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대공국

 


'''핀란드 대공국'''
'''Suomen suuriruhtinaskunta'''
'''Storfurstendömet Finland'''
'''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Финляндско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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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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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당시 핀란드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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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 1918년
위치
핀란드, 러시아 일부
수도
헬싱키[2]
인구
1870년 1,800,000명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 원수
대공(러시아 황제 겸임)
언어
핀란드어, 스웨덴어, 러시아어
민족
핀란드인, 스웨덴인, 러시아인, 카렐인
주요 사건
1809년 성립
1918년 멸망
통화
스웨덴 릭스달레르(1809-1840)
러시아 루블(1840-1865)
핀란드 마르카(1865-1918)
성립 이전
스웨덴
멸망 이후
핀란드 왕국,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
1. 개요
2. 역사
3. 대공


1. 개요


핀란드 지역에 있었던 대공국. 명목상 대공국이지만 대공을 러시아 황제가 겸하여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다.

2. 역사


본래 핀란드 지역은 중세부터 오랫동안 스웨덴 왕국이 지배해왔지만 1809년 스웨덴과의 핀란드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 제국은 스웨덴 왕국과 프레드릭스함 조약을 맺고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를 획득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지배를 반대하는 핀란드 국민들의 봉기가 이어졌고, 결국 러시아 제국은 핀란드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주는 것으로 간신히 무마했다. 핀란드는 과거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 헌법(1772년 스웨덴 헌법)이 입헌되어 입헌 군주국이 되었는데 러시아도 이것을 존중해 주었다.
러시아 제국은 스웨덴에게서 획득한 핀란드에 대공국을 수립했고 러시아 제국의 황제(차르)가 핀란드의 대공을 겸하는 동군연합 형식을 취했으며, 핀란드 대공국을 입헌 군주제 국가로 삼았고, 핀란드에 총독을 파견하기는 했으나 독자적인 의회와 정부를 갖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는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자치권이었고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통치였다.
그래도 러시아 본국이 전제 군주제여서 핀란드의 자치권이 항상 완전하게 보장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의회는 황제 마음대로 소집되다 해산되기를 반복했으며, 1820년대에 아르세니 자크렙스키(Арсе́ний Андре́евич Закре́вский) 총독은 핀란드 자치에 호의적이었던 알렉산드르 1세가 죽은 틈을 타 핀란드를 러시아와 동화시키는 것을 적극 추진했다. 많은 유럽 국가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타협을 시도하는 와중에도 러시아는 전제군주제를 고집했고 이것에 대한 핀란드인의 불만은 상당했다. 특히 1848년 혁명은 이러한 불만을 확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핀란드 민족주의가 대두하여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가 편찬되었고, 불안하게 여기던 러시아 제국 정부와 핀란드에 남아있는 스웨덴계 귀족들이 핀란드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크림 전쟁을 계기로 핀란드의 여러 지식인들은 러시아 정부의 감시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후 북유럽에서 등장한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쇠퇴, 알렉산드르 2세 황제의 관용 정책과 근대화 정책을 계기로 핀란드 민족주의는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고, 아버지의 암살을 본 알렉산드르 3세는 반동 정책과 강력한 소수민족 러시아 동화 정책, 소수민족의 민족주의 탄압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많은 핀란드인의 반감을 샀다. 이러한 정책은 알렉산드르 3세에 뒤이어 즉위한 니콜라이 2세 치세에도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결국 핀란드 총독을 역임하고 있던 니콜라이 보브리코프가 암살당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1905년 러시아 제국이 러일전쟁에서 패전하면서 핀란드 민족주의가 다시 대두되었다. 러일전쟁의 패배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는 국가적 동요를 겪었으며, 핀란드에서도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니콜라이 2세는 제한적인 개혁을 받아들였으며, 1906년에 핀란드에 새로운 의회가 설치되었다. 이 의회는 24세 이상 모든 남녀의 선거권/피선거권을 인정[3]하는 등 당대 서유럽에 비해서도 상당히 파격적인 의회 민주정을 도입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의 성향을 바뀌지 않아서 여전히 의회는 소집되다 해산되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이때 반왕정 사회주의 정당인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30%를 넘는 지지를 받고 의회에 진출하는 등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이 폐지되면서 러시아 제국 각지의 민족주의 세력이 독립을 선포하였다. 핀란드 의회도 1917년 12월에 핀란드의 독립과 니콜라이 2세의 핀란드 대공 퇴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이 장악한 의회를 불안하게 여긴 보수주의 세력이 폭력으로 사회주의 세력을 위협하고 러시아 공화국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영향력이 적었던 의회를 해산하자, 사회주의 세력은 크게 분노했고 대립이 격화되었다. 의회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는 힘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 사회주의 세력은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을 선포했고, 보수주의 세력은 핀란드 왕국을 선포해 내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3. 대공


대수
이름[4]
생몰
재위
'''1'''
알렉산드르 1세
알렉산테리 1세
알렉산데르 1세
Александр I
Aleksanteri I
Alexander I
1777.12.23
~
1825.12.1
1809.3.29
~
1825.12.1
'''2'''
니콜라이 1세
니콜라이 1세
니콜라이 1세
Николай I
Nikolai I
Nikolaj I
1796.7.6
~
1855.3.2
1825.12.1
~
1855.3.2
'''3'''
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테리 2세
알렉산데르 2세
Александр II
Aleksanteri II
Alexander II
1818.4.29
~
1881.3.13
1855.3.2
~
1881.3.13
'''4'''
알렉산드르 3세
알렉산테리 3세
알렉산데르 3세
Александр III
Aleksanteri III
Alexander III
1845.3.10
~
1894.11.1
1881.3.13
~
1894.11.1
'''5'''
니콜라이 2세
니콜라이 2세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Nikolai II
Nikolaj II
1868.5.18
~
1918.7.17
1894.11.1
~
1917.3.15

[1] 국기는 따로 없이 제정 러시아 국기를 그대로 썼다.[2] 1809년 ~ 1812년은 투르쿠[3] 국가에 준하는 정치 체제로서 여성의 피선거권을 인정한 건 이 때가 세계 최초다.[4] 러시아어/핀란드어/스웨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