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농구)/선수 시절

 


2. 영광의 현대 - KCC 시절
3. 이적과 마찰
4. 삼성으로의 이적 이후


1. 농구대잔치 시절


홍대부고 시절에는 천재 가드라는 말을 들으며 동 시기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즐비한 다른 고교팀들을 원맨쇼로 농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당시 홍대부고 전력이 강하지 않아서 이상민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다.
이후 연세대로 진학했다. 원래는 고려대 진학 예정이었지만, 고대의 구타 문화가 싫어서 고집을 부린 끝에 연세대로 진학했다고. 하지만, 정작 고려대 박한 감독은 구타를 하는 사람은 아니고 , 오히려 연세대 최희암 감독이 구타의 신봉자였으니 망했어요. 본인도 신입생 시절에는 은근히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외곽슛이 좋지 않고 드리블이 높고 파울관리를 못 한다." 라는 혹평을 들으면서도 원 가드로 선배인 문경은, 후배인 우지원, 김훈, 서장훈을 이끌고 코트의 사령관으로서 연세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고, 곱상한 외모와 맞물려 이후 두고 두고 이어지는 오빠부대의 인기를 얻었다. 1993-94 농구대잔치 연세대의 20승 1패 우승의 주역 중의 주역.
이 당시 이상민은 그야말로 패스하는 기계였다. 최희암은 철저한 분업농구를 추구했기 때문에 이상민의 역할은 볼 운반과 리딩에만 한정되었다. 문제는 이상민의 저학년 시절에는 오성식[1]이 있으면서 어느 정도 볼 운반과 리딩을 분담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세대 전성기 때는 주전 5명 중 가드는 이상민 혼자라서 볼 운반과 리딩을 이상민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고교 때 보여줬던 여러가지 장점들이 대학 시절 봉인되어버렸다. 문경은, 우지원, 김훈 등 외곽슛에 능한 스몰포워드 3명이 주전인 상황에서 공격 롤을 부여하기는 어려웠고 설사 부여한다 쳐도 보조하는 슈팅가드도 없는 상황에서 리딩만으로도 힘든 상황이었다. 마찬가지로 파워포워드 없이 홀로 골밑을 지켰던 서장훈도 과부하가 심했다.
그런데 연세대 졸업시즌이었던 농구대잔치 1994~95시즌 풀리그 최종전 對 고려대와의 경기에서 이상민은 후반 5분여를 남겼을 즈음 인사이드로 돌파해 오던 김병철의 레이업을 걷어내기 위해 같이 뜨다 착지할 때 선수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부상을 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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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그 부상장면. 무릎인대가 끊어져 버린 부상이었는데 이상민이 고통스러워서 눈물을 글썽거렸고, 그걸 보고 팬들이 울부짖는 모습까지 당시 뉴스를 탔다.

대학 졸업 후 현대전자에 입단하나, 부상 치료도 시킬 겸 당장보다 프로화 이후를 노릴 겸 현대는 이상민을 바로 상무로 입대시킨다. 이 때 대전 현대의 전설을 같이 만들어 내는 조성원도 같이 입대시켰다.
입대 후 이상민은 그때까지 잠재되어 있던 올라운더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2] 사실 상무에서 본인의 기량이 만개했다기보다는, 최희암의 손길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최희암은 철저한 분업농구를 추구한 감독이라 연세대 시절의 이상민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어느 정도 억제하면서 리딩에 신경써야 했다.[3] 거침 없이 득점을 하고 좋은 운동능력을 앞세워 리바운드를 걷어내고 적재적소에 패스를 찔러넣으며 빛나는 활약을 펼쳤고, 두 번이나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다재다능함을 뽐냈다.[4] 하지만 기아자동차와 연세대로 인해 농구대잔치 우승에는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가 상무에 있던 사이, 한국 농구는 프로화가 되며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했다.

2. 영광의 현대 - KC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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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후 프로팀이 된 현대에 복귀하며 KBL에 데뷔했다. 데뷔 시즌에 전년도 8개 팀 중에서 6강에도 못 드는 굴욕을 맛본 현대를 일약 정규시즌 1위로 올려놓는 기염을 토하면서 1997-98 시즌 정규시즌 MVP의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챔프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이 때는 허재의 투혼이 더 빛나서 챔프전 MVP는 실패. 그러나 이 때를 기점으로 현대는 왕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정규리그 3연패와 두 번의 챔프전 우승이 바로 그것.
팀의 에이스 포인트가드로서 맹활약하며 추승균, 조성원, 조니 맥도웰과 함께 팀의 전성 시대를 이끈다. 다만, 1999-2000 시즌 청주 SK 나이츠와의 챔피언결정전에서 이상민은 로데릭 하니발포스트업과 수비에 털리고 맥도웰은 서장훈에게 잡히며 신선우 감독이 토털 바스켓볼이라는 괴랄한 전략을 들고 나오는 계기가 되었지만, 어쨌든 그 전까지는 정말 팀의 대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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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이 흔들리고, 팀이 KCC로 팔리고 연고지가 변경되는 동안에도 이상민은 굳건하게 팀을 지켰다. 다시 돌아온 조성원, 기존의 추승균과 함께 KCC 소속으로 또 다시 우승을 일궈낸 것.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올스타 투표에서는 무조건 1위 자리를 차지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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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시 세월은 속일 수 없는지 03-04 시즌부터는 부상에 시달리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2003-04 시즌 원주 TG삼보 엑쎄스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며 챔프전 MVP가 되기도 했지만, 점차 하락세가 눈에 띄게 드러났다. 2004-05 시즌에는 챔프전에서 평소에는 본인이 항상 압도하던 신기성에게 털리며 별다른 활약을 못하는 등 팀의 패배를 바라만 보기도. 그래도 하락세를 보이는 와중에도 경기별로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는 일은 종종 있었다.

3. 이적과 마찰


누구나 현대-KCC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은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상민은 KCC에서 은퇴하지 못한다. 서장훈이 FA로 영입되는 과정에서 '''보상선수'''로서 이상민이 삼성 썬더스로 이적했던 것이 원인인데, 이 때문에 KCC는 큰 비판을 받았다.
당시 FA 보상선수에서 제외되는 보호선수는 3명까지 지정할 수 있었는데 우습게도 FA로 이적해온 선수는 자동 보호선수로 지정되며, 보호선수 3명에 자동 포함되었다. 즉, 당시 KCC가 FA로 데려온 서장훈, 임재현은 자동으로 보호선수가 되고, 나머지 보호선수로 선택할 수 있는 선수는 한 명뿐이라는 것. KCC엔 이상민이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프랜차이즈 스타이면서 "소리 없이 강한 남자" 추승균이 있었기에 둘 중 하나는 보호선수에서 제외해야 했다.
그런데 추승균 역시 노장이라 볼 수 있지만 이상민보다 2살 어렸기에 효용가치는 추승균이 더 크다고 KCC쪽에서는 봤고, 그래서 이상민은 보호선수에서 제외되었는데, 당시 감독인 허재의 말에 따르면 '삼성이 설마 노장인 이상민을 고르겠어?' 라는 생각으로 보호지정을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 때 허재 감독은 임재현과 서장훈을 데려오면서 기존 선수단+새 용병들을 합쳐 반지 원정대를 구성하려고 했는데, 이상민의 이적으로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당시 삼성은 이상민보다 신인선수 지명권을 우선 요구했지만, KCC가 가지고 있던 신인선수 지명권은 하승진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지명권이었기에 그것을 거부[6], 결국 삼성은 이상민을 FA 보상선수로서 데려갔다. 저 때 이상민의 입단식 사진을 보면 단장과 감독은 웃고 있지만 이상민의 표정은 좋지 않았으니, 이상민 본인의 심정은 상당히 복잡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프랜차이즈 스타를 헌신짝처럼 버렸다며 KCC 구단과 허재 감독은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7] 이상민의 빈자리를 채운 임재현은 임봉사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이상민보다 못한 활약을 보인 데다, 이적한 이상민이 선봉장으로 그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KCC를 격파하는 상황까지 오자 이상민을 떠나게 만든 KCC는 희대의 뻘짓을 저질렀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8]
그런데 KCC 입장에서 보자면 보호선수로 이상민 대신 추승균을 지키고 신인선수 지명권도 지킨 건 결과적으로 대성공이 되긴 했다. 임재현은 FA로 이적한 첫해에 그야말로 임봉사 모드로 까였지만 이적 2년차부터는 주전과 식스맨을 오가며 들개같이(...) 뛰어다니며 좋은 활약을 보였고 이상민 대신 지킨 추승균은 3년 동안 팀의 기둥이 되어 주었으며 결국 이 둘이 팀이 두 번의 우승을 거두게 만든 공신이 되었기 때문. 거기다 삼성이 이상민 대신 달라고 한 신인 지명권을 지킨 끝에 그걸로 하승진을 뽑으며 대성공을 거두었으니.
결국 이상민의 이적 문제는 팀과 선수의 입장이 갈리며 생긴 어쩔 수 없는 부분일 수도 있다.
KCC로 온 서장훈은 이상민과의 플레이를 원했다는 인터뷰를 해서[9] 주변사람들을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10]
한편으로 허재가 당시 팀 내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던 이상민을 팀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보낸 거 아니냐는 말도 있는데, 일단 허재 본인은 일부러 이상민을 보낸 건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 사태 이후부터 보호선수가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상민이 삼성으로 건너간 후 기사를 통해 KCC에 대해 비판했고, 2010년 은퇴를 결정했을 때 KCC가 일방적으로 등번호 11번의 영구결번을 선언하면서 이상민과 KCC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나고 만다.[11]

4. 삼성으로의 이적 이후


이적한 이후, 첫 시즌에는 기대 이상의 좋은 활약을 보였다. 자신의 최다득점을 깨고 35점을 넣어서 승리에 견인하기도 했다. 결국 그 시즌 많지 않은 시간을 뛰면서 9.8점 5.5어시스트의 준수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쉽게 두 번 다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전성기가 지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삼성 썬더스를 두 번이나 챔피언결정전에 이끌기도 했다.
다만 인기도 여전했고 활약을 보인 경기들도 있으나, 이상민은 부상과 체력 저하로 더 이상 시즌 내내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일 수는 없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 삼성을 이끈 것은 안준호 감독의 팀 세팅과 테렌스 레더와 같은 좋은 외국인 선수의 힘이 더 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대신 삼성은 그 전까지는 서울에 있는 팀 정도였는데, 이상민의 영입 이후, 인기 팀으로 급부상하는 가외적인 소득을 얻기는 했다.

결국 2009~10 시즌이 끝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직전까지도 올스타 투표 1위는 이상민이었다.'''
[1] 오성식도 원래 포인트 가드를 보는 선수지만 슈팅 가드도 소화 가능했다. 오성식과 이상민 둘을 동시에 활용하기 위해서 같이 나올 때는 오성식이 2번을 소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성식은 국대에서도 허재 백업으로 2번을 소화하는 경우가 많았다.[2] 이상민은 홍대 부고 시절에도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준 만능 가드였다.[3] 그래도 최희암은 이상민의 재능을 아껴서 그나마 이상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둔 편이었다. 문경은이나 우지원은 거의 뭐 하루하루 슛 쏘는 기계(...)[4] 이상민의 트리플 더블은 당시 한국 남자 농구선수 중에는 최초로 기록한 걸로 알려졌지만, 2012년 들어 이전 기록들이 전산화되는 과정에서 허재, 이원우, 서장훈이 이상민보다 앞서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음이 발견되었다[5] 은퇴가 임박한 순간에도 이상민은 올스타 투표에서 1위를 고수했다. 아마도 9년 연속 올스타전 투표 1위는 불멸의 기록이 될 기록일 것이다.[6] 실제로 1픽에 걸리면서 하승진을 지명한다. 그리고 서장훈은 하승진과의 출전시간 분배 문제로 트러블이 생기며 전자랜드로 이적한다.[7] 심지어 서초동 KCC 본사로 이상민 팬들이 시위를 벌였을 정도로 이 이적에 대한 파장은 컸다.[8] 그리고 남의 레전드를 그냥 데려간 삼성 역시도 엄청난 욕을 먹었다. 그렇지만 삼성은 기존의 강혁-이정석에 이상민을 합해 3가드 라인을 구축하여 2년 연속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었다.[9] 둘은 전술했듯 연세대학교 선후배 사이다. 게다가 서장훈은 앞서 SK에서 FA 자격으로 삼성으로 옮길 당시 본의 아니게 선배 우지원을 날려버렸던 터라(삼성이 우지원을 보호선수에서 제외했고 SK가 그를 보상선수로 지명한 뒤 곧바로 김영만과 맞트레이드했다.) 이상민이 자신 때문에 팀을 떠나게 된 것이 더욱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10] 결국 2년도 안 되어 허재 감독과의 마찰, 하승진 등장으로 인한 출전 시간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으며 전자랜드로 트레이드된다.[11] 원래 삼성에서 이상민의 은퇴를 기념해 11번을 영구결번으로 하려 했으나 KCC가 영구결번을 선언하면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2018-19 시즌까지 삼성에서 11번을 단 선수는 없었다. 도중에 서장훈과 이상민의 번호로 11번을 영구결번하려 했으나 서장훈에게 삼성은 잠시 거쳐가는 팀 정도였고 이상민은 KCC에서 이미 결번이 되어있자 발표 몇 시간 만에 철회하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결국 2019-20 시즌, 감독 이상민의 포지션인 포인트가드로 뛰는 연세대 후배 천기범이 삼성의 새 11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