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증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지도자 및 現 행정가. 현재 대한축구협회 기술교육부장을 맡고 있다.
7, 80년대에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센터백이며 두 차례의 아시안 게임 우승 (1978, 1986)에 공헌하였다. 역대 우리나라 수비수 중 가장 꾸준하게 기량을 유지한 선수이기도 하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대한축구협회 베스트 11에 연속하여 선정되었고 이후 북미 리그에서 3년동안 활약하며 두 차례 올스타에 선정되었다.[2] 말년에 K리그가 창설되자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국내로 복귀해서도 K리그 베스트 11에 두 차례 선정되었고 1986년 월드컵과 1986년 아시안 게임 멤버로 활약하였다. 역대 우리나라 A매치 출전 수 순위에서 7위에 기록된 선수이다.
2. 선수 생활
2.1. 클럽
1977년, 실업 축구단이었던 제일 은행에서 자신의 성인 축구 경력을 시작하였다. 1978년, 해군에 입대해 군복무를 마쳤다. 1980년 제일은행에 복귀하여 활동하다가 1981년 미국 북미 축구 리그의 포틀랜드 팀버스로 옮겨,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였다. 1982년 포틀랜드 팀버스가 재정 문제로 해체되자 시카고 스팅으로 이적하여 활약하였고, 1984년 K리그 창설 2년째를 맞아 프로팀 창단을 준비하고 있던 럭키금성 황소에 입단하여, 1985년 K리그 우승과 1986년 K리그 준우승 등에 공헌하였다. 1987시즌이 끝난 뒤 은퇴하였다.
2.1.1. 1984년 6경기 연속골
신생팀답게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이 많아 전력이 약했던 럭키금성에서 믿을 만한 스타 선수는 조영증 뿐이었다. 급기야 박세학 감독은 수비수였던 그에게 최전방 공격수까지 시켰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탄탄한 피지컬과 기본기를 만든 조영증은 최전방 포스트 플레이에도 능했다. 조영증은 전문 공격수가 아니었기에 드리블이나 개인기는 부족했지만 슈팅에 집중하여 공격수로도 좋은 활약을 했다. 이 때 6경기 연속골을 성공시키는 등 84시즌 28경기에 나서 9골 4도움을 올려 특급 활약을 펼쳤다.
조영증의 6경기 연속골 기록은 10년동안 지속되었다. 1994년 윤상철이 6경기 연속골 타이 기록을 만들었고, 1995년에는 황선홍이 8경기 연속골을 터뜨리며 조영증의 11년 묵은 기록을 깼다.
사실 84년 조영증이 기록을 세웠던 당시에는 이 기록이 큰 관심을 받지 못 했다. 조영증이 득점 행진을 벌였던 기간이 정확하게 1984 LA 올림픽 기간과 겹쳤기 때문이다. 이후 윤상철, 황선홍이 조영증의 기록에 도전할 때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들었다. 수비수인 내가 6경기 연속골을 넣었는데, 이 기록이 한참 유지될 동안 전문 공격수들의 분발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연속골을 기록하는 게 어려운 것이기도 할테고. 이제 K리그도 30주년을 넘어선 만큼 황선홍의 8경기 연속골을 넘는 더 좋은 선수와 기록이 나왔으면 좋겠다." - 조영증
- 배진경 기자, K리그 레전드 ''' ''6경기 연속골, 수비수의 변신은 무죄'' ''' 中
2.1.2. 85 우승, 86 준우승, 그러나 공헌하지 못 하다
파괴력있는 전문 스트라이커의 필요성을 절감한 럭키금성은 태국 출신의 공격수 피아퐁을 영입하였다. 피아퐁이 영입되면서 조영증은 다시 수비수로 내려갈 수 있었지만 럭키금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돼 장기 합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팀은 피아퐁을 앞세워 창단 2년만에 첫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 준우승을 달성했지만 팀의 간판스타였던 조영증은 각각 5경기, 10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 했다.
2.2. 국가대표
1970-80년대의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1980년, 1984년 AFC 아시안컵과 1986년 FIFA 월드컵 등의 많은 대회에서 뛰었고, A매치 109경기에서 1골을 넣었다.
2.3. 플레이 스타일
빠른 속도와 뛰어난 체력을 가지진 않았지만 상황을 잘 예측했기 때문에 판단력, 위치선정, 전술이해도 면에서 우수한 능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선수 답지 않게 좋은 피지컬을 가졌기에 몸싸움, 태클에도 능했고 북미 리그로 이적했을 때도 리그 올스타에 뽑히는 등 쉽게 적응했다. 또한, 당시 한국 수비수로서는 보기 드물게 수비지역에서의 볼배급이 가능한 선수였다.[3]
3. 지도자
LG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조영증은 6년간의 코치 생활을 마치고 94년 친정팀 LG 치타스의 지휘봉을 잡아 그해 컵대회 준우승을 이끌었지만 LG는 만년 하위권을 유지했다. 96 시즌을 마치고 계약만료를 눈 앞에 두고 사표를 제출해 LG를 떠났다.
U20 대표팀을 맡아 1998년 AFC U-19 대회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했다. 이동국과 김은중이 이 대회에서 활약으로 축구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4. 행정가
2002년 대표팀의 대선전에 힘입어 한국인 최초로 FIFA 기술위원장이 되었고, 청소년대표팀 단장을 맡기도 했다.이후 현재까지 K리그 심판기술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