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수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철수'''
'''鄭哲洙'''

[image]
[1]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烏川哲洙
'''이명'''
고철(高哲)[2]
'''본관'''
연일 정씨[3]
'''출생'''
1924년[4] 1월 16일[5]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원촌마을)[6]
'''사망'''
1989년 2월 17일
경기도 용인군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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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계 중화민국의 공산주의자. 한국의 항일운동가.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포은 정몽주의 23대 대종손이다.

2. 생애


정철수는 1924년 1월 16일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포은 정몽주 종가에서 포은 정몽주의 22대 대종손인 정의열(鄭義烈)[7]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준식(金俊植) 사이의 4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0년 모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을 수학하고 1934년 수원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했으며, 1936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1942년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에 진양 하씨 하증덕(河曾德)과 결혼해 장녀를 낳았으나, 학교 졸업을 앞둔 1943년 12월 말 일본군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어 중국 산둥성 지난일본제국 육군 훈련소에 배치되었다. 이듬해인 1944년 3월 25일 평장우·허섭 등 동지 2명과 함께 부대를 탈영한 그는 국민혁명군 팔로군 장교 가오융(高勇)에게 극적으로 구출되어 항일투쟁의 근거지인 타이항산에 인도되었고, 그해 5월 허베이성 서(涉)현 허난뎬(河南店)진에 주둔하던 조선의용군에 가입해 항일전선에 투신했다. 그해 9월 화북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수료하고 반장(班長)·배장(排長) 등의 직임을 맡으며 자신의 학병 탈출 과정을 주제로 연극 대본을 집필해 중국인들에게 항일선전을 하기도 하고 신문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5년 1월에는 조선의용군 화북조선인민위문단(華北朝鮮人民慰問團)[8] 대표로 태행구(太行區) 지역을 순회하면서 조선인민을 위로하였다. 이때 정철수는 '조선인민은 해방구 군민들과 함께 작전(作戰)하여 철저히 일본파쇼를 소멸하고 중한(中韓)인민의 해방을 위해 분투할 것을 희망한다'고 역설하였다.
당시 조선의용군 제5지대 소속으로 있던 그는 8.15 광복을 맞았으나 국공내전으로 인해 중국에 계속 남아야 했고, 1945년 10월 봉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고 선전부 정치지도원 겸 선전간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초 조선의용군 제5지대사령부 선견중대로 연변 지역으로 들어가 마적단친일파를 축출해 동포들의 호응을 받았다. 1946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그해 5월부터 1948년까지는 길동군(吉東軍)분구 정치부의 선전교육부 선전과장 및 선교과장, 벽보위원, 연변군구 정치부 선전과장 등으로 근무하는 한편 연변일보에 희곡을 투고했고, 1948년 제대하자마자 그해 4월부터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여 신문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때 전개되던 공산당 정풍운동 과정에서 '불안정한 공작'을 이유로 1년간 당원권 정지처분을 당하였다.
근신 이후 동포에 대한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는 교육사업에 투신하여 1948년 12월부터 1950년 3월까지 연길현정부 교육과장으로 재직했으며, 그 사이 1949년 4월 연길현립 연길시인민문화관[9] 설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0년 3월에는 길림시 조선족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부임하여 1952년까지 재직했다.[10]
그러다가 1952년 4월 삼반오반운동에 연루되어 1년여간 길림시 인민법원에 수감되었다. 1953년 석방된 후에는 연길시로 이주하여 연길시 제2초급중학교 및 연변제2중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문학을 강의했다. 1957년 8월부터 1958년 4월까지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기관지인 『아리랑』의 편집부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이때 조선의용대 분대장 출신의 조선족 작가인 김학철 등과 교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8년 마오쩌둥 주도의 반우파 투쟁에 휘말려 부르주아 우파로 사상비판을 당했고, 그해 5월부터 1962년 8월까지 연길시 화룡현으로 강제 이주당하여 화룡공사 개간사업 잡역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962년에는 우파 분자로 재차 사상비판을 당하고 연변인쇄창에서 보일러공으로 근무했다. 또 1966년부터 일어난 문화대혁명의 광풍에도 재차 휘말려 잡역 노동자 및 개간사업의 잡역, 보일러공, 인쇄공, 탄광 노동자 등으로 일하며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1979년에야 당시 길림성 성장 왕언마오(王恩茂)의 노력으로 복권되어 연변제1중학교 교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고, 같은 해 11월 당시 지린성군구 부정치위원 겸 연변군분구 제1정치위원, 연변 조선족 자치주 위원회 제1서기 등으로 근무하던 조남기에 의해 연변대학 일어과 교수에 추천되어 부임, 1984년까지 대학교정에서 일본문학을 가르치다가 퇴직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84년 KBS 라디오방송 '북간도 동포에게'를 통해 노모 김준식씨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41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으며, 1986년 10월 10일에는 부인 김순옥, 장남 정래정(鄭來晶) 내외와 함께 영구 귀국하였다.
1989년 2월 17일 별세하여 고향인 모현읍 능원리 219번지 포은선생 묘역에 안장되었다.

3. 기타


1993년 장남 정래정에 의해 유고집 《나의 청춘》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 소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2011년 8월 15일 광복절에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4. 참고 문서


  • 홍순석, 「포은가문의 절의(節義)와 계승」, 『용인향토문화연구』 제13집, 용인향토문화연구회, 2013, 109~110p.#

[1] 1947년경 길림시조선족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을 시절 촬영된 사진.[2] 1944년 일본군 훈련소 탈영 후 국민혁명군 팔로군 장교 가오융(高勇)에게 극적으로 구출되었을 때, 조선에 거주하는 가족들에게 불이익이 갈 것을 우려하고, 가오융의 성인 고(高)와 자신의 이름 두 글자 중 하나인 철(哲)을 따서 가명을 만들었다고 한다.[3]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 33대손, 포은공파 23대손 수(洙) 항렬.#[4] 1922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5] 음력 1923년 12월 11일.[6] 인근의 왕산리와 함께 연일 정씨 포은공파 집성촌이며, 지주사공파 종가 겸 정몽주 종가가 능원리 118-1번지에 있다. 독립유공자 정철화도 이 마을 출신이다.[7] 1924년 히로히토의 혼인을 기념하여 조선총독부에서 금 100엔의 제사 비용을 지원해준 적 있는데, 당시 정몽주의 종손으로 기재되어 있었다.#[8] 당시 단장은 연안파김창만이었다.[9] 1953년 연길시와 연길현이 분리되면서, 연길시문화관으로 개칭되었다.[10] 1948년 이미 제대했기 때문에 다른 조선의용군 동료들과는 달리, 1950년 일어난 6.25 전쟁에 동원되지 않고 교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