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녕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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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63대 내무부 장관
조해녕
曺海寧 | Cho Hae-nyoung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43년 11월 4일 (80세)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 덕촌동
(現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덕촌리)#
'''본관'''
창녕 조씨
'''재임기간'''
제29대 영양군수
1980년 3월 3일 ~ 1981년 1월 12일
제26대 금릉군수
1981년 1월 12일 ~ 1981년 12월 12일
제8대 창원시장
1988년 6월 4일 ~ 1988년 12월 31일
제9대 대구직할시장
1993년 12월 28일 ~ 1994년 12월 31일
제9대 대구광역시장
1995년 1월 1일 ~ 1995년 3월 31일
제31대 총무처 장관
1996년 1월 31일 ~ 1996년 12월 19일
제63대 내무부 장관
1997년 8월 5일 ~ 1998년 3월 3일
제13대 대구광역시장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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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배우자'''
김옥희
'''자녀'''
슬하 1남 1녀
'''학력'''
경북고등학교 (졸업 / 42회)
서울대학교 (행정학 / 학사 · 석사)
'''병역'''
면제 (입영기피, 고령)
'''경력'''
제10회 행정고시 합격
경상북도 영양군수
경상북도 금릉군수
대구직할시청 기획관리실장
경상남도 창원시장
내무부 지방자치실시기획단장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
내무부 지방행정국장
내무부 기획관리실장
9대 대구직할시장
총무처 장관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회장
내무부 장관
한국자원봉사포럼 회장
11대 대구광역시장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학교법인 영광학원 이사장[4]

1. 개요
2. 생애
3. 선거이력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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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63대 내무부 장관.

2. 생애


1943년 경상북도 경산군 와촌면 덕촌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42회)[1], 서울대학교 행정학과, 동 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산하에서 근무하며 관선 영양군수, 금릉군수, 창원시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영삼 정부 때는 관선 대구직할시장, 총무처(현 행정자치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2]하였으나 무소속 문희갑 후보에 밀려 '''4위'''로 낙선했다. 당시 문민정부의 부산 편애론이 대구에 팽배했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가 선거를 2개월 앞두고 발생해 민심이 좋지 못했던 것이 그 원인이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무소속 이재용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재임 당시 2003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올림픽 유치를 추진하기도 했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재선이 유력했으나, 임기 중 일어났던 대구 지하철 참사의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현실적 이유[3]로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언했다.
2008년 학교법인 영광학원(대구대학교)의 이사장으로 피선되었다. 2009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에 임명되었다. 2011년 7월부터 2015년 2월까지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행보로 인해서인지 전직 민선 시장 중 평이 가장 좋지 않다.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장)

175,749 (16.87%)
낙선 (4위)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장)

'''452,943 (61.18%)'''
'''당선 (1위)'''
'''초선'''

4. 둘러보기



[1] 이지두 해군 중장, 이명재 검찰총장과 동기다.[2] 당초 민자당에서는 이상희 전 대구직할시장을 영입하거나 정호용 의원을 출마시키는 방안을 고려했다.[3]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에 뒷수습을 그야말로 엉망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