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라거펠트

 

''' 칼 라거펠트
Karl Lagerfeld'''

[image]
'''출생'''
1933년 9월 10일
나치 독일 함부르크
'''사망'''
2019년 2월 19일 (향년 85세)
프랑스 파리
'''신체'''
178cm
'''국적'''
[image] 독일
'''직업'''
패션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학력'''
Lycée Montaigne
'''경력'''
1964년 끌로에 수석 디자이너
1998년 칼 라거펠트 갤러리 설립
'''수상'''
2010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브랜드'''
(설립 & 수석 디자이너 / 1984 -2019)
(수석 디자이너 / 1983 -2019)
(수석 디자이너 / 1965 -2019)
1. 소개
2. 생애
3. 디자인 특징
4. 어록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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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칼 라거펠트의 마지막 샤넬 컬렉션'''
독일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그의 디자이너 레이블의 이름.[1]
일명 패션계의 ''''살아있는 신화''''였으며, 현대 하이패션아이콘 격인 인물이었다. 2~3년을 버티기 힘든 패션 디자이너 업계에서 54년간 펜디의 수장으로 있었고 동시에 80년대 망하기 일보직전이던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어[2] 37년간 이끌었다. 오랜 기간 두 최고급 명품 브랜드의 수장으로 있으며 전 세계 패션 트렌드를 이끈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3]

2. 생애


1933년 9월 10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4] 아버지 오토 라거펠트는 함부르크에서 커다란 연유제조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었기 때문에, 그는 상당히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라거펠트의 재능은 놀라워서, 3살 때 이미 옷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언제 만들어진 옷감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살 때인 1953년에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였으며, 파리 패션계에서 처음에는 삽화가로 일했다. 이미 21살 때인 1954년에 국제양모사무국이 주최한 신인 디자이너 경연대회에서 울코트부문 1등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하였다.[5]
그 후 디자이너 피에르 발맹 밑에서 3년 반 동안 조수로서 일했고, 1958년부터는 쟝 파투를 사사하였다. 그보다 3살 연하인 이브 생로랑과 함께 파리에서 수많은 디자인의 의상을 선보이면서 젊고 전도유망한 디자이너로서 강력한 경쟁관계를 형성하였다.
1963년부터는 쟝 파투에게서 독립하면서 마리오 발렌티노 등의 회사에서 자유롭게 일했다. 1964년 프랑스 브랜드 클로에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고, 1965년부터는 이태리로 가서 펜디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다. ‘에프’(F) 두개를 겹쳐 만든 펜디의 로고는 그와 펜디 가문의 운영진이 함께 만든 것.
1974년에는 독일에 자기 이름으로 칼 라거펠트 임프레션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1983년부터 샤넬의 아트 디렉터로 부임하면서 전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1971년 사망한 뒤 침체를 겪던 브랜드 샤넬이었지만, 1983년 라거펠트를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한 뒤부터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시작했다. 라거펠트의 손을 통해 샤넬의 상징과도 같던 우아한 트위드 재킷은 젊은층까지 사로잡는 경쾌한 스타일로 변신했고, 하위문화의 상징이던 데님, 가죽 등의 소재로 만든 재킷 등도 인기를 끌었다. ‘C’ 두개가 겹쳐 있는 샤넬의 트레이드마크를 의상이나 가방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 역시 라거펠트였다. 라거펠트는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으며[6], 그 후 37년 동안 '''샤넬=카를 라거펠트'''로 통할 만큼 롱런하며 샤넬을 이끌었다. 타임지는 2012년 그를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100명의 패션 아이콘들 중 한명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19년 2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향년 85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췌장암으로 밝혀졌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은 '그는 파리를 세계 패션의 수도로, 펜디를 가장 혁신적인 이탈리아 브랜드 중 하나로 만드는 데 공헌을 한 창조적 천재였다'고 하며 그를 추모했다. 유산 상속자 중 하나로 반려묘를 지목했다.

3. 디자인 특징


그가 수석 디자이너를 맡았던 브랜드는 유명 명품 브랜드인 펜디샤넬, 그리고 자신의 디자이너 브랜드인 칼 라거펠트 3개이다. 가장 유명하면서 그의 정체성을 대표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샤넬. 코코 샤넬에 이어서 몇 십년째 계속 디자인을 맡았으며 샤넬하면 칼 라거펠트, 칼 라거펠트 하면 샤넬이라고 할 정도로 샤넬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군림했다. 뉴스위크에서는 그를 "샤넬의 집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샤넬에 내놓은 제품들은 상상 이상으로 기발한 것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옷을 만들 때 콘크리트를 박아넣어 예상치 못한 패턴을 짜넣는다던지, 14FW컬렉션에는 종이용기에 가방을 넣고 랩핑을 해서 마트 정육점에서 산 고기 1팩을 연상시키는 가방까지 내놓던지, 레스토랑 메뉴판을 클러치백으로 내놓는다던지 한 것이 있다.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다. 고령[7]에도 샤넬의 광고 캠페인은 본인이 직접 촬영했다고 한다. 하도 사진들을 뭐같이 찍는데 분통이 터져서 직접 찍게된 것이 프로가 되었다. 그래서 LVMH사 아르노 회장의 딸이 결혼할 때 사진사로 부려먹히기도...
칼 라거펠트가 직접 촬영한 샤넬 S/S19 광고
샤넬, 펜디에서 절정의 감각을 뽐내며 '역시 칼 라거펠드다!'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옷들을 뽐낸 반면, 자신의 브랜드인 칼 라거펠드에서는 별로 힘을 못 써 여러가지로 혹평을 많이 들었다. 역시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었다기 보다는 자기 레이블보다 샤넬이나 펜디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고 봐야할 지도. 원래 다른 디자이너들도 자기 브랜드보다는 고용되어 있는 브랜드에 신경을 많이 쓴다.
2004년H&M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한 바 있다. 2011년 s/s 시즌에는 토즈와 콜라보레이션한 상품을 토즈 브랜드로 내놓았다.

4. 어록


제가 말한 것들은, 제가 말한 그 때에만 유효합니다.

제가 말한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지금 제가 말하는 것도, 내일이 되면 아마 기억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일 저는 어제와는 다른 인간이 되어있을 테니까요!

엘레강스는 패션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입니다. [8]

젊은이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늙은이들은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패션의 독재자들입니다.

섹스는 젊은이들을 위한 좋은 장난감일 수 있지만, 나중에는 진부한 소비상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디자이너의 옷으로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도배를 하는 여자보다 패션테러리스트인 사람은 없습니다.

유행은 6개월을 넘기지 못합니다.

스트레스를 가지고 일을 하는 자는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일을 즐기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이 조깅 바지를 입는다면, 삶의 통제를 완전히 잃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저는 인생이 경쟁이 되는 것과 그 경쟁의 결과물이 불공평인 것을 두려워합니다.

아직까지 우리가 육식을 하는 동안에는, 모피에 대해서 불평을 할 수 없습니다.

하이디 클룸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클리우디아 쉬퍼도 모르는 것 같던데요. 아마 파리에서 활동을 안 해서 모르나봅니다.

마른 모델을 기용하는 이유는 고객이 마른 모델이 걸친 옷을 더 소비하기 때문입니다. 마른 모델을 욕하는 여자들은 소파에서 감자칩이나 먹으면서 투덜대는 뚱뚱한 여자들 뿐입니다.[9]

옷이 당신에게 어울리는지 고민하기 전에, 당신이 그 옷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먼저 고민하십시오.[10]


5. 기타


  • 대표적인 르네상스맨으로 무척이나 다재다능했다. 패션 밖의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여, 샤넬을 테마로 단편영화를 만들고 ‘아우디’ ‘매그넘’(아이스크림) 등의 광고를 기획했다. 다채로운 패션쇼 연출도 그의 업적으로서, 단순한 형태였던 무대를 해변, 우주정거장 등의 파격적 콘셉트로 꾸며 화제를 낳았다. 그 외에 그림과 사진에도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커밍아웃게이이다. 자신의 뮤즈였던 모델 바티스트 지아비코니와 열애설도 있었는데 이 모델은 1989년 생. 그러니까 56년 연하의 거의 손자뻘 상대이다. 다행히(?) 열애 및 결혼설은 설로 끝났고 지아비코니는 꾸준히 스캔들도 나고 여자친구도 사귀어왔다. 어쨌던 지아비코니는 '별 것도 아닌 게 노인영감 덕으로 성공했다'고 뒷말이 많았다.
  • 에디 슬리먼과 애인이었다는 소문도 사실무근이다. V매거진에서 서로 사진을 찍기도 하는 듯 서로 존경하는 관계이긴 한 듯하다.
  • 독일 함부르크 블랑케네제에 있는 대저택을 1991년에 구입하였으나 1998년에 팔았다. 그 후 프랑스 브르타뉴에 있는 샤또드페누엣이라는 성을 구입했다가 다시 팔았으며, 그 뒤로 파리에서 계속 혼자 살았다고 한다.
  • 분야를 막론하고 편견이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균형적인 시선을 가졌던 대단한 지식인이자 교양인으로서 평생 독서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그의 저택 도서관에 무려 20만 권의 장서를 갖추었고, 파리에 '7L'이라는 이름의 서점을 열었을 정도로 책을 사랑했다. 2010년에는 'LSD'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수많은 독일어 서적을 내기도 했다.
  • 그와 관련된 비화로는, 일단 한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으로서 에디 슬리먼디올 옴므를 입기 위해 극한의 다이어트를 했다는 것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40kg정도 감량을 했고 죽기 전까지 유지했다고 한다. 다이어트 하기 전의 모습을 찾아보면 정말로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11]
  • 한국 디자이너 정욱준의 브랜드(JUUN.J.) 옷들도 좋아했다. 임종 전 그의 사진을 보면 하나 같이 카라가 목을 다 덮는 셔츠를 입고 있는데 정욱준의 옷을 싹쓸이한 것이라 한다.
  • 과거 자기가 직접 패션을 위해 극한의 다이어트를 해 본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무도 뚱뚱한 여자들이 런웨이에 오르는걸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No one wants to see fat women on the runway)는 발언을 거리낌없이 하기도 했다. 다만 여기서 뚱뚱한 여자는 비만여자가 아니라 하이패션에 올라올 수 없는 빅사이즈 모델 혹은 커머셜 모델, 피트니스 모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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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머셜 모델
피트니스 모델
하이패션 모델
하이패션 모델이란 우리가 '패션쇼 모델' 하면 흔히 떠올리는 극단적으로 마른 체형의 모델이다. 라거펠트는 일반 이성애자 남성들이 성적 매력을 느끼는 적당히 살집이 있는 육덕체형, 헬스로 다져진 근육체형 여성 모델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굶어서 살을 뺀 깡마른 기아체형 하이패션 모델만이 런웨이에 올라올 자격이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었다. 많은 대중적 비판도 있었지만 라거펠트가 사실 모든 패션에 그런 체형만을 고집했던 것도 절대 아니고 하이패션이라는 국한된 분야에서만 그런 모델이 적합하다고 이야기 했다는 점에서 업계에서는 인정받는 발언이기도 하다.
  • 2018년에는 프랑스 누메로 매거진과 한 인터뷰에서 미투 운동이 지긋지긋하다고 발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스타일리스트 칼 템플러의 성추행 의혹을 옹호하면서 '스타일리스트가 바지를 내리라는 것이 싫다면 모델을 하지 말고 수녀원에 들어가라'고 맹비난하면서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지만 2018년 미투 발언과 평소의 모델 관련 발언 등으로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수 생겨났다.
  • 2010년경 치아가 심각하게 손상된 사진(혐짤주의)이 찍혀 마약(메스암페타민) 복용 의혹을 받았다. 필로폰을 과다 복용하면 소위 Meth mouth라고 불리는 치아의 급속한 손상이 일어날 수 있기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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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2011년에는 코카콜라와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실제로 코카콜라 라이트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 해외에서의 인식은 한국 패션계 내, 고 앙드레김 선생님과 같은 원로 정도로 보거나, 디자인적으로 세련되었다기 보다는, 그의 커리어와 샤넬의 상징적인 의미, 마스코트로 인식하기도 한다. 한국 한정 애칭은 칼 할배이다.
  • G-DRAGON과 친분이 있다.
고양이 집사로도 유명했다. 밥티스트 지아비코니가 2주 간의 크리스마스 휴가를 위해 칼 라커펠트에게 키우던 고양이의 임시보호를 부탁했으나, 라거펠드가 이 고양이의 매력에 반하면서 고양이를 입양했다. "슈페트 라거펠드(choupette lagerfeld)"라 불리는 이 고양이전용기를 타고 다니며 두 명의 개인 집사와 전문의, 전용 침대, 놀이용 아이패드 뿐만 아니라 인스타그램 팔로워 10만명, 트위터 팔로워 5만명의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고양이는 2014년 화장품 브랜드 슈에무라홀리데이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했다. 2014년도에 잡지 촬영 및 광고 등으로 300만 유로(한화로 약 35억 원)를 벌었다. 단, 고양이 사료, 간식 광고 요청은 거부하고 있는데, "그런 광고를 찍기엔 슈페트가 너무 세련되었다고" 라거펠드가 반대했기 때문.

라거펠트 사후 이 고양이도 유산 일부를 물려받는다고 한다. 프랑스 법상 반려동물에게 증여는 안 되지만, 신탁에 맡기는 방식으로 라거펠트 사후에도 현재와 같은 생활을 유지하고, 전속 경호원과 하인도 유지된다고 한다.

[1] 부드러운 이미지를 위해서 '라거펠드'로 바꿨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은 독일어로 라거펠트, 영어로는 라거펠드가 되는 것 뿐이다.[2] 오죽하면 패션업계에서는 그를 샤넬의 황제라고 부를정도였다.[3] 실제로 동시대에 데뷔한 다른 디자이너들이 죽었거나 활동을 관뒀지만 늦은 나이까지 일한 것 자체가 놀랍다는 평가를 받았다.[4] 1938년생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나이를 낮추기 위해 한 얘기다. [5] 같은 대회에서 그의 경쟁자 이브 생로랑은 이브닝드레스 부문에서 1등상을 받았다.[6] '라거펠트 콘피덴셜'이라는 2007년작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자신이 처음 샤넬에 왔을 때를 회고했는데, '제가 샤넬을 맡았을 때 샤넬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같았어요. 아름다운 모습도 아니었지요. 그녀는 코를 골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죽은 여인을 되살려야만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당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7] 나이는 앙드레김보다 2살 많은 1933년생.[8] 그런데 라거펠트와 앙드레 김의 스타일은 어느 정도의 대척점을 그리고 있긴 하다. 라거펠트는 철저한 하이패선 스타일과 토탈 룩의 깔끔함, 전체적 조화를 추구한 반면, 앙드레김은 아티스틱한 화려함과 전체적인 개성을 추구한 부분이 있다.(간단하게 요약하면 라거펠트는 철저한 프레타포르테 이고 앙드레김은 철저한 오트쿠튀르로 요약 가능하다.)[9] 이 발언과 관련되어 아델이 목소리는 아름답지만 뚱뚱하다는 발언도 해서 후에 사과하기도 했는데. 이 발언이 나왔던 2017년 당시 아델은 실제로 고도 비만 상태였던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뚱뚱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 아델은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 실제로 45kg를 감량해 몸매와 건강을 되찾았으니 아델에게도 고마운 발언일지도.[10] 이 말은 그 유명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어 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 취임 선언을 패러디한 것이다.[11] 본인이 스키니진을 입기 위해 다이어트를 했기 때문인지 "패션은 다이어트의 가장 강력한 동기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체중 감량이 점점 더 어려운데 엄청난 자기관리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