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주(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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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前 두산 베어스 소속 야구 선수. 별명은 '''두목곰'''
선수 시절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3루수 중 한 명이자 역대 최정상급 우타자였으나, 전성기 시절에도 사생활 문제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말년에는 구단과의 불화도 겹치면서 원만하지 못하게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2. 응원가
3. 선수 경력
3.1. 아마추어 시절
고교 시절엔 저래보여도 '''늘씬한 유격수'''였다. 천재 야구선수로 유명했으며, '''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서 뛰었다.[9] 물론 주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유격수였다. 유격수로 뛴 경험을 바탕으로 벌크가 붙은 프로시절까지 3루 수비를 소화할 수 있었던 것.
같은 시기 신일고에서 맹활약하던 김재현과 라이벌 관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고교 졸업 당시 대학이나 프로나 할 거 없이 김동주와 김재현을 잡으려고 구단들과 대학의 물밑작업이 치열했다. 결국 프로로 직행한 김재현이나 대학을 거친 김동주나 모두 잠실을 홈으로 쓰는 팀에 입단했고 각각 팀의 주축이 되었다.
투수로서는 최고 145km에 이르는 강속구를 던질 수 있었고,[10] 타자로서는 정교한 컨택능력과 강력한 파워를 모두 갖춘 대형 내야수감으로 각광받았다.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는데, 1학년 애송이가 그 군기잡힌 고려대학교 야구부[11] 의 감독에게 '''"공격력을 살릴 수 있게 유격수가 아닌 다른 포지션에서 뛰게 해 주세요."'''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2016년 5월 23일, 더그아웃에서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이와 관련한 질문을 던졌고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고려대 야구부의 군기가 군대보다 셌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단지 김종국, 홍원기 같은 선배들에게 밀린 거라고 한다. 이 인터뷰에서 두리뭉실하게 넘겼던 가정사 부분과, 당연히 부인할 수밖에 없는 국밥사건과 달리 20년 전의 일이자 따로 부인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인한 부분이기 때문에 김동주 본인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당시 고려대학교 투수 인스트럭터였던 김인식[12] 은 그를 투수로 키우려고 했으나, 본인은 타자 쪽으로 의향을 굳혔다고 한다.[13] 그리고 감독의 결정에 따라 김동주는 최고의 아마추어 타자로 이름을 높였다. (1학년때 우익수, 2학년 이후로는 2루 및 3루수로 출장했다고 본인이 밝혔다.)
아마추어 시절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몇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김성근 감독이 고교야구를 보러갔을 때 김동주가 당겨서 홈런 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자 당시 배명고 감독이 "밀어서 치라고 해볼까요?"라고 하고 김동주에게 밀어치라고 말했더니 다음 타석에 바로 밀어서 홈런을 쳐냈다고 한다. 2학년땐 충암고와의 경기에서 8-0으로 지는 경기를 만루홈런 두 방으로 동점을 만들더니 끝내 연장에서 쓰리런 홈런을 쳐서 혼자 11타점으로 경기를 11-8로 뒤집어 버린 적도 있다. 고려대 시절이던 1997년엔 오사카 돔에서 열린 애틀랜타 올림픽 기념 4개국 초청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해 중앙 전광판을 깨트리는 159m짜리 초대형 홈런을 쳐냈고 당시 일본의 에이스이자 한때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우에하라 고지를 상대로 대회기간 동안 4홈런을 뽑아냈다. 이 대회에서의 최종 성적은 26타수 14안타 9홈런 19타점.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대회 MVP를 차지했다. 결국 정말 무시무시했던 4번타자.
3.2. 프로 경력
3.2.1. 두목곰의 전성시대
1998년 고려대(체육교육과 1994학번)를 졸업하고, 배명고 졸업 당시 1차 지명권을 행사했던 OB 베어스[16] 에 입단했다.[17]
그리고 개막전부터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데뷔 첫해부터 심정수, 타이론 우즈와 '''우동수 트리오'''를 구축하며 '''베어스의 전성기를 연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친구 심정수가 현대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는 '''심재학''', 타이론 우즈와 '''우동학 트리오''', 혹은 '''우재주 트리오'''를 구축하여 두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데뷔 첫 해 24홈런이었으니...
프로 입성 첫 해에는 좌익수로 뛰었고 게임인 마구마구에서 3루수로 줘버렸는데 담당자도 이걸 실수했는지 듀얼포지션 추가로 좌익수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해부터 3루수로 전향하였다. 프로에 와서도 그 활약상은 계속 이어져서 통산 타율 .'''312'''을 자랑했고, .405의 통산 출루율, 0.514의 통산 장타율을 기록한 대타자로 거듭났다.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고 2000년대 초중반부터 투고타저 성향의 시즌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뛰어난 기록이다.[18]
허나, 프로 초년병 시절은 팀메이트였던 친구처럼 김동주 역시 헤매다가 시즌 초 전반기에 아예 2군으로 보내버릴 작정이었는데, 김인식 감독 특유인 믿음의 야구로 계속되는 무한신뢰를 쌓아 첫 해 저런 성적이 나왔었다. 트리오 동료였던 우즈 역시 외국인 선수 제도 초창기에 스트라이크 존 때문에 심판들에게 잦은 구설수와 부진으로 김동주처럼 몰릴 위기였으나 똑같이 무한 신뢰 받고 이 분은 장종훈 이전 41개의 기록에 한 개를 더한 42개의 홈런을 쳐냈다.
이후 타격 포텐이 만개된 99년부터~2004년 3할과 20개를 홈런을 때려내는 타자 그야말로 타격과 파워를 겸비할 정도로 대단했다. 물론 홈 구장이 잠실야구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수치는 대단한 기록이다. 아직도 국내 토종 타자 중 '''3할 30홈런 및 장외홈런'''을 기록한 타자는 김동주[19] 밖에 없다. 물론 팀 후배 김재환이 '''40홈런'''을 넘겼지만 그에게는 과거 '''도핑''' 반응이 있기에 대부분의 팬들은 그냥 약런이라 부정하고, 성적의 일관성 부분에서도 김동주같은 꾸준함은 없었기에 진정한 잠실 홈런타자는 김동주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20]
홈런 숫자는 이승엽에 비하면 많지 않지만 넓은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면서도 한 시즌 20여개의 홈런을 쳐낼 수 있는 장타력을 갖췄으며, 2000년 5월 잠실구장에서 최초로 장외홈런을 기록한 일도 있다.[21] 통산 기록만 보면 홈런을 제외하곤 양준혁의 기록과 비슷하게 가고 있다. 김동주는 부족한 홈런 수에 대해 넓은 잠실을 홈으로 쓰기에 타격 어프로치를 다르게 가져간 데 기인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이가 들면서 노쇠화가 진행되긴 했으나 '''3루 수비 또한 매우 안정적'''이었다. 벌크를 불린 탓에 좌우 횡 수비 폭은 그렇게 넓은 것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포구와 순간적인 대쉬능력, 투수를 볼 수 있었을 정도의 강력한 어깨를 바탕으로 좋은 3루 수비를 보여주는 선수였다. 2010년 시즌부터는 이원석이나 윤석민 등에게 3루를 맡기고 지명타자로 주로 나왔다.
또한, 의외로 주루 플레이도 거포라는 이미지에 비해 뛰어났는데 벌크업에 의해 스피드가 막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꽤 괜찮은 편이었고 주루 센스가 매우 뛰어났다. 2007년도에는 '''두자리수 도루'''를 기록할 정도.[22] 그의 뛰어난 주루 센스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베이징 올림픽 일본전 김현수의 역전 적시타 장면이다.[24]
단점이라면 신인시절부터 잔부상이 많은 '''유리몸'''이라서 경기에 빠질 때가 많았다. 17년 프로 생활 내내 어깨, 손목, 허리, 발목 등에 부상을 달고 살았고, 전 경기 출장 시즌은 한 시즌도 없다.[25] 심지어 2009년 여름에는 '''봉와직염'''으로 2군으로 내려갔던 적도 있다. 그리고 2010년에도...
공/수에서 모두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1998년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국제대회가 열리면 꼬박꼬박 차출되었다. 베이징올림픽을 기점으로 신규유입 된 팬들에게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부동의 국가대표 4번타자는 김동주'''였다.[26]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한다고 밝힌 바 있다.[27]
삼성 라이온즈 김한수와 함께 최고의 3루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타격 성적에서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으나 기자단 인기투표라는 특성상 골든글러브 부문에서는 2000년에만 김동주가 수상하였고, 이후 2001~2004년까지 모두 김한수가 수상.[28] 김한수가 노쇠화를 보이며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후엔 이렇다 할 경쟁자 없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나 했지만 2005, 2006년에는 3루수로 탈바꿈한 젊은 선수 이범호가 수상하였으며, 2009년에는 시즌 중 트레이드 되어 당해년도 최고 성적을 찍은 김상현이, 2010년에는 7관왕 이대호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 그리고 2011, 2012년에는 신예 최정이 수상. 하지만 골든글러브를 제쳐두더라도 김동주의 커리어는 역대 한국 3루수 중 단연 최고[29] 다. 단지, 인기투표로 인한 골든글러브는 받지 못했다. 역대 골든글러브 수상은 2000년/07년, 08년 시절의 3루수 및 2003년 타격왕을 먹던 시절 지명타자로 받은 것이 전부다.
대체로 큰 경기에 약하다는 소리가 있지만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투수들에게 가장 위압감을 주는 타자로 꾸준히 거론'''되기도 하고, 역대 포스트시즌 성적도 시즌 성적보다는 못하지만 나쁘진 않은 편. 포스트시즌 타점 1위이다.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면 김거김을 생각해보자. 2001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박동희를 상대로 2점차로 앞선 상황에서 만루홈런을 쳐서 대역전극을 화려하게 장식했다.[30] 허나, 2007년 한국시리즈만큼은 부진했는데 이유는 SK가 너무 견제 했었다. 특히나 그 시절에 두산은 팀내 홈런 1위가 김동주였을 만큼 그 뒤에는 못치니깐 거의 승부를 보지 않고 무시했다. 대신 이듬해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타출장 .556 .619 .778로 대활약했다. 2차전에서 실책을 두 개 저지른 것이 옥의 티.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9타수 6안타 4볼넷 1타점 3득점, 타율 .316, 장타율 .368, 출루율 .435를 기록했고, 팀은 2연패 뒤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시리즈 전적 1승 1패인 2010년 10월 10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4:0으로 지던 2회말 무사 1, 3루에서 상대 선발 투수 장원삼을 상대로 1타점 적시타를 날리며 포스트시즌에서 37타점째를 기록하며 포스트시즌 타점 1위에 등극했다. 이날 김동주는 4타수 3안타 2볼넷 1타점을 기록했고, 팀은 연장 11회초에 2점을 내줬으나 11회말에 3점을 뽑아 스코어 8:9로 이겼다.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21타수 10안타 1홈런 3볼넷 8타점[31] 3득점, 타율 .476, 장타율 .714, 출루율 .542로 맹활약했지만,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40타수 16안타 1홈런 7볼넷 9타점 6득점, 타율 .400, 장타율 .550, 출루율 .489를 기록했다.
2011년 7월 21일 롯데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장원준에게 동점홈런을 뽑아내면서, '''5년 연속 두자리수 홈런''' 달성에 성공했다.
3.2.2. 두목곰의 몰락
김진욱 감독이 부임한 2012년 시즌에는 부상 때문인지 1군 경기에서 뛰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2012년 시즌 두산 타선의 무게감이 많이 줄었다.[32] 9월 이후로 부상은 다 나은 듯했으나, 여전히 1군으로 올라오지 못하였다. 포스트시즌에서도 그의 이름은 엔트리에 없었다. 대다수의 두산 팬들은 김동주를 그리워하면서 김진욱 감독을 자기 입맛에 맞는 선수만 기용한다면서 깠다. osen의 박현철 기자가 2012년 9월 9일 라디오볼에서 "김동주는 언제 올라오나요? 1군에서 볼수 있나요?"라는 청취자의 질문에 "2군에서 깽판친 게 김진욱 감독 귀에 들어갔다. 팀케미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1군에 올라오기는 힘들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012년 시즌 후 두산 구단이 '''팀의 구심점이 될 선수가 필요하다'''는 언플과 함께, 팀분위기를 어지럽히고 롯데로 떠났던 홍성흔에게 오버페이 마저 안겨주는 삽질과 함께 다시 영입한 이유로, 김동주가 프론트나 코칭스탭들에게 찍힌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김진욱 감독은 2013년에도 김동주를 끌어안고 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
2013년 스프링캠프 기사에서 당뇨병을 지병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33][34] 당뇨가 있음에도 몸관리를 소홀히 하여 선수생활을 일찍 접은 사례가 있는지라 팬들은 걱정. 결국 시즌이 시작된 후 예년에 비해 부진하다가 5월 17일 또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된 뒤 2012년 시즌과 마찬가지로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1군에 복귀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량 저하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2011년까지만 해도 팀내 최다 홈런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던 4번타자가 바로 다음 해부터 벤치도 아닌 2군에만 머무르는 모습은 과거 그의 모습을 아는 두산 팬들이라면 마음이 씁쓸한건 당연지사.
설상가상으로 2군 경기중 찍힌 사진에서 이게 김동주인가 오재원인가 싶을 정도로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당뇨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체중이 빠지면서부터다.[35] 즉 당뇨로 인해 체중 관리가 힘들어진 것이 급격한 부진의 원인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본인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2014년 시즌 초부터 다시 '''2군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2014년 5월 3일 기준 퓨처스리그에서 22경기에 출장해서 '''타율 .463 출루율 .516 장타율 .722 3홈런 14타점 OPS 1.238'''의 맹활약을 하였다.
그런데도 송일수 감독은 시즌 초 부진한 '''홍성흔을 꾸준히 5번타자로 기용'''하면서도 '''김동주를 1군에 콜업하지 않았는데''', 급기야 7월 5일 인터뷰에서 '''지금 김동주는 필요없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두산팬들은 단 한 타석 만이라도, 제발 '''단 한 타석만이라도''' 김동주를 보게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또 높였으나, 송일수 감독은 냉랭했다. 아예 김동주라는 선수를 없는 선수로 생각하고 있는 셈인듯 싶었다. 아무래도 팀의 레전드인 김동주와 이렇게 이별을 하는 것은 팬 입장으로서는 상당히 아쉬울 것이기에..
7월 9일 '''김동주, 두산에 자리 없다면 풀어 달라.'''라는 기사가 떴다. 김동주 본인이 “2군에서 열심히 몸을 만들면서 퓨처스리그 경기를 뛰었다. 그러나 이렇게 전반기가 끝난다. 계속 희망을 안고 기다렸지만,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팀에서 다시 기회를 얻지 못할 것 같다.”라며 구단에 풀어줄 것을 요구한다고 한다.
2014년 10월 14일 "김동주, 짐 싸서 두산 떠났다"는 기사가 떴다. 기사가 뜨고난 뒤 몇 시간 뒤 두산 프런트는 김동주가 떠난 것이 아니며, 이천 베이스볼 파크에 있는 2군 선수들이 일본으로 훈련을 가 지금 10명 남짓 남아 있기에 김동주가 개인훈련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라고 해명을 했으나, 결국 2014년 11월 20일, 구단과 본인의 합의 하에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어 두산을 떠나게 됐다.
3.2.3. 방출 이후
두산에서 방출된 이후 김동주 본인과 팬들에게는 씁쓸한 현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기존의 구단들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경험 많은 베테랑이 부족한 KT마저도 '''"김동주가 이호준처럼 팀내 어린 선수들의 롤모델이 되거나 다독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며, 우리 팀에는 김동주를 컨트롤할 만한 고참선수도 없다."'''라며 대놓고 디스하였다. 한 마디로, 김동주가 팀워크를 깨고 막나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사실, 선수가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기량이 떨어져서 전성기 시절보다 못한 성적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선수들에게 고참으로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주면서 팀 케미스트리를 향상시키는 선수들도 많다.
2014년 기준으로 이런 덕아웃 리더로는 위에 언급한 호부지 외에도 SK의 박진만, LG의 이병규, 롯데의 조성환, 넥센의 송지만 등이 있다. 또 KIA의 이종범이 2012년 강제은퇴를 당했을 때 팬들이 걱정했던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36] 즉 두산이 홍성흔을 영입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결국 김동주에 대한 저런 평가는 포지션이나 기량 문제는 둘째치고 팀 사기를 저해한다는 소리밖에 안된다. 더욱 비참한 것은 언론마저도 김동주에 우호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팬들은 도대체 평소의 경기외적 행실이 얼마나 개판이었길래 현장과 구단들 그리고 언론마저도 한마음이 되어서 저런 모욕을 당해야하는 것이냐며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있다.
KT 조범현 감독은 원한다면 입단테스트 기회는 주겠다고 말했다. KT 팬들의 반응은 좋지 않은 편. 한화 김성근 감독도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언급했으나, 필요한 선수는 바로 영입하는 것이 김성근 스타일인 것을 감안하면 저렇게 프런트와 협의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은 별로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돌려말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참조 게다가 한화에는 김재현이 코치로, 조인성이 고참으로,[37] 김태균이 거포 내야수로[38] 자리잡고 있는데다, 3루수, 1루수, 지명타자 자리 모두 경쟁이 치열하고, 장기적인 전력 재정비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김동주가 낄 자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11월 26일 KT가 베테랑 역할을 할 선수로 롯데에서 방출된 장성호를 영입하면서, 김동주의 KT 입단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 상황.
'''그리고, 김동주에 대한 우호적인 의견 조차 스스로 없애버리는 인터뷰가 두 개 연달아 터져버렸는데...'''
kt든 한화든, 어느 팀이든 믿어주시면 헌신이라는 기사가 떴다. 하지만 기사 말미에 '''늦게 얻은 아이들에게 야구선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바람에 엠엘비파크 한게는 순식간에 화이야. 전처 소생의 자녀들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인터뷰에 그나마 있던 쉴더들조차 돌아섰다. 오죽하면 댓글 중에 하나가 ''''인간쓰레기 셀프 인증''''일 정도.
이어서 언론 인터뷰에서 2군 후배가 선배밥을 안 챙긴다는 이유로 15일간이나 꽁하니 지켜보다가 국그릇을 엎었다는 일화를 미담이랍시고 자랑[39] 해서, "저게 지난 2년간 많이 깨지고 느낀 바가 많다는 사람이 할 말이냐?" 라는 평을 들었다. 논란이 일자 국그릇 부분이 기사에서 삭제됐으나 이미 엎질러진 국. 그리고 '''국동주''', '''국밥갑'''이라는 별명이 추가로 생겼다.
결국 은퇴를 선언할 것으로 보였으나...
12월 11일 놀랍게도 kt와 계약 직전까지 갔던 것이 드러났다. '''"팀 케미스트리를 해칠 수 있다"라는 얘기가 많이 나왔고''' 조범현 감독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조 감독이 김동주를 만나보고 멘탈면에서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해서 계약을 추진했다고. 그러나 세부 조율에서 김동주가 사인을 하지 않아서 계약이 물건너갔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kt행 무산 기사 김동주의 입장 기사 말미에는 김성근 감독이 테스트 기회를 줄 것이라고 멘트했던 것을 언급하고 있으나 한화는 kt보다도 김동주의 자리가 없다. 김동주가 무슨 생각으로 밥상을 걷어찼는지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는 중. 네티즌들은 후배한테 패드립하면서 국그릇을 집어던졌던 인물이 뭘 잘했나는 반응이다.
12월 15일 엠스플 스포츠투나잇에서 박동희가 밝힌 바에 따르면 kt와의 결렬 원인은 전적으로 금액차이라고 한다. 김동주는 기존에 받던 금액의 절반을, kt는 1억을 제시했다고. 링크 '기존에 받던 금액'을 명목연봉인 7억으로 보느냐 14시즌 2군에 내내 있어서 절반으로 깎인 금액인 3.5억으로 보느냐에 따라 김동주가 얼마를 요구했는지가 갈리겠지만, 3.5억을 요구했든 1.75억을 요구했든 kt가 제시한 1억도 은퇴 직전의 베테랑 예우로서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며[40] , 한화에서는 입단 테스트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테스트해서 뽑은 선수에게 1억 이상을 줄리가 만무하다는 점에서 김동주가 아직도 제대로 현실 인식을 못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41]
물론 2015년 시즌이 시작된 후 kt wiz가 소홀한 전력 보강 등으로 빈약한 타선 등의 문제가 이어지며 1할대 승률을 올리면서 김동주를 영입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일부 팬들도 있었으나 그래도 김동주 같이 팀 분위기를 저해할 수 있는 선수를 일찌감치 영입하지 않은 것이 잘 된 것이라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이후 kt의 시즌 중의 트레이드[42] 와 외국인 용병 교체[43] 등으로 타선이 재미를 보면서, 김동주 영입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았다.
2014년 5월의 기사에 의하면 연봉은 7억이지만 실수령액은 2억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동주가 요구한 '기존 연봉의 절반'의 기준이 실수령액이 아닌 명목연봉(7억)일 가능성도 있다. 실수령액의 절반을 요구했다면 kt의 1억을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
다음 날 12월 16일 김성근 감독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동주를 영입할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게다가 테스트 제안을 했다는 소문도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베테랑을 중시하다 못해 편애하는 김성근 감독조차도 영입을 꺼렸을 정도면 말 다한거다. 다른 팀들의 입장도 "기존 선수들의 사기가 우려된다", "데려오는 것 자체가 부담이다" 등으로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12월 18일 kt는 '백의종군'을 기대하며 1억을 책정해놓고 있었으나 김동주의 요구와 큰 차이가 있었다는 기사가 났으며, 장성호는 비슷한 제안을 받고 kt행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19일에 나온 새 기사에 따르면 "'''김동주는 kt에 고액 연봉을 요구했다.''' kt는 베테랑을 예우하는 상징적인 액수를 제시했고 당연히 도장을 찍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빗나갔다. 객관적인 평가와 팀 내부 형평성 등을 고려할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김동주가 요구한 금액이 명목연봉 7억의 절반인 3.5억일 거라고 거의 확정되는 분위기. 거기다 26일 "김동주는 kt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작은 차이는 만나면서 천천히 조율할 수도 있지만, 이번에 양측이 확인한 금액의 차이는 그런 수준을 크게 뛰어 넘었다. 단번에 무산된 것이 당연하다고 보일 정도였다."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확인사살.
2015년 1월 27일 정수근이 자신의 SNS에 김동주가 복귀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겼으나, KT에서는 낮은 연봉을 감수하면서 야구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영입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네티즌들은, 더 추해지기 전에 은퇴해라!라는 반응과 정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 손민한이나 박명환처럼 5천만원이라는 푼돈[44] 이라도 일단 받고 활약도에 따른 옵션을 걸어서 실력으로 돈을 따내면 될 거 아니냐, 왜 그러니? 라는 반응.
결국 1월 31일, 은퇴를 선언했다. “현역 생활 동안 정말 최고의 팬들과 함께 했다. 팬들에게 꼭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끝까지 믿어준 김인식 감독님과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이로써 여러 의미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선수생활은 17년만에 막을 내렸다. 관련기사 그러나 해당 기사 마지막에 실린 사진의 플래카드는 2014년 7월경의 것이며, 국밥 사건이 터진 후 조강지처와 아들을 버린 과거사가 재조명되면서 우호적인 여론은 사그러드는 분위기. 여기에 은퇴 발표 후 이어진 2군에 관심 가져달라, 가족들이 받을 상처가 두렵다라는 기사들로 인해 이미지는 점점 나빠지고 있다.
'''연봉 협상에서도 백의종군하여, 선수로 뛸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조차 뻥 차버리고, 그렇게 야구계를 떠났다.''' 결국 이렇게 타의에 인해[45] , 두산베어스의 원클럽맨으로 남게되었다.
(반전 밑밥) 2019년 6월 4일 새벽 정수근이 박명환의 방송인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하여[46] 김동주의 kt 계약관련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언급했는데, 김인식 감독이 kt 구단과 직접 컨택하여 연봉 1억으로 계약을 하려했으나, 이에도 불만족하여 최종적으로 연봉 2억으로 계약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다. 그러나 '''계약당일 김동주는 잠적하였고 이로 인해 kt와의 계약은 결렬되었다'''라 한다.. 당연히 김인식은 물론이고[47] 정수근 또한 크게 실망했다고. 같이 한 발언으로 보았을 때[48] 이번에도 잠적한 것에 화가 나 터트린 것으로 보인다.[49]
김동주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사실은 잠적이 아니라 스카우트 팀장과 집 앞 카페에서 만나서 정중하게 죄송하다고 했고, KT에서도 미안하다며 서로 잘 헤어졌다고 한다. 또한 구단에서 1억보다 더 높은 금액으로 제시했다고도 한다. 김동주 본인이 직접 그 팀장과 통화시켜 줄 수도 있다고 얘기할 정도. 참고 이게 사실이라면, 김동주는 계약현장에 KT의 스카우트 팀장에게만 말하고, 그냥 사전에 계약 파토를 내 버린것이었다. 다만 같이와서 김인식 감독에게 말하지 않은 건 조금 문제가 있었는듯.
3.3. 국가대표 경력
3.3.1. 2000 시드니 올림픽
3.3.2.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3.3.3.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3.3.4. 2006 WBC
대만과의 1라운드 1차전에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하다 왼쪽 어깨가 탈골되어 남은 경기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대체선수로 정성훈이 합류했다.
3.3.5.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3.3.6. 2008 베이징 올림픽 플레이오프
3.3.7. 2008 베이징 올림픽
4. 은퇴 이후 근황
2015년 12월 중순에 호프집에서 팬들이 조촐하게 은퇴식을 해주었다.#
최근 박재홍 야구 해설위원이 출연중인 엠스플 구구절절 프로그램에서 김동주가 화장품 사업을 준비중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인터뷰에서도 '아내의 화장품 사업을 돕고 있다'고 밝혔다.
더그아웃 매거진 과의 인터뷰가 2016년 3월호부터 5월호까지에 실렸다. 2016년 5월 23일자 더그아웃에 나온 인터뷰에서는 아래에 나온 국그릇 사건이 왜곡되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51]
한 때 영구결번까지 노릴 법했고, 두산 베어스를 17년간 이끌었던 선수치고는 초라하게 떠난 셈.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비판들을 고려하면 분명 자업자득이니, 누굴 탓할 일은 못된다.
2017년 11월 29일 다음 웹툰 사회인 야구 이야기에 출연 현재 야구 레슨장을 운영중이라 한다.[52] 1편 2편 3편
2018년 서울 S-리그 개막전에 김용수와 함께 참여했다.# 현역 시절부터 지병으로 앓아온 당뇨병 때문인지 살이 엄청 빠진 모습으로 등장했다.
2018년 9월 17일에 열린 호주 프로야구 리그 질롱 코리아 공개 트라이아웃에 객원 코치로 참가해 야수 선발을 도왔다. 트라이아웃에서 선수 선발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53] 합류했다고 하며 현재도 초, 중, 고등학생을 비롯한 유소년 야구레슨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식 코치를 할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기사
2019년 6월 14일, 더그아웃을 통해 간만에 모습을 보였는데...현역 시절과 비교하면 완전히 헬쓱해진 모습으로 나와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영상 대부분의 사람들도 누구세요라 할 정도로 살이 많이 빠졌다.
2019년 7월 12일 공개된 더그아웃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밑에 적혀있는 각종 루머들을 부인했다.[54][55] 내용을 요약하자면 배트티켓은 후배들아 달라고 하면 잘 줬지만, (선호하는 배트가 다르므로) 달라는 사람이 적어서 어딘가 쌓아두고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리니지는 해 본 적도 없으며, 살이 빠진 것도 당뇨와는 상관없이 은퇴 후에도 본인이 몸 관리를 철저히 해서 그렇다고 한다. 오히려 당뇨에 걸렸다는 걸 김동주 본인이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신경을 썼다고 한다. 시합 전에는 쌀을 먹지 않고 과일, 야채, 요거트[56] 만 먹었을 정도라고. #, ##
5. 비판
'''선수로서의 평가와 인간으로서의 평가가 매우 상반되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성품에 비해 과분할 정도로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갖춘 인물.
마찬가지로 성품과 성적이 서로 상반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선수로는 그나마 진갑용 정도인데, 그 진갑용도 자기가 몸담았던 삼성에서도 삼팬들이 적어도 은퇴할 때는 예우를 해줬고 지금도 약물 등 몇몇이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팬들이 있는 편인데 김동주는 후술하듯 그런 시선이 있을지언정 프런트의 결정을 꺾을 순 없었다.[57] 게다가 진갑용은 어디까지나 경기 중의 행동이 문제가 되었을 뿐 경기장 밖에서는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편이었지만 김동주는 야구실력으로는 까일거리가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불륜 등 사생활에서 구설수를 여러 차례 만들었다. 임태훈 같은 경우는 어디까지나 성인 대 성인과의 일이었고, 서로가 잘만 해결했으면 본인도 상대방도 불행해지지는 않았지만[58] 김동주는 전처는 물론, 자신의 자식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만 남겼을 것이다. 물론 이 부문 KBO 1인자는 부동의 넘사벽 이호성이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저런 중죄를 저지르지 않고서야 사생활로 김동주를 뛰어넘는 인물은 적은 편이다.
우타자 중에서도 거의 정상급으로 꼽히는 성적이지만, 김동주에 대한 평은 동급의 대스타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물론 누적스탯이 부족한 이유도 있겠지만, 아래에 기술하는 야구 외적인 이유에 따른 이미지 하락이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통산 타출장 3-4-5를 찍어주고 전성기에는 한 시즌에 20개 정도의 홈런을 거뜬히 때려내는 등 뛰어난 성적[59] 을 남겼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공사 양면으로 잡음이 많았다. 때문에 야갤 등지에서는 '''간통주,''' '''버비오빠,''' '''합법갑'''[60] , '''사랑은 김동주'''[61] 라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나마 프랜차이즈 스타 대접을 해주던 두산 팬덤에서도 김동주와 두산의 결별 과정과 결별 이전 2군 시절 때 이야기, 결별 이후 행적 등으로 인해 논란이 생길 정도.
5.1. 재계약 잡음
소속팀에 대한 애정이 없고[62] 돈을 밝힌다고 하여 '''김돈줘''', 그 과정에서 연봉 9억을 달라고 해서 '''김구억'''이라는 별명이 있다.[63] 2007 시즌이 끝나고[64] FA 자격을 얻자마자 첫 번째 일본 진출을 타진했을 때 두산에 60억이 넘는 금액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65] 막상 일본 구단에서는 김동주에게 전혀 관심이나 접촉이 없었는데도 불구[66] 하고 김동주 본인이 집요하게 일본 진출을 노렸었다. 이 때문에 일본 진출을 하려는 이유가 '''이혼 소송중에 있는 전처에게 줄 위자료를 떼먹기 위해''' 일본에 진출한다는 썰이 돌게 되었다. 당시 팬들의 반응은 '설마 그 정도로 XXX는 아니겠지' 였지만. 본인이 직접 인터뷰를 통해 사실 인증을 해서 팬들을 멘붕시켰다.[67]
그 때문에 한참 전인 2002년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될 뻔했다. 당시 두산이 요구한 트레이드 조건은 20억+후보급 선수였는데 여기에 유동훈이 끼어 있었다. 그런데 트레이드 내용이 중간에 새는 바람에 무산되었다.[68] 비슷한 시기에 삼성 라이온즈와도 트레이드 썰이 있었다. 트레이드 상대자는 김한수였지만, 두산측이 현금을 끼워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삼성 측에서 그냥 김한수를 믿기로 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2011년에는 두산과 계약기간에서의 입장 차이로 인해 우선협상 기간에 타결을 보지 못하고 FA 시장에 뛰쳐나갔고, 11월 20일에는 롯데 자이언츠 이적설이 나왔다. 당시 감독이었던 양승호와 과거 팀 동료였던 홍성흔까지 나서서 적극 추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 문제도 있고 막대한 연봉으로 인한 보상금 문제 때문에 롯데도 발을 뺐고, 결국 FA시장에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두산과 재계약을 하게 되었다. 전구단 상대 협상기간이 되면서 바로 두산과의 계약이 타결되지 않을까 했으나 김동주 개인 사정으로 협상이 계속 연기되었다. 팬들은 당연히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만큼 두산에서 뛰다가 은퇴하기를 바랐지만, 김동주는 계속해서 돈좀 더 만져보겠다고 이러니 속이 타들어가던 상황.
결국 2012년 초에 김동주가 바라던 대로 3년 32억에 두산과 재계약했다. 하지만 그 후 2군 붙박이 신세가 된 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FA 때문에 두산 프런트 및 그룹 고위층들에게 밉보이고, 마침 부진하니까 비싼 김동주를 2군에 박아놓았을 것이라는 추측. 2군에 박아놔야 연봉 부담을 덜 수 있으니까.
구단은 이런 김동주의 이런 태도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김동주를 붙잡았다. 두산 베어스가 최근 돈 쓰는데 인색한 구단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박혀 있어서 그렇지 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력은 허투로 보내지 않는 편인데[69] , 김동주 사례가 바로 그렇다. 김동주의 가치는 구단 역사는 물론이고 리그 전체로 보더라도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하나였다. 김동주가 일본 진출 드립에다가 이혼 소송 중에 은퇴해 버린다며 진상 중에 상 진상짓을 저지를 때도 두산 베어스는 끝까지 붙잡았다. 때문에 김동주가 은퇴할 때 거의 내쳐지는 듯한 모양새가 된 건 그 간에 쌓인 것에 대한 분풀이에 가깝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5.2. 팀 내 선수들과의 마찰
상술했듯 김동주는 동료 선수들과도 마찰을 빚는 것으로 오명을 남겨서 여러 구단들이 영입을 꺼렸다. 그나마 kt wiz에 갈 수도 있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고참 선수가 구단 수뇌부의 눈밖에 나서 버림받는 일이야 더러 발생하지만, 김동주 정도의 화려한 성적을 내는 스타 선수가 타 구단, 동료, 언론 그 누구의 옹호도 받지 못한채 쓸쓸히 은퇴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그의 현역 시절 행실이 어떠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 되려 그간 쉬쉬해왔던 그의 고참, 프로답지 못한 행실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비판 여론만 커지고 있다.
한 동료 선수는 “시즌 때 방망이 스폰서에서 나오는 배트 티켓 여유분이 꽤 많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주위에서 티켓을 좀 나눠줄 수 있는지 묻자 현금화해야 한다며 매몰차게 거절하더라. 잘 나갈 때 대인배적인 씀씀이를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싶다”라고 증언했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김동주가 그라운드 안팎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타석 안팎에서 행실이 달라졌다거나, 선수생활 말미에는 강한 투수가 나오자 출장을 피하고 약한 투수가 나오자 출장하려 했다거나 하는 등의 사례를 밝히기도 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김진욱 감독이 김동주를 배제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팬들은 그를 두목곰이라 불렸지만 그는 전혀 고참답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팬들까지 돌아서게 된 것은 바로 앞에서도 언급된 '''국밥갑''' 인터뷰.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부분은 김동주의 요청이 있었는지 삭제되었지만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뒤였다.
이 말이 공개되자마자, 네티즌은 분개했고, 두산 팬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열 받아서 김동주한테 남아있던 정 조차 모두 떨어졌다며 온갖 욕을 퍼붓는 중. 막내가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하는 선후배 문화야 김동주만의 문제는 아니니 그렇다쳐도, '''부모님 없냐'''는 등의 패드립을 친 건 도저히 쉴드가 불가능한 사건.'''기자''' : 베테랑은 남이 하기 싫은 말을 앞서서 해야 한다.
'''김동주''' : 지금은 군에 입대한 유망주 후배[70]
가 있다. 함께 2군에서 점심을 먹는데 늘 자기 식사만 챙기더라. 15일을 지켜봤다. 내 연차에 할 말인지 아닌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국그릇을 엎었다. '너는 선배 없냐. 동료 없냐. 부모님 없냐'라고 야단쳤다. 나중에 입대할 때 문자를 보내왔더라. '선배님. 저 제대하면 꼭 큰 사람 될게요'라고. 고마웠다. 후배들을 1~2년 가까이에서 보니까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더라. 후배들이 술 먹고 사고 치지 않게,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야구를 하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 문제의 국밥 부분 전문
이러한 병크 및 상술된 말년의 행보들로 인해 두산 구단 내부에서조차 영구결번은 언감생심이고 은퇴식조차 회의론이 나오고 있을 정도로 김동주의 입지는 좁아졌다.# 이미 그의 배번이었던 18번은 성영훈에게 돌아간 상황.[71] 한때 두산 구단 홈페이지에는 성영훈의 번호가 27번으로 표시되었던 적이 있었기에 정수근의 SNS와 엮여서 김동주가 두산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설레발이 있었으나, 홈페이지가 미처 정비가 되지 않아서 그랬을 뿐이었다.
결국 두산에서는 김동주의 은퇴식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팬들과 조촐하게 호프집에서 축하파티를 가진 것이 고작이었다.
레전드급 타자임에도 이래저래 참 씁쓸한 말년이다. 김동주가 은퇴를 선언한 이후, 박동희는 단 한마디의 직접적인 비판도 없이 팬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 가족 생활에 임하는 태도의 세 가지 측면에서 간접적이지만 신랄하게 김동주를 비판하는 칼럼을 써서 존경받는 레전드의 자격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기도 했다.[72]
FA로 들어온 홍성흔마저 1군 벤치를 떠난 2016년부터의 두산은 딱히 이렇다 할 최고참 없이 비슷한 나이대의 오재원, 김재호, 김재환 등이 활달하고 개방적인 덕아웃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난 자리는 알아본다지만 현재의 팀 분위기는 김동주의 은퇴를 난 자리는커녕 아예 없는 자리로 취급하는 중.
이두환이 비법을 전수 받기 위해 김동주 방을 찾아가면 게임만 하고 나오지 노하우를 전수받기는 어렵다는 인터뷰를 생전에 한 적이 있다.#
5.3. 사생활에 대한 비판
간통 및 전 아내와 자식을 대상으로 한 언론플레이 관련 문제는 두산 베어스/사건사고와 합법드립을 참조.
6. 기타
- 15년 이상 두산 베어스를 이끌고 있던 선수로, 원클럽맨이다. 대표적인 별명은 두목곰.
-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하는 것을 희망했으나 1회 WBC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부상 등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바라던 일본행은 결국 무산되었다. 두산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4년 시즌 기준 두산에선 홍성흔과 함께 두산에서 우승반지를 낀 적이 있는 둘 뿐인 현역이었다.
- 2010년 시즌 중반에 광고 하나를 찍었다. 제품은 비듬샴푸광고이다.
[73]
- 싸움 실력이 아주 절륜하다고 한다. 현역 시절엔 일명 ‘벤클 탱커’ 라는 별칭도 갖고 있을 정도. 덕분에 당시 두산은 벤클 최강팀으로 군림했고, 폭주하는 김동주는 당시 고참급이 즐비한 한화 이글스 말고는 견줄 팀이 없었다. 아니면 두산 코치들이 직접 말린다던지. 2011년 10월 2일, LG와의 벤클당시 나이가 더 많은 이병규에게 욕하는 것 처럼 구도를 잡은 카메라워크로 인해 오해가 생긴적도 있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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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입모양을 보면 고운 말은 오고가지 않은 듯[76][77] -- 흥분한 이대호를 말릴 수 있던 짬밥인 김동주의 마지막 풀타임 시즌이다. https://youtu.be/7yjihAOEOLU
[75] 입모양을 보면 고운 말은 오고가지 않은 듯[76][77] -- 흥분한 이대호를 말릴 수 있던 짬밥인 김동주의 마지막 풀타임 시즌이다. https://youtu.be/7yjihAOEOLU
- 2007년 SK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 때 이혜천이 던진 김재현의 몸의 맞는 볼로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났을 때 분위기 살벌한 인파 속에서 채병용에게 헤드락을 당했다(...) 아마 바로 전 경기인 2차전 때 자신과 빈볼시비로 벤치클리어링이 한 번 일어났었기 때문에 그걸 빌미로 복수(...)를 한 것이라는게 중론. 물론 이 헤드락을 당하고 미쳐 날뛰며 코치가 붙잡고 말려도 밀치며 극대노한 상태를 보여줬다. 채병용을 가리키며 '너 뒤진다'는 손으로 목을 긋는 제스쳐를 한 건 덤.
- 현역 시절 최정 못지않은 류현진 킬러였다. 김동주는 류현진과 통산 맞대결에서 32타수 16안타로 타율이 정확히 5할에 달하며 3개의 홈런을 류현진으로부터 뽑아냈다. 뿐만아니라 김동주는 타팀의 에이스급 선수들에게 강했는데, 이런 선수가 상대팀의 강한 투수가 나오는 경기를 일부러 피했다는 것은 악의적인 루머이다.#
- 조인성이 자신의 배트를 자주 빌려간다고 한다. 실제로 조인성과 김동주는 고교때부터 동기생인 친구였다고 한다. 벤클에서의 카리스마와 다혈질적인 성격을 생각해보면 의외의 일면이다.
- 넥센 히어로즈의 한현희가 경기중 쓸데없이 웃는 버릇이 있었는데, 김동주의 말한마디로 버릇을 고쳤다는 일화가 있다. 참고로 그 조언을 한 날 김동주는 한현희에게 데뷔 첫 삼진을 당했다.
- 2004년 1월 8일 리니지를 하다가 현피 뜨러 가서 사인만 해주고 왔다는 기사가 발굴되었다고 나오지만 2019년 2월13일 안경현의 넘버쓰리에 출연해서 본인은 리니지라는 게임을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고 밝혔다.#
- 2004년 시즌 후 돌연 은퇴를 선언하다가 번복한 적이 있었다.
- 가수 김건모와 꽤 닮은 편이다. 나름 홀쭉했던 프로 초년병 시절에도 닮았다는 얘기가 가끔 나왔는데 은퇴 이후 살이 더 빠진 지금은 매우 비슷해졌다.
- 두목곰이라는 무서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상당히 나긋나긋하고 차분한 말투를 가졌다.
- 사생활이나 인간성 관련해서는 말이 많은 선수지만, 팬 서비스만큼은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출근 시에도 팬들의 싸인 요청에 특별한 이유가 없지 않는 이상 다 응해주는 편이었고, 원정경기때 어린이 팬이 김동주 유니폼을 입고 있자 존댓말까지 써가면서 사인을 해준 일화도 있다고. 그래서인지 인성 논란 등 온갖 괴담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선수 말년에도 2군까지 따라다니거나, 1군 콜업을 요구하는 피켓을 제작하고, 변변한 은퇴식도 치르지 못하고 은퇴한 후에는 조촐하게나마 팬들이 은퇴식 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끝까지 김동주를 응원하는 팬들이 있었다. 김동주와는 180도 대조되는 깨끗한 사생활은 물론 선수 커리어 내내 별 다른 물의를 빚은 적이 없이 모범적인 선수 생활을 하다가 말엽에 팬 서비스 논란이 불거지면서 엄청난 이미지 실추를 겪은 이승엽과 대조적이다. 물론 OB-두산의 역사는 김동주의 입단 전후로 나뉠 만큼 김동주가 팀의 이미지에 기여한 역할은 지대하다. 그리고 팬들 입장에서는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는 선수 개인의 사생활보다는 팬들 앞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팬들을 대하는 태도나 팬서비스로 선수를 판단할 수밖에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선수의 이미지 형성에 있어서 팬 서비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
7. 기록
김동주의 기록은 좋은 비율 스탯에 비하면 누적스탯이 떨어지는 편인데,[78] 이는 상술했듯이 오만가지 부상 때문에 경기 출장수 자체가 적은 탓[79] 이 크다. 아래 기록들은 2012년 시즌 후 기준. 참고로 부상으로 거의 대부분을 제대로 못 나온 2006년을 제외하면, 주전에서 이탈한 2012년 전까지 ''' 13년 전부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최근 세이버 매트릭스 관점으로 보았을때 김동주의 성적은 엄청난 평가를 받고 있는데 홈런타자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매년 3-4-5의 이성적인 타출장을 기록 게다가 출루율이 4할 밑으로 떨어진적이 보기 드물다.[80] 심지어 장타율이 4할까지 떨어질때도 출루율 만큼은 4할을 유지할 정도, 그러나 2000년대 까지만 해도 kbo에서는 심지어 야구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세이버 메트릭스가 무엇인지 잘 모를정도로 무조건적으로 클래식 스탯을 중요시 했던것도 한 몫한다.
거기다가 잠실 구장이 홈구장이라서 홈런스윙도 잘 안한다고까지 인터뷰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구장을 홈구장으로 썼다면 통산홈런도 많이 늘어났을것으로 보인다.
- 통산 안타 1710개로 2020년 현재 27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게 왜 후달리는 거냐면 김동주의 개인 통산 타율이 무려 0.309로, 전체 타율 순위 중 14위에 든다.[81][82] 그런데도 통산 안타수는 다소 적은 편. 경기 출전수나 타석 수가 적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선구안이 좋아서 볼넷으로 나가는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은 타석에 비해 타수가 적기 마련이다. 타수가 적어지니 그만큼 안타를 기록할 수 있는 경우도 줄어드며, 김동주는 타율보다 1할 가량 높은 출루율을 기록하는 눈야구의 달인 중 한명이다. 매년 타율 1위 선수가 안타와 출루율에서도 반드시 1위를 차지하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걸 알 수 있다. 타율은 어디까지나 안타/타수 라는 공식으로 계산하는 만큼 타수로 기록되지 않은 타석에서의 상황은 우리가 타율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마지막 4할 타자라고 잘 알려져있는 테드 윌리엄스는 시즌 200안타를 넘긴 적이 한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율과 출루율은 매년 압도적인 최상위권이었다. [83] 즉 똑같은 경기 수에 출전해서 똑같은 수의 타석에 들어섰다고 가정하더라도, 안타를 많이 때린 선수가 그보다 적은 안타를 기록한 선수보다 반드시 타율이 높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므로 김동주의 타율에 비해 안타수가 적은것을 특별히 희귀하고 이상한 케이스라고 생각하는것은 오류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김동주는 3할을 넘기고도 출루율이 그 타율보다 1할 가까이 높았던 선구안이 A급이었던 선수다. 물론 타석 수 자체도 적었지만... 실제로 그의 통산 출루율은 0.405로 2020년 현재 7위에 해당한다.[84]
- 2011년 4월 22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5회말 1사 만루 상황에서 이정훈의 공을 받아 치면서 3타점 2루타 장식. 이로써 개인 통산 1,000타점의 고지에 도달했다. 이 날 김동주는 인터뷰를 통해 양준혁 선배의 기록을 넘고 싶다고 말했으나 4년도 못 가 은퇴했다. 참고로 통산 1,000타점이 넘는 타자는 김동주를 포함해 2020시즌 기준 18명이며, 해당 부문 1위는 이승엽의 1498타점. 2020년 현재 아직까지 유일하게 베어스에서만 1000타점을 기록한 타자로 남아있다.[85]
- 데뷔시즌인 1998년에 기록한 희생 플라이 16개는 역대 한 시즌 최다 희생플라이 기록이며 커리어 내내 기록한 KBO 리그 통산 희생플라이 역시 89개로 현재 2위이다.[86]
- 잠실구장에서 통산 131개의 홈런을 기록 했고 이 부문 1위다.
8. 통산 성적
[1] 실제 생년월일은 음력 1975년 3월 16일이라고 한다. 주민등록상 생년월일은 1976년 2월 3일이며 이는 KBO 공식 프로필에 기재된 생일이다.[2] 태어난 곳은 부산이지만 어렸을 때 서울로 이사갔다고 한다. 이후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서울에서 나왔기때문에 사실상 서울 사람이다.[3] 전성기 시절[4] 선수시절 체중은 110kg정도 였으며 현재 체중은 약 80kg정도로 추정된다. 본인은 유튜브에서 은퇴이후 자기관리된 날씬한 모습을 보이려고 체중관리를 일부러 했다고 했는데, 후술되어있듯 당뇨병 경력이 있어 그 영향으로 선수생활 막바지에 몸무게가 줄어들었고 그 이후에 추가적인 건강악화를 막기 위해 일부러 더 줄인 것으로 보인다.[5] 1998년 시즌 한정[6] 11시즌에 1경기 나온 적이 있다.[가사] 동~주 동주 김동주~ 헤이! 김동주~ 헤이! 김동주~ 헤이! 동~주 동주 김동주~ 헤이! 홈런 김동주~ 홈런![7] '''동요 비행기로도 유명한 그 노래다.'''[8] OB 시절 이명수의 응원가였다고 알려졌으나 그 이전에 강영수의 응원가로 처음 불렸던 곡이다. 이후에 이명수로 옮겨갔고 다시 이명수가 현대로 옮기면서 김동주가 물려받은것.[9] 2학년 때인 1992년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소속 학교인 배명고의 우승을 이끌었고, 당시 최우수 투수상을 거머쥐기도 하였다. 멤버로는 투수 이경필과 당시 포수였던 황두성이 있다.[10] 더그아웃의 인터뷰에 따르면 150km 이상의 공을 던질 수 있었다고 본인이 밝혔다.[11] 고려대학교 야구부는 구타로 좀 많이 유명했다. 그것도 2000년대 초반까지도. 실제로 안산공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03학번으로 입학이 예정되어있던 구본원이 '''입학 전''' 합숙훈련 도중 선배들의 구타와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을 정도. 박진만이 구타에 질려 고려대학교 입학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공식적으로는 체육특기자 수능 점수 하한선(40점)을 넘지 못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 구타 문제를 깔끔히 드러낸 것이 양승호 감독(2007~2010)이다.[12] 1993~1994년에 김인식은 쌍방울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후 고려대학교에서 투수 인스트럭터 생활을 했다. 1995년에 김인식이 OB 감독으로 부임하고, 김동주가 1998년에 OB에 입단하면서 조우했다.[13] 신체적 이유도 있었다. 안경현의 넘버쓰리에서 밝힌 바로는 손이 작아서였다고.[14] 아직도 '''대졸''' 데뷔 첫 해 신인 20홈런 이상 기록자는 '''박재홍'''과 김동주 이후로 2019년 현재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특히 박재홍은 충격의 데뷔로, 데뷔 시즌에 홈런왕, 타점왕, 그리고 한국 최초 '''30-30''' 클럽 가입으로 1996시즌에 역대 유일무이한 만장일치 신인왕에 올랐다.[15] 당시 커리어하이[16] 당시 LG는 신일고 - 연세대 출신 대형포수유망주인 조인성을 1차 지명했다. 라이벌인 김재현은 이미 1994년에 LG에 입단한 상황.[17] 여담으로 이 때 맘쯤 구경백 해설위원이 OB 베어스 스카우트 단장으로 있었는데. 몇 년 뒤에 입단하는 노경은을 따로 관리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18] 라이벌 김재현도 20홈런을 칠 때 파워의 갭이 좋았지만, 안타깝게 그 넓은 잠실 크리를 맞음에도 불구하고 3할 언저리를 찍어줬다.[19] 커리어 평생을 잠실홈,우타자, 100kg대의 큰 체격을 유지하면서도 커리어 통산 타/출/장 3/4/5를 찍은 건 그야말로 경이로운 성적이라 할 수 있다.[20] 물론, 김동주는 단 한 번도 홈런왕이 된 적은 없다. 대신 타격왕을 먹은 적은 있다. 2003년.[21] 이 잠실구장 장외홈런은 18년 이후에야 '''김동엽과 제이미 로맥'''이 같은 날에 동시 기록하게 된다. 이 또한 최초 기록 당시 허용투수는 팀 후배 '''장민익'''이 맞았다.[22]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1번 타자였던 박한이 보다도 도루를 더 많이 했다.[23] 이승엽이 일본으로 진출했을 때 팀 동료로 유명했다. 일본에서는 전설로 불린다. 2019년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다.[24] 홈플레이트를 막고 있던 상대 포수 '''아베'''[23] 를 피해 슬라이딩을 하면서 손으로 홈플레이트를 터치하는 센스를 보여줬다.[25] 김동주가 이렇게 유리몸이 된 이유는 고려대 재학 시절 '''잦은 구타'''와 갑작스러운 포지션 변경, 체중 증가 등으로 인해 유리몸이 되었다는게 정설.[26] 이승엽은 3번 타자로 출장이 많았다. 해설 일부들도 4번 타자 치고는 몸이 너무 말라서 3번에 붙이는 경향이 많았다. 이승엽이 4번의 이미지가 굳어진 건 일본진출후 교징의 4번타자가 되면서 부터이며 그 이전까지는 국내에서도 주로 3번으로 활약했다.[27] 김동주의 경우 국가대표 차출로 인해 자신의 커리어 손해를 본 케이스인데, 2006년 WBC에서 주전 3루수로 차출되었으나 아시아예선 대만전에서 '''자신의 야구인생 최초이자 마지막인 1루 슬라이딩''' 과정에서 어깨에 큰 부상을 입어 정성훈으로 교체된 바 있다. 이 때문에 2006 시즌 43경기밖에 출장하지 못 했으며 FA 취득도 1년 늦어지고 말았다. 만약에 1년 일찍 일본 진출에 도전했을 경우 계약이 성사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김동주에게는 2006년 WBC가 상당히 뼈아픈 국제대회로 남을 것이다. 그 댓가로 후배 정성훈이 군면제 되는 것에 도움을 준거...[28] 단 김동주는 2003년에 지명타자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한 적이 있다.[29] 3루수뿐만 아니라 박재홍/이대호/김태균 등과 함께 역대 우타자 최고를 논할 만 하다.[30] 이것은 1982년 한국시리즈 김유동(OB) 이후 한국시리즈 사상 두 번째 만루홈런이었다.[31] 2010년 포스트시즌에 출장한 모든 선수 중 가장 많은 타점이다.[32] 팀 홈런이 59개로 LG와 공동 6위. 꼴찌 KIA는 54개다. 안타 대비 장타율은 더 심해서, 7위 KIA .243에도 한참 밀리는 .226이다.[33] 김동주가 당뇨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2012년경부터 공공연히 카더라로 돌았었다. 당뇨병은 유전성이 강한 질병으로 김동주의 어머니도 당뇨병 합병증으로 세상을 떴다. [34] 선수 커리어 내내 연조직염으로 자주 엔트리에서 빠진 것도 당뇨로 인한 면역력 저하를 추측케 하는 부분이다.[35] 살이 쪄 있을 때는 오히려 당뇨가 없거나 심각하지 않은 상황이다.[36] 그나마 이 쪽은 이범호가 주장이 된 이후로 어느정도 안정되었다.[37] 김재현과 조인성 모두 김동주와 친구 사이이다. 그들이 코치나 고참 입장에서 김동주를 통제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38] 게다가 김태균이 3루 훈련도 하고 있다![39] 가뜩이나 싸늘한 여론에 그야말로 셀프로 관짝에 못질한 희대의 병크라고 할 수 있다.나름 여론을 구슬려보겠다고 인터뷰해서 기사를 낸 것인데 저걸 본인은 진지하게 잘했다고 생각해서 인터뷰한듯 하니 대중과 의식의 괴리감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는 부분, 지금은 없어졌지만 포탈 댓글란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40] 기존 구단에서 방출된 후 고향팀 KIA에 입단한 정성훈이나 두산에 입단한 배영수가 1억, NC에 입단한 손민한이나 박명환은 5천만원으로 시작했다.[41] 박찬호의 경우는 2012년에 최저 연봉인 2400만원에 한화와 계약했는데 이마저도 유소년 야구 발전 기금으로 전액을 내놓았다. 어차피 메이저리그에서 번 돈이 이미 900억이 넘어갔기에 아쉬울 것도 없고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뛴 이닝 수로 나누더라도 1이닝당 4800만원이나 하니까 2400만원은 투아웃 잡으면 받는 돈이기에 새 발의 피 수준인 거다. 그에 비해 김동주는 누적 연봉이 수십억이 넘어갔어도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1억 이상을 요구했을 것인데 그건 어디까지나 김동주 본인 생각일 뿐이다. 누가 보더라도...[42] 타자로는 윤요섭, 장성우, 하준호, 오정복 등을 영입했다.[43] 투수 앤디 시스코를 퇴출하고 타자 댄 블랙을 영입했다.[44] 5천만원이 어떻게 푼돈이냐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김동주의 공식연봉이 7억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푼돈이다. 그리고 손민한, 박명환 기준에서도 전성기에 5억 이상은 받던 사람들이 5천만원 받는 거였다보니 이들 기준에서도 역시 푼돈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한국프로야구의 1군 최저연봉이 5000만원이다. 물론 공식 최저연봉은 2700만원이지만 이것은 2군까지 합쳐서이고, 1군을 밟으면 1군에 있던 기간 동안은 5000만원이 기준인 금액을 받는다. 즉 손민한, 박명환은 1군 기준 최저 연봉을 받고 뛴 셈.[45] 타의라고 해도 KT의 감사한 제의를 김동주 스스로 걷어찼기에 자의도 섞여있다. 물론, 그 자의가 두산 원클럽맨으로 남겠다는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었겠지만..[46] 원래 그날은 게스트로 김동주가 나올 예정이었으나 1시간전 갑자기 출연불가 통보를 받아 급히 정수근이 나온 상황이었다.[47] 당시 언론을 통해 상당히 아쉬워 하는 모습을 보였다.[48] 후배(박명환)가 인생을 걸고 하고 있는 방송에 게스트로 섭외하고 다 준비해놨는데 갑자기 그러면 안된다라는 등의 발언.[49] 윗 문단에 나와있는 SNS 내용으로도 유추할 수 있고, 4일 방송에서 직접 언급한 내용으로 정수근은 당시 김동주와 kt의 계약현장에 김인식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50] 일단, 저 유니폼 시절이 안좋은게 김동주도 그랬고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출전. 생애 첫 1루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며, 부상을 당해 결국, 시즌 아웃이 되며 두산이 당해년도 5위로 고꾸라지는 안습의 시절이었다. 그 유명한 '''두점베어스'''의 시초가 이 때였다.[51] 사실 그 기사 자체가 제대로 입증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여지기엔 어려움이 있었다.[52]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BOB베이스볼 캠프'이다.[53] 단장인 박충식, 감독인 구대성 모두 투수 출신이기 때문에 야수 선발을 위해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54] 김동주는 현역 시절에 유난히도 기자들과 친하지 않은 선수였고, 루머에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성 여부를 떠나 서술되어있는 리니지 사건, 국그릇 사건 등 각종 루머가 많이 생긴 편이다.[55]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입장에서 서술한 내용이다.판단은 각자의 몫.[56] 여기서 말하는 요거트는 우리가 흔히 먹는 요거트가 아닌 당뇨병 환자들이 주로 먹는 플레인 요거트라 볼 수 있다. 설탕이 거의 안들어 당이 거의 없기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먹기엔 밍밍한 맛이다.[57] 진갑용은 그나마 삼성이 그를 대체할 포수난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진갑용만한 포수가 없었다는 식으로 팬들의 추억보정이라도 붙은 편이다. 진갑용이 왕조 시절 나름 한몫을 보태기도 했고. 반대로 두산은 특유의 화수분으로 김동주를 대체할 3루수 후계자들이 속속 들어오는 바람에 빠른 시간 안에 잊혀졌다.[58] 하지만 그 이후에도 임태훈이 같은 사건을 일으켜 물의를 빚은 점을 생각해보면 그냥 본인의 처신 문제다.[59] 신인 데뷔 시즌부터 121안타 24홈런을 기록했다는 점이 김동주의 기량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거기다 통상적으로 타자의 홈런 개수를 줄이는 크기의 잠실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 것을 감안하면 20개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60] 헌법재판소에 간통죄가 위헌이냐 아니냐를 심의해 달라는 소청이 올라왔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아래에 서술. 합법갑에서 파생된 별명으로 법을 풀어쓴 단어인 버비오빠가 있다. 더 나아가서 버비오빠를 뒤집어 뚜오뜨또(…)라고 하기도.[61]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인생은 이호준, '''사랑은 김동주'''[62] 하지만 이건 좀 이해가 갈 수도 있는 게, 두산은 프랜차이즈에게까지 냉담하기로 유명한 구단 중 하나다. 그래도 구단 재정 문제로 인해 정수근, 박명환, 이종욱, 김현수, 양의지, 민병헌 등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FA 시장에서 죄다 놓치고 타팀으로 보냈던 두산 구단도 김동주만큼 어떻게든 거액을 제시해서 잡으려고 했었던 걸 보면 김동주가 팀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실제로 김동주는 몇년간 꾸준히 리그 연봉킹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63] 원래 일본 진출을 꾀했으나 계약이 불발되어 향후 해외진출을 다시 원할 경우 풀어주는 조건을 추가해 두산 구단과 연봉 7억+옵션 2억으로 단년 계약했다. 일본 구단측에선 김동주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그냥 몸값 부풀리기 라고 봤으나... 김동주 본인이 병크를 터트리는데...[64] 원래는 2006 시즌 후 FA 자격을 얻을 예정이었으나, 2006년 3월 대만과의 WBC 예선전에서 어깨 부상을 당한 덕분에 그해 시즌을 거의 날려버려 1군 등록일수를 채우지 못해 FA 자격이 2007 시즌 후로 미뤄졌다.[65] 지금보면 선수의 입장에서 당연한 거 아닌가 싶겠지만 저 당시만 해도 FA에서는 최대어 평가받는 선수도 40억대가 최대치라는 평가를 받던 시기였던 만큼 60억은 100억대의 돈을 받는 것과 같은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66] 일본야구계에서 김동주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동주는 오랜기간 일본킬러로 대활약했고 일본은 그런 선수들에 대해 오히려 과할 정도의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루머와 전성기를 지난 나이와 부상 이력등에 대한 염려로 인하여 겉으로는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본 야구는 한국에서 생각하는 이미지와 달리 선수의 사생활등에 있어서도 상당히 민감한 편이다.[67] 김동주 본인이 한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버는 수입의 50%는 위자료로 나가야 할 상황이었는데 이게 너무 아까웠다고...물론 이후 전처로부터 양육권을 빼앗겠다고 협박하거나 전처를 정신병자로 모는 언론플레이 등을 통해 결국 소송 과정 중에 지친 전처가 스스로 위자료를 포기하게끔 하여 위자료를 아꼈다.[68] 이 시절 정재공 KIA 단장은 팀에 필요했던 우타 거포 영입을 원하여 김동주와 박재홍을 트레이드로 영입하기로 마음먹고, 결국 내야 유망주였던 정성훈을 현대에 내주고 박재홍을 데려오는데 성공한다.[69] 물론 이것도 김재호까지의 이야기. 양의지는 100억을 넘어갔다는 특수성도 있지만 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음에도 못 잡았다. 하지만 사실 이때는 모기업이 위기에 빠진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을때라 NC와 머니게임이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임을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다.[70] 홍상삼이라는 썰이 있다.[71] 18번은 2016년 김강률, 2017년 조승수로 주인이 바뀌었다가 2018년부터 박종기가 달고 있다.[72] 기사에 언급은 안되어 있지만 롯데 조성환의 은퇴식 장면도 나왔는데 이건 한때의 잘못으로 비난받아도 그걸 달게 받아들이고 묵묵히 뛰다 은퇴할 때는 박수를 받으며 간 걸 의미한다고 보는 팬들이 많다.[73] 이 광고는 히어로즈 시절 이현승이 광고 모델을 하였다가 모델이 바뀌었다.[74] 은퇴후 살이 많이 빠졌지만 선수시절 당시에는 엄청 컸다.[75] 2011년 5월 15일 SK와의 경기 중 6회말 무사 삼진 아웃을 당한 후 김정국 주심에게 항의하는 장면이다. 1979년생으로 KBO 최연소였던 주심이 김동주의 기세에 눌려서 위축된 게 보일 정도였다. 라고 하나 그게 자랑스러워할 일인지 의문일 뿐더러 위축되어 보이지도 않는다. 누굴 위축시키는게 자랑스러운 일이라 여겨 이 항목을 작성한 것이라면 역시 범죄두 팬들이 그렇지 뭐 , 따위와 같은 핀잔을 듣기 좋으니 자제할 필요가 있겠다.[76] 김정국 주심은 김동주보다 4살 어리다, 선수가 심판을 권위로 찍어누르는 기똥찬 그림이 그려진 것 또한 이날 게임에서는 김동주의 시비 외에도 양의지의 장작패기, 김경문 감독의 배치기 등의 볼거리가 펼쳐졌다. 이에 대해 임태훈 사건등으로 인한 팀분위기를 쇄신시키기 위해 어린 주심을 상대로 고양책을 쓴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걸 고양책으로 진심으로 쓴 것이라면 두산 구성원들의 마인드가 과연 양아치들과 뭐가 다른 것인지 의문일 따름.[77] 고운 말이 오고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볼판정에 대해 바로 상욕을 하는게 중계화면에 그대로 잡혔다. KBO에서 찰리와 더불어 심판에게 대놓고 상욕을 한 유이한 선수. 김정국 심판이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자 심판조 조장이 와서 김동주에게 주의를 줬고 김정국 심판에게 왜 그러냐고 묻자 욕을 한다고 확인사살, 조장이 그러면 바로 퇴장시켜 버리라고 이야기 하는 장면이 모조리 실시간으로 중계되었었다.[78] 클래식 스탯은 그렇지만 세이버 누적스텟은 매우 훌륭하다. 경기 출장수가 적든, 타격 기회가 적든 워낙 장타도 잘치고 출루도 잘하는 OPS 머신이었기 때문에 WAR보면 3루수 지명타자를 오고갔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높다. 그래서 '''누적 WAR이 전체 8위'''다. 이 정도면 누가봐도 크보 레전드라고 해도 무방한 스탯이며 다들 스탯만큼은 인정한다.[79] 김동주급 커리어 기간과 팀 내 절대적 위치를 가졌던 레전드급 커리어 선수들은 보통 7500타석 이상이고 최소 7천타석이 넘지만 김동주는 6600타석 정도 밖에 안 된다.사실상 한 두 시즌정도를 덜 뛴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06시즌을 제하고 봐도 실제 주전으로 뛴 기간보다 반 시즌~한 시즌정도는 덜 뛴 것이다.[80] 실제로 파크 팩터와 리그 평균 득점이 보정되는 득점 생산성 지표인 wRC+가 통산 151.4이며 이는 2020년 현재 3000타석 이상 들어간 타자 중 '''전체 8위'''에 해당한다.[81] 1위부터 차례로 장효조, 박민우, 손아섭, 김현수, 최형우, 김태균, 나성범, 구자욱, 양준혁, 제이 데이비스, 이명기, 이병규, 서건창, 김동주 순이다. [82] 2014년~2018년의 극심한 타고투저로 인해 이 시기에 뛴 타자들의 통산성적 인플레가 일어난 점은 어느정도 감안해야 한다.[83] 통산 비율성적 0.344/.482/0.634[84] 1위부터 차례대로 장효조, 양준혁, 김태균, 최형우, 김기태, 박석민, 김동주[85] 타팀에서 기록한 타점까지 포함해서 1000타점을 넘긴 타자로는 홍성흔, 김현수가 있다.[86] 2018년에 박용택이 1위로 올라섰다.[87] 각 스탯의 통산 순위는 3000타석 이상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