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진
1. 소개
전 두산 베어스의 외야수이자 두산 베어스 잔류군 코치, 현역 시절 등번호는 37번이었다. 포지션은 좌익수-1루수, 우투양타의 스위치 히터였다.
2. 선수 경력
1992년 OB 베어스에서 데뷔, 삼성 라이온즈의 김한수와 함께 소리없는 강자[4] 로 자리잡았으며, 1995년 우승과 2001년 우승에 기여했다. 2000년에는 170안타를 때려내 최다안타 타이틀을 수상하기도 했다.[5]
스위치 히터로서는 박종호와 함께 가장 성공한 케이스이다. 2000년도 타격왕과 연속출루 기록을 세운 박종호가 일시적인 임팩트는 강했지만, 장원진 역시 그해 170안타로 최다안타왕을 수상했으며[6] , 커리어 전체를 보면 장원진이 더 기복없는 안정감을 보였다. LG시절에는 스위치히터로 완성도가 떨어져 사실상 우타자에 가까웠던 박종호에 비해, 처음부터 스위치히터로 양 타석에서 모두 안정적으로 꾸준한 기록을 보였던 점에서 국내 타자 중 사실상 가장 뛰어난 스위치 히터라 해도 손색이 없다.
커다란 덩치(188cm)에도 장타력 대신 정확한 컨택 능력을 과시하며 주로 2번 타순을 맡았다.[7] 젊었을 때는 좌익수, 나이를 먹어서는 1루수를 맡았다. 양 포지션 모두 화려하지는 않지만 준수한 수비 능력을 자랑했다. 2000년 현대와의 한국시리즈에서 홈런성 타구를 잡아내는 호수비를 보여주며 7차전까지 시리즈를 끌고 가는 데 크게 공헌했다. 대학 동기였던 구한성의 칼럼에 따르면 권명철의 패키지로 인하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노력 하나만은 끝내줘서 마침내 권명철보다 더 성공한 야구선수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권명철이 1년 반짝으로 끝난데 비하면 크게 성공한 셈이다. 특히 대학교 2학년에서야 시작한 좌타자 연습이라 더욱 대단했다고. 하지만 원래 장원진은 왼손잡이였다. 야구를 시작했을 시기에는 왼손잡이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때라 야구를 오른손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본인은 자신이 원래 왼손잡이라 그런지 좌타 적응이 조금은 빨랐던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창 20대 시절에도 노장 선배인 당시 LG의 정삼흠에게 데드볼을 맞자 마운드까지 올라와 노려보고 큰소리칠 정도로 다혈질을 자랑했다. [8] 이 외에도 빈볼이라고 판단하면 선배 투수라고 해도 강하게 대응하기도 했다.
투수와 끈질긴 승부를 펼치다가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텍사스성 안타로 상대 배터리를 허탈하게 만드는 플레이가 전매특허였다. 모 팬은 이런 플레이를 두고 ''''방망이 깎는 장샘''''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사실은 '방망이 깎던 노인'의 패러디. 동기들이 몸집은 그렇게 크면서 비겁한 타격 좀 그만하고 풀 스윙 좀 하라고 하자 '먹고 살려면 이렇게라도 해야지'라고 응수했다고.
방위 복무 선수들의 출전금지 조치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그는 방위병 제도가 폐지되자 1996년에 공익근무요원으로 전환하여 잔여 기간 동안 복무했으며, 1997년 시즌 중 소집 해제되어 팀에 복귀했다. 이 원인 제공자는 불상수.
2006년부터 노쇠화가 찾아오며 사실상 주전에서 밀리기 시작했고, 2008 시즌에는 선수로 등록됐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코치 역할을 하였고 시즌 후 정식 은퇴하였다. 2009년 일본프로야구 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고 그해 막판 귀국하여 은퇴식을 치루었다.
2.1. 연도별 주요 성적
3. 지도자 경력
2009년 9월 20일 은퇴식을 치렀다. 이후 두산 베어스 전력분석원으로 재직하다 2011 시즌부터 수비코치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5월 들어 팀이 침체기에 빠지자 코치진 개편으로 인해 1군 타격코치를 맡게 되었다.
2016년까지 1군 타격코치를 맡다가 2017년부터 2군 타격코치를 맡게 되었다.
2018년부터는 잔류군 코치로 보직을 옮겼다.
2020년을 끝으로 팀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하면서 장장 29년에 걸친 베어스 생활을 마쳤다.
4. 기타
- 현역시절 선수들이 불렀던 별명이 레간자였다고 한다. 소리없이 강하고, 묵묵히 할일 하는 형이라서 붙은 별명이라고.
- 덕아웃에서 열정적으로 응원하기로 유명했다. 상대팀 덕아웃까지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타 팀 코칭스태프에서는 싫어하기도 했다고. 홍성흔과 나란히 앉아 있으면 덕아웃이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박명환야구TV에서 구자운이 술회하기를, 마운드 옆에 까지 와서 투수를 격려했는데 안 듣는 척하고 있으면 들을 때까지 계속 했다고..
- 같은 방송에 출연한 정수근은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텍사스 안타(바가지 안타)를 제일 많이 친 2번타자라고 그의 스윙을 칭찬했다.
- 안경현과 대립해 팀 내 파벌을 형성했다는 루머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 안경현은 2011년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장원진과는 그냥 친할 일이 없었을 뿐이지 갈등은 없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장원진과 안경현은 성격도 꽤 다르다. 안경현 문서 참조.
- 별명은 "장샘"이었지만, 그의 불같은 성격 탓에 타 팀 팬들으로부터는 장승질이라고 불렸다. 성질 더러운 타이론 우즈와 말싸움을 한 일화가 있다.
- 다만 위에 서술된 불같은 성격과 파벌 형성 루머 등의 이야기와는 달리, OB 베어스 시절부터 똥군기가 심했던 팀 내에서[9] 특이하게 구타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편이다. 김태형, 이명수, 강병규, 정수근 등이 후배들을 때린 이야기는 많지만, 장원진이 줄빠따를 쳤다거나 후배 선수를 손찌검했다는 소문은 거의 없는 편. 정수근이나 구자운, 이경필 등 후배들도 성격은 괄괄해도 FM적으로 움직이는 좋은 형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아마 성격은 좀 불같고 고지식한 면이 있어도 사소한 일을 핑계로 아랫사람의 트집을 잡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하지는 않는 엄할 땐 엄하고, 유쾌할 땐 유쾌한 선배의 전형이었던 듯.
-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정수근이 차 타고 출근했다고 직접 언급했다.
- 베어스 역사상 가장 순도높은 원클럽맨이다. 물론 선수 경력만으로 원클럽맨은 여러명이 더 있지만, 장원진은 선수 뿐 아니라 은퇴후에도 프런트 또는 코치로 단 한시도 베어스를 떠난 적이 없는 점에서 팀에 대한 애정과 구단과의 신뢰관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박철순은 OB 입단 전에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리그 경력이 있으며[10] , 김동주 역시 한 팀에서만 선수생활을 했지만, 선수 본인이 해외진출을 시도한 일도 있고 구단과의 불화로 코치직 제안을 거절하고 타팀 이적을 타진한 일도 있는 등 팀과 그다지 원만한 관계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은퇴 후에는 프로야구 코치직을 맡지도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비록 현역선수시절 슈퍼스타는 아니었을망정, 1992년 입단한 이래 2020년 현재까지 무려 29년간을 오로지 한 팀에서만 헌신해 온 장원진이야말로 현역선수시절의 별명 그대로 소리없는 강자라는 칭송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프랜차이즈 홀대하기로 유명한 베어스에서 이 정도의 원클럽맨은 없기에.
[1] 1988학번[2] 주로 좌익수로 뛰었다.[3] 원래는 왼손잡이다.[4] 통산 성적 중 OPS .800을 넘긴 것이 2000년 한 시즌 밖에 없어, 공격력 위주의 포지션인 사이드 외야수와 1루수로 주로 나온 선수치고는 공격력이 한참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현역 시즌 내내 두 자릿수 홈런을 한번도 기록한 적이 없기도 하다.[5] 물론 이 때는 LG의 이병규(9번)와 공동으로 따냈다.[6] 그해 타격왕인 박종호는 150안타.[7] 실제로 당시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면 컨택 능력은 우수하지만 체격에 비해 타구를 멀리 못보내고 그 외 모든 부분은 평균이하라는 평이 있었다.[8] 이 사건 및 이후 이택근 밀치기 사건 등 계기로 LG 팬덤에서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94시즌 LG가 한창 잘나갈 때였는데 유독 그 경기에서 LG타자들이 죽을 쑤면서 관중들 욕설이 난무하고 경기가 과열되기 시작해 벤클만 두차례 일어났던 경기. 정삼흠 위협구에 장원진이 성질부리면서 마운드까지 올라가서 벤클이 일어났는데 심지어 정삼흠 멱살까지 잡은 사건이었다. 까마득한 후배가 아무리 흥분했다해도 요즘 관념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 둘이 멱살잡고 싸우는 과정에 갑자기 조그만 누군가 바람같이 조력자로 나타나 정삼흠에게 강력한 싸대기를 날렸는데 당시 ob의 김광수 코치..[9] 이건 사실 2000년대 이전 프로야구단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 다른 구단들(특히 해태 타이거즈)에 비하면 OB는 김인식 감독 부임 이후에는 군기 문화가 나름 수그러들던 축이었다. 이후 두산으로 구단명이 바뀌고 자유방임파인 안경현이 주장이 되고 나서는 더더욱 그런 색채가 옅어지며 가장 분위기가 자유로운 구단으로 인식되기도 했고.[10] 일반적으로 해외리그 경력이 있어도 국내에서 한팀에서만 뛰었으면 원클럽맨으로 인정해주는 정서가 강하기는 하고, 특히나 박철순은 초기 베어스의 상징과도 같은 대스타인만큼 굳이 프로야구가 출범하기도 전의 마이너리그 경력을 들어 원클럽맨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경우는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