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1932)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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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振羲
1932년 9월 13일 ~
1. 개요
2. 일생
3.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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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이다. 종교불교이다. 본관은 고성 이씨[1]다.과학기술처(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4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상희의 친형이다.

2. 일생


1932년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태어났다. 부산 동래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960년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거쳐 서울신문 정치부장을 역임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정우회 제1기 국회의원에 임명되었다. 1976년 유신정우회 제2기 국회의원에도 임명되었다.
1979년부터 서울신문으로 복귀해 주필을 맡던 그는 5.18 민주화운동 직후인 1980년 7월, 전임 사장인 이환의가 사실상 경질되자 공석이 된 (주)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직에 임명되어 한국방송협회 부회장까지 맡았다. 취임 첫 날부터 "새 시대 정립을 위해서 언론인은 국가관이 투철해야 하며 체제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며 "앞으로 이를 따르지 않은 언론인은 물러나야 한다"고 선언한 뒤 7월 15일에 간부급 임원 177명의 사표를 받아 그중 41명을 쫓아냈고, 나흘 뒤에는 차장 이하 전 직원의 사표를 받고 56명을 쫓아내 신군부의 '언론 자율정화'에 적극 나섰다. 이후 8월에는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대통령 될 준비를(!!!) 할 때 TV 특집대담에 나왔고, 11월 언론통폐합 때 민간주식 70%를 KBS에 넘기고 이듬해엔 MBC를 경향신문과 분사시켰다.[2]
이후 전두환 정부에서 한국방송공사 사장이자 후임 문화공보부 장관인 이원홍과 더불어 악명이 높았다.[3] 한국 스포츠사에 있어도 상당한 영향을 발휘한 인물이기도 한데 전두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MBC 청룡의 창단을 지시한데다가 프로야구 중계도 자주 편성하면서 프로야구의 인기를 높이는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4] 정작 MBC 청룡이 창단하고 얼마 뒤에 문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MBC를 떠났지만...

'''무서운 사장'''으로 통했으며, 무능력자 배제, 리포트 호흡단축 등 부분적인 개혁노력도 했다고는 하지만, 정권 홍보에 앞장섰던 데다가 당시 한 간부가 서류 결재를 받으러 사장실에 들어가니 재떨이를 던지는 등 횡포를 부리는 바람에 당황한 나머지 캐비넷 문을 출입문으로 잘못알고 열고 들어갔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당시 '''"정세를 파악하려면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을 보라"'''란 말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후 민심 수습 차원의 개각이 이루어지면서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임명되어, 1985년 초까지 역임했다.[5] 1985년 한국반공연맹 이사장(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을 지냈고 1986년 서울신문 사장 겸 한국신문협회 회장, 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회 이사를 역임했다. 1988년 12월 13일 국회 문공위 언론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했으며, 2019년 <뉴스타파>에서 동생 이상희 전 의원의 말에 의하면 지금은 조용히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3. 수상 경력


  • 청조근정훈장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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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판공파 30세 희(羲)자 항렬을 쓴다.[2] 후임 경향신문 사장직은 정구호 편집국장이 맡았다.[3] 참고로 허문도, 이진희, 이원홍을 80년대 초반 '언론계 3악역'으로 부르기도 한다. #[4] 일부에서는 정치와 관련없이 프로야구를 기획했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자기가 주도한 프로야구인 만큼 초대 KBO 총재직에도 욕심낸 기록이 있는걸로 보아 정치적 목적과 개인적 목적 둘다 있었던 것이 맞을 듯하다.[5] 이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은 현재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역할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