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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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친왕(의민황태자)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다. 혼혈로서 대한제국의 직계 황족이자 마지막 적통 직계손이었다.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이 올린 사시(私諡)는 자인온유덕성순수회은황세손(慈仁溫裕德性純粹懷隱皇世孫)이며 줄여서 '''회은황세손'''으로도 부른다.
2. 사시(私諡) 논란
아버지 영친왕과는 달리 공식적으로 황태자로 봉해진 적이 없다. 아버지 영친왕은 대한제국이 존재하던 시절에 태어났지만 이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에 영친왕의 신분은 이왕(李王)이었으므로 이구는 황태자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조선령 '''이왕세자(李王世子)'''로 봉해졌다.
그래도 당시 대한제국 황태자의 하나 뿐인 아들이고 명목상 황실 후계자였던 그를 달리 부를 호칭이 필요했다. 그가 생전 가졌던 지위 호칭은 이왕세자인데, 일제가 부여한 이왕이라는 작호를 대한민국 시대에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등장한 게 황제의 손자라는 의미인 '황태손'과 왕의 손자인 '왕세손'이 합쳐진 '황세손'. 이도저도 아닌 이 명칭에 논란이 많다. 문화재청의 입장은 대동종약원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듯, 당시 공동장례위원장이자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은 영결식 식사(永結式 式事)에서 그를 황세손 이구 저하(懷隱皇世孫 李玖 低下)로 호칭했다.
3. 생애
3.1. 출생
그의 형 이진(李晉)은 아직 아기였을 때 의문의 병으로 갑자기 요절했고[2] , 그로부터 10년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상 외아들로 성장했다.[3] 태어날 때부터 그는 이왕 은(李王 垠)의 후계자로서 '이왕세자(李王世子)'라 불렸다. 1947년 10월 1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일본의 신 헌법 일본국 헌법의 제정으로 인해 일본 황실 직계를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과 이왕가(구 대한제국 황실)은 신적강하되어 그는 일본 국적을 박탈, 모든 재산을 압수 당하고 무일푼 평민이 되었다.
3.2. 광복 이후
그는 일제로부터의 해방 후 고국으로 가는 귀국길을 가고자 했으나 '''돌아오면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운 이승만 정부에 의해 영구 귀국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래서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 공과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해 유명 건축가 이오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유학 중 만난 줄리아 리[4] 와 1959년 결혼한다. 유학하려고 했을 당시 이방자가 도미를 말렸으나 영친왕이 "구(玖)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으라"라고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이후 서른이 지난 나이에 1963년 귀국해 한동안 성공을 했으나 1973년 사업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갔고, 아내와 별거하다가 1982년에 이혼했다. 불임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불명. 일단 이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이구의 바람끼와, 종친들이 이구더러 줄리아와 이혼하고 한국 여성과 결혼하라고 오랫동안 요구(종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5] 그 후 1990년대에 일본인 무당 아리타 키누코(有田絹子)와 혼인 신고를 비공식적으로 올렸다고 한다.
그는 주로 미국 아니면 일본에서 지냈다.[6] 한국에 거주할 생각이 없던 건 아니지만, 전주 이씨 종친들과 갈등을 겪은데다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끔 일이 있을 때 아니면 거의 한국에 오질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마지막 황태자의 하나뿐인 아들이므로 대한 제국 황실의 적손(직계손)으로서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 '''명예 총재''' 직책을 갖고 있었다.
3.3. 사망
2005년 7월 16일, 과거 자신이 살던 저택을 개조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 묵고 있을 때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7] 향년 73세. 그런데 일본 황족들 중에서 이구의 친손이라며 구 한국 황실가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구는 일본 황실로부터 약간의 연금과 생활 보조비를 지급받긴 했다. 이방자를 통해서 모계로 아키히토와 6촌 관계[8] 이기도 하고.) 이들은 이구의 시신 유품 일부를 몰래 일본에 가져가기도 해 조선황실복원 관계자들을 격분하게 했다. (2008년 월간 중앙 참조)
알려진 바로는 그에게 슬하 친자식은 없다. 양녀 이은숙은 사실 이구가 아니라, 줄리아 리가 이구와 이혼하기 전 한국에 살고 있을 때 입양했다고 한다.[9] 어쨌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그의 사후, 회사원 이상협(이원)[10] 이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이구의 '''사후'''양자로 지명되었다.
이를 정식으로 인정해야 할지는 논란이 있는데, 현행 민법상 사후 양자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전주이씨 대동 종약원에서는 생전 이구가 이상협을 양자로 지명하는데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고 했는데, 사실이라 하더라도 법적 절차는 이구의 사후에 이루어졌으니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참고로 이석은 황실 인사들과 상의 없이 종약원 회장과 이구가 일방적으로 이상협을 양자로 지명했다는 것, 종약원 자체가 황실과 혈통상 거리가 멀다는 것 등으로 인해 이 양자 지명을 강력 반대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원은 이구의 후손(양자)으로서 현재 조선 왕릉제례나 종묘대제에 대한 전반적인 제사를 맡고 있다.
3.4.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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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YTN 보도, 마지막 황세손 이구 씨 영결식
대한제국 시절 예법에 따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과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 공동장례위원장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주도 하에 장례[11] 를 치르고, 종묘 앞에서 노제(路祭)를 지낸 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유릉 권역으로 국방부 의장대에 의해 친히 운구된 후에 아버지 영친왕의 묘역인 영원 인근에 마련된 조선왕조 최후의 왕실 묘역[12] 회인원(懷仁園)에 안장되었다.
이구의 장례는 조선 왕조 왕실 예법으로 거행된 마지막 '진짜 장례식'으로, 사실상 그가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직계손이기 때문에 이후로는 무형 문화재 전승 차원에서 흉내(?)를 내는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진짜 장례식으로 거행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관련 기사
3.5. 사후
2015년 젊은 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소설이 이구의 삶을 다룬 바 있다.
최근 재건축을 위해 허문 서울 새문안교회가 이구의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구 예배당 보존을 검토했으나 이 경우 필요한 면적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고, 도면에 기재된 설계자가 이구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어 결국 철거가 확정되었다.
덕혜옹주가 죽기 전 사실상 유언장이나 다름없는 자필 원고에서 조카인 이구를 보고 싶다고 언급했다. 그만큼 우애가 각별했던듯 하다.
4. 대중매체에서
1990년 KBS1 광복절 특집드라마 <왕조의 세월>에선 탤런트 송승환이 해당 인물을 연기했다.
5. 관련 문서
[1] 법적인 양아들은 아니다. 자세한 것은 후술.[2] 1921년 8월 출생 ~ 1922년 5월 사망.[3] 이방자 여사 회고록에 의하면 그 사이 유산을 두번 했다고 한다.[4] 1923년 3월 18일 ~ 2017년 11월 26일.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으로, 결혼 전 이름은 줄리아 멀록이며 한국명은 이주아(李珠娥). 이구보다 8살 연상으로 합의 이혼 후에도 개명하지 않고 줄리아 리로 살았다. 너무 조용하게 살다보니 사망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부고 기사[5]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마침 줄리아 여사는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 제작 때문에 한국에 와 있었다. 장례식에 찾아갔지만 초대를 받지 못하여 먼 발치에서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낙선재에서 살다가 그 곳을 떠나 1995년까지 서울의 외국인 아파트에서 살다가 하와이로 이민 가서 2017년 11월 26일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창덕궁 낙선재에 살던 때, 줄리아 여사와 이방자 여사 간에 불화가 있었지만 이혼 후에도 이방자 여사가 종종 와서 생활비도 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방자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줄리아 여사가 많이 슬퍼하기도 했다.[6] 참고로 그는 줄리아 리 여사와 결혼하여 취득한 미국 시민권을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즉, 이중 국적자. 사망 당시에도 그의 품에서 미국 여권이 나왔다고 한다.[7] 정확히 말하면 옛 이왕가저는 구관. 그가 머물다 사망한 곳은 신관.[8] 아키히토의 어머니인 고준 황후가 이방자와 사촌 관계이며. 부계로는 이방자와 아키히토는 7촌이다.[9] 이 때문인지 몰라도 이은숙이 이구와 관련한 일로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줄리아는 하와이에서 이은숙과 같이 살았다고 한다.[10] 의친왕의 9번째 아들 황손 이갑(이충길)의 장남, 본명은 이상협.[11] <哀> 大韓帝國 皇世孫 李玖 邸下 永結式 <悼> (애) 대한제국 황세손 이구 저하 영결식 (도)라는 명칭으로 당시 을사조약 체결 100년, 광복 60주년인 상황속에서 삼복 더위속(2005년 7월 24일)에 장례식을 치렀다.[12] 조선의 예법상 왕과 왕비의 묘역은 능(陵), 왕의 사친(왕의 생부 중 왕이 아니었던 자와 왕의 생모였던 후궁)과 왕세자(손)·왕세자(손)빈의 묘역은 원(園)으로 칭하는데 황실이 부활하지 않는 한 '원'으로 칭할 묘역을 가질 황족은 황세손(이왕세자)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예외는 희빈 장씨의 대빈묘, 폐비 윤씨의 회묘, 공빈 김씨의 성묘와 소현세자의 소경원이 있다. 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게 했다는 죄목을 쓰고 사사되었고, 윤비는 투기 때문에 용안에 손톱 자국을 냈다가 성종과 시모 인수대비의 분노를 사 폐서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 연산군이 폐주였기 때문에, 공빈도 아들 광해군이 폐주였기 때문에 원호를 끝내 되찾지 못했다. 소현세자는 비정한 부왕 때문에 복권되지 못하고 소현묘로만 불리다가 고종황제 대에서야 소경원(昭敬園)으로 승격되었다. 연산군은 생모를 제헌왕후로 복위시키고 능호를 '회릉', 광해군도 생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능호를 '성릉'이라 하였으나 반정 후 그 관작이 모두 삭탈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