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군인)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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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00> '''출생'''
1938년 7월 3일 (86세)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61년 ~ 1993년
'''임관'''
육사 17기
'''최종계급'''
대장
'''최종보직'''
육군 참모총장
'''주요보직'''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육군 수도방위사령관
한미연합사부사령관
1. 개요
2. 생애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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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 내란사범. 군 내 사조직 하나회의 주축 중 1명으로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다. 이후 장래에 육군참모총장이 될 것으로 확신되는 출세 가도에 올랐으나 비교적 강직한 성격과 5공/6공 세력의 암투로 2번이나 좌천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1991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으나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 일성인 하나회 해체 숙군 작업의 첫 대상이 되어 물러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홍산(洪山).

2. 생애


1938년 7월 3일 경상남도 통영군(현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출생하였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1]하고 1961년 육군사관학교 제17기로 임관하였으며 육군사관학교 제17기의 대표화랑[2][3]으로 졸업하여 장래가 촉망받는 장교였으며 허삼수, 허화평이 김진영과 동기다. 그러나 김진영은 군 내 사조직 하나회의 주축 멤버가 되었고 회장 전두환의 직계 심복 중 1명이 되었다. 김진영은 전두환의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시절 중대장이었고 전두환의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시절 그는 참모총장의 전속 부관이었으며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시절에는 작전 담당관으로서 하급자로서 같이 근무하며 전두환과 인연이 깊었다. 월남 파병 시절 전두환의 최고 충복이 되는 장세동을 전두환에게 소개해준 것도 김진영이었다. 1979년 대령 시절 수도경비사령부 소속으로 청와대 근위 부대인 33경비단의 단장이 되었는데 33경비단은 30경비단과 함께 현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의 전신으로 대통령의 친위대와 같았다. 30단장과 33단장은 대통령의 총애와 신뢰를 받는 보직으로 앞으로 미래가 보장된 군사 정권의 꽃보직 중 하나였다.[4] 30경비단과 33경비단은 수도경비사령부의 주요 실병력으로서 반란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애쓸 부대였으나 30단장 장세동과 33단장 김진영은 하나회 두목 전두환이 일으킨 12.12 군사반란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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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사건 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장태완 소장(오른쪽 찻잔 든 이)이 부임 나흘만인 79년 11월 20일 청와대를 지키는 근위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 제33경비단을 초도순시, 단장인 김진영 대령으로부터 부대현황을 브리핑받고 있다.

그리고 이 사진이 촬영되고 3주 후, 브리핑을 하던 대령은 브리핑을 받던 지휘관을 배신한다.
30단장 장세동과 더불어 반란군 지휘소가 차려진 경복궁[5]을 지켰다. 반란 진압에 나선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자신의 직속 부하인 장세동과 김진영이 직속 상관과 국가를 배신한 것을 알고 격노했다. 진압군 총지휘관 윤성민 참모차장 등 다른 장성들이 진압 과정에서 우유부단한 면모[6]를 보이는 가운데 장태완만은 보안사의 뒷공작[7]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반란 진압에 애썼다. 장태완은 수도경비사령부 주요 실병력 중 30경비단은 반란군의 베이스였기 때문에 동원할 수 없었기에 김진영이 부재 중인 33경비단의 전차 부대를 끌어와 경복궁으로 진군하려 했다. 전차 소리를 듣게 된 반란군은 위기 상황에 빠졌으나 부대장인 김진영이 직접 나서 33경비단 소속 전차 부대를 제지하고 회군시켜 진압군을 무력화시키는데 일조했다.[8] 반란군이 동원한 부대는 차곡차곡 서울에 진주하여 국방부, 육군본부, 특전사령부, 중앙청 등을 점령하는 가운데 진압군은 어떤 부대도 동원하지 못했고 결국 12.12 군사반란은 반란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김진영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래의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상하게 된다. 대한민국을 장악한 하나회의 주축 멤버, 최고 권력자 전두환의 직계 충복, 군사 반란의 공신, 생도 시절부터 인정받아온 자질 등 김진영의 화려한 미래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하나회 동기들이자 반란의 1등 공신들인 허화평, 허삼수가 정계로 진출하고 1기수 선배인 장세동도 대통령경호실장이 되어 군을 떠나게 됨으로써 군 내에 김진영의 경쟁자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더더욱 그러했으나 육군참모총장으로의 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김진영은 하나회 세상이었던 전두환 정부노태우 정부에서 각각 1번씩, 2번이나 좌천을 당하게 된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역임한 후 단연 육군사관학교 제17기 최선두 주자로 사단장에 보임되어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을 맡았다. 1번째 좌천은 그의 강직한 성격 때문에 빚어졌는데 1985년 총선에서 전두환 정권의 부정 선거 지시를 거부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시 야당의 돌풍이 거세지자 전두환 정권은 총선을 앞두고 총력전을 펼치며 휘하 장병들에게 여당 투표를 반강제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김진영은 2기수 하나회 선배로 '민따로'라고 불릴만큼 자신의 길을 걸었던 20사단장 민병돈의 제안으로 같이 지시를 거부했는데 총선은 야당의 신승으로 끝났고 전두환은 격노했다. 20사단과 수기사단 모두 충정 부대[9]로 진급 코스였으며 둘 다 전두환의 직계였기에 승승장구가 예정되어 있던 그들은 사이좋게 좌천되었다. 김진영은 한직인 육군3사관학교장으로 쫓겨났고 민병돈은 준장 보직인 육군본부 정보참모차장으로 좌천되어 처음으로 눈물밥을 먹어야 했다. 와신상담하던 김진영은 1987년 12월 군사정권 최고 요직 중 하나인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되며 권력의 핵심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당시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정권 이임을 앞두고 있었고 앞으로도 상왕처럼 군림하며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임기 말 마지막 군 인사에서 자신의 직계들을 군의 실세 자리에 깔았다. 그런 의미에서 전두환계 하나회의 중간 보스 중 1명인 김진영에게 서울에 최근접한 수도방위사령관을 맡긴 것이다. 당연히 노태우는 이에 분통을 터뜨렸고 당장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전두환의 직계들을 차례차례 제거하기 시작했고 김진영은 이번에는 정치적 흐름 때문에 좌천의 길로 빠지게 된다.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야권과 국민들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심판 요구에 대한 노태우 정부의 유화적 스탠스[10]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야권의 심판 요구를 좌시하지는 않겠다는 군 내 강경파 장성의 위협 발언[11]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대체적으로 발언자는 김진영으로 추측되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김진영은 군 내 기반이 두터운만큼 노태우는 김진영을 후순위로 두고 다른 전두환계들부터 차근차근 제거하기 시작했다. 6월에 전두환계 육군참모총장 박희도가 해임됐고 12월에 전두환계 보안사령관 최평욱이 좌천당했으며 결국 1989년 3월 김진영도 수도방위사령관에서 쫓겨나 한직인 교육사령관으로 2번째 좌천길에 오른다. 다시 눈물밥을 먹는 동안 제17기 동기 이문석이 노태우의 직계 군맥으로 중용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더니 자타공인 제17기 최선두 주자 김진영이 밀리기 시작했다. 늘 후발 주자였던 이문석이 그를 제치고 먼저 대장 1차 진급을 하게 되고 김진영은 교육사령관을 끝으로 옷을 벗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불사조처럼 김진영은 부활했는데 6개월 뒤 2차 진급으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에 오른 것이다. 비록 1군사령관을 거머쥔 이문석에 비해 뒤쳐졌지만 대장 진급에 성공함으로써 '왕년의 김진영이 돌아왔다'는 평에서 알 수 있듯이 간신히 육군참모총장으로의 길을 다시 확보할 수 있었다. 어느덧 임기 말에 접어들던 노태우는 퇴임 후를 생각했는지 분열된 하나회[12]를 수습하려 했는지 전두환계 하나회와 노태우계 하나회의 조화를 도모했다. 하나회와 군 내에 기반이 두터운 김진영을 버리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것 같고 강직하던 김진영 역시 이 때는 눈물밥 2번 먹고 사람이 유해졌는지 노태우에 대한 충성 의사를 밝혔다고도 전해진다. 이후 이문석과의 육군참모총장을 둔 경쟁에서 마침내 승리하며 1991년 말 제29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13] 이렇듯 반란 직후만 해도 순탄하게 육군참모총장이 될 것 같던 김진영은 2번이나 좌천을 이겨내고 파란만장하게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지만 숙청탄 1발이 남아 있었다.
1992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비록 하나회의 정적이었던 김영삼이었지만 일단은 3당 합당 끝에 같은 여당에서의 정권 교체였고 정권 안보와 직결된 모든 요직을 독점해 군을 하나회가 확고하게 장악한 상황에서 하나회를 건들 경우 쿠데타를 우려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김영삼이 하나회를 곧바로 숙청하지는 않을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김진영은 김영삼과 같은 거제도 출신이라 더욱 그러했다.[14] 그러나 김영삼은 취임 12일째인 1993년 3월 8일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임기 극초반인데다 아직 상반기 정기 군 인사 시기[15]도 3개월이 남아 아무도 예측못한 시점에서 사전에 의논도 없이 국방부장관 권영해와 조찬 자리에서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경질할 것을 지시했다. 역사에 남을 하나회 대숙청 작업의 시작이었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김영삼은 하나회 출신 군인들을 싸그리 밀어버렸다. 권영해는 즉각 경질 절차에 들어갔고 오전 동안 자신의 운명은 꿈에도 모른 채 육군본부에서 참모들과 주간 업무 회의를 하며 지시를 내린 후 총장실로 돌아온 김진영은 이번에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최후의 숙청탄을 맞게 되었다. 김진영은 해임 조치를 반발없이 받아들였으며 2번이나 숙청당한 경험이 있어서 강철 멘탈로 거듭났는지 육군참모총장 해임 소식을 듣고도 전역식에서 덤덤하게 2분도 걸리지 않는 짤막한 전역사를 깔끔하게 남긴 뒤 군을 떠났다.[16] 그렇게 그는 하나회 대숙청의 첫 빠따가 된 육군참모총장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자타가 공인한 대표화랑 출신이었지만 악성 사조직인 하나회의 손을 잡았기에 결국 정치 군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하기에 정치적으로 3번이나 숙청을 겪어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군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이후 인하대학교 초빙 교수를 지내다가 1995년 자유민주연합이 창당되자 김종필의 특보(국가외교행정특보위원)를 지냈으나 1995년 12·12 및 5·18 특별법에 의하여 구속 수감되어 1997년 4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훈이 취소되었다. 1998년 2월 특별 사면되어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자유민주연합 전임 고문을 지냈다가 이후 정계에서도 은퇴하였다.[17]

3. 여담



  • 후임 육군참모총장은 육사 동기이자 비하나회 출신인 연합사 부사령관 김동진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다시 벌어질리 없기에 동기가 연속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는 일은 이젠 없을 듯 했으나, 약 20년 후 천안함 사태로 31기 한민구 참모총장이 급박하게 이동하게 되면서 동기 황의돈 장군이 참모총장에 올랐다. 이후에도 34기에서 권오성 장군이 제28보병사단 폭행사망 사건으로 사퇴하게 되면서 동기 김요환 장군이 취임하는 일이 또 나왔다.

[1] 언론 통폐합 등을 주도하여 전두환괴벨스라 불린 허문도와 동기 동창이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신군부가 집권하자 허문도의 부탁으로 그를 전두환에게 소개했다.[2] 육군사관학교 교수와 훈육 장교 등이 성적, 품성, 지휘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가장 우수한 생도에게 주는 상이다. 성적 수석 졸업은 '대통령상'으로 육군사관학교 제17기의 수석 졸업자는 김진영이 숙청되자 대신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된 김동진 장군.[3] 시초에는 주로 성적 하위자들이 모여 만든 하나회는 후배 기수의 대표화랑들 영입에 열을 올려 많은 대표화랑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김진영을 뺀 모두는 말로가 나빴는데 주로 20기 이하 대표화랑들이 하나회에 영입되었다가 정작 본인들이 장군의 반열에 오를 때 하나회 시대가 끝나면서 군생활도 끝난 케이스들이 많다.[4] 손영길, 전두환, 이종구, 고명승, 장세동, 김진영을 비롯한 실세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이 보직을 독점했다. 5공과 6공에서도 당연히 후임들이 이 자리를 독점했다.[5] 청와대의 최근접 경비를 맡았던 30경비단의 본부가 경복궁 내 북단에 있었다.[6] 병력을 동원해 유혈 사태를 일으키지 않기로 반란군 세력과 신사 협정을 맺고 그걸 믿어서 출동시킨 9공수여단을 회군시켰다. 물론 반란군은 신사 협정 따위는 무시하고 계속해서 병력을 동원해 승기를 굳혔다.[7] 도청을 통해 수도경비사령부가 유사시 동원 가능한 서울 인근 사단들을 출동시키지 못하게 했다. 30사단장 박희모는 회유에 넘어가 반란군에 대놓고 길을 열어주며 협조했고 26사단장 배정도는 저녁 회식에서 보안부대장의 술 공작에 넘어가 자고 있었고 수기사단장 손길남은 침묵했으며 20사단장 박준병은 반란군에 가담 중이었다.[8] 자신에 대한 사살 명령이 내려진 와중에 직접 뛰쳐 나갔다. 말 그대로 역적 행위이지만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다소 비장하게 묘사된다.[9] 유사시 서울로 즉각 동원할 수 있는 부대들. 쿠데타를 늘 염려해야 하는 군사 정권에서는 당연히 요직이고 진급 코스가 된다.[10] 노태우는 자신들을 전두환 정권과 차별화하려 했고 상왕으로 군림하려는 전두환과 전두환의 세력들을 숙청할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제5공화국 심판 분위기가 확대되는 것을 사실상 방관했다.[11] 좌천된 일화들에서 알 수 있듯이 역대급인 민병돈만큼은 아니어도 강직한 성격이었다. 논란이 되었던 발언은 "야당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추궁을 고집하면 그들이 공약한 정치 보복 배제에 위배된다. 그런 식으로 캔다면 김영삼, 김대중인들 온전하겠는가? 적당한 선에서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야당의 태도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모처럼 마련된 이러한 좋은 상황이 파국으로 흐를 수도 있다."로 상당히 강경한 발언이었다.[12] 전두환계 하나회에 대한 숙청으로 인해 노태우 정권에서는 전두환계 하나회와 노태우계 하나회간의 권력에 대한 암투가 벌어졌다.[13] 노태우는 비록 이문석이 자신의 직계였지만 김진영을 버리는 것은 부담스러웠고 전임 육군참모총장이 노태우 직계인 이진삼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인맥이 군을 독점하고 있다는 비판을 신경썼다는 의견이 있다. 무엇보다 육군참모총장 인사를 앞두고 하필 이문석이 에 걸렸는데 극비리에 수술을 받았고 초기 암이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건강 문제 때문에 육군참모총장은 무리가 되었다. 이진삼과 이문석 모두 일단 군을 떠난 뒤 대신 장관으로 내각에 입각했다.[14] 민주정의계이면서도 신민주계에 속하는 김기춘 또한 김진영과 같은 거제도 출신이었다.[15] 과거에는 6월과 12월에 정기 군 인사를 실시했다. 이 때 이후로 4월과 10월로 바뀌었다.[16] 그에 비해 하나회 선배 박희도는 노태우에게 숙청당해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당했을 때 전역식에서 부들부들 분노에 떨면서 불만이 가득 섞인 전역사를 남긴 바 있다.[17] 15대 총선은 구속 수감되어 출마하지 못했고 16대 총선 때는 이미 자유민주연합의 세력이 약화된데다가 고향인 통영은 완전히 한나라당의 텃밭화되었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