고, 반란을 꾀한 한 귀족을 역관광시켜 붙잡아 눈을 멀게 하고 고자로 만들어 버린 일도 있다.

3. 성공적인 원정


대외 활동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091년에는 스코틀랜드맬컴 3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그를 굴복시켰다. 이듬해에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점령한 땅을 되찾아 그곳에 성을 세워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도 했다. 물론 맬컴은 복수하려고 다시 쳐들어왔으며 노섬브리아를 잔인하게 발라버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1093년 11월 13일 매복한 노르만 군대에 공격을 당해 그의 아들과 함께 살해된다. 인터넷상에는 윌리엄 2세가 맬컴을 처형했다는 이야기가 떠도나 사실이 아니며, 멜컴 2세는 아킬 모렐이라는 뱀버러 성의 시종에게 죽었다. 맬컴 이후에는 잉글랜드와의 관계가 좀 나아져서 잉글랜드 왕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 한편, 웨일즈에 대해서는 윌리엄도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웨일즈를 두 번 정도 침략한 적이 있으나 저항이 심해서 점령에 실패하고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1096년에 노르망디를 통치하던 그의 형 로베르 2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자 윌리엄이 섭정을 맡아 노르망디까지 통치했다. 그의 형은 윌리엄 2세가 죽은 후 한 달 후에나 돌아왔기에 그는 죽을 때까지 노르망디를 통치했다. 섭정 기간 동안 윌리엄 2세는 프랑스와 전쟁을 치루었는데 이때 메인 지역을 얻어냈다.

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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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2세의 죽음. 알퐁스 드 뇌빌 作. 1895년
1100년 8월 2일, 윌리엄 2세는 브로켄허스트 근처의 숲에서 죽었다. 그는 상당히 특이하게 죽었는데 숲속에서 사냥하던 중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에 가슴을 꿰뚫려서 죽었기 때문이다.[1] 다만 누가 어떻게 그를 죽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동생 헨리 및 귀족들을 대동하고 있었으나, 같이 있던 귀족들은 그의 시체를 수습도 안 하고 현장에 버려두고 가버렸으며 그의 시신은 나중에 한 농부가 발견했다. 이때 동생 헨리는 형에게로 달려갔...기는 개뿔, 왕궁의 보물을 확보하기 위해 잽싸게 윈체스터로 달려 갔다.[2] 그리고 런던으로서 가서 며칠 후에 대관식을 올려버렸다. 윌리엄 2세를 누가 죽였는지는 당대에도 미스터리였고 현재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 역사가들은 단순히 사고였을 수 있다는 의견, 동생인 헨리가 연관되어 있다는 의견, 헨리는 아니라는 의견 등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지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없다.
그는 군사적인 면에서는 뛰어났지만 통치가 거칠었고 모두가 무서워하는 왕이었다. 특히 잦은 원정으로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기에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증오를 받았다. 당연히 그가 죽었을 때도 슬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대의 사후평가 또한 전쟁 잘하는 군인일 뿐 품위나 위엄과는 거리가 먼 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질서와 정의를 확립하고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 평화를 지킨 것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으며, 프랑스의 메인을 되찾은 것 또한 치적으로 평가받았다.
윌리엄 2세가 쓰러졌다고 알려져 있는 장소에는 루푸스 스톤이라는 기념석이 세워져 있다.

5. 기타


교회와 귀족들에게서 미움을 받아서 모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인지 실제로 였던 것인지 그의 사망 이후 윌리엄 2세가 동성애자였다라는 기록 내지 의혹이 늘 있어왔다. 물론 당대에 교회와 반목이 심하고 사치를 좋아하던 윌리엄 2세의 성향을 동성애에 빗대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40살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정부도 없었으며 자식도 사생아도 없었다. 그리고 궁정에는 젊고 잘생긴 남작들을 충신으로 두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역사학자 중에서는 윌리엄 2세를 동성애자가 맞다고 인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양 눈의 색이 서로 달랐다고 한다. 성깔은 더러운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을 끌어 들이는 매력이 있기도 했다고 한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미디블2: 토탈 워에서 튜토리얼용 캐릭터로 조작할 수 있다. 튜토리얼은 아버지 윌리엄 1세와 함께 헤이스팅스 전투에 참전하고 잉글랜드를 장악하는 미션이다. 튜토리얼에서는 별칭인 '루푸스 왕자'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튜토리얼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그랜드 캠페인 시작 시점이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한 직후라 잉글랜드의 후계자로 등장한다. 여담으로 게임 시스템상 무조건 장자승계로 되어있는 한계 때문에 윌리엄 2세의 형 로베르가 거꾸로 그의 동생이 되어버렸다.
  • 김성한의 소설 바비도에서도 그의 죽음에 대한 일화가 짧게 언급된다.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화형을 택한 바비도의 매력에 이끌린 왕세자(헨리 5세)가 그에게 정의를 설파하며 마음을 돌려보게 하려 하지만, 바비도는 오히려 헨리 5세의 선조인 헨리 1세가 사냥터에서 쓰러진 윌리엄 2세를 버려두고 왕좌를 택한 덕분에 오늘날의 당신이 미래의 천자가 아니겠느냐고 비꼬며 헨리 왕자가 말하는 정의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 얼음과 불의 노래에 나오는 폭군 마에고르 1세의 모티브로 보인다. 정복왕의 아들이었다는 점, 교단과 마찰을 빚은 점, 폭군으로 평이 안 좋았다는 점, 군사적인 능력은 뛰어났다는 점, 자식 없이 의문사 했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1] 정확히는 날아온 화살이 가슴에 박혔고, 그 충격으로 낙마하면서 가슴에 박혔던 화살이 지면에 부딪히면서 화살이 더욱 깊숙이 박히게 된 것이다.[2] 헨리의 입장에서는 서둘러 권좌를 확보해야 했다. 윌리엄 외에도 그 위로는 노르망디 공인 형 로베르가 있었고, 윌리엄의 사망 소식을 들으면 로베르 역시 잉글랜드 왕위를 노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만 로베르는 당시에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고 있어 빠른 대처가 어려웠다. 나중에 윌리엄의 부고를 듣고 로베르는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나 헨리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격분해 잉글랜드 왕위를 두고 헨리와 대립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헨리의 재빠른 권좌 확보는 주효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