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호
1. 소개
대한민국의 농구인.'''밤새워 친 고스톱도 따면 피곤하지 않다'''.
안준호
한국농구연맹 경기이사 및 전무이사이자 현 경희대학교 스포츠지도학과 겸임교수. 강을준 감독과 함께 KBL 양대 개그 감독으로 유명했다. 별명은 안간지, 안어벙, 가가멜(...) 등등. 하지만 단순히 개그에만 능한 감독으로만 봐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인물.
2. 경력
2.1. 선수 시절
전남 담양 출신으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3] 서울로 유학을 가서 고등학교 1학년 때 비로소 농구를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탓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경희대에 진학하면서 실력이 늘어 국가대표가 될 수 있었고, 국가대표가 되어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이런 유명세 때문에 은퇴 후에 비교적 쉽게 코치 자리를 얻을 수 있어서 공백 없이 계속 농구계에 남았다.
2.2. 지도자 시절
1986년 은퇴하자마자 코오롱 여자농구단 코치를 맡아 정주현 농구부장 겸 감독[4] 을 보좌하며 1995년까지 계속 재직했다. 재직 기간 동안 여자 선수 조련에 명성을 얻으며 1994년 여자농구 부분 지도자 상을 수상하는 등, 이미 여자농구계에서는 인정받는 코치였다. 여자농구에 한손 슛을 도입하고, 패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선구자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안준호였다. 즉, 절대 개그로 코치, 감독을 유지한 인물이 아니다. 그 결과 1995년 10년간의 코치 생활을 끝내고 감독으로 승진했다.
여자 농구계에서 인정받는 그를 마침 폭발적인 인기로 팀 창단이 이어지던 남자 농구계에서 그냥 보고 있지 않았고, 결국 당시에 새롭게 창단했었던 진로 팀에서 그를 전격적으로 신생 팀 감독으로 영입했다. 그 대신 막 내정된 대한민국 여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는 물러나야 했다. 남자농구로 옮기는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
하지만 진로와 이를 인수한 SK 나이츠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탓에 중도에 경질되었다. 1997-98 시즌에는 누구나 예상 가능한 최하위 전력이라 팀의 기반을 어떻게든 만드는 과정에서 이 당시 KBL 1위 기록인 11연패도 당해가며[5] 시즌을 진행했지만, 바로 다음 시즌에 10경기도 안 되어서 짤리고 만다. 서장훈, 현주엽을 가지고도 하위권으로 쳐졌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짤린 시점에 서장훈과 현주엽은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로 차출된 상태였었다(...).
여자농구계에서 능력을 인정받던 인물이라 여자농구계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이 당시 여자농구는 13개 팀이 5개로 줄어드는 상황이라 내리막으로 돌입한 탓에 한국스포츠TV 해설가로 잠시 살아야 했다. 이후 2000년 삼성 썬더스의 코치로 잠시 부임해 김동광 감독을 보좌해 우승을 차지했지만, 또 2003년에 코치 계약 해지 크리.
2.2.1.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 시절
그런데 2004년에 결국 서울 삼성 감독으로 다시 복귀했다. 이 때부터가 흔히 아는 안준호 감독의 이미지가 형성된 시기다. 무엇보다 작전타임에서 좋게 말하면 민주적인, 나쁘게 말하면 선수들이 개기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었다. 확실히 작전 타임에서 영 말이 잘 안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긴 말 필요 없이 이 영상의 3분 33초부터 보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혹자는 고려대학교 농구단의 박한 전 감독과 흡사하다고 한다[6] .안준호: 아 지금 가면 안돼!
이상민: 아 되지 왜 안돼!
안준호: 돼? 돼? 돼? 그래?
이상민: 아 된다니까!
그 외에도 사자성어로 시즌 중 본인 팀 표현하기, 2008년 원주 동부 프로미와의 챔프전에서 치악산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에 간다 드립 등등... 이 때문에 별명은 안어벙, 순식간에 개그맨이 되었다.
그래서 안준호 감독이 심판 판정에 분노해서 선수들을 벤치로 불러들이고 몰수패를 각오하고 아예 선수단을 데리고 경기장을 나가버리자 주된 반응이 '''오죽하면 저 사람 좋은 안준호가 저러겠냐'''라며 심판이 뭔가 잘못했을 거란 반응이었을 정도(...).
'''하지만 이걸로 안준호 감독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무엇보다 안준호가 있을 때의 삼성은 '''재임기간 내내''' 플레이오프를 밟았고, 우승 1회, 준우승 2회를 기록하며 모기업 공장이 있는 수원이 아닌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농구팀으로 당당하게 자리잡았다.
무엇보다 안준호 감독의 능력은 바로 판 짜기에 능하다는 것. 대표적으로 2005-06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서장훈과 올루미데 오예데지의 더블 포스트를 상대할 준비를 하던 모비스에게 전혀 예상 외의 강혁 - 네이트 존슨의 2 대 2 플레이를 주력으로 삼아 허를 찔러버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 이 2005-06 시즌에 삼성은 4강 플레이오프부터 챔피언결정전까지 7전 전승으로 모두 이기며 KBL 역사상 최초의 전승 우승의 위업을 달성한다.
선수들의 기량 파악에 능하고,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시즌을 잘 꾸려간다는 장점이 있다. 포워드진이 부족할 때는 아예 3가드 시스템을 구사해서 상대를 누르기도 했는데, KBL에서 본격적으로 3가드 2센터 시스템을 쓴 것은 안준호 감독이 처음. 그 외에도 선수들이 개겨도 대충 받아주면서 팀 내의 분란의 요소를 잘 막아낸 것도 높이 살 부분이다.
작전 타임의 경우, 안준호 감독 자신은 이미 정해진 패턴을 선수 이름 부르면서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말이 영 개그화되는 것이 문제일 뿐. 그리고 정해진 패턴과 시즌 운용에 있어서는 탁월한 감독이다. 다만, 순간적인 전략과 임기응변에 있어서 다소 아쉬운 점이 드러났을 뿐이지, 선수들에 맞춰서 판을 짜오는 것은 KBL에서 손꼽히는 감독이다.
무엇보다 서울 삼성은 안준호 감독이 있을 때, 7년 연속 PO 진출 및 세 번의 챔프전 진출, 1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아, 그리고 2010-11 시즌 챔프전 진출에 실패했다고 그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대신 임명한 김상준 감독 체제에서 삼성은 경기력이 동네 농구 수준으로 떨어지며 14연패의 수모와 함께 2011-12 시즌 중 2011년엔 단 한 번도 홈경기 승리를 못 했다. 7연속 포스트시즌에 개근하던 강호가 한순간에 꼴찌로 시즌을 마감한 것은 덤. 결국 시즌이 끝나자마자 김상준 감독은 자진사퇴하고 김동광 감독이 재등용되었지만, 김동광 감독도 팀을 추슬리기에는 더딘 편이었고, 결국 2013-14 시즌 도중 자진사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이상민을 감독으로 바꾼 이후 15-16 시즌부터 확실히 암흑기를 탈출할 수 있었다[7] .
게다가 안준호 감독 재임 기간 동안 삼성이 모비스에게 강했다는 것도 재평가되었다. 7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서 두 번 만나서 다 이겼으며, 정규시즌에도 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0] . 유재학 감독의 모비스를 상대로 정규시즌 26승 16패를 기록했으며, 플레이오프에서는 7승 1패로 총 33승 17패를 기록했다. 상기했다시피 플레이오프에서는 그냥 이긴 게 아니라 역대 최초의 기록을 세웠는데 챔프전 최초 4전 전승과 4강 플레이오프 최초 1위팀을 이기고 챔피언결정전 진출이 바로 안준호 시절의 삼성이 유재학의 모비스를 상대로 세운 기록이다. 그가 나가고 난 뒤 4시즌 동안 삼성의 모비스 상대전적은 2승 22패인데다 그 2승도 2011-12 시즌의 김상준 체제 아래에서 이뤄낸 것이다. 이 또한 이상민이 15-16 시즌에 모비스전 연패를 간신히 끊어냈다[11] .
다만, 이 시기에 팀이 하도 잘 나간 덕에 잘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안준호도 비판받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신인 육성'''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성기에 돌입한 멤버들을 가지고 우승을 이끌었지만, 외국인 선수나 이상민, 이승준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보강 없이 멤버를 그대로 끌고 가면서 성적은 점점 내려갔고, 사퇴 이후에 팀의 고령화 문제가 터지며 암흑기로 가는 원인을 만들었다. 성적 때문에 불리한 드래프트 픽을 받아 어쩔 수 없다는 평가도 있지만, 비슷하게 픽 운이 없었던 전자랜드가 정병국을, 모비스가 함지훈을, kt가 박상오 등을 발굴한 걸 보면 설득력이 좀... 결정적으로 안준호 시기에 지명한 선수들 중 그가 떠난 이후에도 남아 있던 선수가 이관희, 이시준 밖에 없다는 걸 보면 확실히 육성 쪽에선 별로라는 걸 보여준다.
2.2.2. 통산 감독 성적
2.3. 행정가 시절
삼성 감독을 그만둔 후 2011년 9월 1일 KBL 경기이사에 임명되고, 2년 뒤인 2013년 6월에는 전무이사직이 신설되자 해당직에 임명된다. 2014년에 미국 뉴욕의 세인트 존스 대학교의 객원코치로 1년간 연수를 갔다.
3. 기타
- 경기 중 위의 사진처럼 앉은 상태에서 코트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본인은 앉은 상태의 각도에서 코트가 더 잘 보인다고...
- 상기했다시피 울산 모비스의 유재학 감독 상대로 저승사자와도 같은 상대전적을 자랑한다. 특히 플레이오프에서는 7승 1패로 압도적 우위(이 중 4승은 2006년 챔결 때 스윕승으로 기록했다)를 기록 중이다. 그것도 2번 모두 하위팀이 상위팀(정규리그 1위 팀)을 누른 업셋 승리라는 게 더 의미가 깊다.
- 박한 前 고려대 감독처럼 기절초풍한 어록이 많다.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으니 유념하고 보자. 요기서 보자.
- 2019년, 모 아파트 입주자회장에 당선되었다. 삼성 감독 시절부터 10년 넘게 입주했다고 하며, 아들들도 같은 아파트의 다른 동에 살고 있다고 한다.
4. 관련 문서
[1] 예전에는 安俊'''護'''였다가 1990년대 이후의 기사에서는 安俊'''濩'''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2] 삼성 썬더스 감독 시절 교회 집사로도 활동한 적이 있다. 출석하는 교회는 명성교회.[3] 어머니가 48세에 태어났으며, 바로 위 누나와는 11살 차이가 난다. 어머니는 2008년 11월에 별세하셨다.[4] 1997년 퇴임 후 일본 샹송화장품 여자농구단을 지휘하며 일본 여자농구 발전에 기여를 했다.[5] 이 기록은 불과 1년만에 대구 동양 오리온스가 그 '''전설의 32연패로 기록을 3배 가까이 늘여 놓는다'''.[6] 만약 김응용, 김성근이나 허재, 전창진, 유재학, 이정철 같은 감독에게 저랬다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해보라(...).[7] 그런데 그 부흥기도 얼마 가지 못했다. 2016-17 시즌 준우승을 한 후 하위권 전전이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모기업도 제일기획으로 넘어가서 투자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물론 농구야 샐러리캡 제도 때문에 크게 영향을 받는 건 없다지만...[8] 역대 최초 챔피언결정전 스윕승이다.[9] 역대 최초 정규리그 1위팀이 4강에서 탈락했다.[10] 후에 안준호 감독이 물러난 뒤 후임 감독들이 모비스에게 철저히 승수 자판기로 전락당하면서 22연패까지 당했음에도 삼성과모비스와의 상대전적이 비등했다.[11] 그리고 이상민은 그 다음 시즌 모비스를 상대로 4승 2패의 성적을 거두면서 6년만에 모비스 상대 우세를 기록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111:70(전반 스코어 64:20으로 KBL 한 경기 전반 최다 점수차 승리)으로 시즌 최다 점수차 승리를 기록한 건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