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룩셈부르크)

 


[image]
'''이름'''
장 브누아 기욤 로베르 앙투안 루이 마리 아돌프 마르크 다비노
(Jean Benoît Guillaume Robert Antoine Louis Marie Adolphe Marc d'Aviano)
'''출생'''
1921년 1월 5일
룩셈부르크 콜마르베르크 베르크 성
'''사망'''
2019년 4월 23일 (98세)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장례식'''
2019년 5월 4일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노트르담 성당
'''재위'''
룩셈부르크의 대공
1964년 11월 12일 ~ 2000년 10월 7일
'''배우자'''
벨기에의 조제핀샤를로트 공주 (1953년 결혼 / 2005년 사망)
'''자녀'''
마리 아스트리드[1], 앙리, 장[2], 마르가레타[3], 기욤[4]
'''아버지'''
부르봉파르마의 공자 펠릭스
'''어머니'''
룩셈부르크 여대공 샤를로트
'''형제'''
엘리자베트, 마리 아델라이드, 마리 가브리엘, 샤를, 엘릭스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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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청소년기
2.2. 2차대전 참전
2.3. 통치
2.4. 말년과 죽음
3. 여담


1. 개요


Jean Benoît Guillaume Robert Antoine Louis Marie Adolphe Marc d'Aviano (1921.1.7~2019.4.23, 향년 98세)
룩셈부르크의 전 대공으로 현 대공 앙리의 아버지다.

2. 생애



2.1. 청소년기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나 영국 기숙학교 앰플포스&애비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1939년 1월 5일 공위 계승자로 임명되었다.

2.2. 2차대전 참전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이 룩셈부르크를 침공하자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망명하였고 이때 장은 캐나다로 가서 라발 대학교에서 법학정치학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1942년 11월 영국에서 영국군 아이리쉬 근위대에 입대하였다. 샌드허스트에서 교육을 마친 뒤 1943년 6월 소위로 임관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 카엔 전투, 브뤼셀 수복 작전에 참여하고 그 공을 인정받아 대위로 진급하였다. 그리고 1947년 6월에 퇴역하였다.

2.3. 통치


어머니 샤를로트 대공1961년 4월 28일부터 장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그리고 1964년 11월 12일 어머니의 퇴위에 따라 공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통치 기간 내내 아내 조세핀 대공비와 함께 경제와 복지, 유럽의 통합에 신경썼고 이 공로로 1986년 아헨에서 샤를마뉴 메달을 받았다. 2000년 10월 7일에 장남 앙리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2.4. 말년과 죽음


2002년 여름 대공비(벨기에의 조제핀샤를로트 공주, 1927~2005. 레오폴드 3세의 딸이다.)의 요양을 위해 피슈바흐 성으로 거처를 옮겼고 2005년 사별 후에도 피슈바흐 성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폐 질환으로 입원했다가 2019년 4월 23일에 별세했다. 룩셈부르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장례식이 엄수되었고 대공국 전역에 12일간 애도기간이 선포되었다.

3. 여담


  • 프랑스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은 말년에 룩셈부르크의 발전을 극찬하면서 "유럽입헌군주제를 채택해야 한다면 그 모델은 룩셈부르크여야 한다."고 말했다.
  • 1984년부터 2000년까지 대령 계급장을 달고 영국의 정기 군대 사열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수행하였다.
  • 룩셈부르크의 현대 미술관인 무담 미술관은 그의 통치 기간을 기리기 위해 2006년 7월부터 이름을 장 박물관으로 개칭했다. 개명식에는 그도 직접 참석했다.
  • 장 대공은 아버지(부르봉-파름 가문의 펠릭스)의 영향으로 원래는 부르봉-파름 가문(부르봉 가문의 방계로, 부르봉 왕조 항목 참고)이지만 장 대공의 아들들의 결혼에 관련해서 부르봉-파름 본가와 귀천상혼 논란이 생기자 1987년 부르봉-파름 가문과의 관계를 끊었고 현재까지 어머니의 가문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단, 1995년 다시 화해를 하여 본인 및 직계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과 손자들부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부르봉파름 공자(Prince of Bourdon-Parma) 칭호를 사용하게 하였다.
  • 장이 죽은지 약 1년 후인 2020년 5월 10일에 그의 장증손자[5] 샤를이 태어났다. 1년만 더 생존했다면 장증손자를 봤을 텐데 아쉽게도 생전에 못 보고 타계했다.[6]

[1] 1954년생, 합스부르크 왕조로 시집 감. 정확히 말하면 카를 1세의 4남(다섯째)인 카를 루드비히(1918~2007)의 차남(셋째)인 카를 크리스티안 대공(1954년생)과 1982년 결혼. 슬하 3남 2녀. 여담이나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공주 역시 카를 1세의 차남의 장남과 결혼했다.[2] 1956년생, 1987년 계승권을 포기하고 Hélène Suzanna Vestur라는 프랑스 여성과 속도위반 결혼하여(이 결혼이 룩셈부르크 대공가와 부르봉-파름 본가의 분쟁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3남 1녀를 낳았으나 2004년 이혼. 2009년에 Diane de Guerre라는 네덜란드 여성과 재혼.[3] 1957년생, 리히텐슈타인 공국으로 시집을 감. 프란츠 요제프 2세 공(1906~1989)의 3남이자 한스 아담 2세의 둘째 동생인 니콜라우스 공자(1947년생)와 1982년 결혼, 슬하 2남 2녀.[4] 1963년생. 스페인 귀족 Sibilla Weiller y Torlonia와 1994년 결혼하여 3남 1녀[5] 장의 장남인 앙리의 장남인 기욤의 장남[6] 장증손자 이외의 다른 증손자들은 장 대공 생전에 몇명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