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환
1. 개요
정용환은 대한민국의 80년대를 대표하는 중앙 수비수이다.
2. 선수 생활
2.1. 학창시절
아직 동래가 부산이 아니던 시절 동래에 살던 정용환은 어려서부터 여러 운동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개중에서도 축구를 좋아한 나머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축구팀이 없어졌음에도 축구를 하기로 마음먹고, 축구부가 있는 장안중학교로 진학한다. 팀에서 한계를 느낀 정용환은 친구 1명과 같이 부산진중학교로 3학년 때 전학, 대한축구협회장배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수비수 육성에 일가견이 있는 동래고로 진학하게 된 정용환은 본인의 말마따나 운때가 맞아, 동래고 출신인 김호가 마침 동래고 지도자로 부임해오게 되어 그의 지도를 받게 된다. 전설적 수비수인 김호의 지도 아래 정용환은 기량이 부쩍 성장하게 된다.'''"노력하는 과정이 말이 쉬워 노력이지 쉬운 것은 분명 아닙니다. 눈만 뜨면 모든 것이 유혹인데 그 것을 이겨내고 노력하는 선수만이 태극 마크를 달 수 있는 것입니다.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건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평소에 늘 습관화 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한다. 그 노력이 몸에 배면 프로팀에 가건 어디를 가던 자기 관리를 할 줄 안다.' 이런 말을 제가 자주 합니다. 이런 생활 습관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 고등학교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애정을 갖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 2010년 정용환 감독 후원회 결성식날 인터뷰
178cm의 크지않은 키지만 정용환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높은 곳에 줄로 공이 매달려 있는 기구를 향해 매일 연습 전 30분, 연습 후 1시간 가량 높이뛰어 기술을 활용하는 헤더 연습에 매진했다. 뿐만 아니라 항상 발뒤꿈치를 들고 걸었으며[1] , 제법 높이 있는 나뭇잎은 한 번씩 쳐 보고, 테니스장에 들어가 테니스 네트의 가장자리 높은 쪽을 뛰어넘는 연습도 꾸준히 해, 동래고 학생들이 정용환만큼은 확실히 알았다고 한다. 이런 노력이 결실로 이어져, '''이중점프'''로 오해받을 만큼 체공시간이 길고 농구선수에 준하는 독보적인 도약력을 갖게 되면서 청소년 대표로 발탁된다.[2]
2.2. 개화(開花)
고려대로 진학했으나 구타에 신물이 난 그는 대학교 3학년 때도 얻어맞자 운동을 접을 결심까지 하지만 결국 축구와 헤어지지 못하고, 이 3학년 때 인도네시아의 마라하림컵에서 고려대가 우승을 차지하고 국가대표로까지 발탁된다. 정용환은 브라질 포르투게자와의 친선전에서 데뷔, 국가대표 데뷔골을 뽑아낸다.
또한 대표팀에서 '''근력운동'''(웨이트 트레이닝)을 처음 접했는데, 세간의 오해(예, 달리기가 느려진다)와 정 반대로 이제까지의 노력을 웨이트 트레이닝에 쏟아붓기 시작한다. 휴식시간이 주어져도 당구 등으로 모처럼 여가를 보내는 동료들과 달리, 국대훈련에서 처음 접해본 근력운동에 몰두했다는 후문. 그 결과 하체(근력운동, 높이뛰기)와 상체(근력운동)가 골고루 발달해 박종환 감독이 '''"스프링처럼 탄력있는 몸"'''이라 평할만큼 탄탄한 근육을 갖추게 되었다.
대학교 생활을 마치고 대우에 입단한 정용환은 프로데뷔 첫해에 우승을 맛보게 되며, 베스트 11과 감투상을 수상한다. 신인왕 상이 이듬해 만들어졌는데, '''감투상으로는 정용환의 활약을 기리기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속설도 있다.
정용환은 85년과 86년, 대우에서 총합 5경기밖에 못 뛰는데 이동국 등이 경험했던 청대와 국대 돌림빵 때문이었다. 다행히 정용환은 이미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1년이 지난데다가, 웨이트를 열심히 하는 선수였고, 포지션 역시 상대적으로 활동량이 적은 수비수였던 관계로 큰 부상이 없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86년 한국은 월드컵 본선에 정말 오랜만에 진출하게 되는데, 정용환은 주전수비수로서 커다란 활약을 했다. 특히 일본과의 홈경기, 원정경기 2경기에서는 신들린 활약을 했던 것으로 회자되며, 원정경기에서는 일본 공격진들을 다 잡아먹음은 물론 선제 중거리포까지 터트리며 승리의 1등공신으로 활약했다.
월드컵 본선을 나름대로 치러낸 정용환은, 86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뛰며 금메달을 차지한다.[3]
이듬해 정용환은 시즌의 반 정도는 대우에서 뛰게 되는데, 그럼에도 베스트 11으로 선정되며 대우는 32경기 20실점을 기록하는 짠물수비를 통해[4] 우승을 차지한다. 이듬해 대우는 아시안클럽챔피언십 우승을 바탕으로 1회 아프로-아시안클럽챔피언십에 출전, 우승을 거두며 2대륙 종합 챔피언의 좌를 차지한다.
정용환은 87년 세계 유니버시아드, 88 올림픽, 90 월드컵 예선, 남북 통일 축구대회, 90월드컵 본선 등등에 출전하며 국가대표로서의 활동에 매진한다. 91년 프로축구팀에 매진하게 된 정용환은 30대로 선수생활의 전성기에 접어들어, 33경기 2골을 기록하며 대우에 우승을 안기며, k리그 mvp마저 차지하게 된다. 베스트 11, 모범상까지 3관왕을 차지하며 홍명보 이전 최고의 수비수임을 증명해냈다.
2.3.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다
92년에는 진로방해로 경고를 받으며 '''프로진출 이후 최초로''' 경고를 받기도 했다. 94년 35세의 나이로 월드컵 멤버로 선발되었으나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탈락하게 되었고 은퇴로 이어졌다. 실은 무리한 점프와 헤더 연습으로 이미 발목의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으나 이따금씩 부상으로 제외되던 것을 빼면 오랜 시간 아픔을 참고 경기해 오던 것이 더는 버티지 못하게 된 것이다.[5]
그런데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95년 프리미어리그 풀럼과의 계약이 거의 성사되었으나 워크 퍼밋으로 인해 계약이 불발되고, 해외 리그와의 계약이 불발되자 K리그에서 더 이룰 것도 없어서 그대로 은퇴했다고 한다.[6]
2.4. 플레이 스타일
홍명보 이전 대한민국 제1의 수비수.'''“우리가 평상시 운동장에서 뛰는 운동은 기본적인 근육밖에 발달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헬스는(= 근력운동은) 짧은 시간에 강한 운동을 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도 단련시킬 수 있기 때문에 부상당할 위험도 줄어듭니다. 근력운동을 하면서 가장 도움을 받은 것도 부상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죠. 몸의 탄력적인 부분. 그래서 바른 자세 같은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 2010년 정용환 감독 후원회 결성식날 인터뷰
꾸준하고 성실한 몸관리로 만든 탄력좋은 신체와 + 이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보는 선수였다고 한다. '''개인 훈련으로'''[7] 197cm 외국인 선수와의 공중경합에서 안 밀리는 특급 도약력을 갖췄으며 '''선견(先見), 선구적인'''[8] 근력운동(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유럽 선수들과도 겨룰 수 있는 탄탄한 몸을 만들어, 크지않은 신장(178cm)을 극복한 대표적인 노력형 인물.
'''틈틈히 적어둔 연구자료를[9] 활용'''해 남다른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당시 한국 수비의 대세였던 '''대인 방어능력이 가장 뛰어난 한국 선수'''로 평가받았다. 전문 센터백임에도 불구하고 프로 생활 11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레드카드와 자책골을 경험하지 않을 정도로 선을 넘지 않는 깔끔한 수비력을 보여주었다. 상술했다시피 경고를 처음 받은 게 프로 9년차인 1992년이었다고 하니.
신인선수 시절에는 '''"힘으로만 승부하는 선수라 오래 못갈 것"'''이라 악평 또는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몸을 키우면 달리기가 느려진다."는 선입견으로, 날렵하지만 유럽 선수들과의 몸싸움에는 경쟁력이 약한 선수들이 양산되고 있었기 때문. 국가대표 코치진들은 선견(先見)적으로 근력운동을 권장했으나, 아직 소수의견 수준이었던 관계로 정용환에 대한 오해는 한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의 오해와는 다르게, 발목 부상으로 국가대표를 그만두기 전까지 13년 동안 국가대표 부동의 수비수로 있었으며, K리그 베스트일레븐에 3회 선정되었다.
전 국가대표선수 김도근(1972년생)이 92년 올림픽대표 시절 태릉선수촌에서 정용환과 같은 방을 썼는데[10][11] , 술담배를 않고 적절한 휴식으로 몸을 관리하는 정 선수 모습이 매우 인상깊었다고. 참고로 김도근 역시 성실한 몸관리와 다양한 위치소화능력으로, 98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하였다.[12]
3.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에는 유소년 대표 상비군을 지도하고, '정용환 어린이 축구교실'을 만드는 등 주로 유소년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성인리그 지도자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2015년 6월 7일 위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56세. 2004년 만들어진 정용환 후원회는 그의 치료를 위해 행사를 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직후 돌아가셨다고. 현재는 장학회로 이름을 바꾼 뒤 장학사업과 부산지역 유소년 축구대회를 주최하고 있다. #
[1] 농구하시는 분들이 발뒷꿈치를 들었다놨다 하며 높이뛰기 능력을 기르는 것과 비슷하다[2] 상체는 체공시간과, 하체의 허벅지 근육은 뛰는 높이와 관련있다고 한다. 즉 대학 입학 전에도 꾸준히 상하체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얘기.[3] 한국은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야 다음 금메달을 차지한다.[4] 현대가 40실점으로 그 다음이었다.[5] 수술하러 일본에 간 정용환은 의사로부터 이 사람이 인간이냐는 질문을 들었다고 한다. 아킬레스건이 반 정도가 끊어진 상태로 말려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즉 이미 끊어진지는 오래 되었고, 참고 뛰다 보니 그것이 말려서 올라간 것. 정용환은 심각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참고 뛰었다고 한다.[6] 사실이라면 아마 겨울 이적 시장에서 급하게 베테랑 수비수를 찾은 것 같다.[7] 수험생이 혼자 공부한 과목에서 한국 상위 0.1 ~ 0.5% 안에 드는 실력을 갖춘 격이다.[8] 이 때만 해도 근력은 달리기 능력과 반비례 관계라는 식으로 저평가 받았다고 한다[9] 동료들과 지도자들의 견해를 기억해두었다가 따로 정리한 것들이었다고 한다.[10] 파주NFC가 완공된 건 2001년 11월이었고, 그 이전까지의 축구 국가대표팀은 연령대 가리지 않고 태릉선수촌에서 더부살이했다.[11] 띠동갑이었던 관계로 정 선수를 삼촌이라 불렀다고 한다[12] 히딩크 감독의 부름도 받았지만, 역시 멀티플레이어로 97년 국내 MVP 선정 경력의 경쟁자 유상철에게 밀려 02년 대회에는 나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