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스팅스 전투

 

'''헤이스팅스 전투'''
영어: The Battle of Hastings
'''시기'''
1066년 10월 14일
'''장소'''
잉글랜드 동 서식스의 헤이스팅스 북서쪽 11 km 지역
(현재의 배틀(Battle) 마을 )
'''원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사후, 왕위 계승전쟁.
'''교전국'''
[image] 노르망디 공국
(노르만 족)
[image] 잉글랜드 왕국
(앵글로색슨 족)
'''지휘관'''
[image] '''윌리엄 1세'''
[image] 앨런 루퍼스
[image] 유스타스 2세
[image] 윌리엄 피츠오스번
[image] '''해럴드 고드윈슨[1]'''
[image] 거스 고드윈슨†
[image] 러프와인 고드윈슨†
'''병력'''
7,000 ~ 12,000 명
5,000 ~ 13,000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윌리엄 1세, 잉글랜드 왕좌에 등극.
'''영향'''
노르만 왕조 개창, 북부 대학살 실행.
1. 개요
2. 배경
4. 해럴드 VS 하랄 3세
5.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공
6. 헤이스팅스 전투
6.1. 병력 배치
6.2. 전투
6.3. 절정
7. 잉글랜드의 패인
8.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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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글자막 있음.
1066년 10월 14일에 잉글랜드의 헤이스팅스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전투.
프랑스에 정착한 노르만족 군대를 이끄는 윌리엄 1세앵글로색슨의 왕 해럴드 2세가 맞붙은 전투이다. 전투는 런던 동남부에서 85 km 떨어진 헤이스팅스의 근방에서 벌어졌으며, 병력 규모는 노르만군이 7,000에서 12,000명, 앵글로색슨계 잉글랜드군이 5,000에서 13,000명으로 추정된다.
전투 결과는 윌리엄의 승리로 끝났다. 잉글랜드의 해럴드 2세는 전투가 끝나갈 쯤에 죽었고, 해럴드가 이끌던 잉글랜드군은 패했다. 승자인 윌리엄은 1066년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이는 노르만 왕조의 시작이 되었다. 윌리엄은 후대에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으로 불리게 된다.
헤이스팅스 전투는 윌리엄이 영국 정복에 사실상 성공했음을 뜻하는 전투로서 '''영국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image]


2. 배경


윌리엄의 군대는 당연하지만 잉글랜드인이 아니라 프랑스노르망디에 있던 바이킹계 프랑스 병사들, 즉 노르만이다. 바다 건너 프랑스 군대가 잉글랜드로 진격한 데에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관련되어 있다.
전투로부터 150여 년 전인 911년에 프랑스 카롤링거 왕조의 "단순왕" 샤를 3세[2][3]는 노르망디에 바이킹들이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고, 그 후 노르만 족, 즉 바이킹의 후예들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노르망디의 서쪽 먼 곳에는 영국이 있다.
아울러,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에드워드 왕 또한 노르망디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노르망디에서 오랜 추방 생활을 보냈던 경험이 있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노르망디에도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심지어 에드워드가 당시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윌리엄에게 왕위를 물려받으라고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다. 에드워드는 자식이 없었기에 자신이 죽고 나면 왕위는 다른 가문으로 넘겨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에드워드는 당시 매우 유력한 가문이었던 고드윈슨 가와 라이벌 관계였기에 그들에게 왕위가 넘어가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을 바랐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노르만 족은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3. 왕좌의 게임


이런 상황에서, 1066년 1월, 에드워드 왕은 자식이 없는 채로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에드워드 왕은 일부러 자식을 갖지 않았던 것이라고 한다. 아내 쪽 가문이 매우 야심찬 가문이었는데, 아내에게 자식이 생기면 아내 쪽 세력이 더 힘을 얻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4]
자식이 없는 채로 왕은 죽었고, 누가 왕위를 이을지 모호해진 상태. 야심에 찬 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이 승계자임을 주장했다. 이 왕위 쟁탈 경쟁에 뛰어든 선수들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 해럴드 고드윈슨 (Harold Godwinson, 해럴드 2세) - 웨식스백작(Earl of Wessex)이자, 에드워드 왕의 라이벌인 고드윈의 아들. 가장 세력이 강했고, 가장 부자였다. 여기에 선왕인 에드워드의 인척이란 명분이 있었고 색슨족인 데다 색슨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 하랄 3세 (Harald III) - 이름은 하랄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5] 노르웨이의 왕인데, 덴마크 왕 자리를 넘본 적이 있고 이제는 잉글랜드 왕도 넘보는 야심찬 인물. 노르웨이 왕이 되기 전에 15년간을 추방되어 지냈다. 추방 생활 당시 직업은 동로마 제국 황실 근위대 바랑기안 가드 사령관. 이쪽은 잉글랜드왕을 겸한 크누트 대왕 이래 노르웨이 왕으로서 잉글랜드의 왕위에 대한 명분이 있었다.
  • 윌리엄 1세 - 노르망디 공국공작. 노르망디 태생이다. 이 셋 중 가장 쌩뚱맞은 명분을 주장했다. 선왕인 에드워드가 노르망디에서 망명 생활 당시에 노르망디의 영주인 자신에게 충성 맹세를 했고 후에 자기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다면 자신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주기로 했다는 것. 그런데 문제는 이 명분이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
먼저, 가장 부자이면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웨식스의 백작 해럴드 고드윈슨이 요크 대주교를 동원해 잽싸게 왕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고분고분 인정할 경쟁자들이 아니었다. 당시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예전에 에드워드가 다음 후계자는 나라고 지정했고 너도 동의하지 않았냐고 딴지를 걸었다.
노르웨이의 왕 하랄 3세도 이것은 자신의 선왕하고 잉글랜드의 하레크누드 왕이 이미 합의를 보았고 자식이 없이 죽게 되면 서로의 자식을 왕으로 즉위시켜주기로 했으므로 국왕의 작위는 본인의 것이라며 왕위를 주장했다. 더 큰 문제는, 두 경쟁자 모두 말로만 주장할 성깔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4. 해럴드 VS 하랄 3세


해럴드에게는 토스티그 고드윈슨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자신의 자리를 안 내놓으려고 에드워드 왕을 귀찮게 하다가 플랜더스로 추방되어 있었다. 추방 과정에서 토스티그는 에드워드 왕의 심복이었던 형 해럴드와 싸워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고, 형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다. 에드워드 왕이 죽은 지 얼마 뒤인 1066년 초, 토스티그는 마침내 플랜더스에서 모집한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동남부를 침략했다. 그러나 해럴드 형제들은 힘을 합쳐 토스티그를 물리쳤고, 패배한 토스티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갔다. 토스티그는 그곳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하랄 3세를 만나 잉글랜드 침공을 개시하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해 9월 18일, 하랄 3세는 토스티그와 함께 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여 해럴드의 형제들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후 요크 시로 진격하였고, 9월 20일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해 여름, 해럴드는 윌리엄 1세의 침략에 대비하며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럴드의 군대는 농민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을 추수철이 다가오자 군대를 해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9월 8일이었다. 하랄 3세의 노르웨이 군대가 북부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은 해럴드는 해산했던 병력을 다시 소집해 가며 부랴부랴 북진하여 기습 공격을 가했다. 9월 25일에 벌어진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노르웨이군을 축출해내는 데 성공하였고 전투 도중 하랄 3세와 토스티그까지 전사했으니 노르웨이의 완벽한 패배였다. 하지만 해럴드 측 병력 또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가 되었다. 바다 건너의 윌리엄은 어부지리를 보게 된 셈이었다.

5.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공


윌리엄은 거의 9개월 전부터 병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르망디브르타뉴, 플랑드르 지역에서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는데, 그 목적은 당연히 잉글랜드 정복이었다. 윌리엄은 외교적으로도 협조를 구했고, 교황의 지지를 얻었으며, 때마침 핼리 혜성이 지나간 것을 가지고 잉글랜드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다는 징조라고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윌리엄은 8월 초에 병력 집결을 마쳤으나 바람의 방향이 따라주지 않아 출발을 차일피일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럴드가 하랄로부터 승전한 지 며칠 후인 9월 28일, 드디어 바람은 노르만 군대를 위해 불었고 해럴드의 해군 병력이 흩어진 틈을 타서 마침내 영국 해협을 건넜다. 길을 잃은 몇 척을 빼고 윌리엄의 함대 대부분이 무사히 잉글랜드 남부 서식스의 페번시(Pevensey)에 상륙했고,[6] 인근의 헤이스팅스에 목제 성을 쌓아 주변 침공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상륙한 군대의 정확한 병력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당대의 기록에는 1만 4천에서 15만까지의 다양한 수치가 적혀 있지만, 모두 과장된 수치로 보인다. 현대 역사가들은 7,000~12,000명의 선에서 여러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하랄 3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해럴드는 많은 수의 병력을 북쪽에 남겨둔 채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는 윌리엄군에 맞서기 위한 이동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해럴드가 침공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이미 이동을 시작한 후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소식을 듣고 난 후 해럴드는 하루에 43km를 진군하는 빠른 속도로 약 320km를 남하했고, 런던에서 1주일을 머문 후 다시 이동하여 10월 13일에 헤이스팅스의 윌리엄 측 근거지에서 13km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이런 빠른 진군의 이유 중 하나는 윌리엄의 군대가 상륙을 완료하여 교두보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해럴드는 윌리엄 측에 기습 공격을 가할 계획이었으나 노르만군 척후병이 동태를 이미 알아차렸고, 그 보고를 받은 윌리엄은 성으로부터 나와서 군대를 이끌고 적 방향으로 이동했다. 해럴드는 10월 13일 저녁, 윌리엄의 성으로부터 9.7km 떨어진 센락 힐이라는 곳에 방어진을 쳤다.[7] 기병이 일부 있었던 노르만군과는 달리 잉글랜드군은 전부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8][9] 잉글랜드군의 핵심 병력은 후스카를이라 불리는 전업 군인이었다. 이들은 방패는 물론 호버크(hauberk)라 불리는 사슬갑옷에 원뿔형 투구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주무기는 전투용 도끼(데인액스). 나머지 병력들은 일반인 징집병(fyrd)으로서 생업에 종사하다가 징집되어 온 병사들이었다.

6. 헤이스팅스 전투


전투가 벌어진 곳은 헤이스팅스 북쪽 11km 지점이며, 이 일대에서 양측은 서로 다른 형태로 진영을 구성한다. 현재에는 일대의 두 언덕 사이 그곳에 마을이 들어서 있는데 이름이 "배틀(Battle)"이다. 당시 전투에 대한 기록들이 서로 엇갈리기 때문에 전황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아침 9시에 시작된 전투는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을 때까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6.1. 병력 배치


잉글랜드군의 배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현대 역사가들의 대부분은 잉글랜드군이 언덕 위에 좁은 범위에서 밀집된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잉글랜드군은 옆 사람과 방패를 맞닿도록 하여 이른바 방패의 벽(shield wall)을 치고 있었다.
노르만군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사항이 알려져 있다. 노르만군은 출신 지역에 따라 세 그룹으로 군대를 나누어 배치했다. 왼쪽에 프랑스의 브르통족, 중앙에 노르만족, 오른쪽에 프랑스와 플랜더스 출신이 배치되었다. 맨 앞에 궁수들이 위치했고, 을 든 보병들이 그 뒤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기병은 예비대의 임무를 수행했다.
[image]
▲병력 배치 형태. 위쪽 붉은 선이 잉글랜드, 아래쪽 파란 선이 노르망디 공국군.
병력의 배치를 살펴보면, 아마도 먼저 궁수들이 을 쏘아 적을 약화시킨 후 곧이어 보병이 진격하여 근접전을 벌이게끔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보병이 잉글랜드 측 전열에 돌파구를 내고, 그곳으로 기병들이 침투하여 잉글랜드군의 전열을 무너뜨린 다음,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측은 진영을 갖췄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6.2. 전투


[image]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일부분.[10]
10월 14일 아침, 노르만군의 궁수들이 잉글랜드의 방패 벽에 화살을 날리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언덕 위쪽에서 방패로 방어하고 있던 잉글랜드군에게는 화살 공격이 별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잉글랜드군에는 궁수가 별로 없었기에 노르만 궁수는 더더욱 힘을 쓰지 못했다. 적이 쏜 화살을 주워다 쏠 수 없었기 때문이다.(...)[11]
노르만군은 궁수의 공격 후에 창병을 전진시켰다. 그랬더니 화살은 물론이고 투창, 도끼, 돌 등 온갖 것들이 노르만 창병에게 쏟아졌다. 게다가 잉글랜드 보병들은 방패를 옆사람과 나란히 맞대고 버티며 말 그대로 방패의 벽을 이루고 있었다. 노르만 보병은 이러한 잉글랜드군의 방패벽을 뚫을 수 없었고, 대기하던 기병은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적을 향해 돌격했다.
하지만 기병 또한 돌파에 실패했고, 기가 꺾인 노르만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여 노르만군은 더 심한 혼란에 빠졌다. 신이 난 잉글랜드군은 도망치는 노르만군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이대로 노르만군이 털리려는 순간…

6.3. 절정


'''죽었다던 윌리엄이 노르만군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윌리엄은 고함을 지르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과시했으며, 노르만군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에 다시 맞서 싸웠다. 양측의 치열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잠시 소강 상태가 있었다. 아마 양측 모두 휴식과 식사를 위한 휴전이 필요했을 것이다. 특히 윌리엄 측에서는 새 전략을 검토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잉글랜드군이 낚여서 털리는 것을 뻔히 봤기 때문이다. 오후 전투에서 실제로 거짓 후퇴 전략이 두 번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거짓 후퇴가 전열을 흐트러뜨리지는 못했겠지만 잉글랜드의 방패 벽을 치고 있던 병사의 수를 줄이는 성과는 있었을 것이다.
오후의 전투 역시 치열하게 이어졌다. 궁수들은 다시 화살을 날리고, 양측 기병과 보병은 여러 차례 다양한 방식으로 공격을 가했다. 전투 중에 윌리엄이 타고 있던 이 두 마리, 일설에 의하면 세 마리나 죽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이렇듯 양측은 열심히 치고 받고 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가 전사했다. 당대 기록에는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엇갈리므로 명확한 사실은 알 길이 없다. 해럴드가 한쪽 눈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이쪽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권위있는 기록은 없으므로 확정하기 어렵다. 반대로 아미앵의 주교였던 기(Guy)가 저술한 Carmen de Hastingae Proelio(이 전투를 기록한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에서는 윌리엄을 포함해서 적어도 4명 이상의 기사가 해럴드를 둘러싸서 잔인하게 난도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피스트리에 해럴드의 전사를 묘사한 것이라고 전해지는 그림이 있는데, 여기에는 눈에 화살을 맞은 사람과 기사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직접 보자. 하여간 해럴드는 죽었고, 잉글랜드군은 지휘관을 잃었다. 지휘관을 잃은 잉글랜드군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소수의 가신들이 시신 근처에 모여 끝까지 싸웠으나 이미 전황은 기울었다. 잉글랜드군 병력 다수가 도망쳤고 노르만군은 도망치는 병력들을 추격하여 섬멸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전투는 실질적으로 끝난 것과 다름 없었다. '''노르만군 승, 잉글랜드 패.'''
해럴드의 시체는 전투 다음 날 발견되었다. 윌리엄은 그 시체를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했으나, 시신이 진짜로 던져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7. 잉글랜드의 패인


잉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에서 하랄과 큰 싸움을 치르고 난 후 영국 남부의 헤이스팅스까지의 긴 행군 끝에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하루 온종일 치열하게 싸웠던 것으로 보아, 잉글랜드 병력이 지쳐 있었던 것도 잉글랜드군의 전력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윌리엄은 더 경험이 많은 지휘관이었고 노르만군에는 강력한 기병이 있어서 다양한 전술을 펼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군의 경우 아직 마상전에 익숙하지 않아 말로 전장까지 이동하고는 정작 싸울 때는 내려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12] 그 밖에 윌리엄이 죽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노르만군을 추격하러 가다가 전열의 측면을 노출시켰고, 그곳을 공격받게 된 것이 패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해럴드의 죽음 또한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리더를 잃은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되기 마련이다. 특히 중세 시대에 왕위계승의 이유로 벌어진 영지 전투는 당사자가 죽거나 붙잡히면 병사들 입장에서는 싸울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8.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윌리엄은 살아남은 잉글랜드 지배층이 당연히 자신에게 항복해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잉글랜드 정복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았다. 캔터베리 대주교를 비롯한 지배층은 재빨리 웨식스의 왕족 에드거 애설링(Edgar Aetheling)을 새 왕으로 내세우며 저항을 계속했다. 윌리엄은 런던으로 진격해서 잉글랜드 저항 세력을 진압해야 했다. 윌리엄은 몇 차례의 교전 끝에 2달 후 버크햄스티드(Berkhamsted)에서 에드거 애설링을 복속시켜 잉글랜드의 왕위를 쟁취해냈으며, 1066년 12월 25일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 항복한 건 지배층뿐이었고, 그 이후에도 윌리엄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했던 현지의 앵글로색슨 영주(Earl)들과 기나긴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윌리엄은 1067년 초, 막 잉글랜드 왕국의 통치를 시작했을 무렵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앵글로색슨 귀족 콥시(Copsi)를 새로운 노섬브리아 영주(Earl of Northumbria)로 임명하며 잉글랜드의 북부를 통치하도록 파견했다. 하지만 콥시는 노섬브리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슬프(Osulf)라는 현지 귀족에게 살해당한 후 노섬브리아 영주직을 찬탈당했고, 이 오슬프는 다시 사촌 코스패트릭(Cospatrick)에게 살해당한 후 영주직을 찬탈당했다. 그리고 코스패트릭은 1068년에 다른 앵글로색슨 귀족들과 힘을 합쳐 윌리엄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즉, 노섬브리아 통치하라고 충성스러운 부하를 하나 보냈더니 현지의 귀족에게 살해당하고 작위를 찬탈당했는데 이 찬탈자도 다시 사촌에게 살해 및 찬탈당하고 이 사촌은 노섬브리아를 기반으로 윌리엄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심지어 이 모든 일이 1년 만에 일어났다.''' 윌리엄은 1068년에 대군을 이끌고 북부의 심장부인 요크로 진격해 반란군을 모조리 쓸어버렸고, 이번엔 노르만 영주 로버트(Robert)를 새로운 노섬브리아 영주로 삼았지만 이 로버트도 요크에 들어간 바로 '''그날''' 현지민들의 저항을 맞이해 죽었다.
여기에 앵글로색슨 저항군의 구심점인 에드거 애설링[13]의 부탁을 받은 덴마크 왕 스벤 2세가 함대와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저항군들이 요리조리 발버둥치다 보니 이번에는 정말 위험한 군대를 잉글랜드로 불러온 것이다. 그런데 스벤 2세는 에드가 에설링의 세력과 함께 요크를 탈환한 뒤, 윌리엄에게 돈을 받는 대가로 덴마크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저항군은 윌리엄의 성깔만 긁어놓고 정작 윌리엄과 싸울 만한 군대는 하나도 가지지 못한 상황에 놓였다.
윌리엄은 자기 어머니가 가죽장인이란 이유로 가죽을 내걸고 모욕하며 대항하던 요새를 사람 한 명 남기지 않고 학살해버릴 정도로 잔혹한 사람이었고(요새 수비병을 모두 산 채로 가죽을 벗겼다는 말도 있다) 당연히 보복에 나섰다. 보복이 절정에 달했던 게 1069년 말부터 1070년 초인데, 저항군은 물론이고 무고한 주민들도 닥치는 대로 죽여버렸으며 진군할 때는 길 양 옆의 밭을 엎어버리고 마을에 도착하면 집과 곡식, 심지어 농기구들까지 싹 다 불태워버리는 행패를 저질렀고, 여기에 국경 너머의 픽트족까지 옳거니 하고 끼어들어서 같이 약탈을 벌였다(...). 막대한 수의 백성들이 살 곳과 먹을 것을 동시에 잃어버렸고, 이로 인해 '''10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북부 대학살(Harrying of the North)'이다. 이로 인해 북부는 거의 완전히 초토화됐고, 1080년에 한 번 더 불태운 결과, 앵글로색슨 귀족들과 농민들이 사라지다시피 하여 사실상 빈 땅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앵글로색슨 귀족들이 죽고 추방당하자 노르만 기사들이 그 영지를 분봉받고 귀족이 되어 사회의 상류층을 장악하고 통제하게 되었고, 앵글로색슨 저항의 심장부이던 북부는 더이상 봉기할 수 없었다.
한편 이런 참상에도 아랑곳 않고 잉글랜드를 철저하게 벗겨먹기 위해 당시에 만들었던 토지대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둠스데이 북(Domesday Book)이다.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저항들을 차례차례 진압하고 결국 잉글랜드 정복에 성공하였다. 이는 '''노르만 정복이라 불리며, 당시 잉글랜드의 정치, 사회, 문화, 언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14] 윌리엄 1세를 ''정복왕'' 윌리엄이라 부르는 것도 이 노르만 정복에서 유래된 것이다.
'''특히 언어학적 시점으로 이 전투가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는데''' 이 전투의 패배로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가 세워지면서 약 300여 년간 잉글랜드의 귀족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하게 되어 '''영어에 프랑스어 어휘가 다량으로 침투했다는 것이다.'''[15]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언어 중에서 유독 영어에 프랑스어 어휘가 많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더군다나 궁정 인물들과는 다르게 평민들은 그대로 영어를 쓴 탓에 (예시를 들어) 가축과 그 가축의 고기의 어원이 다른 언어로는 영어가 유일하다. 예를 들어, 소는 영어로 cow지만 쇠고기는 beef이고, 돼지는 pig인데 돼지고기는 pork다. 이는 소의 프랑스어 bœuf와 돼지의 프랑스어 porc가 변형된 것이다. 이 외에도 양(sheep)과 양고기(mutton), 사슴(deer)과 사슴고기(venison)도 각각 다르다. 높으신 분들에게 고기를 대접하며 무슨 고기인지 프랑스어로 소개했던 것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이후 윌리엄의 정복을 기념하여 헤이스팅스 전투를 포함한 잉글랜드 정복과정을 묘사한 그림을 직물 형태로 만든 작품이 만들어졌고, 노르망디 바이외(Bayeux)에 있는 한 성당에 봉헌되었다. 이것이 현재까지 남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전해지는 바이외 태피스트리이다.[16] 현재 남아 있는 부분만 해도 70m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이고, 중세 당시의 풍속이나 무장을 고증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9. 여담


침공군인 윌리엄의 군대가 노르만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바이킹인 윌리엄과 유럽인인 해럴드의 싸움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실상은 정 반대이다. 노르만족은 프랑스 북부에 정착한 바이킹들을 뜻하는 말로, 일찌감치 프랑스화되어 완전한 유럽인이 된 반면, 잉글랜드는 섬나라인 탓에 대륙의 영향이 미미한 대신 오랜 기간 스칸디나비아에서 쳐들어오는 바이킹의 영향을 받아 문화적으로 거의 바이킹에 가깝게 변모한 상태였다. 이미 칠왕국 말기에 대대적인 바이킹의 침략으로 브리튼 섬 거의 전체가 데인족에 정복당한 바 있고, 이후에도 스벤 2세, 크누트 대왕 등에 의해 잠시 덴마크계 왕조가 들어섰을 정도로 바이킹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이 때문에 헤이스팅스 전투는 오히려 바이킹 문화권에 해당했던 잉글랜드가 유럽 문화권으로 탈바꿈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미디블2: 토탈 워의 역사적 전투 및 튜토리얼 전투로 등장한다. 튜토리얼 전투는 초보자용 전투 컨트롤을 알려주는 전투이다보니 쉽게 쉽게 가기는 하지만 역사적 전투로 한다면 고지에서 앵글로색슨 군대가 버티고 있는 것을 저지대에서 쳐야 하는 골치아픈 상황이 펼쳐진다. 일단 병력구성부터 적은 최고급 창병인 테인 창병인 데 반해 아군은 주축이 창병에 쥐약인 쇄갑 기사대인 상황이며,[17] 궁병이 있기는 하지만 성능이 개판인 농민 궁병대라 병력 구성만 보면 당최 어떻게 이기라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 거기다가 우회기동도 절벽에 막혀 하지 못하는 정공법으로 뚫어야하는 상황이며, 다른 전투와 달리 이 전투에선 적들이 언덕 위에서 꼼짝않고 버티기만 시전한다. 그야말로 피를 봐야하는 것을 넘어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길 방법 자체가 보이지 않는 상황.
물론 이기라고 만든 게임이니 공략법은 다 있다. 역사적 전투 중 유독 어드바이저의 대사가 많은데, 양익의 허스칼을 공격하라거나 좌익을 공격한 다음 빠지라는 대사를 마구 마구 뿌려준다. 양익의 허스칼들은 양손도끼를 들고 있기에 그나마 기병 돌격에 취약하기 때문. 그리고 기병 순차 돌격으로 허스칼을 때려잡으면 결정적으로 언덕 위의 병력들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때를 노렸다가 내려온 병력들을 창병으로 버티면서 해롤드의 근위대를 노려 제거하자. 이 근위대는 패주도 안 하기에 기병 돌격이면 잡을 수 있다. 즉, 일반 전투와 동일하게 유저들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대부분의 역사적 전투와는 달리 유독 공략법이 제한되어 있는 특이한 전투이다.
크루세이더 킹즈 2의 기본 시작 시점, High Middle Age가 바로 이 잉글랜드를 둘러싼 왕좌의 게임을 다루는 시점이다. 헤이스팅스 전투가 따로 구현되어 있지는 않으나 철의 세기 기준으로 이 전쟁만의 고유 명분인 노르만 침략 명분과 노르웨이 침략 명분의 전쟁이 영국에 걸려 있다[18]. 노르망디 군은 이벤트 병력을 다수 받아 노르망디에 대기 중이며, 스탬포드 다리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을 구현하여 노르웨이 군이 잉글랜드 북부에 있고 잉글랜드군이 그 밑에 있다.
잉글랜드군 숫자가 충분해 보이지만 군대 편성을 보면 해럴드가 직접 이끄는 병력은 매우 적은 수의 이벤트 병력이기 때문에 전투 중 이 병력이 전멸되는 순간 매우 높은 확률로 전사하여 어느 정도 헤이스팅스 전투를 재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AI 해럴드는 노르웨이 군보다 노르망디 군을 더 위협적으로 평가하는지 가라는 스탬포드 다리는 안 가고 바다 건너 노르망디에 상륙을 시도할 때가 많아서(...) 노르웨이 잉글랜드 노르망디 셋 모두 AI일 경우 상당히 높은 확률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군이 싸우는 틈에 어부지리를 챙긴 노르웨이의 하랄 3세가 최종승자가 될 때가 많은 편이다.
덤으로 덴마크 왕 스벤 2세도 잉글랜드 왕위에 클레임을 갖고 있으니, 뭔가 상황이 꼬이거나 하면 아주 가끔 난입을 시도할 때도 있다. 자식이 많아서 결혼을 통해 동맹을 끌어들이기 쉬우므로, 플레이어가 잡으면 충분히 잉글랜드 왕위를 노려볼만 하다. 관련 도전과제도 있다.
그리고 2편뿐 아니라 1편 역시 기본 켐페인 시작 시점은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이다[19]. 즉, 제작사인 파라독스가 의도한 <중세 대전략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으로써 크루세이더 킹즈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바로 헤이스팅스 전투인 것. 위에서 잘 설명된 것처럼 이전까지 반쯤 (서)유럽사와 분리되어 있던 영국이 완전히 (서)유럽사에 포함되고, 이로 인해 근현대까지 이르는 유럽의 판도가 어느 정도 완성된 계기인 동시에 시기적으로도 딱 중세 전성기(high middle age)가 시작될 무렵이라는 특성 때문에 '중세 역사 게임의 켐페인 시작점' 으로 가장 적당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2편의 경우 거듭된 DLC 출시를 통해 샤를마뉴의 시대나 9세기 바이킹의 전성기, 오토 대제의 신성로마제국 재건 등 초기 중세 시나리오도 추가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66년 9월 15일[20]~1337년 1월 1일 사이의 시나리오에서는 '''하루 단위'''로 시나리오 시작 시점을 선택할 수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영토나 군주, 등장인물의 변화 역시 당연히 하루 단위로 구현되어 있는 데 비해 초기 중세 시나리오인 <769년 1월 1일 중세 초기 시나리오(샤를마뉴 시나리오)>나 <867년 1월 1일 바이킹 시나리오>, <936년 8월 7일 철의 세기 시나리오(오토 대제 시나리오)>는 해당 시나리오 시작 지점만 구현되어 있을 뿐 그 사이의 시대는 전혀 구현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1066년의 헤이스팅스 전투가 <그랜드 캠페인>의 시작 지점임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
또한 헤이스팅스 전투 이전, 초기 중세 시나리오가 추가되고 그를 위한 컨텐츠들이 업데이트되면서 헤이스팅스 전투와 중세 성기의 시작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들 역시 상당부분 게임 내에 구현되었다. 대표적으로, 원래 처음부터 잉글리쉬 문화로 구현되었던 잉글랜드 프로빈스들의 문화가 개편 이후 일단 '앵글로색슨 문화'로 설정되고 노르만인 지배자가 앵글로색슨 문화 프로빈스를 다스릴 경우 이벤트를 통해 지역별로 잉글리쉬 문화로 변화하게 되면서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노르만인 지배자들의 문화가 토착 앵글로색슨 문화와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과정을 구현한 것. 물론 윌리엄 1세가 해럴드 고드윈슨에게 패배하여 앵글로색슨 지배자의 지배가 계속될 경우 당연히 잉글랜드의 문화는 앵글로색슨 문화로 남게 된다. 캠페인 시작부터 구현된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략이 아니면 (플레이어가 의도하고 상황을 만들지 않는 한)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지배할 일은 별로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윌리엄 1세가 승리하는 상황을 상정한 전용이벤트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꼭 잉글랜드 문제뿐 아니라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는 중세 유럽의 판도가 어느 정도 완성된 만큼 어지간하면 현실의 역사에 비교해도 큰 차이 없는 방향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비해, 헤이스팅스 전투 이전 중세 초기 시나리오의 경우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지 않는다거나, 프랑스 대신 아키텐-부르고뉴 왕국이 서유럽의 패자가 된다거나, 심하면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과 북구의 바이킹, 헝가리를 넘어온 텐그리 신앙의 유목민들에 의해 유럽 기독교 신앙이 몰락하는 등 실제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1] 해럴드와 두 형제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죽으면서 고드윈 가문이 흔들렸고, 해럴드의 여러 아들도 이후 전투에서 죽거나 기록이 끊겨 결국 가문 하나가 공중분해된다.[2] Charles the Simple, 또는 Carolus Simplex. 원래 라틴어 'Simplex'는 올곧고 정직하다는 뜻으로 붙이는 칭호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능이 떨어진다는 뉘앙스로 변질되었을 뿐.[3] 그렇다고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좋은 것도 아니다. 한 역사가는, 919년에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친 그에 대해 대놓고 멍청한 왕 샤를 (Charles the Stupid)이라고 불렀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같이 멍청하다는 뜻인 Stultus, Hebes, Insipiens 등으로 불리며 여기저기서 까인 걸 보면, 진짜 뭔가 많이 부족했나 보다.[4] 하지만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어차피 아내에게서 자식을 얻지 않으면 생판 남에게 왕조가 넘어간다. 그냥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5] 정식 명칭은 하랄 시구르드손(Sigurdsson)이고 하르드라다는 폭군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 실제로 노르웨이인들이 그 덴마크의 강압통치를 그리워할 정도로 더 가혹한 통치를 했다.[6]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윌리엄이 배에서 내리다 발을 헛디뎌 얼굴을 처박고 넘어지자(...) 병사들이 불길한 징조라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러자 윌리엄은 넘어지면서 움켜쥔 해변가 흙을 들어올리며 "보아라! 나는 이미 해럴드의 땅을 손에 쥐었도다!"라 외쳐서 사기를 다시 높였다고 한다.[7] 이들 잉글랜드군의 병력 수 또한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현대 역사가들은 5,000에서 13,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8] 토머스 애스브리지에 따르면 1066년 당시까지도 잉글랜드군은 마상전에 익숙하지 않아서 헤이스팅스 전투 때는 말을 타고 왔던 앵글로색슨 병사들이 하마하여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잉글랜드군은 말이 없어서 기병을 운용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마상 전투에 익숙한 기사 계급이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9] 다만 그렇다고 잉글랜드군의 핵심 병력이었던 후스카를들의 전투력이 형편없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찰스 오만의 저서인 <중세의 전쟁 378~1515>에 의하면 이들 후스카를들의 주무기인 양손 도끼는 전력을 다해 휘두르면 일격에 말의 머리를 잘라버릴 만큼 강력했다고 한다. 출처: 중세의 전쟁 378~1515/ 찰스 오만 저/ 안유정 역/홍용진 감수/ 필요한책[10] 방패벽으로 돌진하는 노르만 기병가 묘사되어있다.[11] 초반의 전략 자체는 확실히 노르만군의 오판이었다는 평이 있다. 해럴드는 웨일즈의 왕 그리피스(Gruffydd ap Llywelyn)를 박살내면서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는데, 이 웨일즈 지역은 악명높은 잉글랜드 장궁병의 원조들이 드글대는 곳이었다. 궁병들과의 전투에 이골이 난 지휘관에게 그보다 못한 궁병을 들이댔으니(...).[12] 토머스 애스브리지, '제1차 십자군(The First Crusade)' 참조.[13] 저 위에 복속됐다고 서술한 그 에드거 애설링이다. 윌리엄에게 잡혀있다가 기회를 포착하고 북부로 도망쳤다.[14] 로마의 몰락 이후로 반쯤은 유럽과 분리되었던 잉글랜드의 역사를 '유럽사'의 한 분류로 끌어들였다는 평가가 있다.[15] 심지어 이 전투를 기점으로 그 악명높은 '''대모음추이가 생겨났고 문법적 성이 사라졌다는 가설이 있다.'''[16] 여기에 그 유명한 핼리 혜성이 그려져 있다. 연초에 혜성이 지나갔는데 그 후에 결과를 보고 "왕이 바뀔 징조"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었다.[17] 원래 같다면 잉글랜드 군의 기병은 노르만 기사여야 하지만 이 게임에서 노르만 기사는 시칠리아의 고유 유닛이라 쓰이지 못한 듯하다.[18] 정확히 말하면 기본 시나리오에 제공되는 추천 시작지점은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공이 시작될 무렵인 1066년 9월 15일(중세의 정점)과 헤이스팅스 전투 승리 후 윌리엄이 영국을 막 장악한 1066년 12월 26일(정복왕 윌리엄) 두 시점에 찍혀있다. 1066년~1453년까지 거의 400년(+초기 중세 시나리오를 포함하면 769년부터 거의 700년)의 기간을 다루는 게임 주제에 총 8개(+초기 중세 시나리오 3개)밖에 안 되는 추천 시작지점 중 2개가 1066년 후반기 3~4달 사이에 연달아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해당 게임에서 헤이스팅스 전투가 얼마나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게임 출시 당시 '중세의 정점'(High middle age) 시나리오의 본래 제목은 스탬퍼드 브리지였다. 딱 헤이스팅스 전투 시점인 10월 14일 시나리오가 없어서 아쉽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1066년 9월 15일 시점은 그랜드 캠페인 시작 시점이기 때문에 시작 날짜 자체를 매일 단위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10월 13일까지 해럴드 2세 고드윈슨이 잉글랜드의 왕이다가 14일 윌리엄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뒤 승자인 윌리엄이 잉글랜드 국왕에 즉위한 것까지 일일이 구현되어 있다. 물론 하랄 3세 하르드라다 역시 동년 9월 26일 전사하여 노르웨이 국왕이 교체된 것도 구현되어 있다. 다만 게임상 구현에도 한계가 있어 10월 13일 시점에서는 원래 잉글랜드에 상륙해 있어야 하는 윌리엄의 군대가 아직 노르망디 해안에 대기 중인 것은 옥에티.(그래도 하랄의 노르웨이군을 격파하고 윌리엄의 노르망디군에게 병력을 집중시킨 점이나 스탬퍼드 다리 전투의 결과로 병력이 감소한 것까지는 구현되어있다.) 그리고 정말 10월 14일 시점으로 게임을 시작할 경우 윌리엄이 이미 승리한 상태에서 게임이 시작되는 데다 역시 시스템상 한계로 요크 공작을 제외한 잉글랜드 남부 주요 영주들이 이미 노르만계로 교체되어있는 상태라서... 헤이스팅스 전투 맛을 보고 싶으면 9월 26일~10월 14일 사이 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낫다. 다만 이 경우 해럴드를 꺾고 잉글랜드 왕위를 얻더라도 역시 시스템상 앵글로색슨계 영주들을 역사처럼 화끈하게 노르만계로 교체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옥에티들을 감안하고 추천시점은 제작자가 추천하는 시점이라 추천시점인 점을 생각하여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3파전의 맛을 보고 싶다면 중세 성기 시나리오, 윌리엄에 의한 정복 이후 영국맛을 보고 싶다면 정복왕 윌리엄 시나리오를 선택하는 것도 좋은 선택.[19] 여담이지만 다른 시작 시점은 1187년의 3차 십자군과 1337년의 백년전쟁 시작 시점이다. 즉 십자군의 시대를 눈앞에 둔 중세 성기의 시작-십자군 원정의 절정기로써 중세의 절정기-중세의 끝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의 세 시작 시점 중 하나를 고르는 것.[20] 헤이스팅스 전투 1달 전으로 이미 교황의 승인하에 잉글랜드 왕위 요구 명분으로 전쟁이 걸려있고 윌리엄의 군대가 노르망디에 집결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