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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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抗
(226 ~ 274)


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정치가 겸 장군. 는 유절(幼節).
육손의 차남. 태어날 당시 아버지 육손의 나이가 이미 마흔 넷으로 거의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에 비견될 정도의 늦둥이였다. 어머니는 손책의 딸 손씨. 손책에게는 외손자가 된다. 실제로 정사 삼국지에서도 '''육항은 손책의 외손자'''라고 못박아뒀다. 다만 육항의 외조모가 대교일지 아닐지를 두고 가끔 설왕설래하는데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손책은 대교를 납치하여 아내가 아닌 첩으로 삼았고, 납치혼 1년 후 요절하였다.
아내는 손화의 정실부인 장비(張妃)의 여동생. 즉 장소의 두 손녀가 각기 손화와 육항에게 시집 간 것. 장비 자매의 어머니는 제갈근의 딸이므로, 육항은 제갈근의 손녀사위가 된다.

2. 생애


육연(陸延)은 요절했기 때문에 육손이 죽고 난 뒤 그 뒤를 이어 건무교위가 되었다. 당시 손화손패가 태자 자리를 다투던 와중 육손이 손화를 편들다 손권의 의심을 사 분사한 직후라 신변이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는데, 상주 자리에서조차 육손에게 붙은 혐의 20여가지를 힐문받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 힐문에 동요 없이 침착한 태도로 변명해 손권의 의심을 가라앉혔으며, 태자문제가 매듭지어진 뒤 임지에서 요양을 위해 건업에 돌아오자 손권은 그를 붙들고 울면서 '지난날 짐은 중상모략을 믿고 그대 부친의 신의를 저버리고 말았다. 경에게 의심을 품은 일도 실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바, 그간 책망했던 서찰들을 모두 불태워 없던 일로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
246년에 육항은 입절중랑장으로 승진하여 제갈각을 대신해서 시상에 주둔한다. 제갈각은 시상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제갈각이 떠난 이후에 시상은 "매우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임지에 도착한 육항은 모든 성벽을 다시 보수하고 집과 담장을 수리하며 오두막집에 살면서도 과일 나무와 뽕나무조차 훼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훗날 제갈각이 시상을 방문했을 때 모든 것이 달라보여서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257년에는 제갈탄의 반란과 연계하여 수춘에서 전공을 올렸고, 259년에는 형주에 주둔하여 군사와 관련된 일을 관장한다. 그 후로 분위장군, 정북장군, 진군장군, 진군대장군 등 고위 장군직을 역임하며 주적과 함께 형주 일대를 방위했다.[2] 263년, 동오의 동맹국인 촉한이 멸망하자 동오는 264년에 촉한과 동맹관계였던 것을 구실삼아 보협을 시켜 원군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영안을 공격했지만 나헌에게 패퇴당했다. 이에 동오는 성만, 유평 등과 함께 육항을 원군으로 3만 군사를 이끌고 보협을 지원하게 하였지만, 나헌의 방어를 6개월 간 뚫지 못하였고, 이 후 사마소가 곧 형주에 주둔하던 호열을 원군으로 삼아 보냈기 때문에 영안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이로서 형주는 기준에 방어하던 북쪽과 동시에 익주 방향인 서쪽을 동시에 방어해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 되었고 육항은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에 임명되어 이를 막게 되었다. 270년에 시적(주적)이 죽자 시적의 군진 영역까지 맡아, 형주 방위선을 모두 총괄하게 되었다.
272년에 서릉(적벽대전 당시의 이릉)독 보천이 반역해 서진에 투항했다. 당시 서릉이 넘어가면 진나라는 익주에서 삼협을 거쳐 서릉을 통해 형주 북부의 양번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여 오나라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육항은 오언, 좌혁, 채공과 함께 급히 군사를 이끌고 서릉으로 향했다.[3] 일찍이 육항은 서릉의 지리를 익혀두었기 때문에 쉽게 함락하기 어려운 것을 간파하고, 본격적인 공성전을 벌이는 대신 그 포위망에서 또다시 바깥쪽을 향한 방어선을 구축해 성 주변에 이중으로 성벽을 쌓게 해서 안으로는 반군, 밖으로는 진의 원군에 대비하게 했다.
얼마나 서둘러 재촉하였던지 병사와 백성들이 대단히 고된 작업이라 고통스러워했고 또한 휘하 장수들도 반발하여 진나라의 구원병이 오기전에 보천을 속전속결로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니 백성들과 군사들을 굳이 괴롭히는 이런 포위망은 필요없다고 하자 육항은 서릉은 지세가 견고하고 식량 또한 충분하며 방비는 육항 본인이 갖춘 것이라 바로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어 그 전에 북쪽의 구원병이 틀림없이 도달할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뇌담이 간곡히 청하자 단 한번 공격을 허락했는데, 맹공을 퍼부어도 낙성되지 않자 이후로 휘하 장수들은 아무 불평없이 육항의 명에 따르게 되었다.
곧이어 육항의 예측대로 진의 거기장군 도독 양호가 구원병으로 도착했으나 육항의 방어태세가 워낙 튼튼했던 탓에 감히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해 공략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계책을 써서 육항을 속이려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육항이 적절하게 대응했기에 결국 양호는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양호가 강릉을 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제장들이 강릉 수비를 위해 철수를 제안했지만 이때도 '강릉은 식량이 넉넉하고 방비가 굳건해 쉽게 떨어지지 않으며, 설령 점령해도 적이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반면 서릉은 빼앗기면 이남의 이민족들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지니 강릉을 버려서라도 서릉을 차지해야 한다.'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양호는 물길을 이용해 군량을 나르려 했으나, 육항은 일찍이 이를 예상하고 둑을 무너뜨려 물길을 막아놓았기 때문에 진(晉)군은 군량 수송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양호에 이어 형주자사 양조까지 구원에 나서자 투항하는 장수까지 생길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혀 동요함 없이 이중 포위망을 유지해, 결국 진군은 구원을 단념하고 물러났다. 물러나는 진군을 들이쳐 전과를 거둔 다음 서릉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마침내 낙성에 성공했다. 주모자인 보천과 그 일족을 비롯한 반란의 주역들은 참했으나, 그 이하 장졸들은 모두 사면해 주었고, 군공을 세웠음에도 이를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항을 따르고 존경하는 이들은 전보다 더욱 늘게 되었다.
273년에 대사마 겸 형주목을 맡아 오의 군권을 한데 통솔하게 되었지만 274년에 향년 48세로 병사했다. 죽기 전에 표를 올려 국경 방비와 모병에 대한 의견을 내놓아 서릉과 건평의 방비를 착실히 하며 국정을 평안하게 할 것을 상주했다.
손성의《진양추》, 습착치의《한진춘추》등에는 양호와 나눈 우의가 서술되어 있어, 서로 적의 입장이면서도 술과 약을 주고받을 정도의 교분을 유지했다고 나온다. 진수는 육항을 평해 '그 몸을 잘 다스려 육손의 유풍을 계승했다. 행동에서 약간 뒤떨어지는 면은 있었으나 훌륭하게 가업을 다했다'라고 적었다. 양호와의 우의관계에 대해선 양호 항목 참고.[4]
삼국지연의에서는 120회 때 손호가 육항을 의심해 좌천시켜 병권을 빼앗아 손기에게 주고, 그 때문에 실의 속에서 병사했다고 언급되나[5] 정사에는 손호가 힐문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대신 여러 상주문을 지어 올렸으나 '손호는 듣지 않았다.'라는 구절만 그 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건 그것대로 안습.
사실 손호 입장에서는 육항을 좌천할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오는 호족들의 입김이 강한 지역이고, 그중에서도 으뜸이며 군권까지 가진 육항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손호는 육항이 본격적으로 군권을 총괄하기 이전인 260년대 후반에도 그를 경계했었다는 언급이 있다. 손호가 육개를 마음같아서는 죽여버리고 싶은데, 육항 때문에 그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들로 육안, 육경, 육현, 육기, 육운, 육탐이 있는데 육운과 육경은 진 침공시 종군해 전사했고, 육기와 육운은 장화에게 발탁되어 서진 정권에 출사했는데, 둘 다 뛰어난 문재를 지녀 망나니로 이름났던 주처[6]가 개심했을 때 나이가 더 어렸던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 둘도 훗날 팔왕의 난에 휘말려 일가가 멸족당했기 때문에 육손 일문은 후손이 끊어졌다고 한다. 다만 사람들을 이를 두고 앞서 육항이 보천을 죽일 때 어린 아이까지 죽였는데 이 때 "육항의 후세들은 필히 그 재앙을 만날 것이다"[7]라고 한 것이 결국에 육운이 죽게 되고 육씨의 세가족이 후세가 없어지며 사실이 되었다고 말한다.

3. 평가


연의 기준으로는 양호와 대치한 것만 나오고, 정작 중요한 서릉 전투 때의 활약 등이 나오지 않아, 아버지 잘 둔 덕분에 '''오나라 최후의 명장''' 소리 주워먹은 느낌이 강하게 난다는 의견도 있다. 더구나 나헌이 촉나라의 마지막 명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나헌과의 전투에서 실패하고 물러난 육항의 능력에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서릉 전투 때 보여준 그의 공성 능력은 뛰어난 수준이다. 더구나 오나라가 망국의 길을 걷는 와중에 보기 드물게 압도적 대국인 진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방어를 해낸 장군임은 감안하면 오나라 말기의 최후의 명장이라는 칭호와 같은 전장에서 딱 50년 전에 유비의 대공세를 막아낸 아버지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진서 하충전을 보면 하충이 '육항이 존재하면 오나라가 존재하고 육항이 죽으면 오나라는 멸망한다'고 했으며 진나라 양호도 육항이 죽은 뒤에야 오나라를 칠 기회하고 했다.
특히 서릉 전투는 육손이 오나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유비를 격파하고 동오를 지켜낸 바로 그 장소에서, 휘하장수들이 반대했으나 그들을 억누르며 자신의 전략을 관철하여 승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적군의 기책을 적절한 대책으로 막아냈다는 것조차 같다. 제갈각이 망쳐놓은 시상을 복구하는 등 내정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아버지처럼 외지에서 국경을 지키며 황제에게 국정에 대한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하필이면 당시 황제가 폭군 손호여서 받아들이지 않아 문제였기에 그가 죽고 6년 후 오나라의 멸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실 독발수기능의 난 때문에 6년이나 더 걸린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4. 미디어 믹스



4.1.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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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삼국지
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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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13
삼국지 13 PK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선 극 후반부에 매우 드문 '''2세대 최강 2위'''의 무장으로 등장하며[8] 양호와 견줘볼 때 통솔력, 지력이 더 높고 무력, 정치력, 매력은 약간 떨어진다. 하지만 극초반에는 아버지 덕에 양호를 능가하는 능력치로 나오기도 했다. 단 수명은 아버지보다 낮은 50대 자연사로 책정되었다. 50대로 자연사 해서 나이 든 얼굴으로 나온다.(실제로는 40대에 사망) 그런데 아버지가 젊게 나온 이미지 때문에 아버지보다 늙어 보이는 편이다. 삼국지 3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일단 육항이 나올 시점은 거의 극 후반부이란 점을 알아두면 '''오나라는 거의 장수진이 안습하고 약한 무장들이 많은 시대'''라는 단점이 생긴다. 육항 자체가 좋은 무장이나 무력이 떨어지고 강유, 등애에 비해 약한 편이고, 위나라에 등애 말고 양호, 두예, 왕준, 왕기, 문앙, 문흠같은 대오전선의 무장들이 있는지라 좀 까다로운 편.
별개지만, 초기 시리즈에서는 텁석부리 일러스트였지만 갈수록 육손을 닮아 미남자로 변해가는 중. 그런데 위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 삼국지 12에서는 그다지 특징이 없는 일러스트를 갖고 나왔다.
삼국지 3에서는 '''수전지휘 98'''로 범용 얼굴을 달고 나오는 주제에 단 셋 뿐인 최후의 90대 능력치 보유자이다.[9] 육군지휘 65/'''수군지휘 98'''/무력77/지력 77/정치력 69/매력 87에 야망 6, 운 7, 냉정 9, 용맹 8을 달고 등장한다. 수전지휘는 주유(수전지휘 100), 육손(수전지휘 99)에 이은 전체 3위. 255년에 육손의 아들로 출생한다. 일단 다른 능력치들이 그냥저냥인데 수전지휘가 저렇다 보니 많은 병력을 손에 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민 수준의 육전지휘를 달고 있어도 저 수전지휘 덕에 장군이 되기 위한 요구매력은 고작 39에 불과하다. 그런데 매력까지 87. 극후반 오나라의 가장 중요한 인적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매력이 높으니 육전지휘를 올리는 데에 주력해서 총대장/태수형 무장으로 잘 활용하자.
삼국지 4에서는 범용 얼굴에서 수염이 생긴 전용 얼굴으로 나온다. 특기는 아버지와 동일하며 능력치는 통솔력 94/무력 72/지력 80/정치력 72/매력 85. 근데 나오려면 249년에 나오기 때문에 오나라가 거의 승리하거나 패배할 쯤에 나온다. 거기다가 수명이 1로 설정되어서 비교적 빨리 죽는다.
삼국지 5에서는 시나리오 7의 시작으로부터 무려 15년이 지난 249년에서야 등장하며, 능력치는 무력 78/지력 94/정치력 84/매력 87에 보유진형은 추행/학익/장사/수진으로, 오나라 장수 중 드물게 추행진을 가지고 있다. 습득 특기는 화계/화시/수계/수신/침착/반계로 조금 잉여지만 군사로 시작부터 2만 군사를 거느릴 수 있기 때문에 라이벌 양호에 우위를 점한다.[10] 양호와 서로 다른 군주를 모시고 있고 서로 인접한 도시에 위치하고 있을 시 두 사람간의 이벤트가 3개월 연속으로 발생한다. 삼국지 시리즈에서 보기 드문 이벤트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삼국지 6에서는 통솔력 95/무력 69/지력 94/정치력 87/매력 86에 꿈이 아버지처럼 왕좌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러더니 성장 특성이 만성이라서 빨리 오나라가 육항 바라기보다는 통일하는 게 급선무이다.
삼국지 8에서의 능력치는 무력 70/지력 88/정치력 85/매력 87이고 특기로 축성, 경비, 반계, 보병, 수군, 정찰을, 전법으로 돌격3, 기습2, 창진3, 질풍3, 격류4, 열화3, 공성2를 보유하고 있다. 양호와 비교한다면 무력이 높지만, 난격과 교란을 가진 양호보다 전투에서의 능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다.
삼국지 9에서는 능력치가 '''통솔력 90'''/무력 55/'''지력 92'''/정치력 85이라는 무력만 안습한 흠좀무한 능력치을 달고 있었고, 분투, 연사, 몽충, 누선, 투함, 투석, 조영, 파괴, 혼란, 덫, 고무를 가지고 있어서 심영, 장제, 노숙, 손진, 도황, 도준, 보천, 종리비과 같이 오나라의 희망격인 장군이다. 단 89. 88로 무력까지 강한 강유, 등애에 비하면 좀 딸린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전작에 비해 지력이 80대 중후반으로 떨어졌지만, 통솔력 91/무력 62/지력 89/정치력 83/매력 86에 특기가 16개다.(기술, 보수, 치안, 화시, 일제, 진정, 고무, 은밀, 저지, 유인, 항변, 반박, 논파, 군사, 명사, 제독) 특기들도 무력에 의존하는 보수, 저지를 빼면 효용도가 높은 것들이다. 다른 거 볼 거 없이 통솔력 91에 군사특기 보유자인것만 해도 그냥 사기. 총합 411은 전체 14위로 414로, 11위인 라이벌 양호에겐 한끝 차이로 밀린다. 역사 이벤트로 양호와 육항의 우정 이벤트가 있으며 이어서 좌천 이벤트도 볼 수 있다. 조건은 이쪽을 참조.
삼국지 11에서는 정묘라는 무의미한 특기를 들고 있으니 빨리 지략계 특기로 바꿔주면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무장이다. 능력치는 통솔력 91/무력 63/지력 87/정치력 85/매력 87에 병과적성이 창병 A/극병 A/노병 S/기병 C/병기 S/수군 S. 후반 시나리오에서는 정봉, 심영과 더불어 쓸만한 장수이다.
삼국지 DS 2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94/무력 67/지력 87/정치력 85/매력 85에 특기로는 외교, 장보, 인재, 제조, 화공, 궁장, 수장, 낙석, 동토, 연환, 수복, 매성, 허보, 진화, 화시, 화구, 철벽, 수습을 가지고 있는 A+급 무장이다.
삼국지 12에서는 일러스트는 백마를 탄 채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키는 장면으로 별 특징이 없지만 능력치는 삭제된 매력을 제외하면 11과 같다. 쓸 만한 전법인 궁군강사가 있기 때문에 상당히 좋은 무장이다. 물론 궁군강사를 가진 무장들 중에서 무력이 가장 낮기는 하나 통솔력과 지력은 가장 높고, 어차피 전투력은 통솔력으로 결정되기에 큰 단점도 아니다. 의외로 내정 특기도 수집과 변설을 제외하면 다 가지고 있는 숨겨진 먼치킨. 모든 내정 특기를 보유한 제갈량 다음으로 많다. 다만 이 게임의 시나리오가 PK버전까지 포함해도 가장 느린 시나리오가 223년 오로침공전이라는 걸 감안하면 쓸 기회가 있어야지....
삼국지 13에서 오리지널에서는 전작 일러스트를 우려먹다가 PK에서 변경되었다. PK 일러스트에서는 육손의 아들이란 증거로 '''육손의 투구'''를 쓴다. 자세히 보면 전작과는 달리 턱수염을 달고 있는데다가 손바닥을 펼치고 있다. 실망스러웠던 전작의 일러스트와는 달리 오나라 최후의 명장이자 사령관으로써의 포스가 느껴지는 일러스트로 호평을 받았다. 양호와 같이 고위직 일러스트가 없다는 것이 살짝 아쉬운 점.
능력치는 11탄, 12탄과 동일하고 전법은 6포인트를 소비해 아군 궁병에게 전방위사격과 연사를 걸어주고 사기를 올려주는 맹사지휘라는 S급 전법이다. 맹사지휘는 6 포인트지만 본작 최강 전법 중 하나다. 궁병 위주로 출전시켜 주고 맹사지휘 한 번 써 주면 적군이 추풍낙엽처럼 오다가 쓰러진다. 덕분에 궁병을 좋아하는 유저들은 신무장에게 달아주거나, 에디터로 전법을 변경하거나 해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전병격까지 달아주면 적들이 아무리 많아도 다 처바른다'''. 전작의 궁군강사도 그렇고 은근슬쩍 궁병의 스페셜리스트 이미지를 코에이에서 부여하고 있는 듯. 중신특성도 궁술조련이며, 궁병 적성도 당연히 S다.
초기 통솔력이 91이기에 바로 중신 시켜줘도 임무장이 2장이라는 점도 상당한 메리트 중 하나. 창병 적성도 A기에 전법을 포기한다면 창병 출진도 가능은 하지만, 맹사지휘가 작중 최고의 전법 중 하나임을 감안하면 열심히 활질 시키자. 전투 특기도 신속 6, 분전 2, 공성 6, 견수 4, 수영 7, 귀모 2로 사령관형 무장으로써는 가질 건 다 가지고 있다. 내정에서도 상업 6, 훈련 8, 순찰 5, 설파 8, 교섭 5, 언변 7 등 고루 좋은 특기를 가졌다. 전수특기는 훈련이다. 삼국지 13도 마지막 시나리오가 214년 익주평정 시나리오다 보니 영웅집결이 아닌 이상에야 육항의 얼굴 보기가 정말 힘들었지만, PK판에서 출사표, 강유북벌같은 후기 시나리오들이 추가되면서 사실 시나리오에서도 직접 플레이 할 수 있게 되었다. 통솔력도 높고 전법도 좋다보니 전장에서도 무섭고, 내정에서도 못 하는 게 없다. 이번 작품에서는 아버지보다도 전장에서 더 활약하기 좋다. 육손의 열화계도 S급 전법이기는 하지만 맹사지휘가 워낙에 좋은 전법이기 때문이다.
삼국지 14에서는 전작의 PK 일러스트를 재활용했으며 능력치는 통솔력 91, 무력 63, 지력 87, 정치력 85, 매력 87이다. 개성은 독장, 수전, 일심, 봉살, 개수, 주의는 왕도, 정책은 시설개발 Lv 5, 진형은 어린, 방원, 학익, 정란, 전법은 연노, 격려, 경파, 정란, 구축, 시람, 친애무장은 양호, 오언, 혐오무장은 없다. 아버지인 육손과 진형이 완전 똑같이 나왔다.

4.2. 진삼국무쌍 시리즈


여기서는 클론 무장. 그러나 후기 오나라에 내놓을 인물이 워낙 없어서인지 (...) 그럭저럭 자주 나온다. 후반기 무장 치고 이름값 덕인지 진삼국무쌍 3에서 호위병 디폴트 네임중 하나로 이름을 알린뒤 조용히 사라졌다가 후반기 시나리오가 편입된 6편부터 본격적으로 '''클론무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7편 진나라 스토리의 IF 루트에서는 건업 전투에서[11] 전체적인 작전을 지시하고, 스테이지 보스인 손휴에게로 가는 길을 막는 문지기 역할을 하는 데다가 강화까지 하고 나오는 등 클론 무장 답지 않게 나름대로의 비중이 있다. 오나라 최후의 명장이란 타이틀 덕분에 나름 버프를 받은 느낌.
플레이어와 만날 때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육항: 난 오의 명운을 짊어졌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단 말이다.

사마소: 넌 크게 착각하고 있어. 나라는 혼자 짊어질만한게 아냐.

가충: 수고가 많군, 하지만...짊어지는 사람이 한명뿐인 시점에서 이미 끝났어.

육항의 무쌍무장화를 바라는 팬들도 있지만, 육항이 나오면 육손은 졸지에 애아빠가 되므로 시리즈에 정식 참가할 가능성은 거의 0에 수렴한다는 안쓰러운 점이 있다. 외모도 외모지만 현재 육손의 컨셉이 주유, 노숙, 여몽을 이어 다음 세대를 이끌 젊은 기대주란 컨셉이라서 자식을 내놓기가 힘들다.
예외 케이스로 유비나 유선의 경우도 있지만 유비는 원래 중년 캐릭터로 시작했고 한껏 젊어진 지금도 성우의 연기나 캐릭터성에선 중후한 면을 엿볼수 있다. 근데 육손은 성우부터 컨셉, 디자인까지 일관되게 차세대 유망주다. 육항이 나오려면 육손의 컨셉이 수정되던가 전국무쌍 시리즈타케나카 한베에,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처럼 쇼타 캐릭터로 나오는 방법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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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모바일 게임인 진삼국무쌍 BLAST에서 추가 무장으로 참전. 대부분의 유저들이 예상한대로 쇼타다. 복장은 아버지인 육손을 의식한 듯 육손 6편을 적절히 어레인지 한 듯한 복장을 들고 나왔다. 아버지 무기인 비연검을 EX무기로 가져왔다만 정작 비연검 자체는 클론무장들의 무기로 돌려막기로 써진 비운의 무기라 영 폼이 안난다.(...)

4.3.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서는 히카루의 바둑(고스트 바둑왕)의 신도우 히카루로 나온다. 전투외편 3-2에서 아버지 육손이궁의 변으로 인해 사망한 후 다음 컷에 등장한다.
그 후 별다른 활약은 없다가 나헌과의 전투에 개입하는 것으로 잠깐 등장, 이후 서릉전투에서 양호와 맞붙는 것으로 재등장한다.
서릉 전투에서 삼국지에서는 드물게 '''본격적인 공성전'''으로 대승하기 때문에 작가는 그를 삼국지 후반기 '''최고의 명장'''으로 꼽는다고 크게 칭찬한다.[12] 카이사르알레시아 공방전과 유사한 작전을 폈다고 묘사했다.
부하의 배신 이후 빠른 판단으로 서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보천의 일족을 멸하는 것까지 나온다. 이후 양호와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싸움이 아닌 마음으로써 상대방을 공략하는 모습에서 이 둘의 묘한 경쟁관계와 긴장감을 풀어내었다. 그러다 시름시름 앓는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병사하였고, 양호가 이를 오를 공격할 찬스로 여긴다.

4.4.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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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오나라 배경 연의가 없어 연의 비중은 없다. 조조전 온라인 초창기 때 엠피공격의 사기성을 보여줬던 장수. 오랫동안 버려져있다가 리밸런싱되었지만 여전히 거의 보이지 않는다. 희한하게 말더듬 캐릭터를 등애한테서 뺏아갔다.
[1]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이 일화에서 손권의 옹졸한 면을 보인다고 여긴다. 하지만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면 육항이 훗날 그 편지들이 두고두고 약점이 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육항이 신하들을 마구 죽인 손호 시절에도 정치적으로 숙청되거나 좌천되는 일이 없었는데, 만약 저 편지들이 그대로 있었다면 손호가 어떻게든 핑계삼아 제거해 버렸을 수도 있다.[2] 관등으로는 주적의 아래에 있었다.[3] 보천은 서릉은 아버지 보즐, 형 보협에 이어 3대째 이어받은 땅으로 집안의 영지 같은 곳으로 여긴 모양이다. 그런 상황에서 별 이유도 없이 손호 같은 폭군이 딴 곳으로 옮기라고 했으니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손호 입장에선 유력호족 보씨 가문을 견제하거나 촉한의 멸망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해진 이릉을 수비하는데 보천이 못 미더웠을 수도 있다.[4] 하지만 저 우의관계를 진지하게 믿으면 안 된다. 서로를 높이 평가했던 정도만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이들은 당시 심리전을 벌이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5] 삼국지 10에서는 이벤트로도 있지만 최후반에나 등장하므로 보기 어렵다.[6] 석정 전투에서 육손과 함께 조휴를 물리친 주방의 아들로 조문석개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다.[7] 다른 시대 사람들이 이 비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내용을 찾을 수 있고, 실제로도 자세히 보면 이러한 비판이 부당한 면이 없잖아 있다. 왜냐하면 이 때 황제는 손호였고, 반란 혐의가 보이는 자는 물론, 의심되는 자도 거리낌없이 삼족을 멸했다. 즉, 비판하려는 대상은 손호가 우선적으로 되어야 한다. 오히려 반역에 직접 관련된 보천 일가를 제외한 장수들은 사면한 것을 보면, 이것은 육항이 희생을 최소화시키려 노력한 것이라 할 수 있다.[8] 1위는 누구나 다 알고있는 소패왕이고, 손권은 초창기에 능력치가 매우 높았으나 시리즈가 갈수록 능력치가 점점 떨어져 3위 정도의 순위를 차지한다.[9] 다른 하나는 하후현(정치력 92)과 사마염(육전지휘 90)이다.[10] 양호는 능력치가 무력 83/지력 82/정치력 80/매력 86으로 좀 어정쩡한 장수가 되어버렸다.[11] 사마사가 살아남고, 이후 사마사가 촉을 멸망시키고 동시에 사마소가 오를 역사기록보다 더 빨리 멸망시킨가는 내용이다. 즉 건업 전투는 오나라의 최종 전투인셈. 하지만 오가 멸망해도 정봉, 연사가 잔당으로 남아 촉의 잔당인 강유 등과 연합하여 사마사에게 계속 대항한다.[12] 부연 설명으로는, 삼국지 내에서 공성에 성공한 예는 대부분 기세를 몰아서 함락하는, 한마디로 공성 이전에 이미 기세싸움에서 완전히 우위를 잡고 있는 시점에서 성공시키지만, 서릉 전투는 반대로 기세 싸움에서 우위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공성을 성공한 경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