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사
1. 개요
조선의 역대 국왕에 대한 정보를 정리한 문서.
2. 조선국 역대 국왕
- 명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는 조선 조정에서 뒤에 대왕을 붙여 대표 시호로 사용했고, 자국에서 올린 시호보다 맨먼저 앞에 들어갔다. 인조 때부터 청나라에서 받은 시호는 조선 조정은 받기는 하였으나 명에서 내려준 시호와 달리 실제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고려때처럼 자국에서 올린 시호의 맨 뒤 두글자(대왕)를 대표 시호로 사용했다.
- 대한제국 선포 및 수립 후 고종은 자신으로부터 4대조 위의 국왕들과 개국 시조를 황제(皇帝)로 추존하였다. 실제로 왕위에 오른 정조, 순조, 헌종, 철종과 국왕으로 추존되었던 효장 세자(진종), 사도 세자(장조), 효명 세자(문조) 그리고 개국 시조인 태조(고황제)가 황제로 추존되었고, 이에 따라 중국 명나라 시호는 유지하고, 오랑캐 집단이라 하여 치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청나라가 내려준 추존 황제들의 시호는 폐지되었다.
- 순종은 실제로 조선 국왕이 아닌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다만 조선 왕조의 법통과 명맥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제27대 국왕으로도 분류하기도 한다.
- 한국 역사에 관심이 깊은 사람 외에도 대부분의 한국인 성인들은 조선의 왕명(묘호 앞글자)을 이어놓은 암기법을 숙지하고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부산 용두산 대화재라는 한국 역사상 최악의 문화적 대참사가 벌어지면서 당대까지 전해지던 실제 조선국왕의 어진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불행하게도 이때 소실된 어진은 사진촬영 조차 해놓지 않았기에 복원이 불가능했다. 오늘날 실제 용안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임금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과 추존국왕 원종을 더해 총 7명이다. 그 외에 선조는 추정 어진이 전해지고 있으며, 숙종과 순조는 불에 탄 추정 어진을 통해 얼굴이나 옷 등의 신체 일부분이 식별 가능한 상태이다.
2.1. 비정통 추대자
3. 계보도
- 이름인 '휘(諱)' 만 기재되어 있으며 성씨는 모두 이(李)[11] 입니다.
- 즉위한 뒤 피휘를 위해 이름을 개명해 바꾸었으면 빗금 뒤에 바꾼 이름을 적습니다.
- 문서가 존재하는 인물은 기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특정 사건을 위해 문서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기재된 인물은 해당 사건으로 연결합니다.
- 양자로 들어간 관계면 친자 관계에서는 취소선을 긋고, 양자 관계에서는 바탕색을 깔지 않습니다. 그 자녀 관계는 양자 관계 하에 편입합니다.
- 적자인 경우에는 진한 색으로, 서자인 경우에는 연한 색으로 차이를 두어 표시합니다.
3.1. 태조 이전
- 전주 이씨의 시조로 칭해지는 이한은 선원록의 초창본인 이자춘신도비에 누락되고 후에 첨부된 것인데, '인천 이씨 이한'의 신상자료를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조선왕실 시조 이한'의 실재 여부는 다소 불투명하다.
3.2. 조선 전기
3.3. 조선 후기
이후는 대한제국/황사 참조.
4. 묘호가 개정 / 추존된 국왕
다른 동아시아 왕조들과 비교해보면, 조선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조(祖)'를 남발했다. 다른 왕조에서는 '~조'는 기껏 1명 ~ 3명의 진짜 진짜 업적이 높은 국왕에게나 붙는 묘호이며, 조선처럼 '~조'가 많은 왕조는 베트남의 찐씨 정권 등 일부 예외가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26] 그나마 마지막 셋은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올린 것이라 남발한 케이스에는 속하지 않는다.
이러한 원인의 시작점은 아버지를 '세조(世祖)'로 올린 예종이다. 세조의 경우는 신종으로 확정하기 전에 예종이 세조로 하자고 뒤집은 것인데, 신하들이 제시한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 셋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하고 '세조'를 강력하게 밀어붙여 세조로 결국 채택되었다. 보통 묘호를 정할때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한 묘호를 1안으로 올리고 하나만 딱 만들어 놓으면 국왕한테 통보하는 형식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버리는 카드를 한두개 끼워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신하들은 신종으로 하기로 정하고 예종에게 결재를 받으러 간 것인데 예종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묘호의 원칙은 '덕이 있으면 종, 나라를 세우거나 중흥하는 등의 공을 세우면 조'이다. 한자의 의미도 '조(祖)'는 시조를 뜻하고 '종(宗)'은 시조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쉽게 말해 임금으로서의 뛰어난 업적이 있거나 훌륭한 국왕이라고 해서 '조(祖)'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왕조가 원래 모시던 시조(보통 나라를 건국한 창립자)거나 아니면 이 국왕으로 바꿔야할 만큼 왕통이 끊겨져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경우에 주어지는 것이 '조'인 것이다. 즉, 족보에서의 '시조', '중시조'와 개념이 똑같다.
다른 왕조의 사례를 보면 한국사에서는 앞의 왕조인 고려에선 추존왕 제외하고 실제로 국왕을 재위했던 사람 중에서는 오직 태조 왕건 한 사람만 '~조'가 붙으며, 이런 조종 묘호 시스템의 원조인 중국에서 찾아보면 한나라, 명나라, 원나라(몽골 제국)는 두 명[27] , 심지어 당나라나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등은 중국 왕조치고 오래 지속된 나라들인데도 창업 군주 딱 한 사람만 '~조' 자 묘호를 받았다.
즉, 예종의 사례로 돌아가 보면 예종은 태조 이성계로부터 이어져오는 왕통은 한 번 끊겼으며, 세조로부터 다시 왕통을 이어나가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위 찬탈자와 찬탈자의 아들이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기 위해선 어느 정도 이러한 작업이 필요하긴 했고, 당시 신하들도 거의 대부분 계유정난의 관계자(찬탈자)들이다보니 여기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거나 묵인했다. 문제는 이러한 '''안좋은 선례를 억지로 남기다보니''' 이후 '세조 때도 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못할게 뭐냐'는 식으로 온갖 방식의 추존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이다. 실제로 이 점을 이해하고 다시 조선의 추존 사례를 보면 대부분 왜 이러한 추존이 발생했는지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광해군과 효종을 들 수 있는데, 각각 아버지 선조와 인조를 '조'로 올리거나 처음부터 줘버린다. 효종조 쯤되면 '조(祖) 격상'이 단순한 정통성 강화 용도로 악용되는 수준까지 와버리는데 선조는 광해군이 본인의 존호를 늘릴대로 늘린 것도 그렇고 왜란 이후 떨어진 왕실의 권위와 방계승통한 아버지의 정통성을 드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28] 광해군이 '선종'을 받고 한참이 지나 '선조'로 추숭해버렸으며 인조는 아예 찬탈자라는 프레임을 지우기 위해 세조의 선례를 따르자고 임금과 신하끼리 암묵적으로 합의가 되었는지 신하들이 올린 첫 안건부터가 '열조'였다. 효종은 '열조'라는 묘호 자체에 좋은 묘호가 아니라고 태클을 건 것이지 효종이나 당대 신하들이나 '인조'에게 '조'를 부여하는 것 자체는 합의가 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선 해당 임금이 아니고 그 밑의 후손들이 정통성 자체가 흔들려서 올린 케이스까지 등장한다. 영조와 순조가 대표적인데, 둘 모두 후기에 집권한 고종과 철종이 워낙 이전 임금들과 '''촌수 차이(무려 '17촌' 이상씩 차이난다)'''가 많이 나니까 정통성 강화를 위해 올려버렸다.[29] 그나마 찬탈자 프레임이 두려워 '우리 아버지는 왕조를 재창조하신 분이시다' 논리로 진행된 '세조'와 '인조'의 경우와는 다르게 이건 당시 정말로 왕권을 끌어올릴 필요성도 있었고, 조선 후기에 직계 왕통이 워낙 자주 단절되다보니 어느 정도는 필요성이 있는 부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조, 장조(사도세자), 문조(효명세자)는 대한제국 수립 이후 국왕에서 황제로 다이렉트로 재추존된 케이스. 이는 동아시아 왕조 전통상 새로 국가가 건국되면 건국 시조의 4~5대조까지는 '조'(祖)로 추숭하는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조선만의 특별난 케이스는 아니었다. 대한제국이 13년만에 단명해서 조선의 부록처럼 취급되고, 고종이 워낙 대한제국의 건국자라는 이미지 보다는 망국의 군주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엄연히 대한제국이란 국가를 새로 만든건 맞기에 이는 합당한 '추숭(追崇)'이다.
인터넷 상이나 언론 상에서도 '조와 종의 차이가 뭐냐'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원칙대로라면 위에서 말한 '계승하면 종(宗), (재)창조하면 조(祖)' 원칙이 맞지만, 조선의 경우에는 '''정통성이 약한 임금이 써먹었던 카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를 알지 못하고 상황에 어거지로 끼워맞추다보니 조, 종의 차이를 구분하겠답시고 온갖 해괴한 분류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조는 영 못한 국왕에게 주는 묘호'라거나, '정통이면 종, 방계면 조' 등의 기준을 내세우는 사례가 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혹시 '조(祖)'와 '종(宗)'의 차이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링크를 남겼다. 참고하기 바람.
5. 추존 국왕
5.1. 신위
'''국왕으로 추존되지 않았으나 위패가 모셔지고 역대 왕들이 제사(제향)를 지낸 왕실의 직계 선조들이다.'''
6. 왕실 문화
6.1. 궁중 용어
이 항목에 적힌 것은 극히 일부로, 故황경환 교수의 논문 「宮中用語」(1963)[32] 와 김종훈 교수의 논문 「宮中語 攷」(1969)[33] , 김용숙 교수의 저서[34] 「조선조궁중풍속연구」(1987)에서 더 많은 궁중어 어휘를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워낙 오래된 자료라 한문이 엄청 많거나 용어가 현재와 다른 것이 간혹 있다는 것(...). 그래도 궁중어를 다룬 자료가 워낙 희귀한지라 아주 귀한 자료들이다. 궁중어는 하오소서체, 하소서체 항목 참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외에도 상황이나 상대에 따라 다양한 어투를 사용했다.
- 궁중에서는 거센소리와 된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35]
- 통기(通氣: 방귀), 비수(泌水: 콧물), 이부(耳附: 귀) 등 한자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따로 궁중 전용으로 정해지지 않으면 한문식 표현으로 말하면 될 정도.
- 마마: 왕, 왕비, 상왕, 대비, 세자에게만 붙일 수 있는 극존칭. 원래는 세자빈에게 사용하지 못하나, 1882년 순종의 가례발기를 보면 세자빈을 두고 '동궁마누라'와 '빈궁마마' 모두 사용한다.
- 마노라: 원래 마마와 동급의 존칭이었으나 이후 한 단계 낮은 격으로 사용되다 세자빈에게만 붙이는 존칭으로 격하되었다. 한중록을 보면 빈궁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를 '마노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 전하: 왕,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 상왕 한정으로 사용한다.
- 저하: 왕세자와 왕세자빈에게만 사용한다.
- 대감: 정2품 이상의 당상관에게 사용한다. 즉, 대군과 군의 경칭은 대감이다. 공주의 부마 역시 대감이라 불렸다.
- 자가: 공주, 옹주, 정일품 빈에게 붙이는 존칭. 세자의 딸인 군주와 현주 역시 자가로 불렸을 확률이 높다.
- 영감: 종2품, 정3품의 당상과에게 사용한다. 옹주의 부마와 군주의 남편(부위)을 이렇게 경칭했다.
- 마마님: 상궁에게 붙이는 존칭. 빈 이하의 후궁들도 이에 해당된다.
- 상(上), 주상(主上), 상감(上監), 대전(大殿), 성상(聖上): 왕
- 후(后), 중전(中殿), 중궁(中宮), 곤전(坤殿), 내전(內殿), 중궁전(中殿殿): 왕비
- 동궁(東宮), 춘궁(春宮), 국본(國本), 저군(儲君), 저사(儲嗣): 왕세자
- 빈궁(嬪宮), 동궁빈(東宮嬪), 춘궁빈(春宮嬪): 왕세자빈
- 대왕(大王): 선대왕. 사망한 선대 임금들. 대왕마마, 대왕마노라 등.
- 대조(大朝): 대리청정할 때 왕을 지칭하는 말
- 소조(小朝): 대리청정할 때 세자를 지칭하는 말
- 아기: 책봉 전의 세자(=원자)나 세손(=원손), 관례 전의 왕자녀를 부르는 말.
- 아기씨(아기시): 책봉 전의 세자(=원자)나 세손(=원손), 관례 전의 왕자녀에 대한 존칭. 원손아기씨, 대군아기씨 등.
- 매화(梅花): 국왕의 변. 매우라고도 한다.
- 매화틀/매우틀: 국왕의 변기/뒷간.
- 붕어(崩御): 국왕 또는 중전, 왕대비, 대왕대비 등이 사망하다.
- 성체(聖體), 옥체(玉體): 국왕의 몸
- 용안(龍顔), 옥안(玉顔): 국왕의 얼굴
- 어배진(御陪盡): 국왕, 왕비 등의 (의료)진찰
- 어수(御手): 국왕의 손
- 어족(御足): 국왕의 발
- 면부(面府): 국왕 이외 왕족의 얼굴
- 옥루(玉淚), 용루(龍淚): 국왕의 눈물
- 안수(顔水): 국왕 이외 왕족의 눈물
- 옥음(玉音): 국왕의 목소리
- 수라(需羅): 국왕의 식사(御食어식이라고도 한다.)
- 상후 미령(上後彌零)하시다: 국왕 / 중전 혹은 대비/대왕대비께서 편찮으시다
- 삼가 아뢰다: 말씀드리다
- 두굿겁다: 기쁘다
- 송송이: 깍두기
- 대루리: 다리미
- 적계, 산계: 꿩
- 승하(昇下): 국왕, 왕비의 사망
- 주상(主上): 왕비, 대비, 또는 왕실의 어른들이 국왕을 부르던 호칭
- 회임(懷姙): 왕비(중전)의 임신
- 어전(御殿): 국왕의 궁궐, 국왕을 뜻하는 호칭
- 편전(編殿): 국왕의 집무실
- 중전(中殿): 왕비, 즉 국왕의 정실 부인.
- 환경(還瓊): 여성의 월경(달거리)
- 본방(本房): 왕비의 친정
- 어여쁘다: 가련하다, 불쌍하다, 사랑스럽다, 귀엽다[36]
- 미안하다: 못마땅하다, 괘씸하다, 상대에 대한 증오
- 두굿기다, 두굿겁다: 기쁘다, 반기다, 든든하다, 대견하다[37]
- 가즉이(가ᄌᆞᆨ이): 갖추다, 갖다. 상황에 따라 깍듯하다, 좋다(눈에 차다), 지극하다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 상(常)없다: 품위 없다, 상스럽다, 무식하다
- 아니꼽다: 마음에 안 되다, 딱하다
- 망극하다: 끝이 없다, 한없다, 망측하다, 슬프다, 아주 그릇되다, 기막히다, 민망하다
- 가차하다: 받아들이다, 마음에 두다, 마음을 놓다, 안심하다
- 의대: 옷
- 의대차: 옷감
- 용금치: 용포에 다는 보
- 지: 소변 혹은 요강
- 소첩: 빗접
- 초도(初度): 왕세자의 첫돌. 원뜻은 '첫 번째'다.
- 한삼: 적삼
- 봉지: 바지
- 동의대: 왕의 저고리
- 소고의: 왕비의 저고리
- 단니의: 왕비의 속치마
- 대조: 옷고름
- 기수: 이불
- 기수 배설하다: 이부자리를 깐다
- 프디: 요
- 치: 왕의 신이나 상투
- 오목이/오목다리: 목에 끈이 달린 아이용 버선
- 두면: 갓
- 납시다: 나오신다
- 듭시다: 들어가신다
- 뫼어라: 모시어라, 가지고 오라
- 씻오신다: 씻으신다
- 대세수: 손씻기
- 수부수: 양치질
- 소세: 세수
- 자작하다: 옷감을 재단하다
- 탄일: 생일
- 미령하시다: 편찮으시다
- 문안(問安)이 게오시다: 편찮으시다 (왕비를 위시한 귀한 분에게)
- 메습쇼: 진지 잡수십시오
- 사색(辭色): 왕의 기분이나 표정. 원래 있는 표현으로, 말과 낯빛을 아울러 이르는 한자어다.
- 엄색(嚴色): 왕의 화난 표정. 원래 있는 표현으로, 엄숙한 표정을 뜻하는 한자어다.
- 물어주다: 하사하다, 내려주다
- 아모라타없이: 측량할 길 없이
6.2. 궁중 예법
- 후궁은 중전이 될 수 없다. 숙종이 만든 법도다.
- 마마는 정식 궁중법도로는 왕, 중전, 대비, 세자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다.[38] 다만 1882년 왕세자였던 순종의 가례 발기를 보면 세자에 대해서는 '임오 졍월 쳔만셰 동궁마마 관녜 의ᄃᆡᄇᆞᆯ긔'라고 하지만, 세자빈에 대해서는 '임오 졍월 이십일 동궁마누라 관녜시 샹격 ᄇᆞᆯ긔'라고 한다. 하지만 임오 쳔만셰 동궁마마 가례시 룡흉ᄇᆡ 침노리개 ᄇᆞᆯ긔 원문을 보면 세자빈을 빈궁마마(嬪宮媽媽)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빈궁마마라고 하는 예가 보이지 않는다.
- 선대 왕비는 왕대비, 선선대 왕비는 대왕대비다. 그냥 대비는 왕대비와 대왕대비가 있는 상황에서 또 왕이 사망했을 경우, 그 중전을 대비에 봉했다. 대왕대비 위의 작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왕대비 밑에 대비를 하나 만든 것이다.
- 홑당의는 단오 전날에 왕비가 먼저 갈아입고 나서야 그 다음날인 단오부터 궁중에서 입을 수 있었고, 겹당의는 추석 전날에 왕비가 먼저 갈아입어야 추석 당일부터 궁중에서 겹당의를 입었다. 이외에도 삼월 망일에는 녹색 향라당의를, 단오에는 초록 광사 곱솔[39] 당의를, 오월 열흘에는 백광사당의를, 날이 더운 유월 순망간에는 저포당의를, 팔월 열흘에는 초록 곱솔당의를, 팔월 이후에는 초록 광사당의를, 구월 초하루부터는 항라당의를, 구월 망일에는 공단당의를, 시월 초하루에는 겹당의를, 동지 전후에는 녹색 직금수복자당의[40] 를, 정월 망일 전후에는 공단당의를 입었다. 아청색 당의는 신분이 낮은 궁녀가 행사 때 입었다. 당의 중 가장 격이 높은 것은 네겹당의다.
- 후궁은 정실인 중전 소생의 대군(大君)과 공주(公主)는 물론 심지어 자신이 낳은 군(君)과 옹주(翁主)에게도 무조건 존대[41] 를 해야만 하며, ‘너’라고 함부로 칭해서도 안된다.[42] 국왕의 자식들은 생모의 신분에 관계없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품계를 초월한 무품이지만 후궁들은 가장 높은 빈의 품계가 정 1품으로, 군과 옹주들보다 품계가 낮았다.
- 대군, 군, 공주, 옹주, 군주, 현주는 모두 작위명이다. 책봉 전에는 그저 왕자/왕녀/왕손/왕손녀에 불과하다. 대군과 공주는 무품상계, 왕자군과 옹주는 무품하계, 세손을 제외한 세자의 아들의 경우 경국대전에는 정2품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사실상 정1품이었고,[43][44] 세자의 적녀인 군주는 정2품, 세자의 서녀인 현주는 정3품이다. 이후 고종 5년에 세자의 자녀를 모두 정1품으로 통일했다. 해당 기록 더군다나 예법상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책봉하는 일도 없었다. 즉 아기에게 대군아기씨, 공주아기씨 하는 것은 모두 고증 오류다.
- 조선의 엄격한 적서차별은 왕실에서도 예외가 없기 때문에[45] 후궁 소생의 군과 옹주는 중전 소생인 대군과 공주를 윗사람으로 모셔야 한다. 다만 사가와 달리 군과 옹주라 해도 지존의 자녀이기에 대군과 공주라고 해서 군과 옹주를 하인마냥 부려먹을 수는 없다. 만약 군 / 옹주가 대군 / 공주보다 먼저 태어났다면 당연히 형 / 언니 / 오빠 / 누나 대접을 해 줘야 한다. 물론 군 / 옹주도 대군 / 공주가 동생이라고 해서 반말을 하거나 이름을 부를 수 없으므로, (생존중인 )대원군과 현직 국왕과 마찬가지로 상호 존대하는 관계가 된다. 예외로 황제국을 칭하며 중국의 궁중예법을 따른 대한제국에서는 이 원칙이 깨지게 된다. 태자와 친왕만을 구분한 중국을 따라서 적서 구별없이 왕자에게 친왕 작위를 내렸다.
- 차기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와 다른 왕자녀들의 경칭을 같게 올리지 않는다. 이것은 세자와 왕세손에게도 적용되는 법도다. 세손 역시 나중에 왕위에 오를 사람이지만 감히 세자와 같은 저하의 예를 올릴 수 없었다.[46] 이는 위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때 중국의 예법을 따르며 깨지게 된다. [47]
- 혼인하지 않은 국왕의 자식들은 아기씨라 한다. 혼인을 하거나 관례를 치르면 대군이나 군은 대감, 공주나 옹주는 자가라 불렀다.
- 세자나 세손이 어릴 때[48] 에는 모후인 왕비나 세자빈이 '아기', '너'라고 부르고 해라체를 쓸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책봉되고 나면 세자나 세손이라 불렀으며, 직접 해라체를 쓰지 않았다. 왕비가 세자빈을 대하는 예 역시 세자와 같다. 다른 왕자녀나 왕손은 적서 막론하고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49] 책봉 받은[50] 세자나 세손에게만 '너'나 '아기'라고 하지 않고 해라체를 꺼렸다. [51] 조선은 차기 왕위 계승자와 그렇지 않은 왕자녀의 취급을 명확히 구분했다.
- 국왕의 자식들은 후궁 소생이라 해도 중전이 공식적인, 법적인 어머니다. 그렇기에 후궁 소생의 왕자가 왕위에 올라도 대비를 더욱 깍듯하게 모셨다. 한 예로, 덕혜옹주가 어릴 때 누군가 그에게 외가가 어디냐 물었더니 생모인 복녕당 양씨의 고향이 아닌 명성황후의 고향인 안국동이라 대답한 일화가 있다. 즉, 국왕의 자식은 생모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이 '어마마마'=중전이고 생모는 어머니라고만 부른다. 대비도 마찬가지로 '할마마마'는 왕대비나 대왕대비만을 지칭했다. 사극에서 후궁에게 '어마마마'라 하는 것은 여러모로 고증 오류인 셈이다.
- 후궁들은 세자나 세자빈 등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다. 나이가 많고 항렬(?)로 치자면 임금의 후처니까 위라고는 해도 적서 유별의 원칙에 따라 첩의 신분인 후궁들이 먼저 예를 갖추어야 했다. 사실상 황실의 안주인 노릇을 했던 엄귀비조차 순종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 내명부는 온전히 중전의 소관이기에, 중전이 후궁을 매질하거나 벌을 주거나 하더라도 일종의 여자들 세계 안의 자치행위 비슷하게 간주되어 국왕은 함부로 간섭하지 못했다. 물론 이는 단순한 회초리질이나 훈계일 때 이야기고, 품계를 빼앗는 등 실질적인 중처벌을 할 때는 국왕이 간섭하기 이전에 법도를 먼저 지켜야 했다. 후궁이라고는 해도 간택 후궁들이 있는 이상, 후궁들의 친정에서 그런 대접을 가만히 두고 볼 리도 없다. 추가로, 내명부의 통솔권은 중전에게 있을지언정 웃 어른인 대비나 그 이상이 있는 경우 중전이라고 대비전의 하교를 생까고 후궁들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투기를 한다고 비난받는 일은 이미 중요한 문제도 아닌 수준이다.
- 웃어른이나 신분이 더 높은 사람과 마주앉지 않고 옆으로 돌아 앉는 곡좌를 했다. 쉽게 말하면 높은 사람과 마주보거나 나란히 앉지 않고 ㄱ자로 꺾어 앉는 것이다. 하가한 왕녀의 경우 신분이 시부모보다 높았으므로 시부모는 정면에서 앉지 않고 곡좌를 했다. 좁은 공간에 왕실 사람 여럿이 들어갈 때마다 이 곡좌 때문에 앉기 까다로웠다고 한다. 이는 왕실에서 단순히 웃어른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니고 신분에 따라서도 철저히 지켜졌다. 세자-세자빈과 왕자, 왕녀는 서로 모두 같은 항렬이지만, 신분상 세자와 세자빈이 더 위이므로, 다른 모든 왕자녀들은 무조건 곡좌를 해야 했다. 여러 명일 경우 가장 높은 사람에게만 곡좌한 것이 아니고 개개인의 지위를 철저히 따져서 상석인지 아닌지 가려가며 나란하거나 마주보지 않게 앉았다. 영조의 딸인 화유옹주가 당시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와 나란히 앉자 인원왕후가 엄격히 꾸짖은 예가 있다.
- 내명부는 후궁, 궁중 여관의 품계를 매겼고, 외명부는 여성 왕족[52] , 남성 왕족의 아내나 어머니, 조정 관료의 아내나 어머니의 품계를 매겼다. 종친부는 남성 왕족의 품계를 매겼으며, 의빈부는 여성 왕족의 남편의 품계를 매겼다.
- 외명부 품계상 왕자의 부인은 왕녀보다 항상 낮다. 국왕의 서녀인 옹주는 무품이지만 적며느리인 부부인[53] 은 정 1품이다. 다만 세자빈은 차기 중전이므로 왕녀가 공주든 옹주든 상관없이 그들보다 상전이다. 왕녀는 올케인 세자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조차 없었다.[54]
- 상궁의 존칭은 '마마님'이다. 빈 이하의 후궁 역시 마찬가지로 마마님이라 해야 한다. 정일품 빈의 존칭은 왕녀와 마찬가지로 '자가'다.
- 6세 이후에 봉군(封君)한다. 숙종은 이 예법을 무시하고 연령군 이훤을 다섯 살에 봉군했다.
- 자신이 일하거나 머무는 구역 이외로 함부로 갈 수 없다. 예를 들어 세답방 나인이 마음대로 수라간에 갈 수 없다. 하지만 수라간에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갈 수 있다. 이는 왕자와 왕녀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자기 맘대로 아무데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왕이 거주하는 어전과 왕비가 거주하는 중전, 생모인 후궁의 처소 등으로 제한된다. 자신의 구역이 있다는 얘기다. 즉 남자들의 경우 대비와 중전, 생모 외에는 후궁의 처소에 함부로 방문할 수 없었고, 여자들의 경우 대전이나 동궁 등에도 출입이 불가능했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투병할 때 다른 곳의 궁녀들이 중궁전에 수시로 드나들고 처소의 창호지를 뚫으며 염탐했는데, 이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기록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때문에 웃전들은 자신들의 처소에 따라 당호를 사용하거나[55] 세자의 경우 동궁(東宮) 마마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 용잠과 봉잠은 왕비와 대비, 세자빈만 사용한다. 이외에는 혼례 때 한정으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
- 용 문양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왕, 왕비, 대비, 세자, 세자빈, 세손, 세손빈 뿐이다. 오직 왕가의 적통만이 쓸 수 있었다. 물론 신분에 따라 발톱 수를 다섯 개, 네 개, 세 개로 구별했다. 이전 서술에서는 왕녀에게도 허용되었다고 하나, 대군조차 사용하지 못한 것이 용보다. 왕실 여성에게 용보를 허용한 것이 영조27년에 반포한 국조속오례의보서례인데, 여기에도 왕녀에게 용보를 허용한다는 규정은 없다.
- 왕과 세자의 용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에 따라 원보로 제작했다. 왕은 금오조원룡보[57] , 세자는 금사조원룡보[58] , 세손은 삼조방룡보를 달았다. 둥근 보는 세손이라 해도 허락되지 않았다. 보를 수놓는 바탕천의 색은 입는 의복과 동일하게 사용했다. 세손과 세손빈은 견화[59] 를 달지 않았다. 영조 27년 이후부터 왕비, 세자빈, 세손빈 역시 남편과 같은 규정이 적용된다. 흉배 제도는 시대마다 변화를 겪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대군은 기린, 왕자군은 백택 흉배를 달았다. 이후 영조 때 속대전을 반포하면서 대군과 왕자군 모두 기린 흉배로 통일한다. 물론 네모난 방보다. 왕비와 세자빈의 경우 크게 국조속오례의보서례 반포 전과 후로 나뉘는데, 15세기 중반~17세기 전반에는 왕비와 세자빈의 경우 적계흉배(翟雞胷背)를, 17세기에는 적보자(翟補子)를, 18세기에는 원형 봉보를 달았고, 영조 27년 국조속오례의보서례가 반포되면서 남편과 같은 금수 용보를 달았다. 세종 초기까지는 왕이 사조룡보를 입었고, 세종 31년부터 세자가 사조룡보를 사용했다. 출처 조선 배경 사극에서 테두리가 물결 모양인 용보가 나오면 고증 오류다. 이는 고종과 순종이 사용했고, 이전에는 그냥 원보다.
- 나비 모양 떨잠은 왕비, 대비 등 정비는 똑바로 달 수 있다. 하지만 후궁은 정일품 빈만이 거꾸로 뒤집어서 착용한다.
- 봉황 문양과 봉잠을 후궁이나 일개 왕족이 사용할 수 없다. 왕비와 대비, 세자빈에게만 허락된다.
- 왕족 이외의 사람은 궁 안에서 죽을 수 없었다. 궁녀의 임종이 임박할 경우 사가로 내보내졌다.
- 대감은 정2품 이상의 당상관에게 사용하는 경칭이며, 영감은 종2품, 정3품의 당상관에게 사용한다. 나리는 지체 높은 사람이나 당하관에 대한 존칭이다. 즉, 공주의 부마는 종1품이므로 대감, 옹주의 부마는 종2품이므로 영감이라 불렸다. 군주의 남편(부위)은 정3품 당상관이므로 '영감'이라 부른다. 경은 시대에 따라 다르나, 조선조에는 국왕이 2품 이상의 신하에게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 적의는 왕비와 대비의 것은 원적문 52개, 세자빈은 36개였다. 왕비는 대홍색, 대비는 자적색, 세자빈은 아청색 적의를 입었다. 세손빈의 경우 원적문 수와 색상은 세자빈과 같지만 삼조방룡보[60] 를 앞뒤에만 달았다. 왕비, 대비, 세자빈은 용보를 앞뒤와 양 어깨 총 네 개 달았다. 위치가 애매했던 혜경궁 홍씨는 천청색 적의를 입었다. 대한제국 때에는 심청적의를 도입했는데, 황후는 12등적의를, 황태자비는 9등적의를 입었다.
- 사극과 달리 24시간 곤룡포나 당의 차림으로 있지 않았다.[61]
- 사극과 달리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등을 합창하지 않았다.
- 당의를 입을 때에는 첩지 위에 족두리나 화관을 착용했다. 첩지만 내놓고 있을 때는 당의를 벗은 경우다. 즉, 사극에 흔히 나오는 당의에 첩지머리는 의대를 갖추다 만 게 된다.
- 다른 상전을 모시는 궁인에게 함부로 명령할 수 없다. 이건 왕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 궁녀 선발은 각 처소에서 알아서 했고, 자기 처소의 궁녀가 아닌 이상 왕이라 해도 함부로 침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궁녀가 최우선으로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자기가 모시는 상전이었다. 한중록과 계축일기를 보면 원칙상 궁녀 충원시 왕에게 보고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왕에게 통보하지 않고 알아서 필요한 인원을 충원했다. 계축일기를 보면 왕이 궁녀 충원 건으로 시시콜콜하게 간섭하자 지나친 간섭이라며 대비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 각 처소는 각자 별개의 살림을 꾸렸다. 당연히 지밀, 침방, 수방, 소주방 등의 궁녀 조직 역시 처소마다 별개로 존재했다.
- 웃전의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는 것을 좋지 않게 봤다.
- 합방/승은 관련
- 일식과 월식, 동지와 하지에는 합방을 하지 않았다. 일식은 태양의 양기가 막히고 월식은 달의 음기가 막히며, 동지는 밤이 길어 음기가 지나치고 하지는 낮이 길어 양지가 지나쳐 이때 임신하게 되면 음양의 부조화로 산모와 아이가 고생하고 아이는 평생 병이 많은 등 고통스럽게 살아간다고 여겼다.
- 기상(날씨)이 비정상적일 때에 합방하지 않았다. 비, 뇌우, 바람, 천둥, 폭풍우, 우박 등. 역시 음양이 균형을 이루지 않아 고생하게 된다고 여겼다.
- 초하루와 그믐, 상현달과 하현달이 뜰 때에는 달의 음기가 지나치거나 모자라 합방하지 않았다.
- 후궁의 합방과 달리 중전의 합방은 국가 지대사로 여겨졌다. 관상감과 제조 상궁이 협의하여 길일을 잡았는데, 금기가 워낙 많아 실제로 합방이 가능한 날은 1년에 며칠도 되지 않았다.
- 합궁일은 왕비의 생리 후 닷새가 지난 날로 한다.
- 일진에 사(巳)가 들어가는 뱀날, 인(寅)이 들어가는 호랑이날과 앞에 나온 사례에 해당하는 날은 합궁할 수 없었다.
- 각종 질병이 있을 때는 합방할 수 없었다.
- 객지에서는 합방할 수 없었다.
-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합방할 수 없었다.
- 회임한 후부터 해산한 뒤 첫 생리혈이 비칠 때까지 합방할 수 없었다.
- 중전과 합방을 위한 길일이 정해지면 대전 상궁들의 지휘 하에 모기장, 이부자리, 물수건, 타구(침 뱉는 그릇), 촛불 5개 등 합방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 보통 자정에 시작하여 첫 닭이 울 때(오전 5시 경) 끝내야 했다.
- 강녕전에는 방이 9개 있는데, 우물 정(井)자로 이루어진 형태다. 가운데에 국왕이 머물고 각 방마다 숙직 상궁이 1명씩 들어가 있는데, 국왕이 힘이 부족하거나 복상사의 위험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닭을 들고 대기했다. 닭의 목을 따 피를 마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62]
- 이부자리가 정돈되면 숙직 상궁들이 촛불 5개를 켜고 나가면 국왕과 왕비가 들어왔다. 숙직 상궁을 제외한 모든 궁녀는 철수하는데, 침전 주위에 머물 수 있는 숙직 궁녀는 보통 60대 ~ 70대 이상이었다. 이보다 젊으면 무조건 철수해야 했다.
- 침전의 불을 꺼서 중전이 국왕의 몸을 볼 수 없어야 했다. 국왕이 오른쪽, 왕비는 왼쪽에 누워야 했다.
- 왕비는 절대 합궁 중 눈을 뜨거나, 소리를 내거나, 옥체에 손을 대거나, 스스로 몸을 떨고 흔드는 등 움직이거나, 옥체 위에 올라가서는 안 되었다. 그냥 목석마냥 눈 감고 움직이거나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누워있어야 했다.
- 승은(繩恩) - 국왕이 눈여겨 본 궁녀와 동침하려 하면 그냥 침소(침전)에 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준비 과정이 있었다. 국왕의 입장에서야 복잡한 중전과의 동침보다는 간편(?)했지만...
- 궁녀는 우선 목욕을 깨끗이 하고 승은을 입는 도중 궁녀가 용안과 옥체를 할퀴지 못하도록 손발톱을 바짝 깎는다.
- 이후 궁녀는 발가벗은채로 손, 발 그리고 엉덩이와 생식기 부분을 철저히 몸수색을 받는다.
- 궁녀는 국왕과 함께 할 침소에 발가벗은채로 들어간 후 누워서 수건 한 장만을 걸치고 국왕이 올 때까지 대기한다.
- 국왕이 들어와 승은을 입은 후에는 국왕이 잠든 사이에 몰래 빠져나온다.
- 궁녀는 국왕의 승은을 입었다는 의미로 겉치마를 거꾸로 뒤집어 입는다.
- 태교와 해산(출산) 관련
7. 기록
- 최장기 재위는 21대 영조(1724년 8월 ~ 1776년 3월, 51년 7개월)이고 2위는 19대 숙종(1674년 8월 ~ 1720년 6월, 45년 10개월), 3위는 26대 고종(1863년 음력 12월 ~ 1907년 7월, 43년 7개월) 순이다. 그외에 40년 넘게 재위한 국왕은 4위 선조(1567년 7월 ~ 1608년 2월, 40년 7개월 가량)고 그 다음은 5위 중종(1506년 9월 ~ 1544년 12월, 38년 2개월)이다.
- 최단 재위는 12대 인종(1544년 11월 ~ 1545년 7월, 약 9개월), 2위는 8대 예종(1468년 9월 ~ 1469년 11월, 1년 2개월), 3위는 2대 정종(1398년 9월 5일 ~ 1400년 11월 13일, 2년 46일) 4위는 5대 문종(1450년 2월 ~ 1452년 5월, 2년 3개월) 순.
- 최고령 즉위는 초대 태조 이성계(58세)이고, 뒤이어 2대 정종 이방과/이경(42세), 7대 세조 이유(39세), 5대 문종 이향(37세)가 따른다. 최연소 즉위는 24대 헌종 이환(8세). 2위는 순조 이공(11세). 단종 이홍위는 명종 이환과 함께 공동 3위(12세)이다. 4위는 성종 이혈로 13세, 5위는 숙종 이광/이순으로 14세다.
- 가장 오래 산 국왕은 역시 제일 오래 재위한 21대 영조(83세)이고 2위는 태조 이성계(74세), 3위는 26대 고종(68세) 순이며, 가장 단명한 국왕은 6대 단종(17세), 8대 예종(20세), 24대 헌종(23세) 순이다. 단, 단종이 자연사가 아닌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가장 짧았던 국왕은 예종이다. 참고로 쫓겨난 광해군은 67세까지 살아서 역대 4위의 기록이다. 시골 이방 만큼의 권력도 없던 정종도 63세까지 장수했다. 그 외에 60을 넘긴 국왕으로는 숙종이 있다.
- 가장 아들이 많았던 국왕은 세종으로 총 18남을 두었고, 가장 딸이 많았던 국왕은 3대 태종 이방원으로 17녀를 두었다. 정실과 후궁을 모두 합쳐서 자녀 수가 제일 많았던 국왕은 3대 태종 이방원으로 총 12남 17녀를 두었다. 또한 세종은 정실(소헌왕후)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총 8남 2녀로 태조와 태종(둘다 7남 4녀. 단 태조는 신덕왕후와 신의왕후 2명)에 이어 2번째이며 총 자녀 수도 18남 4녀로 역대 조선 국왕 중 5번째다. 반면 자식이 아예 없던 국왕으로는 단종, 인종, 경종, 헌종, 순종이 있다.
- 후계자로 가장 오래 있었던 국왕은 마지막 황제인 순종. 1875년 세자에 책봉된 후 1907년까지 32년을 후계자 자리에 있었다. 1895년부터는 왕태자,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는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2번째로 세자 자리를 가장 오래 지킨 국왕은 20대 경종(30년), 3번째는 5대 문종(29년).
- 최고령으로 세자가 된 인물은 2대 정종(42세). 최연소로 세자가 된 인물은 27대 순종(2세).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까지 따지면 최연소 원자(출생 하자마자) - 세자(돌)는 사도세자다.
- 후궁이 아닌 정실 왕후를 가장 많이 둔[64] 국왕은 각각 3명씩 둔 중종(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과 숙종(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이다.[65] 반면 문종은 세자 시절에 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문종이 즉위한 뒤 추존)가 사망한 후 새로 왕후를 들이지 않아서 재위 기간 동안 새로 왕후가 없던 유일한 국왕이다.
8. 조선의 장자 수난
조선왕조는 전통적으로 장자가 수난을 당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문종, 단종이며 이들 외에도 해당되는 인물이 상당히 많다.
-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 이방우(1354년 ~ 1393년 음력12월 13일)
-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 이제(1394년 ~ 1462년 음력9월 7일) (심지어 양녕대군 이전에 죽은 아들들이 여럿 있다.)
- 세종의 장자 문종 이향(1414년 11월 15일 ~ 1452년 6월 1일)
- 문종의 장자 단종 이홍위(1441년 8월 9일 ~ 1457년 6월 1일) (이전에 죽은 아들들이 2명 있다.)
- 세조의 장자 덕종(의경세자) 이숭/이장(1438년 10월 3일 ~ 1457년 9월 20일)
- 의경세자의 장자 월산대군 이정(1454년 음력12월 18일 ~ 1488년 음력12월 21일)
- 예종의 장자 인성대군 이분(1461년 12월 31일 ~ 1463년 12월 4일)
- 성종의 장자 연산군 이융(1476년 11월 23일 ~ 1506년 11월 20일)[66]
- 연산군의 장자 폐세자 이황(1498년 1월 10일 ~ 1506년 10월 10일)
-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 이학수/이미(1509년 9월 28일 ~ 1533년 6월 18일)과 적장자 인종 이억/이호(1515년 3월 10일 ~ 1545년 8월 7일)
-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 이곤령/이부(1551년 7월 1일 ~ 1563년 10월 6일)
- 선조의 서장자 임해군 이진(1572년 9월 20일 ~ 1609년 6월 3일), 적장자 영창대군 이의[67] (1606년 4월 12일 ~ 1614년 3월 19일).
- 광해군의 장자 폐세자 이지(1598년 12월 31일 ~ 1623년 7월 22일)
-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 이왕(1612년 2월 5일 ~ 1645년 4월 26일)
- 소현세자의 장자 경선군 이석철(원손)(1636년 ~ 1648년 9월)
- 효종의 장자 현종 이연[68] (1641년 3월 14일 ~ 1674년 9월 17일)
- 숙종의 장자 경종 이윤(1688년 11월 20일 ~ 1724년 10월 11일)
- 영조의 장자 진종 소황제(효장세자) 이행(1719년 4월 4일 ~ 1728년 12월 16일)
- 사도세자의 장자 의소태자 이정(1750년 9월 27일 ~ 1752년 4월 17일)
- 정조의 장자 문효태자 이순(1782년 10월 13일 ~ 1786년 6월 6일)
- 순조의 장자 문조 익황제(효명세자) 이영(1809년 9월 18일 ~ 1830년 6월 25일)
- 효명세자의 장자 헌종 성황제 이환(1827년 9월 8일 ~ 1849년 7월 25일)
- 철종의 장자 원자 이융준(1858년 11월 22일 ~ 1859년 5월 25일)
- 고종의 서장자 완효헌친왕 이선(1868년 5월 31일 ~ 1880년 2월 21일), 적장자(이름 미상, 1871년 태어났지만 항문이 없는 기형아로 태어나 사흘만에 사망)[69]
- 의민황태자 영왕의 장자 원손 이진(1921년 ~ 1922년)
사망하지 않고 생을 유지했더라도 수난을 겪은 장자도 많다. 정종의 서장자 의평군 이원생은 별다른 결점이 없었음에도 고작 서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숙부 정안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고, 양녕대군은 오래 살았으나 폐세자가 되었다. 정원군의 적장자 인조는 자신의 업보로 매우 끔찍한 삶을 살았으며 순종은 망국의 군주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평생을 살았다.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도 한국 조선왕조와 유사한 장자 수난의 역사를 가졌다. 이것은 (Curse of the Braganzas)로 알려져 있다.
9. 글씨체
[image]
'''열성어필(烈聖御筆)'''에 수록된 태종, 세종, 문종, 세조, 성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정조의 친필 글씨체.출처
10. 이야깃거리
- [image]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마지막 권에 실려 있는 그림은 조선국왕의 성향을 잘 묘사하고 있다.
- 3대 태종 이방원은 역대 조선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문과)시험(물론 태조 이성계가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인 고려 시대의 과거)에 급제한 국왕이다. 그것도 17세에 최연소로 급제하였다.[70]
- 18대 현종은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청나라)에서 태어난 임금이다. 부왕 효종이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그 외 조선 건국 이후 출생한 국왕 중 도성 한양 밖에서 태어난 국왕은 16대 인조(황해도 해주). 반대로 최초로 도성 한양에서 태어난 국왕은 4대 세종이고, 최초로 궁궐 내에서 태어난 국왕은 6대 단종. 세종은 1397년, 즉 1차 왕자의 난 전이라 아버지 태종이 그저 5남으로서 일반 왕자(정안공)였던 시절에 정안공 개인 사저에서 태어났고, 마찬가지로 문종도 1414년에 아버지 세종이 3남으로서 일반 왕자(충녕대군)였던 시절에 사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관점으로 보면 태조도 외국에서 태어난 군주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북한이 명목상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점에서) 해당되지 않는 부분이다.
- 한양에서 즉위하지 않은 국왕은 초대 태조 이성계와 3대 태종 이방원. 둘 다 개경(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태조가 즉위할 때는 아직 한양을 수도로 정하지 않았을 때이고, 태종이 즉위할 당시엔 수도를 잠시 개경으로 천도했을 때였다. 나머지는 전부 한양에서 즉위했는데 정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는 경복궁에서,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은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예종, 인종은 창경궁에서, 그리고 경종, 정조, 헌종은 경희궁에서 즉위했으며 광해군, 인조, 순종은 경운궁(덕수궁)에서 즉위했다.
- 조선 국경을 넘어 외국에 나갔던 경험이 있는 국왕은 태조, 태종, 세조, 효종, 현종, 순종이다. 태조는 애초에 출신이 동북면[71] 에 공민왕 때 요동 지방을 크게 들쑤시고 온 적도 있고, 태종과 세조는 왕자 시절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이 있으며, 효종은 상술되었듯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왔고, 현종은 아버지 효종이 볼모로 있던 시절에 태어난 국왕이다. 순종은 역대 국왕들 중 유일하게 일본을 방문했던 국왕으로 대한제국이 망한 후인 1917년에 일본을 방문해 약 20여일 정도 있었다. 하마터면 선조도 조선 국경을 넘어갈 뻔 했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효종의 경우에는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망하는 순간과 청나라가 중원을 접수하는 광경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베이징에서도 수개월 체류했으니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을 했다 할수 있다.
- 임금이나 세자의 자식이 아닌데 왕위를 이은 국왕은 태조, 선조, 인조, 철종, 고종이다. 선조는 명종의 양자가 되었고 인조는 자기가 국왕이 된 후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증해서 임금의 자식이 되었고, 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으며 고종은 익종(뒷날의 문조)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양자로 들어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므로 이들 모두 어쨌든 사후적으로 임금의 자식이 되긴 했다. 선조와 철종의 아버지는 대원군으로 추존되었지만 국왕으로 추존되지는 않았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대원군들 중 유일하게 살아 생전에 대원군이 된 경우이다.
- 세자의 자식으로 국왕이 된 케이스는 의경세자의 아들 성종,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있다. 성종의 아버지 의경 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고 정조는 효장 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양부 효장 세자는 진종으로, 생부 사도 세자는 훗날 고종에 의해 장조로 추존되었다(이전엔 장종). 헌종의 아버지 효명 세자는 익종으로 추존되었다가 고종 때 문조로 재추존됐다.
- 역대 국왕 중 형제끼리 세습한 국왕은 정종 - 태종, 연산군 - 중종, 인종 - 명종, 경종 - 영조이다. 조선 왕실은 부자 세습을 원칙을 하였지 이 형제 세습은 상당히 예외적인 유형인데, 역시 이 답게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연산군 - 중종은 중종반정이란 특수한 유형이고 정종 - 태종은 사실상 태종이 주도한 무인정사 이후의 임시직을 정종이 맡았다가 태종이 도로 가져간 형태.[72] 인종 - 명종, 경종 - 영조도 각각 후사가 없자 물려준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유혈 숙청(을사사화, 신임옥사, 정미환국 등)이 발생했다.
- 반대로 역대 국왕 중 삼촌-조카 혹은 조카-삼촌이 세습한 케이스는 대체적으로 비정상적인 세습이다. 계유정난을 통해 대신과 안평대군을 제거, 생육신, 사육신의 난을 통해 소장파와 잔류 친단종파를 숙청한 뒤 조카 단종까지 죽인 조카 단종-삼촌 세조, 반정을 통해 삼촌 광해군을 몰아낸 조카 인조. 다만, 단종-세조 뒤 삼촌 예종-조카 성종은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을 제치고 계승 순위 3위인 자을산군을 즉위시킨게 정통성 문제를 있기도 했지만, 피바람은 불지 않았다. 워낙 예종이 예기치 못하게 빨리 자연사해서... 삼촌 명종과 조카 선조도 있으나, 역시 같이 정통성 문제가 있는 성종이 공부를 열심히했는데, 이같은 문제도 없었다. 7촌 조카-7촌 아저씨인 헌종-철종은 예외.[73]
- 상왕(上王)이 되었던 국왕은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세조[74] , 고종이 있다. 이중에서 태종과 세조를 빼고는 전부 다 외압으로 상왕이 되었다. 양위 드립을 쳤던 국왕으로는 위의 국왕을 빼고도 다음과 같다.
- 세종 - 끝내 대리 청정으로 합의를 봤다. 세종 24년부터 세자가 섭정을 했다. 따라서 세종 24년 이후의 업적은 실질적으로 아들인 문종의 업적으로 봐야 한다.
- 중종 - 죽기 직전에 인종에게 왕위 물려줄까?하고 한번 해보았으나 조정의 결사 반대로 무산되었고 어차피 얼마 안가서 죽었는지라...
- 선조 - 세자인 광해군을 아주 가지고 놀았다. 광해군이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된 것도 아니고, 장남 임해군이나 적자 영창 대군이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세자가 된지라 광해군은 선조가 양위 드립을 칠때마다 불충으로 몰리지 않으려 죽을 똥을 쌌다.
- 영조 - 두세 차례 선위 파동을 일으켜서 세자가 통곡하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기절까지 했다.
- 국왕이 되기 전에 대리청정을 해본 국왕으로는 태종, 문종, 예종(세조가 아팠을 때 잠깐), 광해군, 경종, 정조 등이 있다. 태종은 세자 시절부터 군사권을 지휘하는 등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했고 사도 세자, 효명 세자는 대리 청정은 했으되 국왕이 되기 전에 죽었다. 광해군의 경우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분조(分朝)를 이끈 경험이 있고, 소현 세자는 정묘호란 때 분조를 이끌었으나 국왕이 되기 전에 죽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으로 단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차지하여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했으나 수양대군은 단종의 숙부이므로 이것은 대리청정이 아니다.
- 조선 국왕들은 즉위할 때 평균 23세였으며 평균 재위 기간은 19년 2개월. 평균 46세 살았다. 25세에 즉위해 24년 재위하고 49세에 죽은 정조가 가장 평균에 가까운 임금이다. 한편 영조는 83세까지 살았으니 엄청 장수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시대 당시에도 영조보다 오래 산 인물들은 찾아보면 꽤 많다.[75]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짧았던 것은 영아 사망율이나 낮은 위생 수준 따위 때문인데 당시에도 생명력 강한 사람은 90대를 넘기기도 했다. 임금은 매일 보는 업무가 격한데다, 스트레스를 풀 수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거기에 비해 식사량은 많았으니 대체로 비만이 될 확률이 높았다. 실제로 세종 대왕의 경우 당뇨병 때문에 사망하였을 정도.
- 영조[76] 와 정종[77] , 광해군[78] , 고종[79] , 순종[80]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임금이 종기를 앓았으며, 문종, 세조, 성종, 효종, 정조가 종기로 사망했다. 이는 당시 조선 임금의 생활 습관이 종기에 걸리기 딱 좋기 때문. 정무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로, 지나치게 많은 식사량과 운동 부족은 종기가 발생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태조와 태종은 사냥을 즐겼고, 정종과 세종대왕은 오늘날의 골프와 흡사하다는 격구라는 것을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국왕의 몸은 국가의 안전과도 같다는 당시의 사고 방식 때문에 격한 운동이나 야외 활동은 금지되었으며[81] 심지어 국왕이 끼니를 거르기라도 하면 온 대궐 안이 발칵 뒤집어지는 대형 사고였다. 사극에서 국왕이 끼니를 걸렀다는 소식을 들은 왕비나 대비가 "주상께서 수라를 물리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주상께서 수라를 마다하셨다는게야!?!?"라고 대노하는 장면이 괜히 나오는게 아니다. 영조와 같은 일부 국왕은 역으로 수라와 탕약을 일부러 거르는 일종의 파업을 행하기도 했다. '내 뜻대로 하기 전까지는 밥을 굶겠다!'는 선언이니 신하들에겐 엄청난 압박이었다[82] .
- 조선 국왕의 하루 끼니(수라)는 총 5끼였다. 초조반으로 죽과 미음, 동치미, 마른 반찬 조합으로 나온 것이 오전 7시 쯤 나온 상이었고, 아침상이 오전 10시쯤 나왔는데 12첩 반상을 먹었으며, 점심 간식을 '낮것상'이라 하여 국수나 장국, 다과를 먹었다. 그리고 저녁은 오후 5시쯤 나와 12첩 반상을 먹었고 야참으로 약과나 수정과, 식혜, 국수 등이 나왔다고. 즉, 정식 식사는 '조석(朝夕) 끼니'라는 단어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오전 10시 경의 아침상과 오후 5시쯤의 저녁상 2끼였으며, 나머지는 중간중간의 간식이었던 셈.점심이 정식 식사가 된 역사는 의외로 짧다. 사실 '점심(點心)'이라는 말 자체가 '아침 먹고 나서 꽤 시간이 흘러 해이해진 마음
心[
을 다시 점화(點火)시킬 정도로 간단히 먹는 식사'라는 뜻이기도 하고... 본래는 조석 끼니 사이의 간식 취급이었다. 왠지 '대식가'의 이미지가 강한 세종대왕은 하루 4끼를 먹었고 영조가 5끼의 식사를 3끼로 줄였다. 두 사람은 식성 자체도 극단적으로 정반대였는데, 세종은 고기를 매우 좋아해서 고기 반찬이 없으면 밥을 안 먹는다고 부왕 태종이 걱정해 유언으로 상 중에도 고기를 먹게하라고 했을 정도였던 반면, 영조는 채소 반찬 서너가지로 소식하는 것을 좋아해서 당시 실록을 보면 영조의 식단을 주변에서 걱정했다고 한다. 영빈(영조의 후궁이자 사도 세자 생모)은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이러한 식단은 건강에도 영향을 미쳐, 세종은 눈병, 피부병, 각종 성인병에 시달렸으나 영조는 즉위 52년간 잔병치레 조차 없었다. 영조의 식습관은 오늘날에도 장수 비결로 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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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는 술을 매우 꺼려서 본인도 술을 거의 마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주령을 내려 술을 한동안 일절 금지시켰다. 사실 술을 만드려면 대량의 곡식이 필요해서 이를 절약하기 위해 금주령을 내린 사례는 영조 이전 및 이후에도 있었지만 일시적이고 단기간이었던 반면, 영조는 거의 재위 기간 내내 금주령을 유지시켰다. 금주령을 어긴 관료를 처형하도록 하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처형장에 직접 올 정도. 이런 식으로 장기간에 걸쳐 금주령을 유지한 것은 영조 대가 유일하다. 아이러니한게, 그 다음 대이자 손자인 정조는 술을 즐겨서 즉위 직후 금주령을 폐지하였고 평소 술 버릇도 '남에게 강제로 술먹이기'였다.
- 자기 자식을 죽였던 국왕은 서장자 복성군을 사사한 중종과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영조가 있다.[83] 인조 역시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강한 의심을 받고 있으나 확실한 건 아니다.
- 형제를 죽인 국왕들은 은근히 많은데 이복 형제인 이방석, 이방번을 베어 죽인 태종 이방원부터 동복 동생인 안평 대군, 금성대군을 죽인 세조, 이복 형제들을 쳐죽인 연산군, 이복 형제 견성군을 사사한 중종,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 이복 형제 은전군을 사사한 정조[84] 등이 있다.
- 즉위하기 전 실무 관료 생활을 해본 국왕으로는 고려의 무관 출신인 태조와 정종, 위에서 나왔듯이 유일한 과거 급제자 출신인 태종, 수양 대군 시절 잠시 영의정 자리를 맡아서 실권을 장악한 세조가 있다. 이후 성종 때에 종친 사환 금지법이라고 해서 왕실 종친들은 명예직 외에는 관직 진출을 금지해 버렸다.
- '친정(親征)', 즉 국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실전에 참가한 형태는 조사의의 난 때 친정한 태종이 유일하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도 전장에 있었던 것은 맞으나 친정과는 거리가 있다. 국왕이 되기 이전에 친정한 사례로는 임진왜란 때 세자 시절의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참여한 적이 있다.
- 조선 왕조의 수도는 한양이었고 또한 조선 자체가 북부 지방보다 남부 지방을 훨씬 더 중요시했던 나라다 보니 조선 국왕 27명 중 26명이 남한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가 2대 정종으로 현재 북한 땅인 개성특별시(후릉)에 묻혀 있다. 정종은 한양에서 잠시 개경으로 환도했고 개성 지역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개성 부근에 묻힌 것이다. 정확히는 개성 시내에서도 꽤 떨어진 예성강 부근에 묻혔고 강 맞은 편이 고려시대 최대 무역항이었던 벽란도다.
- 마지막 대원군을 제외한 대원군들은 인성이 안 좋거나[85] , 일찍 죽거나[86] , 자식이 역모에 연루되거나[87] , 유배되었다[88] . 흥선대원군도 청나라에서 유폐되었으니 왕들만큼이나 대원군들도 풍파의 삶을 살았다.
11. 같이보기
12. 참고 문서
[1] 태조, 세조의 어진에서 확인되는 용이 측면을 바라보고 있는 형태이다.[2]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과 사진에서 확인되는 용이 전면을 바라보고 있는 형태이다. 다만 테두리가 물결 모양인 것은 고종과 순종이 사용했고, 이전에는 그냥 둥근 모양이었다. 이 용보는 고종, 순종 시기에나 사용했을 형태다.[3] 견화(肩花)라 한다.[A]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존호[B] A B C D E F G H I J K L 명 제후로서의 시호.[C] A B C D E 대한제국 수립 후 폐지.[4] 피휘 때문에 새로 지은 이름.[5] 피휘 때문에 새로 지은 이름.[6] 증조부인 태종 이방원과 더불어 훙서 시점까지 유이하게 2자 이름을 가진 왕. 실록에 따르면, 단종이 태어나기 전, 이미 문종의 두 아들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기에 오래 살라는 의미로 세종이 2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D] A B C D E F G H I J 청 제후로서의 시호.[7] 조선 국왕 역대 사상 첫 외국(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왕이다.[8] 본명은 '광(爌)'이었으나 대사헌 조복양이 수양제의 휘(양광)와 음이 같다고 지적해서 공모를 통해 '순'으로 바꿨다고 한다.[9] 피휘 때문에 새로 지은 이름.[10] 이는 실질적인 학업적 측면에서 추존국왕을 숙지할 필요성이 적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의 추존국왕은 문자 그대로 추존된 것으로서 대체로 자신의 아들이 즉위했을 때 예법상 아버지도 추존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추존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 진종의 경우에도 명목상 정조의 양부가 되어서 추존이 된 경우이다.[11] 전주 이씨(全州 李氏)다.[12] 족보에서 퇴출됨.[13] 족보에서 퇴출됨. 고려 강종의 장인.[14] 장평도정[15] 의성군[16] 부림령[17] 유제도정[18] 완원군[19] 복녕군. 참고로 동생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은 경신환국의 일환인 '삼복의 옥'에 휘말려서 모두 역모로 사사당했다. 훗날 복권.[20] 임창군[21] 왜란을 극복했다는 것은 좋으나 당대 사람들에게도 선조는 상당히 욕을 먹었고, 구국 사유 하나 때문이 아니라 사실상 종계변무가 가장 결정적이다.[22] 효종때 신하들이 '한소열제도 열조를 묘호로 쓰므로 상당히 좋은거다.'라고 했는데 효종이 ' 남량의 초대 군주 독발오고의 묘호도 열조인데 우리 아빠보고 열조를 쓰라고?' 식으로 우겨서 가장 좋은 묘호로 꼽히는 인조로 바꾸었다.[23] 두번의 호란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고하여 격상되었다.[24] 긴 시간동안 나라를 안정시켰다하여 격상되었다. 사실 영조가 50년 동안 왕위에 있는 동안 장수했는데, 장수(長壽)의 의미 자체가 전근대에는 아주 좋았다.[E] A B C D 대한제국 선포를 계기로 고종때 바뀜. 이는 황제국으로 바뀌면서 4대조까지 제사를 모시던 기존 제후국 예법에서 5대조로 바뀌면서 자연스레 5대 고조였던 사도세자부터 조로 격상되었다.[25] 사악한 학문인 천주교로부터 나라를 지켰다고 하여 격상되었다.[26] 묘호가 있는 국왕 중에서 종이 없고, 전부 조 밖에 없다.[27] 창업군주를 제외하면 다른 한 사람은 각각 광무제, 영락제, 쿠빌라이 칸인데, 이 쪽 역사를 안다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세 사람은 사실상 나라를 새로 세운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28] 다만 선조 당대에는 방계 승통이 왕권에 문제되는 일은 없었다. 흔히 선조의 방계 콤플렉스 같은 요소들이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를 발목 잡은 것은 오히려 임진왜란 피난 당시 보여준 여러 추태들이 문제였다.[29] 간혹 실록에 적힌 이유를 들어 '그냥 나라를 오래 다스렸다' 거나, '홍경래의 난을 진압했다'는 별 시덥잖은 이유로 조 격상을 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해당 이유들은 정통성이 약해서 올려줬다고 곧이곧대로 적을 순 없으니까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이유는 당연히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고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30] 사도세자로 알려져 있다.
정조 즉위 후 장헌 세자로 시호 추존
대한제국 때 장종(1899년)으로 추존되었다가 얼마 뒤 장조 의황제(1901년)로 재추존[31] 효명세자로 알려져 있다.
헌종 때 익종으로 추증되었으며 대한제국 때 고종에 의해 '''문조 익황제'''로 다시 추증.[32] 1960년 발표 논문을 1963년 국어국문학회 국어국문학 26권에 실은 것이다.[33] 국어국문학회 국어국문학 42·43권[34] 발표 논문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35] 이건 옆나라의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왕실과 혼인한 여자는 자신의 이름에 있던 탁음을 전부 청음으로 교체해야 했다.[36] 시대에 따라 다르다.[37] 기본 뜻은 '기쁘다'지만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풀이되었다.[38]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에서는 왕, 왕비, 대비, 세자에게만 마마를 바치고, 이에 세자빈은 제외되는 것이 정식 궁중법이라고 서술한다.[39] 흔히 말하는 깨끼바느질[40] 옷감을 짤 때 금사를 넣어 壽, 福자를 새긴 천으로 지은 당의[41] 각각 ~대감과 ~자가,라고 경칭을 꼭 붙여주면서 얘기해야 한다.[42]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가 딸 숙녕 옹주에게 무심코 '너'라고 했다가 효종이 격분한 것을 중전이 중재해서 무마한 일이 있었다.[43] 경국대전에서는 왕세자의 중자(衆子)라고 표현한다. 세손을 제외한 왕세자의 나머지 아들을 규정한 것. 이들은 종법상 국왕의 적자인 대군보다 왕위 계승 순위가 더 높다.[44] 손이 워낙 귀했던 조선 후기에는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역시 정1품 홍록대부에 봉했다.[45] 이에 비해 중국은 적장자(=태자) 정도나 따로 구분하지 나머지 황자, 황녀들은 생모가 누구인지에 관계없이 모든 황제의 아들은 친왕, 모든 황제의 딸은 공주로 책봉했다. 단, 황제의 자식이더라도 후궁사이에서 나온 딸은 공주가 아니라 옹주로 칭해진다. 대표적으로 덕혜옹주.[46] 각하나 합하를 사용했다.[47] 만일 대한제국이 전통 예법을 유지했다면 친왕은 물론이고 (만일 존재했다면) 태손 역시 전하라고 불릴 수 없었을 것이다.[48] 책봉 전[49] 세자나 세손이 아닌 이상 책봉이나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너'와 해라체 모두 사용했다.[50] 보통 7~8세 정도에 책봉했다.[51]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29쪽, 137쪽[52] 남성 왕족은 종친부의 품계를 매기지만 여성 왕족은 외명부의 품계를 매긴다.[53] 대군의 정실 부인.[54] 예를 들어 왕비와 세자빈, 공주가 한자리에 있을 경우에 왕비가 정면을 보고 앉으면 세자빈은 틀어서 측면의 벽을 보고 앉을 것이다. 이 때 공주는 세자빈과 나란히 앉지 못하고 세자빈에 대한 곡좌까지 해야 했다. 물론 세자빈에게 곡좌를 하겠다고 왕비와 나란히 앉거나 마주볼 수도 없었다.[55] 예를 들면 장희빈의 경우 취선당(趣宣堂)이라고 불리웠다.[56] 영조 27년 이후에 왕비도 용보를 달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이기 때문에 용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57] 금사로 수놓은 발톱이 다섯 개인 둥근 용보[58] 금사로 수놓은 발톱이 네 개인 둥근 용보[59] 어깨에 다는 보[60] 발톱이 세 개인 용을 수놓은 네모난 보[61] 용포는 일종의 국왕 전용 정장으로 보면 된다. 정장을 입은채로 집에서 책을 읽는등 일상생활을 하지는 않으니까. 왕도 평상시에는 일반 사대부들의 옷차림으로 있었다.[62] 혹은 바늘을 들고 대기했다라는 설도 있다. 국왕이 위급할 때 침을 놓으려고...[63] 영의정, 도승지, 예조판서[64] 조선시대엔 정실 부인은 1명만 둘 수 있으므로 여기서 '많이' 두었다는 것은 왕후(중전)가 자주 바뀌었음을 의미함[65] 희빈 장씨는 폐비 후 복권되지 못했으므로 예외.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이전 대군 부인 신분으로 들어왔다가 반정 이후 반정 세력의 압력(명분은 단경왕후의 일가가 연산군 처남과 같은 일족이라 후에 어떤일 벌일지 모른다는 것)으로 쫒겨났고, 이후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되었다.[66] 이쪽은 수난보다는 자기 스스로 그르친 게 많았다. 본인보다는 그 큰아들에게 수난(피해)을 안겨준 셈.[67] 사실 서자를 포함하면 늦둥이이자 막내 of 막내인지라 적장자란 표현이 다소 난감하긴 하지만... 그리고 임해군은 양녕대군과 연산군처럼 자기 스스로 그르친 게 많았다.[68] 현종(1대 독자)과 숙종(2대 독자)은 조선 왕조의 장자론 유일무일한 외아들이기도 하다.[69] 즉 순종은 그 다음 소생이다.[70]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이 고시를 그것도 고등학생 재학 때 보고 당당히 합격했다는 얘기. 즉 엘리트 코스를 밟은 공무원이 대통령이 된 셈.[71] 현재 함흥으로 추정, 당시는 고려 땅이 아니었다.[72] 참고로 태종은 형식적이나마 정종의 양자로 있는 식으로 계승.[73] 물론 철종이 순조의 양자로 들어가 당시로썬 조카-삼촌이긴 했다.[74] 딱 하루 상왕 하고는 죽었다. 최단 재위 상왕. 최장기 상왕은 정종.[75] 대표적으로 황희, 효령대군, 송시열, 허목 등이 있다.[76] 장수했던 만큼 그 식단과 식생활이 채식으로 이루어져서 아주 건강했다.[77] 원래 무인이었고, 격구를 즐겨했다.[78] 폐위되고 역모에 연루, 그리고 후금도 광해군의 복수를 하겠다며 처들어와 유배지도 많이 옮겨졌지만, 그러면서도 66세로 상당히 장수했다.[79] 이때는 의학이 급성장할 때이다.[80] 다만 이쪽은 전반적인 건강이 안 좋았다.[81] 지금이야 대한민국 대통령의 어느 정도 격한 운동은 열량 소모 및 체지방 연소를 이유로 권장되고있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활동은 부상과 같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국왕의 건강과 안위를 거의 국가 안보급으로 취급하던 조선 시대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82] 국왕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식욕이 없어 식사를 하지않을 때도 있지만 그랬다간 무슨 근심이나 걱정이 생겨서 식사를 안하는가 싶어 궁궐이 노심초사 하는 바람에 그조차 안된다. 어쨌든 이유없다. 그저 잘 먹어야 한다.[83] 다만 중종의 복성군 사사는 김안로의 압력 때문이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중종은 도승지 양연을 통해 김안로를 순식간에 처리해버렸다.[84] 영조도 간장게장으로 경종을 죽였다는 말이 있다.[85] 덕흥대원군과 정원대원군.[86]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87]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88] 전계대원군
정조 즉위 후 장헌 세자로 시호 추존
대한제국 때 장종(1899년)으로 추존되었다가 얼마 뒤 장조 의황제(1901년)로 재추존[31] 효명세자로 알려져 있다.
헌종 때 익종으로 추증되었으며 대한제국 때 고종에 의해 '''문조 익황제'''로 다시 추증.[32] 1960년 발표 논문을 1963년 국어국문학회 국어국문학 26권에 실은 것이다.[33] 국어국문학회 국어국문학 42·43권[34] 발표 논문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35] 이건 옆나라의 일본도 마찬가지라서 왕실과 혼인한 여자는 자신의 이름에 있던 탁음을 전부 청음으로 교체해야 했다.[36] 시대에 따라 다르다.[37] 기본 뜻은 '기쁘다'지만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풀이되었다.[38]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에서는 왕, 왕비, 대비, 세자에게만 마마를 바치고, 이에 세자빈은 제외되는 것이 정식 궁중법이라고 서술한다.[39] 흔히 말하는 깨끼바느질[40] 옷감을 짤 때 금사를 넣어 壽, 福자를 새긴 천으로 지은 당의[41] 각각 ~대감과 ~자가,라고 경칭을 꼭 붙여주면서 얘기해야 한다.[42]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가 딸 숙녕 옹주에게 무심코 '너'라고 했다가 효종이 격분한 것을 중전이 중재해서 무마한 일이 있었다.[43] 경국대전에서는 왕세자의 중자(衆子)라고 표현한다. 세손을 제외한 왕세자의 나머지 아들을 규정한 것. 이들은 종법상 국왕의 적자인 대군보다 왕위 계승 순위가 더 높다.[44] 손이 워낙 귀했던 조선 후기에는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역시 정1품 홍록대부에 봉했다.[45] 이에 비해 중국은 적장자(=태자) 정도나 따로 구분하지 나머지 황자, 황녀들은 생모가 누구인지에 관계없이 모든 황제의 아들은 친왕, 모든 황제의 딸은 공주로 책봉했다. 단, 황제의 자식이더라도 후궁사이에서 나온 딸은 공주가 아니라 옹주로 칭해진다. 대표적으로 덕혜옹주.[46] 각하나 합하를 사용했다.[47] 만일 대한제국이 전통 예법을 유지했다면 친왕은 물론이고 (만일 존재했다면) 태손 역시 전하라고 불릴 수 없었을 것이다.[48] 책봉 전[49] 세자나 세손이 아닌 이상 책봉이나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너'와 해라체 모두 사용했다.[50] 보통 7~8세 정도에 책봉했다.[51] 출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김용숙, 일지사) 129쪽, 137쪽[52] 남성 왕족은 종친부의 품계를 매기지만 여성 왕족은 외명부의 품계를 매긴다.[53] 대군의 정실 부인.[54] 예를 들어 왕비와 세자빈, 공주가 한자리에 있을 경우에 왕비가 정면을 보고 앉으면 세자빈은 틀어서 측면의 벽을 보고 앉을 것이다. 이 때 공주는 세자빈과 나란히 앉지 못하고 세자빈에 대한 곡좌까지 해야 했다. 물론 세자빈에게 곡좌를 하겠다고 왕비와 나란히 앉거나 마주볼 수도 없었다.[55] 예를 들면 장희빈의 경우 취선당(趣宣堂)이라고 불리웠다.[56] 영조 27년 이후에 왕비도 용보를 달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이기 때문에 용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57] 금사로 수놓은 발톱이 다섯 개인 둥근 용보[58] 금사로 수놓은 발톱이 네 개인 둥근 용보[59] 어깨에 다는 보[60] 발톱이 세 개인 용을 수놓은 네모난 보[61] 용포는 일종의 국왕 전용 정장으로 보면 된다. 정장을 입은채로 집에서 책을 읽는등 일상생활을 하지는 않으니까. 왕도 평상시에는 일반 사대부들의 옷차림으로 있었다.[62] 혹은 바늘을 들고 대기했다라는 설도 있다. 국왕이 위급할 때 침을 놓으려고...[63] 영의정, 도승지, 예조판서[64] 조선시대엔 정실 부인은 1명만 둘 수 있으므로 여기서 '많이' 두었다는 것은 왕후(중전)가 자주 바뀌었음을 의미함[65] 희빈 장씨는 폐비 후 복권되지 못했으므로 예외.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이전 대군 부인 신분으로 들어왔다가 반정 이후 반정 세력의 압력(명분은 단경왕후의 일가가 연산군 처남과 같은 일족이라 후에 어떤일 벌일지 모른다는 것)으로 쫒겨났고, 이후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되었다.[66] 이쪽은 수난보다는 자기 스스로 그르친 게 많았다. 본인보다는 그 큰아들에게 수난(피해)을 안겨준 셈.[67] 사실 서자를 포함하면 늦둥이이자 막내 of 막내인지라 적장자란 표현이 다소 난감하긴 하지만... 그리고 임해군은 양녕대군과 연산군처럼 자기 스스로 그르친 게 많았다.[68] 현종(1대 독자)과 숙종(2대 독자)은 조선 왕조의 장자론 유일무일한 외아들이기도 하다.[69] 즉 순종은 그 다음 소생이다.[70]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이 고시를 그것도 고등학생 재학 때 보고 당당히 합격했다는 얘기. 즉 엘리트 코스를 밟은 공무원이 대통령이 된 셈.[71] 현재 함흥으로 추정, 당시는 고려 땅이 아니었다.[72] 참고로 태종은 형식적이나마 정종의 양자로 있는 식으로 계승.[73] 물론 철종이 순조의 양자로 들어가 당시로썬 조카-삼촌이긴 했다.[74] 딱 하루 상왕 하고는 죽었다. 최단 재위 상왕. 최장기 상왕은 정종.[75] 대표적으로 황희, 효령대군, 송시열, 허목 등이 있다.[76] 장수했던 만큼 그 식단과 식생활이 채식으로 이루어져서 아주 건강했다.[77] 원래 무인이었고, 격구를 즐겨했다.[78] 폐위되고 역모에 연루, 그리고 후금도 광해군의 복수를 하겠다며 처들어와 유배지도 많이 옮겨졌지만, 그러면서도 66세로 상당히 장수했다.[79] 이때는 의학이 급성장할 때이다.[80] 다만 이쪽은 전반적인 건강이 안 좋았다.[81] 지금이야 대한민국 대통령의 어느 정도 격한 운동은 열량 소모 및 체지방 연소를 이유로 권장되고있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활동은 부상과 같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국왕의 건강과 안위를 거의 국가 안보급으로 취급하던 조선 시대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82] 국왕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식욕이 없어 식사를 하지않을 때도 있지만 그랬다간 무슨 근심이나 걱정이 생겨서 식사를 안하는가 싶어 궁궐이 노심초사 하는 바람에 그조차 안된다. 어쨌든 이유없다. 그저 잘 먹어야 한다.[83] 다만 중종의 복성군 사사는 김안로의 압력 때문이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중종은 도승지 양연을 통해 김안로를 순식간에 처리해버렸다.[84] 영조도 간장게장으로 경종을 죽였다는 말이 있다.[85] 덕흥대원군과 정원대원군.[86]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87]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88] 전계대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