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흥군(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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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선조의 서12남으로 어머니 정빈 민씨에겐 2남이다.
친남매들로는, 형으로 인성군, 누이로 정인옹주, 정선옹주, 정근옹주가 있다.
2. 생애
1604년(선조 37년)에 태어났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이 즉위하고 유영경의 옥사가 마무리된 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년)에 인흥군에 봉해졌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에는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서조카 인조가 즉위한 직후에는 위험한 고비를 몇 번 넘긴다. 1624년(인조 2년)에 발생한 이괄의 난 때 친형 인성군, 이복형 흥안군[3] 과 함께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크게 언급되지 않아 무사히 넘어갔다.# 1628년(인조 6년)에는 친형 인성군이 유효립이 꾸민 역모 사건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이유로 같이 의심받았다. 이 때 신하들은 인흥군을 위리안치 시키라고 했지만 인조가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벌을 받지 않았다.#
1645년(인조 23년)에는 종부시와 사옹원의 도제조가 되었고, 1648년(인조 26년)에는 종친부유사당상직을 겸했다. 1649년(효종 즉위년)에는 사은사[4] 로 청나라 베이징에 가서 조선의 국방력 강화 문제 및 척화파 대신 발탁에 대한 외교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했다.##
3. 사망과 이후
1652년(효종 3년) 1월 6일[5] 사망했다. 향년 46세.[6] 묘는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에 있다. 그의 묘와 신도비는 1986년 4월 9일 포천시의 향토유적 제28호로 지정되었다.
3.1. 묘계 비
묘의 입구에 묘의 경계를 나타내는 비석이 있다. 인흥군의 아들 낭선군이 1686년(숙종 12년)에 세웠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82㎝이고, 비신 높이는 150cm이다. 재질은 대리석이며 옥개석[7] 은 화강암이다.#
한글로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글귀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이 앞에서는 누구든 스스로 행동을 바르게 하고 몸을 낮추라는 뜻이다. 이 비석은 17세기 한글의 음운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비가극히녕검ᄒᆞ니ᄉᆡᆼ심도사람이거오디말라
'이 비가 극히 영묘한 위력이 있으니 어떠한 생각으로라도 거만스럽게 낮추어 보지 말라
4. 여담
- 저서로 《남한록(南漢錄)》, 《연경록(燕京錄)》과 《호서록(湖西錄)》, 《월창야화(月窓夜話)》 등이 있다. 《선군유권(先君遺卷)》이란 책도 있는데 이것은 그의 글들을 아들 낭선군이 정리한 것이다.
5. 가족과 후손
여산 송씨 송희업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딸 둘은 각각 양주 조씨 조태개와 한산 이씨 이수문과 결혼하였다.
장남은 낭선군 이우(郞善君 李俁)이고 차남은 낭원군 이간(郞原君 李偘)이다. 낭선군은 아들(서자) 둘을 두었고 낭원군은 9남을 두었다. 다만 낭선군에게 적자가 없어서 낭원군의 아들 전평군이 낭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인흥군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