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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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Ordo Fratrum Praedicatorum (약칭 O.P)
라틴어 별칭: Dominic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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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코회 수사(修士)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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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코회 수녀(修女)들.
1. 개요
2. 한국의 도미니코회
3. 매체에서의 도미니코회


1. 개요


관상하라, 그리고 관상의 열매를 전하라(contemplari et contemplata aliis tradere).

성 도미니코 데 구스만이 오스마의 주교 디에고와 함께 프랑스 툴루즈에서 조직한 수도회[1]를 기반으로, 1216년에 교황청의 인가를 받아 설립된 수도회로, 일명 설교자회라고도 한다.[2]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앙의 진리를 만인에게 설교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도회이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본질적인 수도생활 요소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생활을 모범으로 삼으면서 관상생활과 연구생활, 공동체 생활 및 복음삼덕(청빈, 정결, 순명), 그리고 규칙 준수[3]와 사도직 활동에 몰두하는 것이다. 때문에 매우 학구적인 분위기를 가지며, 사실상 예수회와 함께 가톨릭의 두뇌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성 도미니코가 이 수도회를 설립한 계기 자체가 이단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함이니 이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남프랑스의 이단 종파 알비파와의 대립에서 선봉장을 맡아 활약한 것. 그러나 도미니코회는 사도적 청빈, 깊이 있는 설교, 성모 마리아 신심(대표적으로 묵주기도)으로 사람들을 정통 가톨릭으로 귀의시키려 노력했고, 당시 프랑스 왕권의 남프랑스 진출 패권에 편승해서 시행되었던 알비파에 대한 폭력과 무력탄압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성 도미니코와 알비 십자군의 지휘관이었던 몽포르의 시몬 사이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음은 사실이고, 이 때문에 좋지 않은 이미지가 어느 정도 생겼다는 게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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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특징 때문에 중세에는 십자군에게 격려 설교를 하기도 하였으며, 이단심문관은 대부분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맡았으며[4][5], 교회 내의 저서를 검열하는 일도 맡았다. 이 때문에 별명은 '주님의 개(Domini canis)'[6] 이렇게만 써놓으면 뭔가 악역 같은 포스(?)가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중세의 서방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자연철학을 발전시켜 더 나아가 과학혁명의 계기를 제공한 성 대(大) 알베르토, 스콜라 철학의 끝판왕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 등 무수한 성인들을 배출한 명실상부한 가톨릭 신학계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세 독일 신비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에 속하는 마이스터 엑카르트(1260~1328), 요한네스 타울러(1300~1361), 하인리히 소이세(1295~1366)가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다.
또한 가톨릭의 중국 선교 초창기 때, 중국 의례 문제를 두고 예수회와 대립했다. 예수회는 상류층 및 사대부 위주로 선교했기에 원리원칙에 입각한 유교를 보았고, 따라서 유교식 제사는 종교적 색채가 탈피되었으므로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반면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시골의 서민층 위주로 선교하였기에 각종 민간신앙과 섞인 유교를 보았고, 그렇기에 유교식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예수회가 Deus를 관용적으로 상제, 천(天)으로 번역 가능하다고 본 반면,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오직 천주(天主)만이 가능하며 상제, 천으로의 번역은 Deus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한 이런 부분 외에도 은총논쟁 관련으로 예수회와 라이벌 격으로 대립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건 이 항목을 참조하자.
2016년 미국에선 황당한 오해를 당하기도 했다. KKK 항목 참조.
2019년 7월 19일, 사상 최초로 아시아계 회원이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필리핀계 신부로 88대 총장에 취임하여 9년간 재임한다. 바티칸뉴스 기사
도미니코회 출신의 네임드 근현대 신학자로는 마리조셉 라그랑쥬(Marie-Joseph Lagrange) 신부와 이브 콩가르(Yves Congar) 추기경을 거론할 수 있다.

2. 한국의 도미니코회


한국의 경우 예수회프란치스코회, 베네딕토회 같은 여타 유명 수도회에 비하여 진출이 상당히 늦었다.
도미니코회의 한국 진출이 처음 시도된 것은 16세기였다. 허나 이 시도는 시도하기도 전에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유럽에는 한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고 항해 시기를 잘못 잡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몆 차례의 시도 끝에 당시 선교 임무를 받은 선교사들은 중도 포기해서 일부는 필리핀으로 돌아가고 대부분은 일본 공동체의 요청에 따라 일본에 남았는데... 곧이어 박해가 터져 이들은 모두 순교자가 된다. 그 이후부터 1982년 개최된 도미니코 수도회 아시아 총회 전까지 도미니코회와 한국은 전혀 인연이 없다가 결국 한국 진출이 논의되었다. 로사리오 관구를 통해 한국 진출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자 로마 본부 책임자가 3개월여에 걸쳐 한국을 순방했고, 1987년 열린 아시아 총회에서 한국 선교가 로사리오 관구에 공식 위임됐다. 이후 한국 진출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초청을 받아 1990년 한국에 첫 선교사를 파견한 도미니코회는 1992년부터 한국인 지원자를 모집하게 되었고, 1994년 서울 미아리에서 수도원 축복식을 열었다.
현재 한국 도미니코회의 활동은 각 본당 미사 집전 및 강론, 영성지도, 피정지도 등이다. 1475년 창립된 평신도 신심단체 '로사리오회'와 '토마스 아퀴나스 청년회' 등을 지도한다.
공동체는 각각 서울특별시 수유동안산시 상록구에 있다. 한국에 있는 도미니코회는 '수도원(Convento)'이 아니라 한 단계 낮은 '공동체(Casa)'로 취급된다[7]. 수도원이 되기 위해선 종신서원을 한 수도자가 일정한 수를 넘어야 하는데, 한국은 아직 모자라기 때문. 상록구 공동체는 원래 한국인 도미니코회원 양성을 위한 수련소로 승인받았으나, 관구에서 홍콩에 국제 양성소를 건립하면서 수련소 목적은 폐지되고[8], 지원기(약 1년)만 이곳에서 보낸다.
설교자회 회칙은 (사제 서품에 필요한) 기초적 학업이 가능한 한 수도회 내부에서 이뤄지도록 규정하고 있는데(Liber Constitutionum et Ordinationum fratrum Ordinis praedicatorum (이하 LCO) 232) 현재 로사리오 관구의 설교자회의 자체적인 신학교는 한국에는 없고 마카오에 있다. 왜냐하면 현 지침에는 "로사리오 관구에서는 마카오와 본부인 홍콩[9]에만 신학교가 있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한국 도미니코회는 도미니코회의 로사리오 관구[10]에 소속되어 있다. 로사리오 관구는 한국, 일본, 대만, 홍콩[11], 마카오[12], 스페인, 동티모르, 베네수엘라, 미얀마, 싱가포르, 필리핀 일부[13] 등을 담당하며, 신학교는 마카오에 있다. [14] 따라서 양성은 100% 영어로 진행된다.
참고로, "양성이 아무리 영어로 진행되어도, 살다 보면 한국어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할 수도 있는데, 청원기부터는 교육 자체가 국외에서 이뤄진다. 영어가 싫어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면 중간에 퇴회하거나 종신서원[15]을 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 또한 로사리오 관구의 개별 양성 지침(Ratio Formationis Particularis, RFP)과 개별 학업 지침(Ratio Studiorum Particularis, RSP)에서도 영어 공부가 의무임을 명시하고 있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지역 교회에서 요구되는 학문적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실제적인 영어 지식을 지니는 것은 이상적이다.

RFP, 제2장; 수련기 이전, 제1절 기술, 목표 허가를 위한 요건의 31의 c항.

우리 선교 관구의 현실을 고려할 때, 홍콩의 관구 수련소로 보내질 수 있기 전에 적절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것은 모든 청원자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조건이다. (후략)

RFP, 제2장; 수련기 이전, 제2절; 청원기 양성 계획의 33 (ACPHK 2009, 131)

따라서, 직접 청원자의 양성을 맡고 있는 이들은 여러 장소에 따른 상이한 교육적 배경들과 그 필요들을 고려하여 청원자들의 다음의 기본 과정을 하도록 보장할 것이다.

집중적인 영어 코스. / RFP, 제2장; 수련기 이전, 제2절; 청원기 양성계획의 34 中

음악과 성가, 영어(우리 관구에서는, 영어에 더 능숙하게 되는 것이 목표가 될 것이다).

RFP, 제3장; 수련기, 제2절; 수련기 양성 계획의 55의 f항.

따라서 한국인이 도미니코회 수도자가 되고 싶다면,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영어로 양성되는 교육을 소화해 낼 의지가 있어야 한다.
  •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16]

3. 매체에서의 도미니코회



[1] 1216년 이전엔 아직 수도회가 아니라 단순히 툴루즈 교구 소속의 단체였고 1206년엔 이미 수녀회(옛 용어로 제 2회)의 전신이 되는 공동체가 있었다.[2] 사실 라틴어 원문은 직역하면 '설교하는 형제들의 회' 정도 되고, 실제로 한국 도미니코회에 소장한 회칙에는 '설교자회'가 공식명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의 관습을 고려해서 "'도미니코회'라고도 부를 수 있다." 하고 허락한다.[3] 전통적으로 도미니코회는 순명 서원만을 발한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 서원을 할 때도 청빈과 정결을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복음삼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회칙 안에 청빈과 정결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회칙에 의거하여 '하느님께 순명 서원을 발하면 나머지 두 덕목은 당연히 따라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4] 다만 설립자인 도미니코 본인은 어디까지나 설교 권한을 받았지, 종교재판관과 이단심문관이었던 적은 없다. 종교재판과 이단심문관 제도가 갖춰진 것(1231)은 그가 선종(1221)한 후의 일이다.[5]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이단심문관 일은 당시 수사들 사이에서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직종이었다. 거의 대부분 수사들이 '해야 하니까 한다.'는 마인드였고, 지속적으로 수도회 총회에 불만을 표시했다. 나중에는 수도회 총장이 편지로 '합법적으로 (이단심문관 일에서) 빠질 수 있으면 빠지세요.'라고 할 정도였다.[6] 스펠링을 보면 알겠지만, Dominicani'(도미니코회원)의 언어유희이다.[7] 명칭이 영어가 아닌 이유는, 로사리오 관구의 문서에 쓰이는 언어가 스페인어라 그렇다. 애초에 스페인에서 설립된 수도회이기도 하고(…).[8] 하지만 건물 명패에 나와있는 명칭은 여전히 '수련소'. 참고로 수도회 내부에서는 '지원소' 혹은 '청원소' 등으로 호칭이 갈리는데, 대부분 수도자들이 그마저도 더 줄여서 그냥 안산이라고만 부른다(…).[9] 다만 실제로 도미니코회 소속 신학교는 없고, 홍콩 교구 신학교에 중국 국적 신학생 수사들을 보낸다. 중국 국적 소지자는 마카오 거주가 불가능하기 때문.[10] 공식 명칭은 '로사리오의 성모 마리아 관구'.[11] 관구 본부(+청원소)와 수련소(+중국인 유기서원소)가 있다.[12] 유기서원소(+신학교)가 있다.[13] 필리핀의 경우 엄밀히는 '담당' 하는 것이 아니라 필리핀 관구가 독립하게 되면서 일부 공동체가 남게 된 것이다.[14] 실제로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설치한 신학원에서 공부하셨다. 외방 전교회는 현재는 철수한 상태.[15] 더 좁게는 사제품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이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관구장이 해외로 발령을 보내면 끝이다(…).[16] 한국인 신학자로서 활발한 저술과 번역을 하고 있는 안소근 실비아 수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가 여기 소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