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1. 개요
2. 역대 이왕
2.1. 덕수궁 이태왕(德壽宮李太王)
2.2.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
2.2.1. 창덕약궁 이왕세자(昌德若宮李王世子)
3. 같이보기


1. 개요


'''이왕'''(李王)은 대한제국경술국치로 패망한 후 일제가 옛 대한제국 황실일본 황실의 일부로 편입하기 위해 만든 지위로, 왕공족의 수장이었다.[1] 왕공족은 이왕가라고도 불렸다. 자세한 내용은 왕공족 문서로.
일제는 한반도에서의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해 구 황실을 명목상 황제 가문인 일본 황실보다는 낮고 공후백자남 오등작을 가진 다른 화족들보다는 높은 친왕급 위치로 대우했다. 이 신분을 왕공족이라고 하며, 이왕은 이 왕공족의 수장이다. 칭호들도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불과 13년만에 다시 격하되어(...), '황태자'가 '이왕세자'로, '폐하'가 '이왕, 이태왕 전하'로 격하되었다. 넓게 보면 한국 황실이 일본 제국 화족(귀족)에 편입된 것이었다.
한국 황실은 원래 갖고 있던 재산 + 일본 정부에서 제공하는 자금과 지위 덕택에, 막대한 자금을 운용할 수 있었다. 이방자 비가 이왕가에 시집 간다니까 다른 일본의 황족들이 부러워했단 이야기가 있을 정도. 링크는 이왕가가 운용한 재산의 규모에 대한 2006년 동아일보 기사.[2]
일본은 이왕가에게 품위유지비로 엄청난 돈을 줬는데 심지어 1940년대 2차세계대전으로 자국민이 쪼들리면서까지 계속 돈을 줬다.
이왕가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며, 이러한 일제의 녹을 받는 이왕가의 존재와 독립운동에 반대 내지는 소극적인 황족들에 대한 실망으로 인하여 독립운동[3] 중에도, 해방 이후에도 제정 복고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게 된다. 광복 이후 일본은 한반도를 반환한 데다 1947년 신적강하를 거쳐 이왕가의 지위가 일본 국내에서도 사라졌고, 1948년 한반도는 남쪽이든 북쪽이든 옛 황실에 우호적이지 않은 정부가 출범한다.[4] 이로써 이씨 황족들은 한일 양국에서 모든 실질적 지위를 상실한다. 그들의 막대한 재산은 국가에 환수되거나 공중분해되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2. 역대 이왕



2.1. 덕수궁 이태왕(德壽宮李太王)


도쿠주큐 리 타이오.
묘호
이름
재위기간
비고
고종(高宗)
이희(李熙)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태황제에서 덕수궁
이태왕으로 강등(격하)

2.2.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


쇼토쿠큐 리오.
대수
왕명
이름
재위기간
1대
순종(純宗)
이척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6일
2대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
이은
1926년 4월 27일 ~ 1947년 10월 18일

2.2.1. 창덕약궁 이왕세자(昌德若宮李王世子)


쇼토쿠노와카미야[5] 리오세이시.
대수
시호
이름
재위기간
1대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
이은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6일
2대
회은황세손(懷恩皇世孫)
이구
1931년 12월 29일 ~ 1947년 10월 18일

3. 같이보기




[1] 이는 나라를 판 장본인은 고종이며, 이완용 등은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거론된다. 이완용 등도 일제로 부터 작위를 받지만, 정작 가장 높은 작위는 고종과 순종이 받은 이태왕과 이왕이다. 이왕가는 일제시대가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2] 위 기사에 따르면 이왕직에서 관리하던 전답만 1억5천만 평에 이르며 헥타르로 계산하면 5만 헥타르에 달한다. 여의도가 주변 한강 둔치를 합쳐야 450헥타르인 걸 감안하면 여의도의 100배에 달하는 넓은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던 셈이다.[3] 임시정부 부터가 대한제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4] 남북 모두 공화정을 채택했다. 남한은 이승만이 자신의 지지도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해 옛 황족들의 귀국을 완강히 거부했고, 이미 국내에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창덕궁에서 살지 못하도록 막는 등 복권의 여지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북한은 조선왕조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5] 와카미야(약궁, 若宮)는 왕실 내 궁가의 후계자를 일컫는 말이다. 쇼토쿠 자체는 이왕의 거처를 나타내는 것으로 일본 황실의 궁호와는 다른 것으로 인식되고 쓰였으나, 후계자를 지칭하는 와카미야를 뒤에 붙일 때에는 궁호에 준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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