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왕후

 

'''고려의 역대 왕후'''
세조
위숙왕후

'''태조비'''
신혜왕후
'''장화왕후'''
신명순성왕태후
신정왕태후
신성왕태후
정덕왕후

혜종
의화왕후
'''혜종의 어머니
莊和王后
장화왕후
'''
'''시호'''
'''장화왕후(莊和王后)'''
'''본관'''
나주 오씨
'''왕자'''
왕무(王武)
'''아버지'''
오다련군(吳多憐君)
'''어머니'''
덕교(德交)
'''생몰연도'''
? ~ ?
1. 개요
2. 일화
3. 아들을 태자로
4. 대중매체


1. 개요


고려 태조 왕건의 제2비. 나주 태생으로 나주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호족 오다련의 딸이다. 왕건이 아직 후고구려의 장군이던 시절인 903년에 나주를 정벌할 당시 호족 유화책으로 결혼했으며 고려 2대왕 혜종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녀의 집안 나주 오씨는 고려사에 의하면 대대로 나주의 목포(木浦)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 곳은 통일신라서라벌당나라를 연안 항해로 오갈 때 반드시 지나는 길목인데다 영산강 하구이며 서해안에서 내려올 때도 만나는 교차점으로 상업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장화왕후의 아버지 오다련은 지방 세력가로서 사간 관등을 가진 연위(連位)라는 자의 딸 덕교(德交)에 장가들어 장화왕후를 낳았다. 신라의 6두품 귀족인 연위의 사위가 된 것에서 나주 오씨 가문이 지방 세력치고는 위세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1]

2. 일화


왕건과 장화왕후 사이에 있었던 일에 관해 2가지 설화가 전해지는데, 하나는 그 유명한 나뭇잎 이야기. 금성(나주)를 지나던 왕건이 완사천에서 갈증이 나 우물에 있는 아가씨에게 물을 얻어마시고자 청했는데, 그 아가씨가 물을 담은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주었다. 왕건이 왜 나뭇잎을 띄웠냐고 묻자 목이 마르다고 물을 급히 마시면 체하는 법이라고 답했고, 아가씨의 현명함에 감탄한 왕건이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가 청혼을 했는데 그녀가 바로 장화왕후 오씨였다는 이야기.
2번째 설화는 다음과 같다. 금성 정벌에 성공한 왕건이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오씨를 우연히 봤고, 그런 그녀 뒤에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보게된 오씨가 맘에 든 왕건은 그날 밤 그녀와 동침을 하였다. 오씨를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왕건은 깔고 누운 돗자리에 질외사정을 하였다. 하지만 왕건의 됨됨이를 살핀 오씨는 그가 돗자리 위에 사정한 '''정액을 손으로 쓸어 모아 그것을 음부에 넣었다고'''(...)[2][3]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고려의 2대 황제 혜종이었다는 이야기.[4] 그렇게 태어난 혜종은 얼굴이 돗자리처럼 자글자글하게 주름살이 져서 저것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3. 아들을 태자로


혜종이 태자로 책봉된 데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해지는 대로 왕건은 거의 30명에 달하는 호족들의 딸들을 아내로 맞았는데, 이 또한 알려진 대로 건국 당시 사방의 호족 세력가들의 반발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이었으니 당연히 그 아내들 하나하나의 권력이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윤을 두고 장화왕후와 신명왕후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장화왕후는 왕건의 두번째 정실부인이자 왕건의 장남을 낳았으니, 이를 두고 자신의 아들들을 정윤으로 못삼은 신명왕후의 불만이 컸다. 왕건은 신명왕후 배경인 호족들의 반발이 격심할 것도 불사하고 무를 정윤(태자)으로 책봉하고 싶어했다. 이에 "신하들의 뜻으로 무를 원자로 책봉한다"는 상황을 만들게 되는데, 상자에 자황포를 넣어 오씨에게 전해준다. 왕이 입는 옷 '자황포(柘黃袍)' 즉 이는 오씨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뜻이었으니, 오씨는 이를 깨닫고 그것을 대광 박술희에게 보여주었다. 옷을 본 박술희 또한 왕의 의도를 깨닫고 신료들 간에 회의를 열어 큰아들 무를 후계자로 책봉할 것을 합의한다. 이렇게 하여 무는 신료들의 뜻을 가장한 왕건의 의지로 태자로 책봉된다. 그후 왕무는 신라 경순왕이 항복하러 개경에 왔을때, 왕건을 대신하여 경순왕을 영접할 정도로 왕건의 굳건한 후계자로 성장한다.

4. 대중매체


태조 왕건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염정아. 결혼 전에는 작가가 지은 극중 이름인 '도영'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나주의 호족인 오다련의 딸로서 등장한다. 작중 캐릭터 성은 그야말로 여장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미 늙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업과 가문의 일을 총괄하고 있었으며, 그만큼 총명하고도 행동력 있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거기다 전투력도 나름 있는지라 1차 나주 전투당시 아예 참전하여 싸우는 모습을 보인다. 고려(당시는 궁예가 다스리던)에서 사자가 와서 내통할 것을 요청했을 때 금성태수 종례와 오다련은 마음은 이미 후백제를 저버리고 있었지만[5] 아무래도 위험천만한 행동인 만큼 쉽게 선택을 못하고 있었는데, 고려와 내통할 것을 결정한 것이 오씨였다. 거기다 고려가 과연 금성을 보호해줄 능력이 있으며, 약속을 지킬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고려의 정주에 가보기까지 한다. 왕건이 나주 정벌을 위해 나주에 왔을 때 내외로 왕건을 도와주면서 왕건의 두 번째 부인이 되고, 이후 왕건의 큰 아들인 무[6]를 낳게 된다. 이후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건국하면서 나주부인이라 불리게 되는데, 첫 부인이며 왕후가 된 유씨(신혜왕후)가 건강상의 이유로 궁 밖으로 피접을 나가게 되고, 아들인 무가 정윤으로 봉해지면서 장화왕후로 봉해지게 된다. 왕후가 된 뒤에는 주로 왕건이나 아들 정윤의 친정에 불안을 토로하는 장면이 주로 나온다. 어머니 마음은 다 똑같은지 본인도 전장을 누볐지만 아들 무가 전장에 나가게 되자 많이 심란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셋째부인인 충주부인 유씨와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도 있다. 특히 첫 아들을 낳고 자신도 기회가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충주부인을 향해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거나, 이후 자신의 아들인 무를 위해 기도 올리러 가는 때에 충주부인의 첫 아들이 요절하게 되는 모습 등이 대표적. 특히 기도하는 순간에 충주부인의 아들이 요절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기도하는 모습이 언뜻 보면 충주부인을 저주했던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독한 눈빛을 보여주기도 했다. 드라마에서는 오해를 풀고 반목을 멈췄지만 소설에서는 끝까지 이 일로 갈등하게 된다.
바로 이어지는 후속작 제국의 아침에선 반효정이 연기했는데[7], 장화왕후는 전라도 나주 출신인 반면 이 배우는 경상도 출신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점. 전작에서 정윤 책봉 당시에 잠시 그려졌던 충주부인 유씨(신명순성왕후)와의 갈등이 더욱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자신의 아들인 혜종과 그 손자로 왕통을 계승하려 노력하지만 혜종이 병약한 탓에 마음 고생이 심했으며, 이 때문에 왕규에게 더욱 크게 의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혜종 붕어 이후 결국 왕식렴의 지지를 받은 정종이 즉위하게 되며 궁에서 퇴출되는 것으로 하차한다.

[1] 6두품이 비록 진골 아래라고 하지만, 진골이 좀 넓은 왕족 범위로 소수 특권층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6두품 정도만 되어도 통일신라 전국에서 손꼽히는 중견 명문가였다고 봐야 한다.[2] 물론 실제 본 사람이 없으니 신뢰성은 제로이다.[3]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신라 왕비를 강간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를 두고도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듯이, 당시 고려 초기 치열했던 왕권 다툼을 생각하면 누군가에 의해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4] 그러나 생각이 있다면 알겠지만 설화는 설화니 그대로 믿지 말자. 일단 왕건과 오씨가 혼례를 올린 게 903년인데, 왕무는 912년생이다. 막말로 저게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누군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는 얘기고''' 아니면 당사자(왕건이나 오씨)가 말하고 다녔단 말인데 그 정도 대형 사건이 과연 설화로만 남겠는가? 단지 확실한 것은 그런 소문이 났을 만큼 오씨가 왕건의 장남을 낳은 사실을 주변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5] 후백제가 신라와의 전쟁을 하면서 호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있었는데, 전재산을 다 까먹게 생긴 금성의 호족들은 세금을 줄여달라고 호소했지만, 견훤은 그 요청을 씹었다. 나중에 고려의 밀사가 오고 나서, 오다련이 종례와 의논할 때 그는 처음에 밀사를 수달에게 넘기라고 주장했으나, 얼마 후 수달이 종례에게 금성의 호족들을 더욱 닥달하여 세금을 더 걷으라고 요구하자, 종례 역시 후백제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오다련과 함께 내통에 동참한다.[6] 아역배우 출신 안정훈이 연기했는데, 정작 안정훈은 1969년생으로 1972년생인 염정아보다 세 살 많아 미스 캐스팅이라는 지적이 있었다.[7] 천추태후에서는 신정왕후 황보씨(!)를 연기했다. 왕건의 2비와 4비를 연기한 특이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