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재

 

'''최훈재의 수상 및 등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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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4'''
'''1997'''
'''2001'''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0번'''
장성호(1996)

'''최훈재'''(1997~1998)

양준혁(1999)

[image]
'''이름'''
최훈재(崔勳載)
'''생년월일'''
1967년 1월 21일 (57세)
'''국적'''
대한민국
'''학력'''
중앙고 - 단국대
'''포지션'''
1루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9년 1차 지명
'''소속팀'''
MBC 청룡 - LG 트윈스 (1989~1996)
해태 타이거즈 (1997~1998)
두산 베어스 (1999~2001)
'''지도자'''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2003)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04~2006)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2007~2010)
NC 다이노스 타격코치 (2012)
NC 다이노스 1군 타격코치 (2013)
NC 다이노스 2군 타격코치 (2014~2016)
kt wiz 1군 주루코치 (2017~2018)
kt wiz 2군 타격코치 (2018)
kt wiz 잔류군 타격코치 (2019~2020)
1. 소개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여담
5. 관련 문서


1. 소개


前 프로야구 선수이자 프로야구 코치.

2. 선수 시절


중앙고등학교단국대학교를 거쳐 1989년 MBC 청룡에 입단했다. 주 포지션은 1루수였지만, 팀의 1루 자리는 최훈재의 입단 전해인 1988년 타격왕을 차지하기도 했던 정상급 교타자인 김상훈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주전 자리가 쉽게 나지 않았다.
1990년 1월 MBC 청룡이 럭키금성그룹에 인수되어 LG 트윈스로 바뀐 후에도 그의 입지는 나아지지 않았고, 1994년 시즌을 앞두고 김상훈해태 타이거즈트레이드되자[1] 기회를 잡나 했지만, 서용빈이라는 스타 신인이 갑툭튀하면서 결국 외야로 밀려나게 된다. 1994년 성적은 1군 90경기를 뛰면서 타율 0.324 6홈런 29타점으로 제법 괜찮았고, 이 해 우승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외야에서도 심재학김재현에게 밀려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결국 1996 시즌이 끝나고 LG는 해태로부터 동봉철, 최향남, 송유석을 받고, 최훈재와 조현을 내주는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좌타자에 목말라 있었던 해태 타이거즈김응용 감독은 그를 중용했고, 그에 보답하듯이 이적하자마자 0.292(팀 내 2위), 12홈런(팀 내 4위) 70타점(팀 내 3위)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시즌 내내 붙박이 3번타자로서 1997년 해태 타이거즈의 9번째 우승에 큰 공헌을 한다.[2] 당시 최훈재의 분전으로 인해 94년부터 96년까지 이종범의 출루와 홍현우의 적시타의 득점루트가 아니면 별다른 효과가 없던 해태 타이거즈의 공격진에 새로운 공격 루트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1998년 .264 9홈런 49타점에 그치면서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고,[3] 더욱이 자신의 주요 포지션이던 1루와 좌익수의 자리에서 성장세가 두드러진 장성호이호준에게 밀리게 되면서 1998 시즌이 끝나고 권명철을 상대로 이재만과 함께 두산 베어스트레이드됐다. 그 후에 같은 10번을 단 양준혁이 해태를 오고가면서 많은 잡음을 일으킨 전력이 있어서, 똑같은 좌타자지만 올드 타이거즈 팬에 있어서는 양준혁보다 최훈재가 이미지가 좋게 남아 있다.
두산 베어스에서는 나름 지명타자나 좌타 대타로 기용되면서 괜찮은 활약을 보여 주었고,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로써 3개 구단에서 모두 우승 반지를 껴 본 선수가 되었다.
통산 성적은 0.260 677안타 62홈런 368타점.

3. 지도자 시절


은퇴 이후 2003년부터 현역 마지막 팀이었던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영입되면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다. 두산에서는 2006년까지 1군 타격코치를 맡았고,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2군 타격코치를 맡다가 2010년 시즌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1년 간의 휴식기를 가진 후 신생 팀 NC 다이노스의 타격코치로 영입되었다. 정황상 김경문 감독의 부름을 받은 듯. NC 창단 첫 해인 2013년에는 김광림과 함께 1군 타격코치를 맡았고, 2014년부터는 2군 타격코치로 옮겼다.
2016 시즌 후 NC 다이노스에서 사임했다.
2017년 초 스프링캠프 기사를 통해 kt wiz의 코치로 영입되었다는 게 발표되었다. 보직은 1군 1루 주루코치. 2018년 시즌 도중 코칭스태프 보직변경을 거쳐 2군 타격코치로 내려갔고, 이강철 감독 부임 이후인 2019년부터는 잔류군 타격코치로 보직을 변경했다.
2020년 시즌 종료후 재계약에 실패하며 kt를 떠나게 되었다.

4. 여담


은근 반지 캡터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이 몸담았던 LG 트윈스, 해태 타이거즈, 두산 베어스 3개의 팀에서 모두 우승 반지를 한번씩 껴보고 은퇴하게 되었다. 리그 정상급 선수임에도 평생 우승반지 하나 껴보지도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가 꽤 있는 편인데, 어찌 보면 몇 해를 제외하고 대부분 준주전으로 뛰었던 선수였음에도 나름 대단한 기록을 남긴 셈.
1993년 7월 22일 삼성전에서 1:3으로 리드당하던 9회말에 팀이 동점을 만든 후 만루 상황에 타석에 들어서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하였다. 당시에는 중계가 없는 경기도 많았고[4]이러한 경기는 뉴스에 짤막하게 보도되어 직관한 올드팬이 아닌 이상 기억하는 팬이 많지 않았지만[5] 2020년 5월 24일 로베르토 라모스의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인해 11년전 로베르토 페타지니와 함께 최훈재의 당시 홈런이 재발굴 되었다.
1997년 LG 트윈스에서 해태 타이거즈트레이드된 후 얼마 안 되어 최훈재가 이종범, 홍현우, 이대진이 같이 운동장에서 도시락 까먹는 것을 보며, "너희들 밥 먹니?"라며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이 먹는 것을 쓰레기통에 치우고 운동장에서 다시 연습하러 갔다고 한다. 최훈재는 당시 LG 트윈스에서 이적해 온 상태였으며, 후에 회고하기를 어느 구단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 해태의 군기가 얼마나 셌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 참고
LG 트윈스에서 이적해 온 송구홍, 이병훈비슷한 일화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5. 관련 문서


[1] 김상훈의 트레이드 맞상대가 바로 한대화였다. 거기에 해태가 2차 1픽을 했던 허문회도 함께 LG로 이적했다.[2] 해태는 유난히 LG의 트레이드에서 많이 손해를 보았다. 팀 분위기가 자유분방하던 LG에서 뛰던 선수들이 '''강압적이고 군대같기로 악명 높았던'''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최훈재는 비교적 고참급으로서 해태에서 그보다 고참급 선수가 이순철, 김정수, 백인호, 조계현 정도였고 이강철과는 동기였다. 그 덕분인지 최훈재는 LG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된 선수들 중 그나마 가장 해태에서의 적응에 성공한 선수였다. 그 후 해태가 KIA로 바뀐 이후 LG에서 KIA로 트레이드된 이용규김상현이 대박터진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3] 특히 장타율이 3할대까지 떨어지면서 1루와 좌익수에게 기대되는 공격력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을 보여주었다.[4] 캐이블TV가 활성화 되기전이라서 중계가 많이 없었다.[5] 다만 이 때는 주중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3연전 모두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팀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