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image]
'''이름'''
<colbgcolor=white,#2d2f34>'''유치환(柳致環)'''
'''본관'''
진주 류씨[1]
'''출생'''
1908년 8월 10일
대한제국 경상남도 거제군 둔덕면 방하리[2]#
'''사망'''
1967년 2월 13일
대한민국 부산직할시
'''아호'''
청마(靑馬)
'''학력'''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3기)
1. 개요
2. 삶
3. 작품


1. 개요


대한민국시인이자 교육자. 극작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동랑 유치진이 그의 친형이다.

2. 삶


유치환은 1908년 8월 10일 경상남도 거제군 둔덕면 방하리에서 한의사였던 아버지 유준수(柳焌秀)와 어머니 밀양 박씨 박순석(朴珣碩)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2살 때 충무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냈다.
통영공립보통학교(현 통영초등학교) 4학년을 수료하고 일본 토요야마(豊山)중학교에 유학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했고, 시를 쓰면서 한때 사진관을 경영하기도 했다. 1931년 '문예 월간'에 첫 시인 '정적'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그 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중 1937년(29세) 부산의 화신지사를 그만두고 통영으로 귀향했다. 통영에서 향교 재단이 운영하던 통영협성상업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이 시절 유치환은 발행, 편집인이 되어 같은 해 7월 1일 부산 초량에서 동인지 『생리(生理)』를 창간하며 1939년 첫 번째 시집인 '청마시초'를 발간했다. 1940년 교사를 사임하고 만주로 피신했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다시 교육계에 투신, 충무/부산/경주 등 지방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였으며[3] 훗날 경주고등학교장, 경주여자고등학교장, 경남여자고등학교[4], 대구여자고등학교장,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장까지 역임했다.
만주 피난 활동과 교직활동 중, 그리고 6.25 전쟁 중에도 틈틈이 시를 쓰고 시집을 발표하며 출간한 활발한 문학인이었다. 1946년에는 창립 조선청년문학가 회장을 지냈으며, 1957년에는 초대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내는 등 대한민국 문학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인물이다. 특히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시작하는 교과서에 정말 자주 등장하는 작품인 ''''깃발#s=7''''과 ''''생명의 서'''', ''''행복'''' 등이 유명하며 수능 필수 암기 리스트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통영여중 재직 당시 가정교사로 근무했던 시인 정운 이영도(1916년 10월 22일 ~ 1976년 3월 5일)에게 그야말로 한 눈에 반해 살아 생전 20년 동안 연애편지를 써서 보냈다. 처음 만나게 된 1947년부터 교통사고로 죽게 된 1967년까지 이룰 수 없는 짝사랑에 대한 고통과 회한, 그리고 설렘과 기쁨을 잔뜩 버무려 표현한 연애편지들 가운데 6.25 전쟁 이전의 것은 소실되고 남아 있던 것이 5,000여통이라 한다. 그 중 200통을 추려 유치환이 죽고 나서 두 달 후에 《사랑했으므로 幸福하였네라》(중앙출판공사, 1967) 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부수인 25,000부를 찍어냈다.
문제는 그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점. 반면 이영도는 21세에 남편을 잃고 외동딸을 홀로 키우고 있던 과부였다. 다만, 두 사람은 현실의 만남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치환 아내는 이 이야기가 퍼졌는데도, 20년동안 꾹 참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영도는 위에 나온 책 판매수익을 모두 기부했다.
거제시에 청마기념관과 청마거리가 있고 통영시에 청마문학관이 있으며[5], 부산광역시 동구에는 '유치환 우체통'이라고 불리는 문화공간이 있을 정도로 고향에서는 확실히 스타 작가 대접을 받는 분.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현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1967년 2월 13일에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부산시[6] 동구 수정동에서 시내버스에 치였고, 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끝내 숨지고 말았다.
묘소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에덴공원에 있었으며 이 까닭에 에덴공원에 청마 시비가 있기도 하나, 현재는 유씨 집성촌이 있는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로 이장하였다. 단독 묘역이 아니라 유씨 공동묘지 같은 곳이라 잘 공개되지 않지만, 가끔 열리는 때 들어가 보면 그의 묘소 옆 멀지 않은 곳에 모친의 묘소가 있어, 그가 어머님을 위해 쓴 사모비도 읽을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친일파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된다는 것. 특히 1942년 2월 6일 자 만선일보에 기고한 친일성 산문이 2007년 10월 19일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태일 교수에 의해 발견되면서 기존의 애국 시인 이미지가 많이 퇴색되었다. 그나마 형 유치진이 백범 김구 주석으로부터 공개 비판을 받을 정도로 저명한(?) 친일파인 탓에 본인은 상대적으로 묻히는 편. 정상 참작의 여지조차 없는 친일파인 과 달리 그는 매우 전형적인, 친일과 애국적 행보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변절자 혹은 나약한 지식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객관적일 것이다.
잘한 것도, 옹호할 가치도 없지만 당시에는 '''조선 문학'''을 한다는 행위만으로도 목숨을 건 일이었음을 감안해야 하며, 그럼에도 현대와는 다르게 당대의 몇 안되는 지식인으로서 떳떳치 못한 행위를 했다는 것 역시 생각해야 한다.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생기'가 출제되었다

3. 작품


[1] 토류계 대사성공파 26세 '''치(致)''' 해(海) 항렬.[2] 진주 류씨 집성촌이다.[3] 이 시기 제자였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디 경치 좋은 곳에 올라가 뒷짐을 지고 있다가 유치환 시인이 즉석에서 시를 짓기 시작해 그걸 받아 적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4] 같은 시기에 이 학교의 교감을 지내고 있던 사람은 마에스트로 금난새의 부친이자 경남 지역에서 음악교사를 했던 작곡가 금수현 선생이다. 두 전설이 나란히 교장과 교감을 하고 있었던 셈.[5] 거제시통영시가 청마의 출생지 인정 여부를 놓고 법정싸움까지 벌이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통영의 청마문학관에서는 문학답사 온 대학생들에게 거제의 청마기념관을 '''가짜'''라고 공격하기도 했다.[6] 당시 부산시는 직할시로 승격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부산직할시'로 불린 것도 아니었다. 경상남도에서 분리되어 정부 직할이 되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1963년부터 1981년까지의 이 과도기는 정확하게 표기하자면 '(정부 직할) 부산시'라고 하는 것이 맞다. ('정부 직할'은 생략 가능하므로 괄호 표기를 한 것이다.) 부산직할시로 개칭(동년 7월 1일에 직할시로 '승격'된 인천시, 대구시와 달리 부산은 이미 직할시였으므로 '개칭'이 맞다.)된 공식 일자는 1981년 4월 4일이다. 그러나 현재 부산광역시에서는, 그 과도기 당시에도 '부산직할시'라는 표현이 언론 등에서 비공식적으로 쓰였던 바가 있었던 점을 근거로 '부산직할시'의 역사를 1981년이 아닌 1963년부터로 잡고 있다. 실제로 부산교통공사의 전신인 부산직할시지하철건설본부도 1981년 1월 1일에 출범하였는데 당시는 (정부 직할) 부산시였다. 즉 '부산직할시'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명칭을 썼다는 사실을 통하여, 부산시에서 이미 그 과도기에도 계속 부산직할시 명칭을 써왔으며 정부에서도 당시에 개칭 계획을 염두에 두고 부산직할시 명칭을 허가해주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