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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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예비역 육군 대장), 관료.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참모차장으로 진압군을 지휘했으나 우유부단하며 반란군에 유화적인 태도로 진압에 실패했고, 이후 반란군의 정권인 5공화국에서 국방부 장관, 합동참모의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했다.
2. 초기 생애
1926년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태어났다. 목포 문태고등학교(1회)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9기)에 입교, 1950년 1월 소위로 육군에 임관했다. 이후 육사 9기 선두주자 중 1명[1] 으로 1군사령부 인사처장, 주월사령부 참모장, 5사단장, 인사참모부장을 거쳐 1977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해 3군단장에 임명되었다.
3군단장 재직 중이던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다. 이후 공석이 된 정보부장 자리에 당시 육군참모차장 이희성이 임시 직무 대리로 차출되고, 윤성민이 후임 참모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부임한지 한 달 정도 된 12월 12일 밤, 전두환의 세력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며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12.12 군사반란이다.
3. 12.12 군사반란
육군 최고 지휘관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당한 상태에서 지휘 계통 상 육군본부 2인자인 참모차장 윤성민이 반란 진압 최고 지휘관이 되었다. 윤성민은 우유부단하고 반란군에 유화적인 태도로 반란 진압에 실패해 군사 정권의 재림을 초래했다.
당일 밤, 정승화 총장이 보안사령관 전두환 휘하인 허삼수 대령(하나회 17기)과 우경윤 대령(하나회 13기)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보고를 받게 된다. 상황 분석 후 전두환의 반란임이 명확해지자, 총장 납치 후 자동으로 총장 대행이 된 윤성민이 진압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다. 급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윤성민은 육군 지휘부를 비상 소집하는 한편, 전방의 지휘를 맡는 3군사령관 이건영, 1군사령관 김학원과 연락해 상황을 알리고, 수도권 부대 지휘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 등과 더불어 반란군을 진압할 방책을 모색하였다. 또한 모든 부대에 부대 장악 및 출동 통제 지시와 더불어 본인의 육성으로만 작전 명령이 내려질 것임을 강조하고, 반란군 지휘소에 가있던 박준병의 20사단에 권익검 소장 등을 보내 부대 출동을 막는 등 초반의 대처는 적절한 편이었다.
이 때, 진압군 내에서는 반란은 진압해야 한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방법에 따른 의견 차이가 있었다. 기회를 틈탄 북한의 남침 위협이 있는 상태에서 내전을 벌일 수 없으니 최대한 유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의견과,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병력을 재빠르게 동원하여 반란군을 진압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초반에는 윤성민 등 지휘부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시간이 경과하자 유혈 사태를 최대한 피하자는 쪽으로 점점 기울어갔다. 마지막까지 강경 진압을 주장한 것은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안종훈 군수참모부장 등의 몇 안되는 일부 장성들뿐이었다.
이에는 병력 동원 허가를 내릴 수 있는 국방부 장관 노재현의 적전도피도 일조했다. 옆 공관인 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울리자 지휘부에 연락도 없이 일단 가족과 함께 도주하는가 하면, 이후 진압군 지휘부 벙커에 나타나서도 진압에 대한 명확한 지시조차 내리지 않고 반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혼자 주한미군 지휘부 벙커로 이동했다. 거기다 노재현과 주한미군 지휘부는 북한의 남침 방지가 우선이라며 전방 병력의 이동을 금지했고 이에 진압군의 가용 병력은 미군의 작전 통제를 받지 않는 특전사 여단들과 수경사 병력에 국한되게 되었다. 이 조치는, 윤성민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는데, 장관이 금지령을 내려놔 선배들인 야전군사령관(3군사령관 7기 이건영, 1군사령관 5기 김학원)이 병력 동원을 주저하게 되었고 진압군 지휘관인 윤성민 또한 선배들의 기조를 무시하고 동원시킬만한 결단력이 없었다. 사생결단이었던 반란군은 최전방 병력마저 동원했다.
전두환의 충복 박희도 1공수특전여단장(하나회 12기)이 육군본부 점령을 위해 1공수를 이끌고 서울로 진입하려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병력이 없었던 윤성민 등 지휘부는 일단 수도경비사령부로 이동했다. 당시 상황은 사전에 수도권 실병력 지휘관을 하나회로 깔아놓은 반란군에 매우 유리했다. 반란군은 서울에 동원 가능한 특전사 4개 여단 중 1공수(여단장 박희도, 하나회 12기), 3공수(여단장 최세창, 하나회 13기), 5공수(여단장 장기오, 하나회 12기)를 이미 장악했다. 또한 30경비단(단장 장세동, 하나회 16기), 33경비단(단장 김진영, 하나회 17기), 수경사 헌병단(단장 조홍, 하나회 13기)이 반란에 가담함으로써 사령관 장태완의 의중에 반해 수경사령부의 실병력 대부분이 이탈했다. 이에 더불어 유사시 수경사령부에 배속 가능한 서울 근접 3개 사단 (수기사/20사단/26사단) 중 20사단은 사단장 박준병(하나회 12기)이 반란군에 동조 중이었다. 남은 26사단과 수기사단은 보안사 조직을 이용한 반란군의 배후 공작[2] 으로 사실상 출동을 포기한 상태였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하나회와 연줄이 없는 갑종 출신 윤흥기 여단장의 9공수였다. 윤성민의 지시를 받아 9공수가 출동하자, 반란군 지휘부는 위기에 빠졌다. 반란군이 출동시킨 1공수보다 9공수가 서울에 더 먼저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윤성민은 반란군 지휘부의 공작에 넘어가 서로 병력을 동원하지 않고 사태를 유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신사 협정을 반란군과 맺은 뒤, 서울을 향해 출동하고 있던 9공수에게 회군 명령을 내린다. 신사 협정 자체는 당연히 기만술이었고, 9공수가 회군할 때 1공수는 계속 출동해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다. 반란군은 한술 더떠 최전방 병력인 9사단(사단장 노태우, 하나회 11기)마저 서울로 동원하며 승기를 굳혔다.
서울에 반란군 병력들이 차곡차곡 진주하는 가운데, 진압군은 사실상 동원 가능한 병력이 없어 승기는 반란군으로 넘어갔고 진압군은 체념 상태에 빠졌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부하인 최세창의 3공수 특전사 반란부대에 체포되었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경우 아직 소수의 전차와 전투부대가 남아는 있었지만 하나회의 도청, 적수가 너무 많음, 누가 어디에서 배신할지 몰라서 포기하고 자기 부하들에게 체포되면서 무력화 되었다. 13일 새벽 윤성민은 전두환의 명을 받은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하나회 21기)의 헌병대에게 진압군 지휘부 전원이 무장해제되었을 때 같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되었다. 이렇게 12.12 군사반란은 반란군의 승리로 끝났고 향후 최소 8년, 최대 14년까지 군사정권은 연장되었다.
4. 12.12 군사반란 이후
서빙고 분실로 연행된 윤성민은 놀랍게도 곧 풀려났다. 반란군은 뒷수습을 위해 진압군 지휘부 중 몇 명을 포섭해 화합의 제스쳐를 보이려 했다.[3][4] 대표적으로 진압군에서 9기 선두주자 윤성민과 문홍구 둘 중 1명을 회유해 강제 예편시킬 김학원 제1야전군사령관[5] 의 뒤를 잇게 하려 했다. 둘 중 윤성민이 선택된것은 영남 출신이 주류[6] 였던 것 때문에 호남 출신임으로 지역 안배 생색을 낼 수 있다는 점과 반란 진압 중 보여준 유화적인 태도가 반영되었다[7] . 윤성민은 이후 1군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대장으로 진급했고 이후 합동참모의장으로 영전했으며,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전두환 정권에서 최장수 국방부 장관을 지내며 실권[8] 은 크지 않았다 한들 사실상 전두환 신군부의 일원으로 행동했다.[9] 이후에도 한국석유개발공사 이사장, 대한방직협회장 등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우정해 여사, 딸 윤혜정·윤혜선씨, 사위 유석인 서울대 명예교수, 서성원(사업가)씨가 있다
5. 윤성민의 자기변호
윤성민은 훗날 인터뷰에서 본인은 패장으로서의 책임은 인정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발언했다. 그는 결정적 패인이었던 9공수 회군에 대해 노재현 국방장관, 김종환 합참의장,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10] 등이 전화해 9공수 출동을 말렸기 때문이며 공동 책임론을 제기했고, 당시 육군 지휘부 내에서는 유혈 사태를 회피하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주장했다. 또한, 노재현 장관이 주한미군 벙커로 자리를 옮겨가서 지휘에 지장이 많았으며, 26사단과 수기사단을 동원하려 했지만 노재현 장관과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끝내 동의해주지 않아서 동원하지 못했다 말했다. 또한, 본인은 책임을 지고 전역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1] 다른 1명은 12.12 군사반란 당시 합참본부장으로 이후 강제 예편 당한 문홍구 예비역 중장이다. 윤성민과 문홍구 모두 준장, 소장을 1차로 진급했으며, 차지철 밑에서 경호차장을 지냈던 문홍구가 군단장을 1년 먼저 나가 먼저 중장으로 진급했다. 반란군의 선택에 의해 두 선두 주자 중 윤성민이 살아남고 문홍구가 강제 예편당했다.[2] 수기사단장 손길남은 보안사의 만류 공작에 출동을 포기했고, 26사단장 배정도는 부대 보안부대장과 양주를 먹다가 골아 떯어졌다.[3] 제4공화국(드라마)에서 해당 장면이 나온다. 삐딱한 자세로 윤성민에게 호통을 치던 보안사 수사관이 “윤성민 차장님을 즉시 사령부로 모셔와라, 정중하게 모셔와라”라는 내부 방송을 듣자마자 "차장님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며 사과하는게 압권[4] 이후 윤성민이 노재현 국방장관과 하나회 수뇌부가 모인 사령부로 가서 "병 주고 약 주는 거냐"라고 하자 전두환이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밝아오는 새 날처럼 우리 새로운 마음으로 함께 일하십시다"라며 회유한다[5] 수도권 안보 및 정권 안보와 직결된 3군은 반란군의 유학성이 차지하는 한편, 동부전선 전방 병력이 대부분이라 사실상 역쿠데타를 도모할 수 없는 1군의 사령관을 주려 한 것이다.[6] 반란 이후 육군 수뇌부만 봐도 육군 대장급 6명 중 영남 4명, 충청 1명, 호남 1명이었다.[7] 드라마 제4공화국에선 이점이 반영되어 서빙고 분실로 잡혀간 윤성민이 풀려나서 전두환에게 불려가 1군사령관 직을 권유받고 영전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제5공화국에선 반란군에게 진압되고 허탈한 표정만을 짓는 씬을 끝으로 더이상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는다.[8] 합참의장직은 90년대 들어서야 실권이 생기며, 국방부 장관도 당시에는 실권이 그리 크지 않았다.[9] 녹화사업 또한 윤성민 국방장관 재임시기에 실행되었다.[10] 반란 이후 반란군이 신임 육군참모총장으로 추대했고 반란군의 정권 장악 작업, 대표적으로 5.18 강경진압에 협조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