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철

 


'''윤상철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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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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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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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득점왕'''
'''1989년'''

'''1990년'''

'''1991년'''
조긍연
(포항제철 아톰즈)

'''윤상철'''
'''(럭키금성 황소)'''

이기근
(포항제철 아톰즈)
[image] '''도움왕'''
'''1992년'''

'''1993년'''

'''1994년'''
신동철
(대우 로얄즈)

'''윤상철'''
'''(LG 치타스)'''

고정운
(일화 천마)
[image] '''득점왕'''
'''1993년'''

'''1994년'''

'''1995년'''
차상해
(포항제철 아톰즈)

'''윤상철'''
'''(LG 치타스)'''

노상래
(전남 드래곤즈)
'''198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윤상철'''
FW
조긍연
FW
노수진
MF
이흥실
MF
조덕제
MF
강재순
DF
임종헌
DF
조윤환
DF
최윤겸
DF
이영익
GK
차상광
'''1990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윤상철'''
FW
이태호
FW
송주석
MF
최진한
MF
이흥실
MF
최대식
DF
임종헌
DF
최영준
DF
최태진
DF
이재희
GK
유대순
'''1993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차상해
FW
'''윤상철'''
MF
김판근
MF
신태용
MF
김동해
MF
이상윤
MF
김봉길
DF
최영일
DF
이종화
DF
유동관
GK
사리체프
'''199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윤상철'''
FW
라데
FW
김경래
MF
신태용
MF
고정운
MF
황보관
DF
안익수
DF
유상철
DF
홍명보
DF
허기태
GK
사리체프




<colbgcolor=#35c5f0> '''평택 시티즌 FC 감독 '''
'''Pyeongtaek Citizen FC'''
''' 이름 '''
'''윤상철'''
'''尹相喆 | Yoon Sang-Chul'''
''' 출생 '''
1965년 6월 14일 (58세)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image]
'''학력 '''
숭곡초 - 경신중 - 경신고 - 건국대
''' 신체 '''
178cm
''' 직업 '''
축구선수(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행정가
''' 별명 '''
얼룩 치타
''' 소속 '''
<colbgcolor=#35c5f0> ''' 선수 '''
'''럭키금성 황소/안양 LG 치타스 (1988~1997)'''
마르코니 스텔리언스 (1998)
뉴캐슬 브레이커스 (1999)
''' 지도자 '''
경신고등학교 (2004~2012)
평택 시티즌 FC (2019~)
''' 기타 '''
평택 시티즌 FC (2017~ / 대표 이사)
''' 국가대표 '''
1경기
1. 소개
2. 선수 시절
2.1. 프로 데뷔 전
3. 지도자
4. 플레이 스타일
5. 수상
6. 이야깃거리

[clearfix]

1. 소개


럭키금성 황소, LG 치타스, 안양 LG 치타스에서 활동했던 전직 축구 선수이자 현재 K3리그 참가팀 평택 시티즌 FC의 대표이사직과 감독을 맡고있다. 1988년부터 1997년까지 오직 FC 서울에서만 300경기를 뛴 레전드이지만 선수생활 막바지엔 구단에 팽당해 불운했다.

2. 선수 시절


[image]

2.1. 프로 데뷔 전


공격형 미드필더와 윙으로 뛰었는데 주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이때부터 득점감각이 빼어나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2.2. 럭키금성 황소 시절


1988년 드래프트 1순위로 럭키금성에 입단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고재욱은 미드필더로 놓기에는 아까웠던 윤상철의 득점감각을 감안해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시켰다. 첫 시즌 18경기 4골을 넣어 프로무대에 연착륙에 성공했다. 2년차인 1989년 리그 17골을 성공시켜 스타덤에 올랐다. 3년차인 1990년 12골로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럭키금성의 마지막 시즌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2.3. LG 치타스 시절


준우승을 차지했던 1993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하위권을 맴돌던 LG 치타스에서 유일하게 믿을만한 골게터였으며 특히 1994년 21골을 터뜨리면서 두번째 득점왕을 차지했다.

2.4. 안양 LG 치타스 시절


[image]
두번째 득점왕 이후 잠시 주춤하던 윤상철은 1996시즌 다시금 힘을 내면서 14골을 득점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이듬해 1997년 부진했으나 윤상철의 득점 주기를 보면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LG는 리빌딩을 선언하면서 윤상철과의 재계약을 포기했고 '''임의탈퇴'''를 걸었다.

3. 지도자


안양 LG 퇴단 이후 30대 초반으로 은퇴하기엔 이른 나이였던 윤상철은 선수 생활을 걸고 호주로 날아갔으며 그 곳에서 2년을 뛰고 축구화를 벗었다. 이후 차범근 축구교실 코치와 경신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았다.
은퇴 후에도 자신을 내쫓다 시피한 구단임에도 애정을 보이고 있으며 2007년 FC 서울 시축행사에 피아퐁과 참여했으며 우리동네 예체능에서 열린 FC서울 창단 30주년 맞이 기념 축구경기에 참여했으며 2016 현대오일뱅크 K리그 개막 전 인터뷰에서 FC서울의 우승을 기원했다.관련 기사
2016년 기사에 따르면 경신고 감독직에서 내려온 후 K3리그 신생팀 평택 지-스마트 FC (현 평택 시티즌 FC) 감독직을 수락하였다고 한다.관련 기사
하지만 K3리그 참가팀의 임원을 지도자로 등록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벤치에는 기술고문인 조정호 감독이 대신 앉아있었다.
창단 첫해 리그 2위를 기록하며 K3리그 베이직에서 K3리그 어드밴스로 승격하였다.
2019년부터 평택 시티즌 FC 감독으로 공식적으로 등록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PC통신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등등 거대 커뮤니티에서 K리그를 씹어먹는 윤상철을 대표로 뽑아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음에도 그는 역대 어느 대표팀 감독에게도 철저히 외면당했는데 이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당시 한국에선 활용하기 힘든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체격이 큰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발이 느렸고 경합능력도 떨어져서 서정원처럼 스피드로 수비수를 제치거나 최용수김도훈처럼 공중볼 척척 따내고 여차하면 피지컬로 상대 수비진을 비집고 들어가 골문을 열어젖히는 플레이는 보여주지 못했다. 활동폭도 좁아 페널티 박스 밖에서는 영향력이 떨어졌다. 눈이 즐거운 개인기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통산 101골 넘게 집어 넣을 수 있었던 건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의 득점감각과 슈팅센스가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슈팅파워는 평범한데 골키퍼와 수비수의 허를 찌르며 툭 차 넣는 타이밍이 예술적이었고 수비진 교란과 오프사이드 트랩 무력화에도 능했다.[1] 피지컬로 밀어붙이던 시절에 기교로 승부했다는 김현석보다도 더 유니크한 타입이었다.
이런 타입은 그 당시 한국 대표팀에선 써먹을 방법이 아예 없었고 경쟁자들은 너무 강했다. 당시 한국은 스트라이커는 무조건 피지컬 좋고, 발이 빨라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지도자들 일색인 축구 후진국 이었다. 더군더나 황선홍, 김도훈, 최용수라는 역대급 타겟형 스트라이커 3명이 날개를 편 시점이었다. 요즘 태어났으면 보다 체계적으로 교육받아 부족한 부분을 좀 더 끌어올리고, 전술적으로 맞춰서 활용이 가능했겠지만 90년대에는 어느것도 무리였다.

5. 수상


  • 개인 수상
    • K리그 득점상 (2회): 1990, 1994
    • K리그 도움상 (1회): 1993
    • K리그 베스트 11 (4회) : 1989, 1990, 1993, 1994
    • K리그 감투상 (1회) : 1993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 우승 (1): 1988
  • K리그1
    • 우승 (1): 1990
    • 준우승 (2): 1989, 1993
    • 4위 (2): 1988, 1992
  • 리그컵
    • 준우승 (2): 1992, 1994
  • FA컵
    • 3위 (1): 1997

6. 이야깃거리


  • 데뷔시즌인 1988년부터 1997년까지 럭키금성~LG 치타스~안양 LG 치타스에서 8번만 달고 뛰었으나 88시즌과 93시즌에 각각 한경기씩 11번을 달고 뛴 적이 있다.
  • 위에서 언급했듯이 K리그에서는 레전드급 활약을 펼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팀과는 지독하게 인연이 없었다. 국가대표로서는 1992년 10월 21일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있었던 아랍에미리트와의 평가전에 단 1경기 나온것이 전부이다.
  • FC 서울 최다 득점 기록 2위에 랭크될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펼친 선수지만, 국가대표 활약상이 없고 서울연고공동화 정책으로 연고이전/복귀 과정을 거쳐야 했던 서울이라 인지도가 낮다. 라이트팬들은 까마득한 옛날 선수에 국가대표 활약상도 전무하니 기억이 없고, 코어 팬덤은 큼직한 물갈이만 2번해 90년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2]
  • 한 팀의 감독직과 대표이사직을 동시에 맡고 있는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1] 뒷날 인터뷰에서 제일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수는 일화의 신의손이었다고 밝혔다. 페인트 동작에 속지않고 끝까지 버텨서 정말 골치아팠고, 그가 없었으면 100골 달성이 훨씬 빨라졌을거란 소감을 남겼다.[2] 서울연고공동화정책으로 서울에서 쫒겨난게 96년. 윤상철이 서울을 떠나기 바로 직전해다. 윤상철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팬들 상당수가 이때 날아갔다. 남아있던 사람들, 단 2시즌이나마 윤상철이 뛰는걸 본 사람들은 2004년 서울 연고복귀때 또 대거 이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