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조선)
이직(李稷, 1362 ~ 1431)은 여말선초의 인물로 본관#s-1은 성주(星州), 작위는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자는 우정(虞庭), 호는 형재(亨齋)다.
그는 고려 말의 유명한 권문세족 출신으로 증조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이고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李褒)며 아버지는 이인민(李仁敏)이다. 그의 큰아버지는 공민왕 연간(1351 ~ 1374)의 명신이었던 이인복#s-1과 우왕 연간(1374 ~ 1388)의 권신이었던 이인임이다. 하륜은 그의 사촌누나의 남편, 곧 종자형(從姉兄)이다. 그의 장녀는 태종의 후궁인 신순궁주(愼順宮主) 이씨이고 다른 딸은 태종의 처남인 민무휼에게 시집갔다.
1377년(우왕 3) 16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과 태조 추대에 참여해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이인임이 이성계에 의해 축출당했으니 한 집안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張至和)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있다가 정안군 이방원이 이끄는 정변군의 습격을 받았다. 정도전, 심효생, 장지화 등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남은은 도망치는데 성공했지만 다시 되돌아와 죽었다. 이때 이직은 급히 하인의 복색으로 갈아입고 도주해 목숨을 건졌고 이후 정안군에게 용서받아 다시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415년(태종 15) 태종 때 황희와 함께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고 민무휼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민무휼과 민무회(閔無悔) 옥사에도 연루되어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직첩이 회수되었다. 또한 황희와 함께 양녕대군 폐위에 반발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유배되었고, 또한 심온의 옥사에도 연루될 뻔했다.[1] 이후 귀양지에서 책만 읽으며 조용히 지내다 1422년(세종 4) 풀려나 1424년(세종 6) 영의정이 되었으며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기도 하면서 1426년(세종 8)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사직한 뒤 1431년(세종 13)에 죽었다.
다음과 같은 시조가 유명하다. 조선 건국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1. 대중 매체에서
〈용의 눈물〉에서는 이직의 이름이 정안군이 만든 살생부에 올라 있어서 1차 왕자의 난 때 궁문을 들어서다 정안군이 매복시킨 장사들이 휘두르는 철퇴에 맞아 사망하자 정안군이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그의 이름에 사선을 그었다. 그런데 제작진이 이게 뒤늦게 역사왜곡임을 알고 이직을 다시 되살렸고 배우도 이우석으로 바꾸었다. 다행히 인물의 인지도가 높지 않았고 사망하는 장면 외에는 이렇다 할 출연이 없었기에 큰 어색함 없이 극에 녹아 들었다. 등장인물이 죽었다 살아난 한국 사극 역사상 초유의 해프닝이었다. 이후에는 그냥 그럭저럭 등장하는 조정 관료 정도의 역할로 나온다. 정승까지 올랐지만 실제 역사대로 사위인 민무휼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위가 국문을 받는 현장에서 민무휼을 소극적으로 변호해주려다 일을 키운 장본인인 대사헌(大司憲) 유정현에게 죄인의 장인되는 사람은 말하지 말라는 폭언을 듣고 태종에게 삭탈관직되어 귀양길에 올랐다. 이후 세종 즉위 후 관직을 돌려받고 한양으로 돌아와 영의정이 되었다고 나레이션으로 나온다.
조영무가 태종의 궁녀를 취해버린 사건에 간접적으로 한 건했다. 오랜만에 조정이 좀 조용해진 와중에 하륜, 이직, 조영무 삼정승이 기방에 들러서 술 한잔 하는데 조영무가 나이먹고 너무 무료하다고 하자 같이 술을 마시던 우의정 이직이 "그럼 첩을 한명 들여보는건 어떠시오?"라고 첩장가를 제안한 것. 문제는 그 제안을 수락한 조영무가 고른 사람이 하필 모종의 이유로 궁밖에 잠시 나와 있던 태종의 궁녀였던것. 결국 조영무는 태종이 비상 소집 훈련 후에 삼정승들과 모여 얘기 하던 중 태종에게 불호령을 들어야했다.[2]
[1] 심온과 민무휼은 사돈 간이고, 이직은 민무휼의 장인이므로 심온과 이직은 서로 민무휼을 통해서 인척으로 엮어져 있었다.[2] 극중에는 조영무가 '그냥 배째십시오'라며 뻗대자 이방원이 웃으며 넘어가줬다면 사료에서는 이방원이 처음부터 그냥 넘어가줌에도 조영무가 눈치를 보며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