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현
1. 개요
유정현(柳廷顯, 1355 ~ 1426) 또는 류정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 본관#s-1은 문화(文化)다. 고려 원 간섭기 중찬(中贊)을 지낸 류경(柳璥)의 자손이며, 아버지는 유진(柳鎭). 태종과 세종 대의 재상으로 세종의 다른 재상들과 같이 죽을 때까지 혹사당한 인물. 주로 태종의 조종을 받아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운 일과 세종의 장인 심온의 국문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문화 류씨 가문은 여말선초에 상당한 영달을 누린 가문으로, 성헌의 용재총화에서는 75성관의 명문거족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1]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가 정도전의 일파라는 이유로 1차 왕자의 난 때 살해당한 유만수는 그의 사촌[2] 이고, 태종 때 우의정에 오른 유량(柳亮) 역시 유정현의 일족이다.
2. 생애
고려 말 음보로 등용되어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조선이 건국되고 정몽주 잔당을 숙청하는 과정에 관직을 회수당하고 태조가 즉위하자마자 귀양을 갔다가 자식 둘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1393년(태조 2) 관직을 돌려받았다. 1394년(태조 3) 상주 목사에 임명되었다가 각 도의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 의정부 참찬(參贊), 찬성(贊成) 등을 거쳐 1416년 좌의정이 되었고 같은 해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하고 새로운 세자를 세우려 할 때 충녕대군을 세우라고 주장하라는 태종의 언질을 받고 박은#s-1과 함께 '어진 이'를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해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는 데 일조했다. 세종이 즉위하고 상왕이었던 태종이 추진한 대마도 정벌 때 삼군도통사가 되었다.
태종이 심온을 숙청할 당시 옥사를 책임지고 박은과 함께 심온을 주도적으로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폭풍을 막기 위해 심온의 가족까지 처벌할 것을 주장하여 관노로 만든다. 하지만 태종 사후 세종에 의해 재상급 관직을 거치면서 궤장까지 하사받았다. 세종의 원수와 같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임을 맡긴 이유는 그가 건국 초 조선에서 제일가는 재정관리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이후 경시서(京市署) 도제조에 임명되어 하루종일 시전#s-2에 죽치고 앉아 물물거래를 단속하며 백성이 자살할 정도로 각박하게 법을 집행했으며, 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해 방만한 예산 운영을 개선하느라 필수 비품마저 구하기 힘들 정도로 예산을 줄였다. 이외에 개인의 토지와 노비의 소유를 제한하는 법안을 제시하고 관리의 녹봉도 화폐로 주자고 주장했으며 강물이 어는 겨울에는 조운을 육로로 바꾸자고 제안했으며 공신전이나 다름없는 별사전(別賜田)의 상속 금지를 제안해 관철하는 등 혁신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기반 공사가 많은 국초에 재정이 많이 필요한 토목 공사를 주도하며 비용을 상당히 줄였다. 70세가 넘자 꾸준히 치사(致仕)를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72세에 은퇴한지 4일만에 죽었다.
3. 수전노 재상
사기식 분류법을 따르면 아주 전형적인 혹리(酷吏)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한결같았다. 효령대군의 장인 정역의 사노가 그에게 돈을 빌린일이 있었는데[3] 납기일을 어기자 그 집으로 쳐들어가 가마솥을 압류해 왔으며,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가 사람을 죽이자 어차피 콩을 수백 석씩 먹기만 하는 동물이니 섬에 귀양보낼 것을 주장했고, 북방의 군인들은 어차피 수조권을 받으니 중앙에서 주는 급료를 없애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한성 외관직의 하급 관료들의 임금을 체불하고 국가에서 지급하던 점심을 없애 세종을 경악하게 하기도 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조차 콩 한 톨 주지 않는 인색함을 보여 당시 백성들에게 "당장 굶어 죽어도 영상의 재물을 빌리지 않겠다"는 원성을 들었다. 그래서 실록의 졸기(卒記)에서도 그를 중국 한무제 대의 상인 출신 재정관료로 생활 필수품인 소금과 철의 전매를 주장해 재정을 늘렸지만 백성을 수탈했다는 비판을 들은 상홍양(桑弘羊)에 빗대어 비난하고 있다.[4]
4. 사극에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신귀식이 맡아서 열연하는데, 수전노 에피소드는 안나오지만 인물 자체는 제대로 고증해서 유능하나 '''지독할 정도로 깐깐하고 각박한 성정'''의 신료로 등장한다. 양녕이 가례를 올릴 때 빈례도감의 소임을 맡는 것으로 처음 등장했으며, 태종이 민씨 형제를 제거할 때 대사헌으로서 그에 앞장섰다. 특히 민무회가 조정에 노비 출신이 부당하게 들어와 일을 하고 있다고 상소를 올리자 이를 두고 자중해야 할 죄인 집안 사람이 조정 일을 함부로 재단하여 왕실을 능멸했다며 마구 물어 뜯는데[5] 민무휼의 장인이었던 우의정 이직이 어떻게든 사위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소극적으로 변호하자 명색이 정승인 이직에게 죄인의 장인은 말씀하실 입장이 못 된다며 윽박지르다시피 하며 입을 막아 버린다.[6] 정승을 겁박하다시피 하는 모습에 왕실의 외척인 김한로와 심온이 보다 못해 한 마디 하고 황희도 좀 심한 것 아니냐고 중재하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일을 키운다.
은근히 욕심도 있어서 세종이 즉위한 직후 자신은 영돈녕부사로 물러나고 심온이 영의정에 오르자 고까운 심사를 내보였다. 태종이 심온 옥사를 시작하자 의금부 도제조에 임명되어 수사 지휘권을 받아서 심온과 그 관련자들을 혹독하게 추국하는데, 심온도 국문을 받을 때 평소부터 친분이 있었던 박은에게는 지독한 배신감을 드러냈으나[7] 유정현에 대해서는 ''원래 그런 인간"이라며 조금의 섭섭함도 내비치지 않는다[8] . 옥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태종 사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폐비론을 주장하는데, 일말의 가책이라도 보이는 박은과 달리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밀어붙인다. 이수, 변계량, 최윤덕 등 대부분의 신료들이 반대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최윤덕이 인정상 할 짓이 아니라고 한 마디 하자 변방에 나가 있다가 막 조정에 들어온 무관들이 뭘 아냐면서 무시한다. 태종이 그만하라고 하는데도 계속 주장하다 세종이 옥사에 대한 정치 보복은 없을 것이나 한 번만 더 들고 나오면 그땐 대역죄로 다스리겠다며 역정을 내고 나서야 그만뒀다.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성우이자 배우인 김기현이 분했다. 이 드라마 등장인물 대부분이 그렇듯 실존 인물과 거리가 있다. 극중 심온의 가족을 노비에서 풀어 줘야한다며 간청하던 정소공주가 죽자 태종의 조치를 부정하며 심온의 옥사를 뒤집고 주요 관료들을 다 탄핵하려 하자 신진 관료들에게 공수까지 하면서 기존 관료가 탄핵되면 나라가 돌아갈 수 없다며 옥사를 뒤집을 수 없지만 심온의 가족의 처지는 반드시 해결하고 사과한다.
[1] 유경래. "고려 후기 문화 유씨 가문의 가계와 통혼권." 국내석사학위논문 아주대학교, 2007. 경기도[2] 유정현의 아버지 유진은 유만수의 아버지 유총의 동생. 말하자면 태종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인물의 사촌을 영의정에까지 앉힌 것이다. 이러한 인사 기용은 상당히 관대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유정현뿐 아니라 왕자의 난으로 숙청당한 신료들의 다른 가족 구성원들 중에서 유사한 케이스가 꽤 많다. 정도전의 아들 정진, 심효생의 아들 심도원, 남은의 형 남재 등이 모두 태종의 핵심 정적들과 혈연관계에 있었는데도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지 않고 오히려 고위직에 오른 사례다.[3] 돈거래를 부끄럽게 여기던 조선 양반들이 사노를 통해 돈거래했다는 사실을 보면 돈을 빌린 주체는 정역으로 봐야 할 것이다.그런데도 돈을빌려준 주체는 유정현으로 기록되있는걸 보면....[4] 재밌게도 류정현의 4대조 할아버지인 류경은 생전에 치부에 능하고 재물을 밝혀 삼한거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5] 심지어 조정도 아니고 조영무의 상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륜이 조영무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민무구, 민구질을 보다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는 식으로 민무휼, 민무회를 위로하자, '그러고 보니 참 사헌부에 상소가 하나 올라왔는데...' 식으로 말을 꺼낸 것.[6] 이직은 파직되어 거기서 끌려나간다.[7] 박은이 처음부터 심온을 몰아간건 아닌게, 최초 병사들 배치변경 관련으로 태종이 화를 낼때 현재 주상인 세종과 상왕 태종에 대한 안전을 위해 경비를 증강시키는 '''일상 의례적인 일'''이었다고 약간이나마 변호는 했다. 물론 곧바로 태종의 일갈에 입을 다물어야 했지만...[8] 다만 박은의 간청을 받아들인 태종이 국문을 멈추라고 지시했을 때는 더 이상 진행하기가 어려웠다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한 발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