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홍(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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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元洪
1929년 4월 3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관료이다. 80년대~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방송사(史)에 선악을 떠나 많은 영향을 끼쳤던 전 KBS 사장이자 전 한국방송협회 회장. 또한 5공화국에 적극 부합하여 허문도, 이진희 등과 함께 제5공화국 시절의 '언론계 3대 악당'으로 비판받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2. 경력
1929년,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부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56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사회부장, 주일특파원, 편집국장, 논설위원으로 근무하다 1974년 주일대사관 한국공보관에 임명되어 5년간 근무하였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7월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원수석비서관(현 민정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최세경의 뒤를 이어 1980년 7월부터 1985년 2월까지 한국방송공사 사장 겸 한국방송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취임 후 그는 먼저 KBS 내의 양심적 기자 86명을 해직시켰고, 이때 KBS의 컬러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언론통폐합으로 합병된 TBC와 DBS, 보도기능만 폐지된 CBS로부터 방송채널과 직원들을 낼름 받아먹었다.
또한 언론통폐합이 된김에 문공부, 방송위원회, 방송심의위원회 등을 적절하게 주물러서 광고도 편성하도록 하고[1] 무엇보다도 컬러TV 수신료를 2,500원으로 정하도록 로비해서[2] TV채널 1개, 라디오 채널 3개 정도였던 KBS의 규모를 크게 확충하여 TV채널 3개[3] 라디오 채널 9개를 지닌데다가 돈도 넘치는 세계구급으로 규모가 큰 방송사로 만들었다.[4] [5]
여하간 이런 축복받은 환경에서 이원홍 사장 개인은 나름대로 선구안을 발휘해서 100분쇼나 뉴스파노라마 같은 그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형식의 프로그램이 속속 신설되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방송을 지휘했으며 KBS를 대표하는 장수프로그램인 추적 60분이나 전국노래자랑[6] ,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딩동댕 유치원, TV유치원 등이 이원홍 사장이 재직하던 시절에 신설된 프로그램이었다.
그 외에 가족오락관이나 가요톱10,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유머 1번지, 젊음의 행진, 100분쇼, 11시에 만납시다, TV가정고교학습, 사랑방중계, 전국일주 등의 히트 프로그램도 이원홍 사장 시절에 방송이 시작된 프로그램인데다가 결정적으로 '''현재의 KBS 로고를 1984년부터 써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7] 이원홍이 KBS에 남긴 발자취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난시청 지역 해소를 위한 간이중계소 설치 등 방송기술 발전과 관련해서도 힘썼다.
하지만 이동규, 이광형, 김기열 등 방송과 관계 없는 인사들을 간부직에 꽂아놓고 정권에 비판적인 직원들을 해고하고 땡전뉴스로 전두환 정권에 아부한데다가 TV와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에 시시콜콜 간섭한건 물론이고 마음에 들지 않은 부하 직원들에게는 쪼인트를 마구 까대는 등 이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많이 남겼다. 게다가 박용식도 출연금지시켰다. 그래서 당대 KBS 직원들 사이에서는 '네로 황제', '왕PD'[8][9] , '노예선의 선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는 당시 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하였고 이원홍의 전임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던 이진희나 그 외 5공 시절 다른 KBS, MBC 사장들도 마찬가지였다.[10]
여하튼 이원홍의 임기말부터 수신료를 비싸게 걷어들이고 광고료도 받으면서도 땡전뉴스 편성은 적극적으로 행한 업보로 인해서 시청료 거부운동이 점차 확산되기는 시작했지만 1985년에 문화공보부로 발령나면서 KBS 사장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에(잔여임기는 한국일보 후배였던 박현태가 채웠다) 일단 경영상으로는 큰 타격을 받은걸로 되어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퇴임직전에도 여당인 민정당을 홍보하고 야당을 비난하는 선거용 드라마의 제작을 지시하고 제작현장에 일일히 찾아다니며 의도적으로 민정당에 유리한 대사를 넣도록 지시하는 등 신경을 써서 결과적으로 해당드라마의 제작진들과 출연진들, 방송사 안내직원들을 항의전화로 욕보게 만들고 KBS의 이미지를 완전히 작살내서 시청료 거부운동을 확산시키는데 일조했다.
1985년 2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때도 보도지침을 통해 자신의 연설이나 담화 내용을 눈에 띄게 보도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 [11][12] 또 그는 '민중'이란 단어에 과민 반응을 심하게 보여서 이념서적 탄압에 적극적으로 앞장섰고, 또 김언호의 <출판일기> 1985년 8월 20일자에 의하면 교보문고 시찰 당시 '민중'이나 '민주'라는 제목이 들어간 서적을 구매한 담당자를 질책한 뒤 해당 단어가 들어간 책들을 진열 서가에서 빼도록 지시한 일화가 있었다.
퇴임 후 1986년부터 3년여간 대한무역진흥공사 비상근 이사장을 역임하며 1988년 12월 13일 허문도, 이진희, 이광표 등과 함께 국회 문공위 언론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바 있으며, 1991~1995년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1995~2001년까지 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을 각각 지냈고, 김대중 정부 때 민주평통 자문위원도 역임했다. 2001년 한국차문화협회 명예이사장으로 추대됐다.
3. 수상 경력
- 국민훈장 모란장 (1982)
- 청조근정훈장 (1986)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8)
[1] 1973년부터 1981년 3월 6일까지 KBS에서 광고를 전혀 편성하지 않았다.[2] 원래는 KBS에서 광고를 편성하기로 결정난데다가 이미 1979년과 1980년에 흑백TV 수신료가 인상되었다는 점 때문에 수신료를 굳이 비싸게 받을 필요가 없다는 가정하에 1150원이나 1850원안이 유력하게 검토되었지만 이원홍과 부하직원들이 청와대나 각 정부부처에 로비를 열심히 한 덕택에 컬러TV 수신료가 2500원으로 결정났다는 후문이다. [3] 지금이야 TV채널 3개 정도를 가진 방송사야 제법 법 흔해졌지만 당대에는 소련국영텔레비전이나 이탈리아 RAI 등 얼마 없던 수준이다.[4] 다만 1980년과 1981년에는 컬러화 완료작업과 인수자금 마련때문에 적자를 보기는 했다. TBC와 DBS를 강제로 빼았은거나 마찬가지지만 일단 명목상으로는 자발적인 과정을 걸쳐서 인수가 된 것이니 인수자금을 줘야되기는 했으니까 [5] 허나 이것도 수신료 수입이 많이 감소해서 그런것이지 광고수입은 꾸준히 늘어났기 때문에 최소한 흑자는 냈다. 단지 1TV에서 광고를 적게 편성하다보니 광고수익을 기대수익보다 많이 내지 못했을뿐이었다.[6] 방송자체는 197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지만 현재의 전국노래자랑으로 개편된건 1980년 10월부터다.[7] 참고로 현재의 KBS 로고를 디자이너인 정준(2003년에 타계)이 디자인했다. 서울올림픽 공식 엠블럼에 응모했을 때는 떨어졌는데 KBS 로고 응모에는 붙었고, 작품 선정 이후로 KBS에서 공식 로고로 썼는게 그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8] 참고로 역대 KBS 사장들 중 왕PD로 불렸던 사람이 두 명이 있는데 하나가 이원홍이고, 다른 하나는 2003년 4월부터 2008년 8월까지 사장이었던 정연주라고 한다. #[9] 다만 정연주의 경우에는 제작 현장에 일일히 간섭을 해서라기보다는 구조조정 작업으로 지역방송사를 대거 정리하면서 노조와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서라고 보는게 중론이다. [10] 단 1982년 6월부터 1986년 2월까지 MBC 사장이자 이원홍의 후임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던 이웅희의 경우 다른 사장들보다 조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는 하나 재임기간 중 업무상 비리는 이들 중 가장 많았다고(...)[11] 참고로 이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은 현재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역할도 맡았다.[12]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