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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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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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가족 사진.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황제, 덕혜옹주, 영친왕, 고종황제)
1. 개요
大韓帝國 皇室(皇族)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비와 직계비속들을 설명하는 문서.
2. 고종황제
2.1. 적출
2.2. 서출
3. 순종황제
순종은 아이를 갖지 못 했는데, 그냥 몸이 약해서 아이를 갖지 못 했다고도 하고, 김홍륙의 커피독살미수사건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면서 성불구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첫 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에 사망했고, 이후 1906년 두 번째 태자비로 순정효황후가 입궁하였다. 따로 후궁은 두지 않았다.
4. 영친왕 계
영친왕은 의친왕보다 20살 정도 어린 동생이긴 하지만, 순종이 '''황태자(皇太子)'''로 봉하였기에 일단 황실 직계적통은 영친왕에게 있다.
회은 황태손(사시) 이구는 자식을 갖지 못했고, 줄리아 멀록과는 1982년 이혼했다. 양녀로 이은숙(李恩淑, Eugenia Unsuk, 1959년 ~ )이, 사후 입적으로 황사손 이원(李源)이 있다.
5. 의친왕 계
5.1. 적출
의친왕은 적자녀를 갖지 못했으며, 이건과 이우만이 적자[8] 로 인정되었다.
5.2. 서출[9]
6. 같이보기
[1] 이후부터 언론 등에서 통칭 '황손'으로 불린다. 의친왕은 생전에 자녀들에게 아명, 호적명, 황실명을 지어줬는데, 황손들 각자의 입장, 경우에 따라 통용하는 이름이 제각각이므로 아래의 표 역시 성명이 정돈되어 있지 못하다. 통상적으로 외자 이름이 황실명, '이해○'으로 된 이름이 호적명(李海○, 명목상 덕흥 대원군파 17손 항렬)이며, 그외 2음절 이름이 사동궁에서 집안 사람들끼리만 쓰던 아명이다. 단, 의친왕의 손자, 손녀들은 외자여도 황실명이 아니다. 정확히는 황실 인물이 아니므로 없는 것.[2] 항문이 막힌(쇄항증) 기형아로 태어났다.[3] 사단 법인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이 사적으로 '의민(懿愍)'이라는 시호를 올리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종묘 정전에 배향이 되어 종묘에는 '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으로 모셔져 있다.[4]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는 회은황세손(懷隱皇世孫)[5] 이구와 이주아의 양녀.[6] 전주이씨대종약원으로부터 사후 양자로 지명되어 명목적인 대한제국 황실 수장의 계승권을 부여받아, 원래는 의친왕의 손자였으나 영친왕의 아들인 황세손 이구에게 사후 입적되어 상징적인 계승자(왕위 요구자)로서 법통을 잇게 되었다.[7] 의친왕의 여러 서자녀를 검증, 가계를 정리했다. 서자녀들로부터는 '사동궁 큰어머니'로 불렸다.[8] 정확히는 일제의 이왕가로부터 황족 인증을 받은 것.[9] 이후부터 언론 등에서 통칭 '황손'으로 불린다. 의친왕은 생전에 자녀들에게 아명, 호적명, 황실명을 지어줬는데, 황손들 각자의 입장, 경우에 따라 통용하는 이름이 제각각이므로 아래의 표 역시 성명이 정돈되어 있지 못하다. 통상적으로 외자 이름이 황실명, '이해○'으로 된 이름이 호적명(李海○, 명목상 덕흥 대원군파 17손 항렬)이며, 그외 2음절 이름이 사동궁에서 집안 사람들끼리만 쓰던 아명이다. 단, 의친왕의 손자, 손녀들은 외자여도 황실명이 아니다. 정확히는 황실 인물이 아니므로 없는 것.[10] 1930년 부친으로부터 공(公)의 직위를 받았다. 2차대전 후 재일 한국인으로 남은 작은 아버지 영친왕과는 달리 아예 일본으로 귀화하여 일본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11] 6살 때 당숙인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되어, 공(公)의 직위를 받았다. 일본군 복무 도중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폭으로 인해 병원에서 투병 중에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사망했다.[12] 이 사람이 대한제국 황실 복원 문서에 나오는 여황(女皇)이다. 이해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13] 미국 대학 강연에서 "나는 프린세스가 아니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또 황실복원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이해경 여사로 알려져 있다.[14] 이 사람은 황사손(皇嗣孫)으로 불리는 명목상 대한제국 황실 수장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대한황실문화원의 명예총재이다. 봉사손은 이원을 황사손으로 인정하지 않는 측이 사용하는 명칭. 본명은 이상협이다. 2005년 당시 이구의 사후 양자로 들어가서 화제가 됐었다. # 다만 민법상 '''사후 양자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 참고로 이 사람은 2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15] 가수, 방송인으로 유명한 그 사람 맞다. 이해석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5년 회은황세손 이구가 타계할 때 의친왕계 후손들과 상의없이 의친왕의 8남 이갑씨의 아들 이상협(이원)을 멋대로 사후양자로 입적했다고 하길래 노발대발하여 전주이씨대종종약원 사람들과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러려니 해서 지금은 별다른 마찰은 없다.[16] 일제강점기에 대한제국 궁가들 중 황실과 가까운 집안은 왕공족이 되었다.[17] 일제강점기에 대한제국 궁가들 중 황실과 먼 집안은 조선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