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폰다
1. 소개
미국의 배우. 전설적인 원로 영화배우 헨리 폰다의 딸로 젊은시절에는 아카데미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스타였으나 이후에는 연기보다는 정치운동이나 사회운동에 치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2. 생애
배우로서 명성을 널리 펼치던 헨리 폰다와, 사교계 명사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 사이에서 1937년 12월 21일 태어났다. 제인 폰다가 12살이던 해, 어머니가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여 정신 치료를 받다가 끝내 자살하였다고 한다. 이후 제인은 모델로 데뷔하여 보그 표지를 두 번이나 장식하였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여 메소드 연기의 창시자 리 스트라스버그가 운영하는 수 많은 명배우들을 산출한 액터스 스튜디오에 들어갔다고 한다. 리 스트라스버그가 재능이 있다며 호평을 내리자 배우로서의 확고한 꿈을 가지게 된다. 1960년 정식으로 배우로 데뷔하여 1970년대까지 최정상 스타 배우 반열에 올랐으나, 1990년대부터 유명 기업인 테드 터너와 결혼을 하면서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2005년 다시 복귀하여 현재는 넷플릭스 시트콤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주연과 프로듀서를 겸하고 있다.
2.1. 하노이 폰다
제인 폰다는 아버지 헨리 폰다[1] 의 영향을 받아 진보적 정치관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반전주의운동을 하던 중 도를 넘는 행동을 하여 논란을 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전 반대시위를 하였다. 폰다는 북베트남을 방문하여 각종 마을, 학교 등을 다니며 미군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심지어 전쟁통에 북베트남군들과 함께 장난을 피우는 장면이 포착 되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사진 사진2 단, 이는 폰다 혼자 간 것이 아닌, 약 500명 가량의 반전주의자들이 하노이에 방문하였다. 특히 당대 최고의 스타가 반전 운동을 노골적으로 하는 대에 많은 사람들의 격분을 샀다.
그러나 이에 대해 폰다는 자신의 블로그 글에 위 사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위 사람들의 호응에 휩쓸리다 북베트남군에 의해 찍혔으며, 자신이 어디에 앉아있는지 조차 몰랐다고 한다. 그제야 모든 것이 그들의 의도된 계획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으며, 이에 자신이 비난을 받는 것은 마땅하며 상처 받았을 군인들과 국민에게 사과를 하였다.
비밀작전 수행중 포로가 된 그린베레나 SOG같은 특수전 부대원들의 신원을 확인해서 북베트남 정부에 통보하는 짓도 했다. 덕택에 당시 포로가 됐던 참전용사들은 더욱더 악랄한 고문을 당했다고 치를 떨며 분노했고 제인 폰다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며 분노한다고.[2]
다만 이는 신원을 통보하였다는 사실은 조작 의혹이 있었으며 제인 폰다는 '난 그들을 만난 적도, 이름 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신원을 통보하냐.'라고 주장하였다.
북베트남 방문과 그에 따른 루머로 인해 어느 미국 군사 학교는 'Good night, Jane Fonda, Bitch!'를 야간 구호로 채택했으나 머지않아 그 구호는 규정 위반으로 금지되었다.
이러한 폰다의 활동에 대해 북베트남 육군총장인 Bui Tin은 미국은 민주주의 때문에 패전했다며 폰다를 위시한 자국민들의 프로파간다에 미군이 전투의지를 상실했다고 평했다.
물론 폰다는 재산을 히피들과 반베트남전 시위대에게 기부하기도 했고 린든 존슨 대통령을 몹시 싫어했으며[3] 극우 배우인 존 웨인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정작 폰다 자신은 후에 CNN 설립자인 미디어 재벌 테드 터너와 결혼하는 등 전형적인 부유층의 삶을 살았기에 여피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2005년, 미해군 노병 마이클 A. 스미스가 폰다의 자서전 사인회에서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고 도망 친 사건도 있었다. 체포 되었으나 제인 폰다는 큰 일을 원치 않다며 그는 곧 풀려났다.
그녀가 당시에 저지른 이적행위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아서, 홈쇼핑 채널에서 방송 예정이던 저서 'Prime Time'의 홍보방송이 수많은 시청자들의 항의로 인해취소되기도 했다.
현재는 환경 운동[4] 과 관련된 여러 사회적 행보와 여러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과거보다는 비판이 많이 사그라들어 원로 배우로서의 존경을 받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존 보이트[5] 와 함께 출연했던 1978년 영화 <귀향>은 베트남전 참전 군인의 PTSD와 그에 대한 극복을 다루고 있으며 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3. 출연작
Tall Story (1960)
A String of Beads (1961)
Walk on the Wild Side (1962)
The Chapman Report (1962)
Period of Adjustment (1962)
In the Cool of the Day (1963)
Sunday in New York (1963)
Joy House (1964)
La ronde (1964)
Cat Ballou (1965)
The Chase (1966)
The Game Is Over (1966)
Any Wednesday (1966)
Hurry Sundown (1967)
Barefoot in the Park (1967)
Spirits of the Dead (1968)
Barbarella (1968)
They Shoot Horses, Don't They? (1969)
Klute (1971)
Tout Va Bien (1972)
Steelyard Blues (1973)
A Doll's House (II) (1973)
그레이스 앤 프랭키
4. 기타
- 핵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에 넘어지면서 발목을 부상당하게 된다. 이때문에 체중 관리 목적으로 해오던 발레를 못하게 되자 그 대신에 음악에 맞춰서 하는 운동법을 개발하게 된다. 이를 녹화한 비디오가 나중에 VCR 시장이 발달하면서 역대 가장 많이 팔린 VHS 비디오가 되는 등 공전의 히트를 쳤는데 이것이 소위 비디오 운동의 시초이다. #
- 헨리 폰다와 제인 폰다 둘의 부녀 사이가 악화되었던 것은 헨리가 자신의 아내인 프란시스 포드 세이무어를 두고 수잔 블랜차드와 바람을 폈는데, 당시에 프란시스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헨리 폰다는 아내에게 이혼 신청을 했고, 프란시스는 이혼 신청에 대한 충격 그리고 우울증과 어린 시절 성폭행 트라우마가 겹쳐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헨리는 프란시스가 사망하고 얼마 안 가 바로 수잔 블랜차드와 재혼하는 바람에 12살이었던 제인이 자신의 엄마를 외면했다고 생각해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피터[6] , 제인, 헨리 셋이서 모인 인터뷰에서는 서로 어색한 모습을 보인다. 악화된 관계는 말년에 황금 연못에 함께 출연하며 화해에 성공했고, 헨리가 AFI 공로상을 받았을 때 마지막 연설에서 자신의 딸을 욕하는 사람들을 향해 "닥쳐, 제인은 완벽하니까."라고 한방 날려줬다. 아버지의 말에 감동한 제인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이 사연은 2020년 9월 06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
영상 11분 55초부터.
- 90년대 초중반까지 유명했던 도시전설인 '갈비뼈 뽑는 성형수술'의 대표주자로 잘못 알려져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허리 사이즈를 신체 한계보다 더 줄이기 위해 맨 아래쪽 갈비뼈 두 개를 뽑아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인데, 워낙에 널리 알려져서 대한민국에까지도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지만, 사람들이 하도 물어보는 통에 결국 X레이 사진을 찍어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해야만 했다.[7]
- 아버지가 헨리 폰다라는 것부터 알 수 있듯 젊었을 적에 엄청난 미녀였다.[8] 1960년대를 상징하는 섹스심볼 스타였으나(당시의 모습은 영화 바바렐라에 잘 나타나 있다), 70년대에 들어 반전 운동을 시작하면서 숏컷으로 바꾸고 섹시한 이미지를 탈피하여 연기파 배우로 나아갔다. 현재도 한국나이로 84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엄청난 동안력을 자랑하신다.
- 이지 라이더로 유명한 동생 피터 폰다[9] 가 자서전에서 회고하길, 자신은 사탕을 먹었다고 엉덩이를 때릴 정도의 엄격한 아버지[10] 를 두려워해 피했다면 누나 제인은 오히려 달려들었다고 한다.(...)
-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시상자로 등장했다.# 익스트림 무비에서 이를 예언한 유저가 화제가 되었다. # 수상자를 호명한 후 봉준호 감독에게 트로피를 전달했다
[image]
5. 관련 문서
[1] 여담으로 헨리 폰다는 제인 폰다가 N-word를 사용하자 제인 폰다의 뺨을 때릴 정도로 인종 문제에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제인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던 것은 1950년대였으며 당시 인종주의가 만연한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당시엔 헨리의 행동이 더 드물고 진보적인 행위였던 것.[2] 피터 폰다가 덴버 공항에 붙어있던 "고래의 먹이로 제인 폰다를 줘라."라는 선전물을 훼손하다 결국 체포된 적이 있었다.[3] 정작 LBJ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다. 헨리 폰다가 엄청나게 독실한 민주당 지지자라는 점을 감안하면...[4] Fire drill fridays라는 환경운동 행사로 샘 워터스톤, 나탈리 포트만, 호아킨 피닉스, 루니 마라도 자주 참석하여 연설을 한다.[5] 심지어 존 보이트는 할리우드 내 대표적 공화당원이다(...)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존 보이트의 딸인 안젤리나 졸리는 민주당 소속으로 대통령 출마도 고려해볼 정도로 독실한 민주당원이라는 점.[6] 피터 폰다가 자신의 회고록 에서 밝히길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두려움의 존재로 여겼으며, 10살이었을때 누나 제인은 피터를 안심 시켜주기 위해 엄마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으로 속였고, 모두가 어머니에 대해 함구하였다고 한다. [7] 캠퍼스 러브 스토리 제작 과정에서도 이런 헛소문이 적용된 흔적이 남아 있다. 캠퍼스 러브 스토리/더미 데이터/강미령 문서 참고.[8] 사실 폰다 가족 3인방 모두 장신+쾌남, 미녀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 폰다와 피터 폰다는 190cm 정도의 장신이었고 제인 폰다는 170 후반까지는 아니지만 173cm로 당대 여배우들 중에서도 매우 장신인 편이었다.[9] 피터의 딸 브리짓 폰다도 배우로 활동했다.[10] 물론 사탕 먹었다고 바로 혼난게 아니고 먹지 말라고 경고하는 아버지에게 대들다가 맞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