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
[image]
선거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광복''

1948년 7월 20일
'''초대 대선'''

1952년 8월 5일
2대 대선
}}}
'''투표율'''
98.99%[1]
'''선거 결과'''
'''후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
'''한국독립당''']]
'''김구'''
'''득표율'''

'''92.3%'''
6.7%
'''득표수'''
'''180'''
13
'''당선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
'''대한민국 제1대 부통령 선거'''
[image]
선거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광복''

1948년 7월 20일
'''초대 부선'''

1951년 5월 16일
2대 부선
}}}
'''투표율'''
98.99%[2]
'''선거 결과'''
'''후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시영'''
'''한국독립당''']]
'''김구'''
'''득표율'''

'''67.5%'''
31.5%
'''득표수'''
'''133'''
62
'''당선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시영'''
1. 개요
2. 배경
3. 결과

[clearfix]

1. 개요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로,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선거를 통해서 국가원수를 뽑은 사례이다.'''

2. 배경


제헌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 대통령대한민국 부통령국민의 직접선거가 아니라, 국민의 직접선거로 뽑힌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선출'''하도록 했다. 즉 간접선거였던 셈.
이는 제헌헌법이 제정되던 당시의 상황과 비교해봐야 한다. 원래 유진오가 기초한 제헌헌법 초안은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이며, 의회에서 선출하는 국무총리가 실권을 가지는 내각책임제였고, 대부분의 제헌의원들도 여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이 유력시 되던 이승만 국회의장이 대통령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는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마찰이 생겼다. 결국 타협책으로 4년 임기에 1회 중임이 가능한 미국식 정부통령제로 결정되긴 했으나 정부통령 선거를 국회의원들이 투표하도록 하면서 내각제적 요소를 첨가하였다.[3][4]
제헌헌법 53조에서는, 정부통령 선거는 무기명투표로, 재적의원 2/3의 출석과 출석의원 2/3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당선이 확정되는 것으로 하였다. 만약 이런 후보가 없으면 2차 투표를 진행하며, 이래도 확정되지 않으면 2차 투표의 최다득표자 2인을 대상으로 결선 투표를 진행, 최다득표자가 당선 확정되는 것으로 하였다.

3. 결과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
'''기호'''[5]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유무'''
-
'''이승만'''

'''180'''
'''92.30%'''
'''1'''
'''당선'''
-
김구

13
6.67%
2
낙선
-
안재홍

2
1.03%
3
선거인수
198
투표수
196
무효표수[6]
1
투표율
98.99%
'''대한민국 제1대 부통령 선거'''
'''구분'''
'''기호'''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유무'''
1차 투표
-
이시영

113
57.36%
1

-
김구

65
32.99%
2

-
조만식

10
5.08%
3

-
오세창

5
2.54%
4

-
장택상

3
1.52%
5

-
서상일

1
0.51%
6

2차 투표
-
'''이시영'''

'''133'''
'''67.51%'''
'''1'''
'''당선'''
-
김구

62
31.47%
2

-
이구수

1
0.51%
3

-
무효표[7]
-
1
0.51
-

대통령 선거에는 재적 의원 198명 중 196명이 참여해 당선에 필요한 득표수는 131표였으며, 부통령 선거에는 197명이 참여해 당선에 필요한 득표수는 132표였다. 결국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외 한국민주당에서 밀던대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선거는 후보자 등록 없이 의원들이 지지하는 '''임의의 사람'''을 적어서 투표하는 식이었다.[8] 따라서 '''단독정부 참여를 거부한''' 김구, 안재홍, 조만식[9]이라든가, 아예 '''미국 국적자라서 피선거권이 없는''' 서재필이 득표[10]한 표도 있었다.

[1] 이 선거는 국회에서 뽑는 간선제였다.[2] 이 선거는 국회에서 뽑는 간선제였다.[3] 그러나 당시 유력 대선후보 이승만이 원했던 것은 '''4년의 임기가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 이후 이승만의 행보는 줄곧 국회와의 마찰로 얼룩졌으며, 의회의 지지 없이 정부가 구성될 수 없는 내각제에서의 '국무총리 이승만'이었다면 진작에 실각하고 말았을 것이다.[4] 혹은 제헌헌법 초안대로 갔다면은 이승만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대통령이 되고, 실권을 가진 국무총리 자리는 다른 사람한테 갔을 수도 있다. 이승만은 이런 시나리오를 경계했다는 썰도 있다.[5] 당시 정부통령 선거에는 기호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기호가 있었다.[6] 미국 국적자인 서재필에게 투표된 표가 무효표 처리[7] 서재필[8] 말 그대로 아무한테나 투표할 수 있다. 어느 국회의원이 자기 지인 이름을 써내면 그것도 유효표가 된다는 것이다.[9] 심지어 조만식은 당시 김일성에 의해(아직 단독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38선 이북에 억류된 상태였으므로 실질적인 의미는 없었다.[10] 물론 무효표 처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