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노첸시오 8세
213대 교황.
1432년 제노바에서 로마 원로원 의원의 아들로 태어났고, 유년기를 나폴리 궁정에서 보냈으며, 파도바와 로마에서 공부한 후 사제서품을 받았다. 니콜라오 5세 교황의 이복형제 칼란드리니 추기경의 호의로 1467년에 사보나의 주교, 1472년에 몰페타의 주교가 되었다. 식스토 4세는 1473년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식스토 4세의 사망에 따른 콘클라베(교황 선거)에서는 온갖 음모와 술수가 판을 쳤다. 식스토 4세의 조카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훗날의 율리오 2세)는 자신이 선출될 수 없음을 깨닫고 꼭두각시를 세우려 했다. 선거 전날 밤 자기 방에서 몇몇 추기경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콜론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 사이에서 타협안 후보로 나약하고 무능한 조반니 바티스타 치보를 제시하여 선출되게 했다.
우유부단하고 단정치 못하고 지병이 있던 인노첸시오의 재위기간에 교회 쇄신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식스토 4세처럼 그 역시 세속 군주들 못지않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주로 식스토가 임명한 추기경들은 세속적으로 잘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인노첸시오는 전임자에게 막대한 빚을 물려받았으며, 교황청의 재정 상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인노첸시오는 이를 해결해 보려고 교황청 직무와 교회 관리직을 수도 없이 만들어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팔았다. 또한 나폴리 왕국이 조공 요구에 불응하자 1485년 나폴리 남작들에게 나폴리 왕 페르난도 1세를 거슬러 반란을 일으키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이 일은 로마와 교황청에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1486년 8월에 나폴리와 불평등 평화조약을 맺게 된 것이다.
줄리아노의 영향력에서 잠시 자유로워진 인노첸시오는 1488년 1월에 서품 전에 두었던 자신의 사생아 프란체스케토와 결혼한 메디치 가문의 며느리를 이용하여 로렌초 데 메디치와 동맹을 맺고, 그의 13세 된 아들 조반니(훗날의 교황 레오 1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하지만 조반니의 어린 나이 때문에 그 임명은 몇년 간 비밀에 부쳐졌다. 그러나 페르난도가 평화조약을 이행하지 않자 1489년에 나폴리에 대한 적의가 다시 폭발하여, 9월에 인노첸시오는 그를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했다. 1492년 1월에 화해가 다시 이루어졌으나 라퀼라도 잃고, 교황청의 정치적 위신도 잃게 되었다.
인노첸시오가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주들을 불러 모으려고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 관계를 맺은 첫 교황이었다. 1489년에 그는 오스만의 술탄 바예지드 2세와 협상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인노첸시오는 바예지드의 형제이자 그의 잠재적 경쟁자인 젬 왕자를 로마에 두는 대가로 매년 4만 두카토와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를 때 사용되었다는 성창을 받기로 했다. 교황은 이렇게 중요한 인질과 성물을 갖게 되어 기뻐했다.
1486년에 인노첸시오는 헨리 7세를 잉글랜드의 적법한 왕으로 공식 인정했다. 독일에서는 소위 마녀 재판을 적극 추진한 칙서를 발표했다. 그가 파견한 도미니코회 이단심문관 2명은 1486년 쾰른에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같은 해 인노첸시오는 르네상스 플라톤주의의 주창자인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논문에 대한 토론과 학습을 금지했다. 로마는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에서 무어인들이 추방되었다는 소식에 환호했다. 그래서 그는 스페인 왕 페르난도 2세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 1세에게 "가톨릭 왕"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교황으로서 그는 로마를 확고하게 통치하지 못했고, 교황령을 무정부나 다름없는 상태로 방치했다. 그리고 그의 사망과 함께 전례 없는 폭동과 혼란이 일어났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