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신라)
慈藏
590년~658년
1. 소개
신라 시대의 승려. 신라십성(新羅十聖)에 속하는 인물이다. 보통 법명에 경칭인 율사(律師)[1] 를 더한 자장율사(慈藏律師)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원효ㆍ의상ㆍ도선과 더불어 대한민국 각지의 오래된 사찰의 창건자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승려이다. 신라 시대 유물이나 확실한 1차 사료 기록이 남아 사실인 것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사찰의 역사, 정통성, 권위를 끌어올리기 위한 허구다.
2. 생애
골품제상 진골 출신으로 김무림(金茂林)[2] 의 아들이며 속세의 본명은 김선종랑(金善宗郞)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자장의 부모님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고민이었는데 어느날 김무림이 관세음보살 앞에서 자식이 생기기를 빌며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출가시켜 불교에 귀의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발원하자 그날 자장의 어머니가 품속으로 별이 날아드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했다고 한다.
부모를 일찍 여의자 자장은 전 재산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세운 뒤 출가했다. 삼국유사에서 선덕여왕은 자장에게 태보(台輔) 관직에 오를 것을 종용하고 이를 듣지 않고 출가하면 목을 베겠다고까지 위협[3] 했지만 자장의 의지가 확고해 선덕여왕도 어쩔 수 없이 출가를 허락했다고 기술했다.[4] 선덕여왕 5년(636)에 왕명으로 제자 승실 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종남산 운제사에서 3년 동안 수도했다. 이후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의 현신을 만나 "너희 나라에 외적의 침입이 많은 이유는 여자가 왕이라서 그렇다. 고국에 돌아가서 절을 창건하면 부처님이 국가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으며 석가모니의 정골사리와 가사 등을 받고 이후 화엄종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웠지만 선덕여왕이 귀국을 요청하여 선덕여왕 12년(643)에 장경 1부와 불구를 가지고 돌아왔다.
귀국 후 신라 최고 승직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었고 대대적인 불교 정비에 나서 불교를 확고한 통치 이념으로서 국력의 신장과 국론 통일을 꾀했고 불교의 토착화에 공헌했다. 이 때 서라벌 황룡사[5] 의 황룡사 9층 목탑도 건설하는데 탑의 층마다 신라가 앞으로 물리쳐야 할 오랑캐의 이름을 정하였다. 이외에도 불보사찰 통도사 등을 창건했는데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세우고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았다는 정골사리를 안치했다고 한다. 진덕여왕 3년(649)에는 신라 조정의 복식 제도를 당나라의 제도와 같게 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당나라의 '영휘' 연호를 사용하게 하였다.[6]
삼국유사에 따르면 말년에 초라한 거지 행세를 한 채 그를 만나러 온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하고 시자를 시켜 박대하자 문수보살이 "아상[7] 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꾸짖은 뒤 죽은 강아지로 둔갑시켰던 사자보좌(獅子寶座)를 타고[8] 광채를 발하며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시자로부터 광경을 전해 들은 자장은 거지 노인이 문수보살의 현현임을 깨닫고는 빛을 쫓아 남쪽 고개에 올랐지만 따라갈 수 없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성인과 만났건만 자신의 아상 때문에 무산됐음을 탓하다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1] 불교의 계율에서 높은 경지를 이룩한 승려에게 붙이는 존칭. 비슷하게 참선을 주로 한 승려에게는 '선사(禪師)', 경전과 교리에 이름높은 승려는 '강사(講師)', '강백(講伯)'이라 칭한다.[2] 그의 이름은 호림(虎林), 호림공(虎林公)으로도 기록되어 있다.[3] 출신 성분도 좋고 지배 계층으로서 탄탄대로만 걸어서 그런지 자존심이 셌던 듯하다. 삼국유사의 자장정율에서 면모가 드러나는데 재상으로 데려오고 '안 오면 목을 베겠다.'고 협박하는 왕을 상대로 "하루 동안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100년 동안 계를 어기고 살고자 하지 않는다."하며 꼿꼿한 자세로 일관한 이야기가 그 예.[4] 주보돈 교수는 자장의 가문이 전형적인 왕권파로서 선덕여왕을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자장의 출가를 선덕여왕이 강경하게 반대한 것도 비담으로 대표되는 반여왕파 귀족들의 위협을 받는 형편에서 자장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으로 판단했는데 자장이 출가 이후에도 선덕여왕을 계속 지원하므로 출가는 하되 선덕여왕을 돕기로 하지 않았나 추정했다.[5] 절의 창건은 진흥왕 때 했고 이 때는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해 황룡사를 완성한 것이다.[6] 당나라풍 의복 수용을 건의한 것이 삼국사기에는 김춘추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도 "김춘추는 당에 아첨해서 고유의 의복을 버리고 당의 의복을 입었다."라고 삼국사기와 똑같은 기록이 나온다. 삼국유사가 원래 불교 편향적인 성격이 강한 기록이라서 조선의 수도를 정할 때 무학대사가 정했다고 하는 야사의 기록과 태조 자신이 한양으로 정하자고 했다는 정사 기록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하겟다.[7] 我相. 불교 용어로 실체로서 자아가 있다고 믿고 집착하거나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뜻한다. 나르시시즘과 유사한 의미.[8] 불교에서는 사자를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기기 때문에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자장을 찾아온 거지가 사자를 타고 떠났다는데서 문수보살임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