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

 


박경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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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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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MVP
1987년

1988년

1989년
정해원
(대우 로얄즈)

박경훈
(포항제철 아톰즈)

노수진
(유공 코끼리)
[image] 올해의 감독상
2009년

2010년

2011년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박경훈
(제주 유나이티드)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198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최순호
FW
이태호
FW
백종철
MF
박창선
MF
허정무
MF
조영증
DF
정용환
DF
박경훈
DF
박성화
DF
정종수
GK
오연교
1987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최상국
FW
정해원
FW
김주성
MF
김삼수
MF
노수진
MF
이흥실
DF
구상범
DF
최기봉
DF
정용환
DF
박경훈
GK
김풍주



대한민국의 축구감독
[image]
이름
박경훈
朴景勲 | Park Kyung-Hun
출생
1961년 1월 19일 (63세)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image] 대한민국
직업
축구선수(수비수 / 은퇴)
축구감독
교수
소속
선수
포항제철 돌핀스/포항제철 아톰즈 (1984~1992)
예딩 FC (1993~1994)
감독
전남 드래곤즈(1994~1996 / 수석 코치)
청구고등학교(1996~2000 )
부산 아이콘스(2000~2002 / 코치)
대한민국 U-23 대표팀(2003~2004 / 코치)
대한민국 U-17 대표팀(2004~2007)
제주 유나이티드(2009~2014)
성남 FC(2016 / 전력강화위원)
성남 FC(2017)
기타
전주대학교 교수
국가대표
94경기 1골[1](대한민국)
병역
병역특례[2]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프로입단 전
2.2. 포항제철 시절
2.3. MVP 반납사건
2.4. 대표팀
2.5. 은퇴
3. 지도자 경력
3.1. 코치 경력
3.2. 대한민국 U-17 대표팀 감독
3.3.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
3.4. 성남 FC 감독
4. 행정가 경력
5. 패셔니스타
6. 이야깃거리


1. 개요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감독, 교수이다. 선수 시절, 한국 축구 최초의 황금 세대였던 1986년 월드컵 멤버 중 한 명이었으며 한국 축구와 K리그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특히, 우라나라 풀백 중 최초로 오버래핑 능력을 장착하여 '오버래핑의 창시자'라는 별명이 붙는 등 개인 능력 뿐만 아니라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훌륭했던 선수였다. 은퇴 이후에는 제주 유나이티드성남 FC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13년, 프로축구연맹이 선정한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에 선정되었다.

2. 선수 경력


포항 스틸러스의 레전드 이자 포항 스틸러스 초대 명예의 전당 헌액자.

2.1. 프로입단 전


서울 출신으로 본래 미술학도를 꿈꾸었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수유중학교 졸업 후 미술의 꿈을 포기하고 놀던 중, 당시 실업축구 팀 포항제철(現 포항 스틸러스)의 감독을 맡고 있던 함흥기의 스카웃으로 축구 명문인 대구 청구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축구를 시작했다. 청구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포항제철로 가기로 했었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한양대학교에 진학, 이 때부터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2.2. 포항제철 시절


1984년 본격적으로 프로로 전환한 포항제철에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포항제철에서는 9년 동안 124경기 4골의 기록을 올리며 팀의 3회 우승을 이끌었다.[3]

2.3. MVP 반납사건


1988년 서울 올림픽과 대통령배의 국대축구 열기로 뜨거울 때쯤 찬밥 신세인 K리그팀들는 여느때처럼 대표팀에 스타급 선수들을 보내고 있었다. 박경훈과 최상국이 차출되고 주전들의 부상으로 신음하던 포항은 2년차 공격수 이기근의 눈부신 활약으로 조기에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이기근은 23경기에 출전하여 12골 1도움을 올려 득점왕을 차지했고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수였기에 MVP 후보 영순위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축구위원회가 선정한 MVP는 반시즌 밖에 뛰질 못 한 박경훈이었다. 이기근과 박경훈, 팀 관계자까지 모두 당황하게 만든 이 결정에 박경훈은 MVP 수상을 거부했고 시상식에도 불참했다. 하지만 수상자는 결국 바뀌지 않았고 MVP 트로피는 포철 팀을 통해 박경훈에게 전달되었다.

2.4. 대표팀


대표팀은 1980년부터 선발되어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 참가하여 전 경기에 출전했고 1988 서울 올림픽에도 출전했다.[4]
선수시절 포지션은 오른쪽 윙백. 청구고 동기였던 전 대구 FC 감독 와 함께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른 선수 중 하나였다. 동 시기에 국가대표팀에서 같이 활약했던 현 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 최강희와 포지션이 겹치는데, 최강희 감독이 수비적인 옵션이라면 박경훈 감독은 좀 더 공격적인 옵션으로 기용되었고 최강희 감독이 센터백, 박경훈 감독이 윙백 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동시에 기용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황선홍 감독이 물러난 이후 포항팬들 사이에서 단골로 차기 감독 후보로 박경훈을 꼽지만 문제는 프런트가 막장인지라...(...)

2.5. 은퇴


국내 은퇴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가 있는 동안 세미프로인 7부 리그[5] 예딩 FC[6]에서 조기축구하는 정도로 축구를 했고 FA컵에도 출전했었다.[7] 참고로 예딩 FC 역사상 전무후무한 월드컵 출전경험 선수.(...)

3. 지도자 경력



3.1. 코치 경력


영국 유학 도중 1994년에 K리그에 새로 창단한 전남 드래곤즈의 초대 감독인 정병탁 감독으로부터 수석코치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아 1년 반의 짧은 유학 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복귀하며 지도자로 데뷔한다. 하지만 첫 지도자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이후 모교인 청구고등학교 감독, 부산 아이콘스 코치,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코치 등을 거치다가 2004년에 17세 이하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지도자 박경훈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3.2. 대한민국 U-17 대표팀 감독


특히 2007년에 국내에서 열린 FIFA U-17 월드컵에서 홈인데도 불구하고 조별예선을 통과하지 못하며 기대에 못 미친 결과가 나오자 부정적인 면에서 이름이 알려진 점이 컸다.[8][9] 이후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사임하고 2008년부터 전주대학교 축구학과 교수로 정식 임용되어 축구 이론에 대해 공부를 했다.
여담으로 이때 전주대학교 축구학과 교수시절이 자신의 축구관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박경훈 감독이 얘기한적이 있다.

3.3.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2008년 10월 30일, 제주 유나이티드가 성적 부진을 이유로 브라질 출신의 알툴 베르나르지스 감독을 해임하고 박경훈을 감독으로 선임한다.
하지만 알툴 감독 시절에 제주는 포항에 8:1 대패를 당할 정도로 팀이 약체인 상태라 팀을 끌어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고, 결국 2009년에는 15개 팀 중 14위에 머무르며 프로 감독 데뷔 시즌을 마친다.
제주 유나이티드라는 팀이 제주특별자치도로 연고를 옮긴 이후로 워낙에 그저 그런 팀이었고, 박경훈 감독도 지도자로 데뷔한 이후 특기할 만한 성과를 보여 준 적이 별로 없었던 지도자이기에 K리그 팬들 내에서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장이 취임하고 이 사장에게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받아 중국으로 떠났던 김은중을 불러오고 수원에서 벤치만 달구던 배기종, 박현범 등 알토란 선수들을 영입하며 팀을 새롭게 만든 결과, 2010년 K리그 정규리그 2위, 포스트시즌 2위의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이 한 시즌으로 K리그 팬들에게 명장의 반열에 거론되는 감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2011 시즌 역시 중반까지 리그 3~5위를 오가며 이전까지 약팀이던 제주를 확실히 6강권의 강팀으로 변모시켰다.
조광래 감독의 해임 이후 신임 대표팀 감독 후보로 국내 감독들 중 최강희, 신태용 감독과 함께 거론되었으나, 최강희 감독이 선임되었다.
2012 시즌을 앞두고 높은 점유율을 바탕으로 공을 점유하며 서서히 상대를 압박해, 한 번의 킬 패스에 이은 슈팅으로 득점을 노리는 방식인 방울뱀 축구(...)[10]라며 홍보를 했으나 인지도는 그다지 신통찮은 듯. 방울뱀 축구의 영향을 받은 제주 선수들은 빠른 패스로 상대를 압박하고 좌·우 공격수들이 수비 뒤쪽으로 침투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으며, 7월까지 4~5위권을 계속 유지했었다.
청대 시절부터 눈여겨본 송진형을 데려오고 전술에 짜임새가 생기면서 제주가 더욱 강해졌었다는게 전문가들의 의견.
또한 관중 수도 증가했었다.
2013년에는 청대에서 함께했던 윤빛가람을 성남에서 불러들였으나 그 해에는 예년만 못한 경기력을 보이며 결국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졌고, 전체 9위(하위스플릿 2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박경훈 감독에 대한 팬들의 신뢰도 많이 떨어졌었던 상황. 강경 팬들 사이에서는 경질론까지 나왔었다.
박경훈이 구사한 방울뱀 축구의 경우 송진형-권순형-윤빛가람이 중원을 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세 선수 모두 비슷한 스타일이였다. 개인기가 좋아 공을 잘 지키며, 패스 능력도 준수해 점유율 축구를 하는데 최적화됐었으나, 상대적으로 수비력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드러냈으며, 이에 2013시즌에는 활동량이 많은 오승범을 기용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점유율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2014 시즌 방울뱀 축구처럼 점유율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선수 개개인의 장점을 살리는데 초점을 맞춘 오케스트라 축구'를 구사하며 상위 스플릿에 재등극했다.
오케스트라 축구의 경우 확실한 색깔이 있는 선수들을 중원에 배치했으며, 수비력이 빼어난 에스티벤을 허리에 포진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에스티벤은 울산 현대 시절 울산 특유의 철퇴축구를 후방에서 보호하던 방패 역할이었다. 그렇기에 수비력은 좋았지만 공을 점유하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이에 박경훈은 송진형-윤빛가람-에스티벤으로 2014시즌 팀의 중원 조합을 갖췄고, 기술이 좋은 두 선수의 장점을 살려주기 위해 방패 에스티벤을 둔 것이며, 자연스럽게 점유율은 떨어졌지만, 경기에서 중원의 안정감은 올라갔고, 윤빛가람과 송진형은 에스티벤 덕에 수비 부담을 덜고 더욱 공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받았다
시즌을 마친 후 계약 기간 1년이 남은 시점에서 2014년 12월 3일 감독직 사임을 발표하고 조성환 2군 감독에게 사령탑을 넘겼다. 이미 14년 시즌부터 사퇴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며, 결국 전주대학교에 복직했다.
그리고, 2016년 7월 21일. 성남 FC의 전력강화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12월 1일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3.4. 성남 FC 감독


성남에 부임해 스페인 전지훈련에 각지의 외국인 선수들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헤비메탈 축구로 더블(챌린지 우승&FA컵 우승)을 기록하겠다'며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부상자가 13명이나 나오고, 비도시치, 네코 등의 용병들이 대부분 제몫을 못해주는 등 불운이 재개되었다. 성남의 중량급 선수들이 입대와 이적으로 팀을 빠져나가면서 신인과 이적생들로 스쿼드가 보충된 것도 한 이유긴 하지만, 6라운드까지 2승 4무, FA컵 3라운드(수원FC 상대 승부차기 승리)까지 포함하면 3무 4패에 단 2득점 7실점이라는 참담한 성적을 받아들고 있다.
그나마 6라운드에 황의조가 팀에 오랜만의 필드골을 안기긴 했지만, 적지 않은 팬들이 '대체 헤비메탈 축구가 뭐냐' '언제 승리할 거냐'며 성토하게 된다. 상대가 무난했던 FA컵 32강전(청주 시티 FC)과 자신의 200경기째를 맞이한 안산 원정에서 간신히 승리하며 한숨 돌리는가 싶더니, 두바퀴째를 맞이하는 10라운드 홈 이랜드 경기에서 여지없는 졸전 끝에 0:2패, 다시금 꼴찌(승점 6: 1-3-6)를 찍었다. 이제 5월을 어떻게 잡아가느냐가 감독 인생을 좌우할 지도 모르게 되었다.
결국 박경훈은 자신이 내세웠던 전방 압박과 빠른 전환, 스피드를 가진 강렬한 축구인 헤비메탈 축구를 버리고 수비 안정화를 꾀했으며, 확실히 오르슐리치와 연재운이라는 강력한 중앙수비와 이후권, 안상현이라는 두터운 수미를 바탕으로 수비를 많이 안정화 시키며 기적같은 5ㆍ6월을 보내며 팀을 5위까지 끌어올렸으며, 이후에도 중상위권 승점관리를 잘해놔서 승강 플레이오프권에도 안정적으로 정착시켰지만, 득점력이 상당히 빈곤해졌으며, 시즌 중반 팀의 프랜차이즈스타였던 황의조가 떠나면서 이를 메울 자원으로 야심차게 영입한 김동찬 역시 대전 시절만큼의 화끈한 득점력을 보이지는 못하였었다.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패스가 옆으로, 뒤로 무의미하게 향할 뿐, 좀처럼 전진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공격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였다.
뭐가 어찌됐든 가까스로 리그 4위를 기록하며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아산 무궁화를 상대로 성남의 수비는 단순한 공격 패턴에 볼 소유를 계속 상대에게 내준 전술적 패착이 수비 불안으로 이어지며 끈끈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박성호를 노린 단순한 공격 루트가 차단되면 오히려 아산의 역습과 다양한 패턴에 쉴 새 없이 두드려 맞았고, 결국 1:0으로 패하며 승격은 다음해를 기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11월 27일 전격 경질되었다. 표면상 성남 스쿼드가 좋긴 했으나 시즌초반부터 부상자가 속출했고, 외국인 선수들이 줄줄히 실패하는 등 불운이 많았고 이제 부임 1년차에, 줄어든 시의 지원에도 어쨌든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 등 1년 정도 더 기회를 줄 여지가 있었음에도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한때 시민구단의 모범이라 자처하던 성남도 갈수록 여느 시민구단과 다를거 없어져가는 모습이다.

4. 행정가 경력


2021년 1월 19일, 울산 현대 감독으로 지도자에 복귀한 홍명보 전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의 후임으로 선임되었다. 1월 27일에 열릴 대한축구협회 대의원 총회의 승인을 거치면 정식 취임하게 된다.

5. 패셔니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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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가 공인하는 K리그 감독 선수 포함 최고의 패셔니스타다. 172cm의 축구선수로서는 단신에 속하지만 간지폭발의 백발, 군더더기 없는 몸매로 인한 수트간지. K리그 양대 패셔니스타로 꼽히는 신태용 감독과 비교하자면, 비교적 나이가 어려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과감한 패션을 시도하지 못하는 신태용 감독과 달리 박경훈 감독의 패션에는 거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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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주임원사 포스.
[image] [image]
신태용 감독과 함께 팬서비스에 적극적인 감독이라 김보성의리 티셔츠 패러디나 강마에의 지휘복 복장도 매우 멋지게 소화한다. K리그의 진정한 패셔니스타. 오오오!!

6. 이야깃거리


  • 상당한 애연가라는 루머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평상시에도 술과 담배는 멀리한다.
  • 어린 시절 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선수 시절에도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렸고 2008년 전주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한 이후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 했으나 1년도 안 돼서 다시 축구판에 뛰어들게 되어 다시 미뤄 두었다고. 대신 지인과 함께 작은 미술관을 만들어 운영 중이고, 나중에는 자신의 작품도 전시하는 게 꿈이라고 한다.
  • 감독 생활을 그만둔 뒤, SBS 객원해설로 2015년 AFC 아시안컵 중계진에 합류했다. 첫 중계가 우즈베키스탄 경기. 해설위원이 익숙지 않아서 인지 결국 결승까지도 말을 잘 못한다는 평이 많았다. 네이버에서 특히 욕을 먹는 것을 보아 이곳에는 박문성 팬이 많아서 더 욕을 먹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대체적으로는 표현을 잘 못 하지만, 역시 한 달 전까지 현장에 있던 사람이라 은근히 직구를 잘 던지다는 평. 아무래도 꾸준히 중계를 해 온 전문 해설가와 동일선상에 두기에 가혹하기는 하다.


[1] 대한축구협회 기록실에는 올드 선수들의 기록이 보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기록은 자료마다 다르게 명시하고 있다. 한국어와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88경기로, 어디에서는 92경기로..[2]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3] 이러한 공로로 포항 스틸러스 구단 명예의 전당 최초 13인에 포함되었다.[4] 당시 올림픽 축구에는 23세 이하 + 와일드 카드 제도가 없었다. 나이 제한은 1992년, 와일드 카드는 1996년부터 도입.[5] Isthmian League Premier Division. 잉글랜드 축구 시스템은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와 풋볼리그(2~4부)까지는 완전한 프로 리그이고 5~6부는 전국 기반 세미프로 리그, 7부 이하부터는 지역별 리그이다.[6] 2007년 이후로는 하예스 FC와 합병되어서 하예스 & 예딩 FC.[7] 최초의 한국인 FA컵 출전자가 되시겠다. 한국인 1호 FA컵 선수는 박지성이영표도 아닌 박경훈 이 사람이란 말.[8] 이 때 박경훈 감독의 미래가 얼마나 암울했냐 하면, 축구계 안팎에서 다시는 감독을 못 할 것이라고 예상했었고 박경훈 감독도 '다시는'까지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감독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전주대학교의 교수로 가게 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9]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당시 주축 멤버들이 2009 U-20 월드컵 8강, 2012 런던 올림픽 축구 동메달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10] 방울뱀이 먹이를 잡을 때 서서히 조이면서 한 번의 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한다는데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