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규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향직 품계'''
좌승(佐承)[1]
대광(大匡)[2]
'''성씨'''
함(咸) → 왕(王)
'''이름'''
규(規)
''''''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손자'''
광주원군(廣州院君)
'''생몰연도'''
? ~ 945년

1. 개요


고려 초기의 정치인이자 권력자로 함씨의 중시조로 받들어지는 인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라 신문왕의 장인이었던 김흠돌과 비슷한 행적을 걸었던 인물이다.

2. 생애


경기도 광주시호족 출신으로 본래 함씨였다가 태조 왕건에게 사성을 받아 왕씨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 직후인 태조 20년(937)에 오대십국시대 후진(後晉) 석경당의 즉위 축하 사절로 중국에 다녀온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후 벼슬이 대광에 이르렀고 두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내 15번째, 16번째 왕비가 되었으며 셋째 딸을 왕건의 장남 왕무에게 시집보내 2번째 왕비가 되게 했다.
<고려사> 반역 열전에서는 왕건 사후 왕규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건의 차남 왕요와 왕건의 3남 왕소에 비해 뒷배경이 미약했던 혜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자 병약하여 정무를 보기 어려운 그를 대신해 권력을 독차지하는 한편 태조의 유언을 받은 공신 박술희를 모함하여 유배보냈다. 외가쪽 기반이 강력한 왕요와 왕소도 혜종의 약한 권력과 혼란함을 틈타 왕위를 노리자 왕규와 왕요, 왕소 간의 대립은 커져갔다. 왕규는 왕요와 왕소를 제거할 심산으로 혜종에게 왕요와 왕소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고했으나 혜종은 오히려 왕소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는 행보를 보였다.[3] 이렇게 되자 왕규는 혜종을 시해하고 자신의 외손자이자 태조의 또다른 아들인 광주원군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획책하기 시작했으나 뛰어난 무장이었던 혜종은 자객을 친히 맨손으로 제압하였고 결국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혜종이 붕어하고 그 뒤를 왕요가 이어받아 제3대 임금인 정종으로 즉위하자 '왕규의 난'을 일으켰지만 태조의 사촌동생인 왕식렴이 이를 진압해 결국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정황상 앞뒤가 안맞는 내용이 굉장히 많아 고려시대 정치사를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심한 왜곡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후에 권력을 차지한 정종 일파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왕규가 두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내 광주원군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위의 형들이 많았던 탓에 왕위를 노릴 명분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왕규는 다른 딸을 혜종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 왕규는 한강의 물목을 움켜 쥔 광주 일대의 유력 호족 출신으로 일찍이 왕건에게 왕씨 성을 하사받음과 동시에 대중 외교 등 중책을 수행하였으며 왕건이 승하하기 전 그의 유조를 받든 신하 중 1명이었는데 왕건 생전에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던 중신이었던 것. <고려사>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런 중신이 갑자기 왕위 계승 서열도 한참 떨어지는 외손자를 임금 자리에 올리기 위해 사위를 손수 죽이려 하였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 그려진다.[4]
오히려 왕규는 박술희와 함께 혜종의 친위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태조는 무력 기반은 탄탄하지만 한미한 무관 출신으로 지지 기반이 없었던 박술희를 돕고자 왕규를 택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혜종이 경쟁자인 왕소에게 딸을 시집보낸 것도 왕요와 왕소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정략으로 보면 얼추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더러 있다. 그러다 박술희가 서경의 왕식렴 세력을 끌어들인 왕요 일파에 의해 유배를 떠난 후 처형되었고 승기를 잡은 왕요 일파가 정적인 왕규에게 역적 혐의를 뒤집어 씌웠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왕규는 유력 호족 출신에 세력이나 조정 내의 위치도 굳건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문신이었다. 만약 왕규가 박술희와 함께 혜종의 친위 세력이었다는 사실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면 혜종의 측근 문신은 왕규, 측근 무신은 박술희가 담당했을 것이다. 고려 건국 초기의 불안정한 정국에서 왕위 계승 암투가 치열한 마당에 왕규가 혜종의 무력 기반인 동시에 자신의 무력 기반이기도 한 박술희를 제거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가장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왕규의 난'이라 기록된 혜종이 죽고 정종이 즉위하자 왕규가 군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쳐들어왔다가 잡히는 과정인데 기록에는 서경의 왕식렴이 왕규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서경 수비대를 이끌고 개경에 먼저 들어와 왕규의 군대를 맞이했다고 되어있다. 기본적으로 광주-개성의 직선거리는 약 80km, 개성-평양의 직선거리는 약 140km 정도이며 실제 거리와 길어야 20~30km 정도 차이가 난다. 저 서술대로라면 왕규가 군사를 일으켜 약 80km를 행군해 이동하는 동안
'''1) 광주에서 왕규가 봉기했을 때 '왕규가 난을 일으켰다'는 첩보를 가진 전령이 80km를 달려 개경에 도착한 뒤, '''
'''2) 다시 그 첩보를 갖고 서경으로 140km를 달려가서 왕식렴에게 전달하고, '''
'''3) 그 소식을 들은 왕식렴이 군사들을 준비시켜 서경에서 출발해 140km를 행군해 개경에 도착해서 왕규의 군대를 맞았다.''' 는 말이 된다.
왕규가 군사를 일으켜 약 80km를 이동하는 동안 정종과 왕식렴 측이 첩보를 가진 전령의 이동거리까지 합쳐서 약 360km를 이동하고도 개경에 먼저 도착해 왕규의 군대를 맞이해 왕규를 궤멸시켰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왕규의 이동거리인 약 80km면 당시 보병 행군 속도로 2~3일, 기병이었다면 하루 반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이동 수단이 고려 초와 별다를 것이 없는 조선 임진왜란 당시 파발마의 하루 이동거리가 약 100km였던 것을 감안해도 광주-개경-서경까지 빨라도 3일, 서경에서 출발해서 개경까지 오는 시간 3~4일, 미친 진격 속도를 자랑했던 고구려 개마무사 기병의 속도로 계산해도 2일 이상 걸린다. 정종과 왕식렴 측의 이동 시간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최소 5일은 넘긴다는 뜻으로 군대를 준비시키는 기간, 명령 처리에 걸린 시간 등은 덤이다. 물론 왕식렴이 왕규의 난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으나 명색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양반이 반대 세력인 왕식렴이 이끄는 서경군의 정황도 모른채 무작정 들고 일어났다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당시 서경의 군대라면 왕건이 중시하여 키워준 서경에 주둔하는 최정예 부대였다.
왕규 일당의 처벌 기록에서 왕규가 왕으로 옹립했다고 전해지는 왕규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는 것 또한 왕규의 난에 회의적인 근거 중 하나. 원래 반란이 일어나면 그 수괴는 물론 그들이 왕으로 옹립했던 인물까지도(설령 자기가 왕으로 옹립된지조차 몰랐다 하더라도) 철저하게 처리되는 것이 전근대 사회의 이자 관례였음을 감안해보면 광주원군의 기록이 빠졌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일반 잔당이나 단순 가담자라면 몰라도 옹립된 인물이자 반란 수괴의 외손자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것들이 왕규의 난 조작설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부분이다. 만약 혜종이 병으로 승하(혹은 시해)당한 뒤 혜종의 아들인 흥화군을 대신해 혜종의 동생인 왕요가 서경의 왕식렴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이 소식을 듣고 막으러 온 왕규의 군대를 궤멸시켰다고 가정한다면 오히려 이야기가 자연스러워진다. 기록으로 입증된 사실은 없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왕식렴과 연합한 제3대 임금 정종이고 이에 반대했던 혜종의 최측근 박술희와 왕규를 살해한 후 기록을 조작해 왕규에게 모든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는 시나리오가 오히려 정황상 자연스럽다고 보인다.[5]
왕건의 사촌동생이자 개국공신인 왕식렴은 왕건이 생전에 중시했던 서경의 개척경영을 맡겼을 정도로 왕건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는데 서경의 병력을 기반으로 한 탄탄한 무력 때문에 왕요가 박술희의 무력을 기반으로 한 혜종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포섭했을 가능성이 높다. 왕식렴의 사망년도가 949년인데 제3대 임금 정종의 승하년도 역시 949년이라는 것은 다른 의문을 던져주기도 한다. 그리고 정종 역시 경춘원군이라는 왕자가 있었음에도 정종의 동생이자 왕건의 셋째아들인 왕소가 왕위에 오르는데 왕권 강화를 이룩한 제4대 임금 광종이다. 이 점을 보면 정종 역시 자신이 그리했던 것처럼 광종 및 다른 세력에 의해 패배해 시해당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혜종의 무력 기반은 개국공신인 박술희이고 정종의 무력 기반은 역시 개국공신인 왕식렴이다. 박술희가 제거당한 945년에 혜종이 승하했고 왕식렴이 사망한 949년에 정종이 승하했다. 이후 광종은 왕위에 오른 뒤 서서히 신하들을 압박하면서 힘을 키우다가 어느 순간 아버지인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들을 철저하게 숙청했다.[6]
한편 왕규의 난일 가능성으로 볼 여지도 많다는 견해도 있는데 일단 혜종의 기록을 보면 왕규는 혜종과 달리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박술희 역시 왕규와 대립하여 서로 호위병을 두었다는 말은 사실상 박술희가 왕소와 왕요 제거에 최소 찬성하지 않았다는 맥락으로 풀이해볼 수 있다. 만약 왕규가 왕요와 왕소를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왕규로써는 반역 외에는 길이 없다고 할 수 있다.[7] 이미 혜종이 병이 들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에서 무력적 기반이 있는 박술희는 자신과 척을 지니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결국 왕요가 즉위해버리자[8] 정종은 과거 혜종의 후견인이자 충신이었던 박술희를 역모로 의심하고 그를 유배보내 버렸다. 이는 왕규에게는 사형 선고나 무방했을 것이고[9] 박술희 열전에는 왕명을 사칭했다고 하는데 이는 왕규가 정종이 박술희를 처형한 것으로 꾸며 그를 암살한 후 그 휘하 세력을 흡수해 마지막 반항을 했을 확률이 크다. 그러나 기록에도 나와있듯 정종과 왕식렴은 이미 이를 예측해 준비하고 있었고[10] 만약 왕규가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세력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단순 문관인 관료였다면 군사를 다루거나 전쟁에 익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국토를 개척해 왔던 왕식렴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혈연 관계로 광대한 세력[11]을 가진 왕요에게 밀리는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결국 왕규의 마지막 발악은 실패로 끝났고 이와 연루된 이들은 모조리 숙청당한다. 이로 인해 왕식렴의 위세는 올라가고 정종은 왕식렴을 더욱 믿었으며 이는 서경 천도의 빌미가 되는 동시에 동생 왕소와 척을 지는 일이 만들어진다.

3. 대중매체에서


  • 2000년 방영된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김명수가 연기했다. 비중은 문신 A 정도로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비중이 큰 것도 아니라 조정에서 관직을 지냈던 다른 인물이 대신 나왔어도 문제가 될 것이 없을 정도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왕규로 나오고 왕건에게 성씨를 받는 장면도 없다.[12] 같은 작가가 쓴 후속작 제국의 아침 2회에서는 왕식렴의 대사로 나온다.[13]
  • 2002년 방영된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배우 김무생[14]이 연기했다. 다만 단군이 어쩌고 고조선이 저쩌고 고구려가 어쩌고 고기(古記)가 저쩌고 하는 등 뜬금없이 환빠로 나와 작품의 수준을 깎아먹는 모습이 나오기는 했다. 혜종의 장인이자 후견인으로서 왕권 강화를 위해 왕족들을 견제하다가 박술희를 귀양보낸 사이[15] 결국 왕요, 왕소와 연합한 왕식렴에 의해 처형당한다는 식으로 나온다. 정종은 사람을 보내 유배지에 머물고 있던 박술희를 처형하고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왕규가 시킨거다"라고 말하게 해서 그에게 누명을 씌운다. 자신의 외손자 광주원군을 다음 황제로 올리는 것이 어떠하냐는 왕함민상소를 보고 오히려 이간책이라며 대노했다. 1996년 방영된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해당 배우는 조선 왕조태조 이성계였고 왕식렴 역할을 맡은 배우가 정도전 역을 맡은 배우였던 김흥기인 점을 감안하면 훌륭한 배우개그. 제국의 아침 오프닝의 출연진이 나오는 장면에서 왕규와 왕식렴은 서로를 흘겨보며 등장하는데 용의 눈물에서 묘사된 이성계와 정도전의 수어지교를 생각하면 묘한 느낌이 드는 장면이다.

[1] 3품 6등위.[2] 2품 3등위.[3] 이 부분을 다르게 해석하면 혜종이 왕요와 왕소의 세력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한다.[4] 혜종이 병약했다는 고려사의 기록도 왕규가 보낸 자객을 병약하다는 혜종이 직접 맨손으로 때려죽였다는 대목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있다. 후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 왕요와 왕소 형제의 반란에 휘말려 시해당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5] 만약 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제일 먼저 충돌해야 될 사람이 박술희인데 박술희 열전에는 유배를 보낸 사람이 정종으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정종이 이미 즉위한 상황에서 혜종의 측근 및 세력이 줄줄이 숙청당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혜종에서 정종으로 넘어가는 기간에 대해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쿠데타가 일어나 박술희는 패해 유배를 떠나고 왕규는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되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면 왕규와 박술희의 난이어야 하는데 왕규만이 반란의 주체로 나온다.[6] 광종이 정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도 있는 배다른 형제들의 무력 기반이 될 수도 있는 개국공신 세력을 숙청했다는 말이다. 둘째 형인 정종이 큰형 혜종에게 그랬고 자신이 정종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동생들이 공신 세력의 무력 기반으로 해서 자기를 제거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광종이 정종을 제거했다는건 전적으로 일부 학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애초부터 기록이 아닌 가정에서 출발한 것. 그러나 공신 세력 숙청은 왕권 강화가 1번째 목적이기 때문에 상당한 개연성은 있을 수 있다. 한국이나 중국 역대 왕조의 개국공신들은 체제가 어느 정도 잡힌 뒤 건국자 혹은 후손에게 대부분 숙청당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유방, 주원장, 이방원 등. 개연성이 없지는 않지만 '설'임을 감안하자.[7] 혜종은 왕소에게 딸을 시집보내었는데 계책인지 우호적 행동인지 알 길은 없다.[8] 후대까지 고려는 형제가 세습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된 것이 훈요 10조일 것인데 3번째 조항에 장자가 왕위를 잇되 자질이 안 되면 다른 자가 왕위를 이으라고 되어 있다.[9] 애당초 왕요와 왕소를 죽이려한 사람이 왕규였다고 한다면 왕이 될 왕요로써는 어떻게 해서든 왕규를 죽이는 수 밖에 없다. 결국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나는 상황이다. 아니라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일 뿐이다.[10] 왕식렴과 왕규 열전에 왕요와 왕식렴이 왕규의 반란을 대비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왕규의 반란을 갑작스럽게 맞이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왕규가 정종과 왕식렴의 에 빠진 것일 수 있다.[11] 어머니가 유력 호족인 충주 유씨, 그의 장인이 후백제박영규(견훤의 사위), 여동생 낙랑공주신라 경순왕의 부인으로 왕요가 얼마나 막강한 세력을 갖추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상 경기도, 강원도, 패서 일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세력이 왕요를 지지했을 것이다. 다만 이는 왕소도 마찬가지라는 아이러니가 있다.[12] 이는 박유김순식과 대조되는데 박유의 경우 극 중에서 왕건과 박유의 대화 중에 사성하는 내용이 나왔고 김순식의 경우 나레이션으로 언급되었다.[13] "저 왕규가 언제부터 왕씨였소이까? 본래는 함씨가 아니였소니까."라고 까는 장면이 나온다.[14] 아들이 배우 김주혁.[15] 박술희가 아군이기는 하지만 왕식렴, 왕요, 왕소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병부령인 박술희의 지위를 자신들 쪽이 가져야 활용이 가능하다고 여기며 죄가 없음에도 귀양가는 박술희에게는 왕식렴 일파를 처리한 후에 다시 불러와서 잘대해주면 그만이라고 근시안적으로 생각했고 왕규 일파의 핵심 인물들도 반대했으나 병부의 군사들에게 강압적으로 대하면 된다고 군부를 간단히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결국 병부의 군사들이 왕식렴 일파에게 합세해버리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이 때 병부의 군사들을 지휘한 염상도 왕규가 더 위험하다는 망상에 빠져서 왕식렴을 도와서 왕규 일파를 제거하나 결국 왕식렴에게 토사구팽당하고 병부의 군사들도 왕식렴 일파의 군사들에게 쫓겨나면서 병부 역시도 박술희의 뜻을 따르고자 했지만 멍청함으로 인해 적인 왕식렴을 도우면서 결국 병부와 왕규는 사이좋게 왕식렴에게 제거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