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1962)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내 구 대한제국의 직계 황족이자 황위요구자이다. 현재는 대한제국의 명목상 황실수장으로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총재, 대한황실문화원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본명은 이상협(李相協)으로 의친왕의 9남 황손 이갑(이충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재는 이구의 명목상 양자로 대한제국 황실의 '''황사손(皇嗣孫)'''이자 대한제국 황실 수반(수장)이다. 즉, 매우 희박하긴 하지만 만일 대한제국 황실이 복원될 경우 황제가 될 사람이다. 이 때문에 네이버 인물 검색상 분류는 다름 아닌 '왕가'이다.
1.1. 왕위 요구자인가?
2021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 공화국이 확고히 자리잡혔고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다수의 민주화 운동들을 겪으며 나라의 모든 주권권력이 황제나 귀족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국민들 스스로가 잘 인식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향후 남북통일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므로 형식적으로라도 제정복고가 일어날 수 없다. 어차피 이 나라에서 제정 복고를 주장해봤자 국민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소에 붙일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2000년대 이후로 항상 대한민국 정계에서 나오는 10차 개헌 떡밥에서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제7공화국'''이 목표이지 '''대한제국 제2제국'''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사손 이원은 공식적으로 대한 황실 복원을 주장한 바 일절 없다.'''[8] 따라서 이원이 허황된 야욕 때문에 황사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안된다. 황실 복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무리는 스스로 황손을 참칭하는 일부와 의친왕 10남 이석이나 의친왕 차녀인 이해원 정도가 있다. 더욱이 황사손이란 과거 민가에서 가문의 제사를 봉양하기 위해 친척 중에 봉사손이라고 뽑아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단순히 대한 제국 황실의 대통이었던 이구의 사망으로 발생한 제례 공백을 이원이 물려받아 모든 제례를 '봉행(奉行)'하는 것이다.
다만 이원이 황제 제위를 요구한 적이 없음에도 왕위 요구자로 분류되는 이유는 국제적으로 구 황족들(특히 유럽) 등의 폐위된 왕손들이 왕가를 잇고 있는데, 유럽의 공화국들은 일단 이들에게 명목상 왕가로 인정해주는 이유가 있어서이다. 그러니까 저 '요구자'라는 호칭은 그냥 '''국왕이나 황제였던 사람의 후손 중 왕정이 유지 되었다면 그 지위를 계승했을 인물이라는 가정'''이지 무조건 황위를 요구한다는 것이 아니다. 번역어가 본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주장하든 주장하지 않든 싸잡아서 왕위 요구자로 묶는 측면이 없잖아 있다. 물론 대한민국이야 애당초 유럽하고 상황이 다른 데다가 역대 민주화 운동 등으로 황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향후 남북 통일 시 통일 대한민국을 수립할 때 황가가 왕위를 주장해봤자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되기 때문에 가능성 자체가 없지만 말이다
2. 이구 사망 이전
본명은 '''이상협(李相協)'''. 1962년 9월 23일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에서 태어났다. 1981년 상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 아버지 이갑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공과대학교(New York Institute of Technology, 약칭 NYIT)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미국 케이블 회사인 HBO에서 6년간 PD로 일했다. 1990년 귀국 후엔 광고 회사 금강기획[9] 에서 5년 동안 제작업무를 담당했으며, 이후에는 케이블 채널 현대방송에서 PD로 일했다. 당시 정보통신 발달과 함께 발전한 뉴미디어와 케이블방송에서 가능성을 보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뉴미디어 사업본부로 들어갈때 면접을 본 사람이 다름아닌 정몽헌 前 현대그룹 회장(당시에는 현대전자 대표이사)이었다고 한다.
결혼 관련 케이블 채널인 뷰티TV에 설립 멤버로 참여하고, HOT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는 관련 캐릭터 사업을 담당했다. 이후 현대홈쇼핑에서 여러 팀의 부장으로 재직하면서[10] 간간이 언론과 사업 관련 인터뷰도 하는 등## 아주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집도 서울 종로 한 가운데가 아닌 일반 아파트에 거주했었다.
참고로 방송 산업과 홈쇼핑 산업은 대중들의 기호를 누구보다 빨리 파악하여 유행을 선도하는 산업이다. 즉 과거와 전통은 커녕 오히려 ''' 누구보다도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3. 이구 사망 이후
그러다 2005년 7월 16일 슬하에 후손 없이 자기가 태어난 도쿄 구저택이 있었던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신관 객실에 머물다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구의 사후 양자로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 의해서 정식 지명되었다.[11] 그러나 현행 민법상 사후 양자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법적인 양자 지위는 없다.[12] 양자로 지목된 이후 황사손(皇嗣孫)[13][14] 이 된 이래 현재 조선왕릉이나 종묘에 대한 전반적인 제사/제례를 맡고 있다.
(명목상) 양자 입적 후 삼년상을 치렀고, 현재는 조선 왕실의 5대 제향 등에서 초헌관(初獻官)을 일임, 2008년부터는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의 명예총재를 맡고 있다.[15][16] 원래 전공인 미디어 컨텐츠를 바탕으로 황실 문화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릴 목적으로 사단 법인 조선 왕실 문화원과 대한 황실 문화원을 세워 각각 이사장과 총재를 맡고 있다.
원래는 회사 생활과 황실 행사를 병행하려 했지만 황실의 그 많은 제례 행사와 회사 일을 도저히 같이 하기 힘들어 회사를 그만뒀다고.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행사만으로는 밥벌이가 안 되기 때문에 현재 생계는 여러 회사의 경영컨설팅(management consulting)을 하며 유지하고 있다.[17] 단, 종약원과 문화재청 등에서 활동비 명목의 예산 자체는 꽤 나온다고.
아들이 2명 있다.[18] 아들들은 이원이 황사손이 되었을 때까지 자신들이 대한제국 황실의 일원인 것 자체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 순종효황제에겐 자녀가 없었고 황실 대통인 의민황태자 계열도 이구 사후 가계가 끊겼으니 생존한 황손은 오직 의친왕가뿐인데, 일제강점기 때 이미 성인이었던 고종태황제의 3세대, 이우의 자녀 이청[19] , 사동궁을 계승하게 된 이곤의 자녀 이준[20] 등을 제하면 정부 수립 후 기실 일반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친왕의 묘역도 최근까지 비공개 지역이었고 오직 (고종으로부터) 3세대, 일부 4세대까지만 제사에 참반하는 정도였으니 그럴 만하다. 애초에 이원 본인도 19세 때 미국에 이민가면서야 자신의 뿌리에 대해 제대로 알았다고 하니(...).[21] 출처. 2000년대 후반, 이갑 황손이 적극적으로 가계를 모아 제향에 오가게 하고 언론에 오르내린 이후에야 현재에 이른다.
'''황사손(皇嗣孫)''' 이원은 아들들이 자신의 뒤를 이을지 말지는 전적으로 아들들의 뜻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두 자녀에게 황사손 승계 의사가 없다면 전례처럼 다시 의친왕계 근친 중에 차세대 황사손을 뽑을 가능성이 높다.[22]
종묘 제례 등 전통의식 수행 외에 황실 관련 문화재 반환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인터뷰 기사 #1, #2, #3. 이원은 황사손 직위에 오른 이래 대한제국 황실 복원을 직접적으로 주장하지는 않고 있지만 황실의 문화를 전통이자 문화컨텐츠의 일종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2015년부터 개최된 궁중문화축전도 기획했다.
이원 본인이 창덕궁 낙선재(樂善齋)[23] 에 거주하면서 관광 안내를 하는 방안을 매년 제안했으나 문화재청 측에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아이디어의 배경은 '살아 있는 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황실 복원 및 입헌군주제 관련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은 거의 하지 않았던 이원의 활동 중 꽤나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4. 기타
2020년 10월 개최된 궁중문화축전 프로그램 중 하나인 '헬로우 황태자'에 출연하여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Ep1 살아있다! 대한민국에 황태자가? # - 종묘제례 주관자로서의 삶
- Ep2 낙선재, 슬프지만 아름다운 #
- EP3 못다 핀 오얏꽃, 대한제국 #
- 팟캐스트 인터뷰 # - 정영진, 최욱과 함께했으며 여러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다.[24]
5. 참고
[1] 2005년 7월 16일 의민태자의 아들 이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전주이씨대동종약원으로부터 공식 양자로 지명받고, 황사손이 되면서 항렬에 맞춰 개명하였다.[2] 법적인 양아버지는 아니다. 자세한 것은 후술.[3] 李鉀. 1938 ~ 2014. 의친왕 9남. 아명은 충길(忠吉), 호적명은 항렬에 따라 해룡(海龍)이며, 영문이름은 찰리(Charley)이다. 한국어 위키에는 정강재(正康齋)가 호로 올라와 있는데 민간 모임인 우리 황실 사랑회에서 지어 올린 것이다.[4] 1939 ~ 2018.[5] 李炡. 본명은 이상우. 기혼.[6] 現 미국 거주. 기혼.[7] 대한황실문화원 홈페이지 및 SNS.[8] 오히려 인터뷰에서 자신은 민주주의 안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본인이 가지는 황사손이라는 책임을 다한다고 답했다. 황실 적통으로서 황사손은 조선,대한제국의 3대 의례인 종묘제례, 환구대제, 사직대제와 조선 왕릉에서 지내는 제사를 관장한다.[9] 정주영 시절 현대그룹의 광고기획을 위해 1982년 설립된 기업[10] 후술할 황사손 결정 당시에는 상품2본부장이었다.#[11] 장남 이건(일본명 모모야마 켄이치)는 일본으로 귀화했고, 2남부터 7남까지(이우, 이방, 이창, 이주, 이곤, 이광)는 이미 각각 출계하거나 의친왕가를 잇게 되었고, 8남 이현은 독신이었던 터라, 사실상 9남 이갑 쪽이 가장 서열이 높긴 했다.[12] 하지만 명목상이나마 양자로 대통(大統)을 계승했기에 홍유릉 내의 회인원 제향에서도 직접 초헌(初獻)하며, 공석에서는 회은황세손을 '아버님'으로 호칭한다.[13] 황사손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봉사손(奉祀孫)이라고 칭한다.[14] 그러나 회은 황세손까지는 생전에 입국 절차, 사후 장례 행렬 등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사실상 구 황실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으므로 황사손 이원을 단순히 여염집의 봉사손처럼 치부하는 것은 멸칭에 가깝다.[15] 조선의 왕실과 단순 전주 이씨의 종친회는 이미 조선 시대부터 족보와 제향 모두 분리되어 있었으나 도리어 현재는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에서 이화문(오얏꽃🌸)을 심벌로 사용하고 조선의 5대 제향 및 조선 왕릉 제향 전반을 도맡게 되었다.[16] 더욱이 2000년대 중반 - 2010년대 초반에 황실 숭모 사업을 시도한 민간 단체가 여럿 생기며 황손 가계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오히려 종약원에서는 "황손들을 일반 전주 이씨 방계처럼 의친왕파로 분파시키자!"는 성토까지 있었다. 전주 이씨 종친회인 대동 종약원은 일찍부터 왕실에서 분파해 그 후손의 수가 많은 파, 그중 특히 효령대군파의 입김이 강하다.[17] 사실 이것도 이원 황사손이 어느 정도 능력이 되니까 가능한 일이지 앞으로도 명목상의 황실을 이어나가려면 생활비 문제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18] 장남 이권이 1998년생이다. 현재 25~26세.[19]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부에서 식민지 이왕직의 사후 재산 등을 정리가 아닌 대한제국 구 황실 인사들을 탄압(일본에 있는 구황족 입국금지 등)하면서 멋대로 상의없이 국고로 환원, 귀속했다.[20] 1961년생.[21] 가끔 할머니(의친왕의 부인)께서 가끔씩 ‘네 몸에는 왕가의 피가 흐른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지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고 한다. 이민(유학)가면서 한국에 언제 다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어 아버지 이갑이 그때서야 제대로 얘기를 해줬다고.[22] 만약 승계 의사가 있다면 이원의 장남인 이권이 그 다음 황사손이 될 가능성이 높다.[23]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 등이 1980년대까지 여기서 거주했다.[24]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 이원은 국가로부터 지원금, 급여, 의전 등 일체 받는것이 없다. 다만 종묘제례같은 전통행사는 문화재청 활동비로 지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