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폰다
1. 개요
'''Henry Jaynes Fonda'''
'''헨리 제인스 폰다'''
1905년 5월 16일 ~ 1982년 8월 12일
헨리 폰다는 미국의 영화배우이다. 할리우드 고전 시대를 상징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배우 중 하나로 꼽힌다.
2. 상세
할리우드 전성기 시대의 선역 기믹으로 유명한 배우. 동시에 할리우드 가족의 상징이기도 하다. 최근 프로레슬링계에 존 시나가 있다면, 1930~50년대 할리우드에는 헨리 폰다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선량하고 정직해보이는 이미지로 에이브러햄 링컨의 젊은 시절을 다룬 존 포드 감독의 젊은 날의 링컨에 나오기도 하고 서부영화에서는 개척정신이 있는 역할로 나왔으며 존 스타인벡의 유명한 명작소설 《분노의 포도》를 다룬 존 포드 감독의 동명의 영화와 톨스토이의 원작을 다룬 《전쟁과 평화》[1] 와 같은 명작영화에도 출연했다.
이렇게 선량하고 정직한 이미지의 그가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인 무법자 시리즈로 유명해진 세르조 레오네의 작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에 출연을 하는데... '''예상을 뒤엎고 악역이었다.'''
그 결과 당초 배급을 맡은 MGM 영화사가 배급을 취소할 지경이었다. 미국인 관객들 역시 그의 악역 변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하지만 그는 악역으로도 명연기를 보여줬다. 사실 레오네의 작품엔 선역과 악역의 구분이 애매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누가 봐도 그가 악역이다.''' 이 작품에서 그가 맡은 악역 묘사가 어느 정도냐면, 한 가족을 몰살시키고 남은 어린아이마저도 자신의 이름을 알았다고 쏴죽이고, 젊은 시절엔 재미삼아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정직하고 정의롭고 선한 이미지의 미국인을,미국을 대표하는 배우였기 때문에 그가 악역을 하는것은 미국의 이미지에도 치명적인 묘사였기 때문에 당초 배급을 맡기로 한 영화사는 미국에 개봉될 경우의 파장을 두려워하여 배급을 취소해버렸다. 하지만 폰다는 악역을 연기하는것이 마음에 들어 즐겼다고 한다.
이후 《무숙자》에도 출연하기도 했다.
전쟁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였는데,[2] 이 분야에서 손꼽히는 1965년작 《벌지 대전투》에서는 경찰 출신으로 날카로운 분석력과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육군 중령 카일리를 연기하였다. 1970년작 《불타는 전장》에서는 주인공의 상관 역으로 특별 출연, 오만 불손한 주인공을[3] '''"말 안 들으면 해군 이등병으로 강등시켜서 최전선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해 데꿀멍시킨다.[4] 이후 1977년작 《미드웨이》에서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해군 대장 역을 맡아 열연,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냉정 무비한 니미츠 제독을 제대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작에 참여한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그의 대표작이자 전설적 걸작으로 이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작이다.[5] 차후에 이 영화의 감독이었던 시드니 루멧이 연출한 《핵전략사령부》에서도 좋은 연기력을 보여준다. 영화 자체도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잘 부합하기도 했다.[6]
다양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상복이 없었다가 극장 영화 유작인 《황금 연못》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그의 딸 제인 폰다와 함께 출연했는데, 영화 속 캐릭터처럼 실제로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으나(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젊은 여인과 재혼했던 점이 컸다.) 이 영화로 화해했다. 흥행과 평에서 대박을 거둔 이 영화가 개봉하고 1년도 안돼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여담인데 마지막 영화인 하지점(Summer Solstice,1981)은 티브이 영화로 1981년 9월 30일에 방영했다. 황금연못은 1981년 9월 4일에 미국 개봉.
소두인지라 비율이 극도로 좋은데, 키는 185.4cm라고 한다. 주연급 고전 할리우드 배우들 중에서는 평범한 편이다.[7][8]
3. 정치 성향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은 할리우드[9] 에서도 매우 리버럴한 성향으로, 인종 문제에 깨어 있는 인물인지라 딸인 제인 폰다가 어렸을 때 자신의 앞에서 "니거"(nigger:깜둥이)라는 말을 쓰자 그녀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물론 당시가 195~60년대인만큼 흑인 인종차별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기에 오히려 헨리의 행동이 더 드물고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훗날 제인도 리버럴한 성향을 띠고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인권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전쟁 중인 적국의 수도 하노이를 방문해서 자국을 비난한 건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 훗날 그 점을 사과하였다.관련 기사 특히 보수주의자인 존 웨인과 비견되는데, 존 웨인의 경우 참전하지 않아 겁쟁이 이미지가 박혔지만 헨리 폰다는 2차 세계대전에 친구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참전했기에 영웅으로 남았다.[10]
또한 매우 독실한 민주당원이기도 해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적이 많다.
제임스 스튜어트와는 평생지기로 아주 절친한 사이였는데, 제임스 스튜어트가 공화당 지지자였기 때문에 처음에 정치 논쟁을 하다 싸움이 나서 그 제임스 스튜어트를 '''일방적으로 패버렸다'''고.[11] 싸움이 끝나고선 이래선 안되겠단걸 알겠는지 제임스에게 먼저 앞으로 절대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하여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매번 선거철만 되면 정치 이야기가 아주 없진 않아서 서로 냉대하긴 했었다고 한다.
4. 기타
자녀와 후손들로 첫째 딸 제인 폰다와 막내 아들 피터 폰다와 손녀 브리짓 폰다가 있다.[12] 피터 폰다 같은 경우 배우 겸 영화 제작자로 성공 했다. 이지 라이더가 그의 작품이다. 피터 폰다는 2019년 8월 16일 79세로 사망했다.
헨리 폰다와 제인 폰다 둘 사이가 악화 되었던 것은 헨리가 자신의 아내인 프란시스 포드 세이무어를 두고 수잔 블랜차드와 바람을 폈는데, 당시에 프란시스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헨리 폰다는 아내에게 이혼 신청을 했고, 프란시스는 이혼 신청에 대한 충격 그리고 우울증과 어린 시절 성폭행 트라우마가 겹쳐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헨리는 프란시스가 사망하고 얼마 안 가 바로 수잔 블랜차드와 재혼하는 바람에 12살이었던 제인이 자신의 엄마를 외면했다고 생각해 관계가 악화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피터[13] , 제인, 헨리 셋이서 모인 인터뷰에서는 서로 어색한 모습을 보인다. 악화된 관계는 말년에 황금 연못에 함께 출연하며 화해에 성공했고, 헨리가 AFI 공로상을 받았을 때 마지막 연설에서[14] 자신의 딸을 욕하는 사람들을 향해 '''"닥쳐, 제인은 최고니까."'''라고 한방 날려줬다. 아버지의 말에 감동한 제인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영상 11분 55초부터.
그리고 황금 연못을 찍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7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현재까지도 그의 영화들은 많은 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비교적 동안인 편이었는데, 젊은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제임스 스튜어트가 노안인지라 더욱 대조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에 출연 당시 '''63세'''였다! 그리고 12인의 성난 사람들 출연 당시에도 52세로 중년기였다. 그러나 1970년 이후로 나이가 많이 드셨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제임스 스튜어트와 무명시절부터 같은 방을 쓰는 등 친했으며, 헨리 폰다가 늙어 죽을때까지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같은 영화에도 출연한 적이 많다.
2020년 9월 06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딸인 제인 폰다와의 사연이 방영되었다.
위의 일화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영화 내의 선하고 차분한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 성격은 불같았다고 한다.[15] 피터 폰다 말로는 사탕을 몰래 까먹다가 걸려서 엉덩이를 얻어맞았다고 한다.[16] 그러나 원리원칙을 매우 잘 지키는 인물이고 화나지만 않으면 주변인들에게 상당히 친절했다고. 10세 나이가 적은 프랭크 시나트라와 유사한 부분이다.
그 외의 특이할 만한 점들 중 하나는 떨떠름한 표정과 씨익 웃는 표정을 잘 짓는 편이다.
[1] 이 영화에는 당시 아주 유명했던 오드리 헵번과 멜 페러 부부가 출연해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이런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다(...) [2] 실제로 미국 해군 중위로 2차대전에 참전한 바 있다.[3] 일본어 통역장교인 중위였다.[4] 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으며, 단지 미 해군 소속으로서 대령 계급장을 단 것만 알 수 있다.[5]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현기증이 있다면 헨리 폰다에게는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정도.[6] 실제로 12인의 성난 사람들에는 유죄 판결을 내리는 사람과 무죄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 갈등하는데, 헨리 폰다가 맡은 역할은 처음으로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 즉 정치적으로 보자면 리버럴에 가까운 사람이다.[7] 주연급 고전 할리우드 배우들은 게리 쿠퍼, 제임스 스튜어트, 존 웨인처럼 190cm가 넘는 장신이 상당수이고, 클라크 게이블 등도 180cm 중반 이상이었다. 험프리 보가트가 173cm로 작은 편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삼아 당대 아주 잘나갔다고 한다. 자고로 당시 미국 평균키를 비교해보면, 보가트가 작은 것이 절대 아니다.[8] 늙어서 줄어든 것으로 프로필상 187cm이고, 젊은 시절에는 절친 제임스 스튜어트와 큰 차이가 없었다. 특히나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잘 드러나는데, 본작의 등장인물들(3번, 7번)은 매우 작아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들 180cm의 거구들이다.[9] 사실 당대에는 세실 B. 드밀, 제임스 스튜어트, 게리 쿠퍼, 월트 디즈니 등 보수적인 사람도 많았다. 오히려 매카시즘 이전에는 리버럴보다 보수 세력이 더 컸을 정도.[10] 다만 미국의 전통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아들은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전사했지만 헨리 폰다의 자식들인 제인 폰다나 피터 폰다가 반전 운동을 하다가 이적행위까지 했기 때문에 제임스 스튜어트를 더 높게 쳐주는 경우가 많다. [11] 이건 헨리 폰다가 언급한 것이 아닌 제임스 스튜어트가 지나가는 말로 '그때 내가 신나게 얻어맞았다네(...)'라고 했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키가 5cm 이상 더 크지만 아무래도 체격 차이가 나다 보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12] 브리짓은 아들 피터의 딸이다. 가장 알려진 배역으로는 대부 3에서 그레이스 해밀턴이 있다.[13] 피터 폰다가 자신의 회고록 <Don't tell dad>에서 밝히길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두려움의 존재로 여겼으며, 10살이었을때 누나 제인은 피터를 안심 시켜주기 위해 엄마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으로 속였고, 모두가 어머니에 대해 함구하였다고 한다.[14] 1978년에 진행된 연설으로 사망 4년 전이며, 당시 헨리는 73세였다. 황금 연못에 나오기 이전이지만 어느 정도 화해한 듯하다. 1981년에 마지막 공로상을 받고 1년 뒤인 1982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나 그때 이미 헨리 폰다는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황인지라 딸 제인 폰다가 대신 수상했다. 1981년에 공로상을 받을 때의 영상을 보아도 위의 1978년 영상보다는 확실히 많이 쇠약해졌다.[15] 그렇다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에 나오는 인간말종은 절대로 아니다. 실제로 헨리 폰다는 열혈 속성+선한 성격에 가깝다고 한다.[16] 그런데 이건 피터 폰다의 입장이고 제인 폰다의 경우 오히려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