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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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金晋基
1932년 4월 19일 ~ 2006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전 군인. 호는 산민(山民),본관은 김해. 종교는 개신교이다.
2. 일생
1932년 평안북도 후창군[2] 에서 태어났다. 평양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3] 6.25 전쟁 당시 월남하여 육군사관학교 9기로 입교하였다. 이후 다시 대한민국 육군 갑종간부후보생 6기로 임관되었다. 베트남 전쟁 등에 참전하였고 보국훈장 삼일장, 보국훈장 천수장, 화랑 무공훈장, 베트남 1등 무공훈장 등을 수훈받았다. 헌병 중대장, 헌병 대대장, 3군 헌병참모, 헌병감실 차감, 국방부 조사대장, 육군 헌병감 등을 지냈다.
'''장태완, 정병주, 하소곤 장군과 더불어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에 끝까지 저항한 장성 중 하나이다.'''
3. 10.26사건 당시 행적
1979년 육군본부 헌병감으로 재직 중 10.26 사건 당시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이 김재규임을 알게 된 정승화는 육군 벙커로 김진기를 불러 김재규를 총장 비서실장으로 위장해 체포, 보안사에 인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김진기는 김재규를 유인하여 헌병 중대장 이기덕 대위, 보안사 오일랑 중령과 함께 체포해 보안사로 인계했다.[4] 이후 같은 해 계엄 선포 이후 계엄사 치안처장으로 임명되었다. 치안처장 재직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정보 독점 월권행위로 인해 치안처 및 헌병대에 정보가 오지 않자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전두환의 월권행위에 대한 보고를 하기도 했다.[5]
4. 12.12군사반란 당시 행적
1979년 12월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진압하려 하였다. 당시 그는 신군부에 의해 친 정승화 계열로 분류되어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함께 연희동 위장 만찬에 유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헌병감실에 연희동 음식점 번호를 알려놓고 나와 정승화 총장이 연행되었을때 연락을 받아 다른 장군들에게 알렸다. 그 뒤 전두환 등 하나회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인지해 최규하에게 정승화 체포 승인을 받기 위해 총리공관에 머물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직속 부하인 총리공관 헌병 특별 경호대장 구정길 중령에게[6] 명령하지만 헌병 경비 병력들이 하나회 병력인 대통령 경호실 병력에 의해 무장해제되며 실패한다. 그리고 휘하의 헌병병력을 이용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를 구출하려 했지만 하극상으로 인한 병력부족으로 좌절된다.[7] 그뒤 수경사 지휘부에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무장해체 된다. 국군보안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이듬해 예비역 준장으로 자진 예편한다.[8]
5. 부하들의 배신
다른 진압군측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김진기도 하나회에 소속된 부하들에게 하극상을 당했다. 전두환의 명령으로 정승화를 체포한 우경윤 범죄수사단장(대령)과 성환옥 헌병감실 기획과장(대령) 모두 직속 부하였다.[9] 애초에 그들이 전두환의 명령으로 정승화를 체포하지 않았더라면 12.12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별개로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를 연희동 만찬으로 유인했던 조홍 헌병단장은 병과 후배로 이미 후임자로 내정되어있던 상태였다. 이 배신으로 인해 김진기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후에 그는 "평생을 쿠테타의 악몽에 시달렸다" 라고 밝혔다.
6. 그 후
예편 후 수원에서 농사도 짓다 보문도에서 광어 양식을 하기도 하고 일본 평화안전보장 연구소에서 지정학을 연구했다. 김영삼 정권 때 한국토지공사 이사장[10] 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정병주, 하소곤, 정승화 등과 함께 전두환을 내란죄 등으로 고발했다. 2006년 지병으로 사망한 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슬하 1남 2녀를 두었다.
7. 미디어에서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조재훈 씨가,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김주영씨가 김진기 역을 맡았다.
8. 관련 문서
10.26 사건
12.12 군사반란
[1] 제 18대 국방부 조사대장, 계급은 준장[2] 현재 량강도 김형직군.[3] 재학 당시 성적이 우수해 한학년 월반했다고 한다.[4] 후에 김진기는 이때가 삶에서 가장 긴장되었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5] 이 보고는 정승화가 전두환을 숙청하려고 결심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6] 당시 최규하는 대통령에 당선된 상태였으나 대통령 취임선서 이전이라 총리공관에 머물러 있었고 총리공관의 경비는 육군본부 헌병감실 소속 헌병대가 맡고 있었다.[7] 성환옥, 우경윤 대령이 휘하 33헌병대 병력을 모두 총장공관에 이끌고 갔기 때문이다.[8] 사실상 강제 예편이나 다름없었다.[9] 우경윤은 체포 도중 오인사격으로 인해 반신불구가 되어 군에서 예편한다 [10] 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