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알베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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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ac Manuel Francisco Albéniz y Pascual(1860.5.29-1909.5.18). 보통 '''이삭 알베니스'''(issac albeniz)로 통한다. 스페인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1. 생애
2. 창작 성향
3. 후대에 끼친 영향
4. 여담
5. 주요 작품들
5.1. 피아노
5.2. 오페라
5.3. 가곡
5.4. 협주곡
5.5. 실내악
5.6. 관현악


1. 생애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 지방의 캄프로돈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좋아해서 불과 네 살때 바르셀로나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 무대를 가졌을 정도였다. 부모는 아들의 천재성을 짐작하고 일곱 살 때 프랑스의 파리 음악원에 유학보내려고 했는데, 유학 심사를 위해 음악원에 갔을 때 알베니스가 공놀이를 하다가 유리창을 깨는 바람에 '너무 어려서 안됨' 이라고 딱지맞기도 했다.
파리 유학 시도는 실패했다고 해도, 알베니스는 계속 스페인에서 피아노 수업을 받았고 여덟 살 때 처음으로 작곡도 시도했다. 열두 살 때는 연주인의 끼를 참지 못했는지, 부모 몰래 외항선에 밀항해 아르헨티나쿠바, 푸에르토 리코, 미국 등지에서 일찌감치 해외 연주여행을 할 정도였다(...).
열다섯 살 때는 이미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다니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경력을 쌓고 있었는데, 그래도 뭔가 배워야 하겠다고 생각했는지 독일벨기에, 헝가리 등지의 음악원에서 계속 피아노와 음악이론, 작곡 등을 배웠다. 특히 그는 벨기에의 브뤼셀 음악원으로부터 <피아노 공연 부문> 장학금을 수여받기도 했다. 일기장에 보면 1880년 8월 18일 부다페스트에 갔을 때 프란츠 리스트를 만났다고 기록했다. [1]
1883년에는 고국 스페인에서 민족주의 악파의 거두로 활동하던 작곡가 펠리페 페드렐을 만났는데, 그로부터 스페인 전통음악의 중요성과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한 창작 활동에 관한 조언을 듣고 큰 영향을 받았다. 페드렐과 만난 뒤부터 알베니스의 작품에는 의식적으로 스페인색을 넣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플라멩코 음악을 비롯한 민속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했다.
1890년대에는 런던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특히 런던에서는 극장 흥행주이자 대본 작가였던 프랜시스 머니카우츠 남작의 제안으로 아더왕 전설을 소재로 한 오페라들을 작곡했다. 그러나 이들 오페라는 스페인 사람인 알베니스에게 그리 적절하지 않은 소재였고,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사장되었다.[2]
이렇게 유럽 전역에서 활동하면서 명성을 떨치고 있기는 했지만, 건강 상태는 별로 좋지 못했다. 특히 1900년부터 일종의 신장병인 브라이트병을 앓게 되면서 연주 활동을 포기해야 했고, 주로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요양하면서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작곡한 피아노 모음곡 세트인 '이베리아' 는 알베니스의 최대이자 최고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요양 생활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호전되기는 커녕 악화되었고, 결국 마지막 요양지였던 프랑스 남부의 캉보르뱅에서 48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스페인으로 옮겨져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언덕에 있는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창작 성향


여덟 살 때 처음 작곡한 '군대 행진곡' 부터 만년의 '이베리아' 까지 작품의 절대 다수가 피아노곡이라는 점에서 피아니스트 작곡가의 성향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펠리페 페드렐을 만나기 전까지는 대부분 서부 혹은 중부 유럽의 수많은 대가들의 작품을 벤치마킹한 정도였고, 그런 곡들은 지금도 듣보잡 취급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알베니스가 스페인 음악에 눈뜨면서 작곡한 최초의 곡은 1880년대 초반의 '파반 카프리치오' 로 추정되는데, 곡의 색채는 전반적으로 당대 유행한 살롱 음악 수준이지만 취급하는 선율은 스페인 민속음악의 어법을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아무튼 이 때부터 알베니스는 줄곧 스페인 민속음악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죽을 때까지 지속시켰다.
자민족 중심주의가 상당히 강한 카탈루냐 출신이면서도 특이하게 남서부 지방인 안달루시아의 민속음악에 유별난 애착을 보였는데,[3] 특히 열정적인 플라멩코 댄스와 거기에 곁들여지는 기타의 연주, 집시의 애절한 노래 등이 중기 이후의 작품에 녹아나 있다.
'이베리아' 의 경우 지금도 피아니스트들에게 고난이도 테크닉을 요하는 대곡으로 악명높다.[4]
강한 민족주의 성향 외에도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인물로서 근대 프랑스 음악의 영향도 물론 강하게 받았다. 특히 후기 작품에서는 클로드 드뷔시 등이 대중화시킨 온음음계[5]나 강한 악센트를 표현하기 위한 불협화음을 도입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자신의 장기였던 피아노곡 외의 다른 장르에서는 딱히 성공하거나 유명한 곡이 없다. 반면 알베니스의 피아노곡 다수는 특유의 진한 남부 스페인색과 기타 연주를 모방한 것 때문에 종종 기타 독주나 중주로 편곡되는데, 특히 스페인 기타 음악의 선구자인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편곡이 유명하다. 알베니스 자신도 타레가의 편곡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고 전해진다.
작품 번호 47의 스페인 모음곡에 그라나다, 카탈루냐, 세비야, 카디즈, 아스투리아스가 종종 기타로 연주된다. 이 중 5번째 곡 '아스투리아스' 는 기타 동아리에서도 연주될 정도로 인기있는 곡목이다.[6] 클래식 기타 매니아들중에는 이삭 알베니스가 기타곡을 작곡했는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작품번호 232의 4번 곡 코르도바[7], 작품번호 165의 2번 곡 라장조 탱고[8]가 자주 연주된다. 알베니스 기타 연주 모음

3. 후대에 끼친 영향


알베니스 자신도 당대 음악에 영향을 받았지만, 거꾸로 후배 스페인 작곡가들뿐 아니라 프랑스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드뷔시나 모리스 라벨의 스페인 소재 작품들도 알베니스의 스페인풍 피아노곡의 인기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며, 실제로 드뷔시나 올리비에 메시앙 등 프랑스 작곡가들은 '이베리아' 등의 후기 작품들을 매우 좋아하고 직접 즐겨 연주했을 정도였다.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의 '자바 모음곡'은 사실상 '이베리아'를 벤치마킹해서 자바의 음악을 피아노곡으로 옮긴 작품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지금도 스페인 피아노곡 하면 알베니스와 그라나도스의 곡들이 먼저 언급될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주로 호평받는 음반들도 대부분 스페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담고 있다. 특히 알리시아 데 라로차(Alicia de Larrocha)는 '이베리아' 의 전곡 녹음만 세 종류를 남겼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여준 바 있다.
'이베리아' 한 묶음만으로도 기교파 피아니스트들에게 좋은 떡밥인데, 곡집 당 세 곡씩 총 12곡의 전곡 연주를 한 방에 한다고 하면 피아노 마니아들이 꺼벅 죽을 정도. 기교와 체력 모두가 받쳐줘야 가능한 미션인데, 실제로 행한 피아니스트들은 위에 쓴 라로차와 마르크앙드레 아믈랭 등 몇 사람에 불과할 정도다.

4. 여담


알베니스는 1883년에 자신의 피아노 제자인 로시나 조르다나와 결혼했고, 출산 직후 죽은 두 아이를 빼면 아이 셋을 남겼다. 그러나 장남 격인 블랑카도 1886년에 죽었고, 슬하에 남은 자식은 화가로 활동한 라우라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축구선수로 뛰기도 했고 훗날 외교관이 된 알폰소 둘뿐이었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중년 이후로 텁수룩하게 기른 수염과 통통한 몸 때문에 다소 꼬장꼬장하고 탐욕스러운 성격으로도 보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인정 많고 유쾌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동료 작곡가였던 에르네스트 쇼송이 재정난에 빠졌을 때, 출판사에서 계속 뻰찌먹였던 그의 작품들을 자기 돈으로 출판해 주고는 '출판사에 갖다줬더니 흔쾌히 받아줬다' 면서 선의의 거짓말을 한 에피소드도 있다.
다음의 일화는 알베니스의 활달한 성격, 끊임없는 안절부절못함, 그리고 음악적 표현에 대한 그의 열망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알베니스는 잡지 <Romero i Andia>의 편집자와 원고 페이지당 5페세타로 계약을 맺었다. 잡지사는 저렴한 거래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알베니즈는 매우 다작한 것으로 판명되어 편집자가 곧 계약을 해지할 것을 요청했다. 젊은 작곡가 알베니스는 수십 페이지를 매일 제공했다고 한다. 이러한 원고들은 다량 분실되었지만, 알베니스와 가까운 사람들의 서신이나 문서, 진술 등의 참고문헌들이 위를 증명하며, 초기 알베니스 학자들로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일기장이 보존되어있다. 그의 일기는 성격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사실과 허풍을 잘 구분해야 하는 주의가 필요하다.

5. 주요 작품들



5.1. 피아노




Op.232
이베리아 + 나바라
파반 카프리치오 Op.12(1882)
스페인 모음곡 Op.47 (1883-94)[9]
고대 모음곡 1번 Op.54(1885경)
고대 모음곡 2번 Op.64(1886)
쿠바 광시곡 G장조 Op.66(1886)
6개의 스페인 춤곡(1886)
고대 모음곡 3번 ( 1886)
피아노 소나타 3번 A플랫 장조 Op.68(1886)
모음곡 '여행의 추억' Op.71(1886-87)
피아노 소나타 4번 A장조 Op.73(1887)
피아노 소나타 5번 G플랫장조 Op.82, 1887)
12개의 성격 소품 Op.92, 1888)
스페인 모음곡 Op.97(1889경)
2개의 스페인 춤곡 Op.164(1889경)
모음곡 '스페인' Op.165(1890)
마요르카 (뱃노래) Op.202(1890)
그라나다의 삼브라 D단조 (1890경)
스페인의 노래 Op.232(1891-4)
스페인의 추억들 (1896-97)
라 베가 (1897)
'''이베리아''' (1905-09)
나바라 (1909) - 미완성 (알베니스 사후 프랑스인 제자 데오다 드 세브락과 윌리엄 볼컴, 필라르 바요나 등이 완성)
아수레호스 (1909) - 미완성 (역시 알베니스 사후 동료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가 완성)

5.2. 오페라


헨리 클리퍼드 (1895)
페피타 히메네스 (1896)
멀린 (1902)

5.3. 가곡


일레인, 당신은 영원히 가버리는 건가요?(1896)
산문체의 두 단편 (1897)
신의 선물(1897)
4개의 노래 (1908)

5.4.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1번 A단조 (환상 협주곡) Op.78 (1885-7)

5.5. 실내악


  • 피아노 6중주를 위한 모음곡(1883)

5.6. 관현악


모음곡 '카탈루냐의 교향 정경' (1888-89)
교향시 카탈루냐 (1899)

[1] 일기장에서는 리스트가 알베니스의 공연을 보고 '장차 크게 될 천재다' 는 극찬을 했다고 쓰여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리스트가 바이마르에 거주하고 있음이 잘 알려져있다. 알베니스의 의도..된 허풍을 알 수 있다.출처[2] 2000년대에 와서야 리바이벌되고 있는데, 영국 음반사인 데카에서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거물급 성악가들을 주연으로 써서 전곡 CD들을 내놓고 있는 중이다.[3] 스페인은 그렇게 잘 통일된 형태의 국가가 아니다. 특히 바스크와 카탈루냐는 틈만 나면 분리 독립 떡밥을 풀어놓거나 중앙 정부에 대한 시위와 테러크리까지 먹일 정도.[4] 알베니스의 피아노곡 초판 악보들은 현재 저작권이 풀려서 웹에서도 pdf파일로 구할 수 있다. 물론 '이베리아' 전곡도 마찬가지인데, 피아노 연주 실력에 컴플렉스가 있는 이들은 악보만 보고도 열폭할 수 있으므로 주의.[5] 모든 음의 간격이 온음으로 이루어진 음계. 특성상 딱 두 가지만 만들어지는데, 도(C)음 기준으로 C-D-E-F#-G#-A# / 도#(C#) 기준으로 C#-D#-F-G-A-B.[6] 타레가 편곡, 전설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7] 미구엘 료벳 편곡, 존 윌리엄스가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8] 미구엘 료벳 편곡, 사랑 왜곡계 마성의 BGM 중 하나이다.[9] 알베니스 자신이 쓴 여러 피아노곡들을 작곡자의 허락 없이 출판사에서 임의로 묶어 출판한 비공인 모음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