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 개요
2002년 6월 13일 치러진 한국의 전국동시지방선거로 34,744,232명 유권자 중에서 16,946,236명이 투표함에 따라 투표율은 48.8%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6년 후인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46.1%'''로 깰 때까지 국내에서 전국단위 선거 중 최저 투표율이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진행 중의 선거'''라 투표율이 매우 저조했다. (지방선거 다음날이 한국-포르투갈 경기) 심지어 선거 다음날 방송 3사 메인뉴스(KBS 뉴스 9, MBC 뉴스데스크, SBS 8 뉴스)도 지방선거 소식은 뒷전으로 밀려나서 한국이 16강에 갔다는 소식이 먼저였고, 심지어 일본이 동시에 16강 갔다는 꼭지가 나온 뒤에야 지방선거 소식이 배치될 정도였다. 물론 그 당시에 한국이 2라운드에 진출한 것 자체가 엄청난 뉴스거리였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애초 2002년 7월 1일에 새 자치단체 임기가 출발하는데 불과 2주 전인 6월 13일에 치러진 것도 월드컵 탓이었다. 원래 지방선거일로 계획 된 5월 31일[2] 이 월드컵 개막으로 임시공휴일 지정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3][4] 게다가 한 주 뒤인 6월 6일이 현충일이어서 그 다음주까지 밀렸다.[5][6]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외신에서 한국에 많은 특파원을 내보냈을 때이기 때문에 한국 지방선거 얘기는 세계 각국에 알려지기는 했다는 것이다.
2. 진행 과정
사실 선거운동 초반만 해도 노풍이 강하게 불면서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10~20% 이상의 격차로 승리하는 여론조사가 많았기에 새천년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고, 선거 결과를 자신에 대한 재신임으로 생각하겠다는 후보 발언도 있었다. 한나라당은 당초 텃밭으로 여겨졌던 울산시장도 위태위태했던 상황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선거를 치러야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거 운동 중후반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걸이 구속 수감된데다가 노풍이 점차 주춤해지면서 한나라당이 선거초에 비해 상승세를 보이면서 1당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고, 당초 민주당 우세지역으로 예측되었던 서울과 경기가 경합으로 돌아서는 등 민주당 우세지역은 점차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월드컵에 관심이 쏠리면서...
3. 투표자 조사
MBC의 경우 제주지사 선거만 유일하게 예측조사 결과와 실제 당선자가 다르게 나왔다. SBS는 16곳의 결과를 모두 맞췄으며 KBS는 한나라당 11, 민주당 3, 자민련 1 제주도를 경합으로 분류했다.
4. 선거 결과
결국 '''여당 새천년민주당의 참패. 한나라당의 대승으로 이어졌다.'''
2002년 12월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기준으로 한나라당이 11곳, 새천년민주당이 4곳, 자유민주연합이 1곳을 각각 차지하면서 한나라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특히 한나라당은 '''제6공화국 처음으로 한 정당이 전국 단위 선거에서 과반 득표를 하는 기록을 세웠고'''[7] 압승의 정도도 1991년 지방선거에서 투표율 저조와 야권분열로 압승했던 민주자유당보다도 더 강세였다.
새천년민주당이 참패하는 대신 '''민주노동당이 대약진'''한 선거였다. 수도권 지역에서는 부진했지만, 부산광역시[8] 와 울산광역시에서 선거비용 전액 보전 기준인 15%를 넘었고, 특히 울산광역시는 '''한나라당 후보와 민주노동당 후보가 그야말로 박빙의 대결'''을 펼치는데, 나중에 서술. 울산은 이 선거의 하이라이트였다.
또한 호남 지역에서도 5%대 득표율을 올리는 등의 선전을 보였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권영길 후보의 선전까지 더해서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 드디어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새천년민주당으로서는 경선 이변으로 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후보의 "노풍"의 여세를 몰아 젊은 후보를 중심으로 수도권에서 승리하겠다는 복안을 내세웠지만 정작 지방선거 패배로 노풍이 위태롭게 되고 정몽준 후보가 부상하며 여론조사 3위로 추락하고 만다. 하지만 이 패배가 만들어 낸 "몽풍"과 단일화, 그리고 뒤이은 나비효과는 정말로 굉장한 것이었다(...) 반면 한나라당은 지방선거 승리의 기운을 타고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도 함께 치솟으며 정권교체를 노렸지만, 노무현 - 정몽준 단일화로 '''노무현이 대역전승'''하여 이회창은 다시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된다.
4.1. 광역자치단체장
한나라당은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 대전광역시, 울산광역시,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11곳에서 당선되었다.
새천년민주당은 텃밭인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 제주도[9] 네 곳에서 승리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충청남도 한 곳을 건졌다.
민주노동당은 광역자치단체장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했지만 울산광역시에서 무려 43%를 얻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4.2. 기초자치단체장
227명을 뽑는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136명을 당선시켰고, 새천년민주당은 44명, 자유민주연합은 16명, 민주노동당은 2명, 무소속이 29명 당선되었다.
4.3. 지방의원
광역의회(시·도의회)의 정당 비례대표 의원을 직접투표로 선출하기 시작한 선거였다.[10][11] 이로서 민주노동당은 자민련을 넘는 7.89%의 득표를 올리며 서울, 경기, 강원, 전남북, 경남, 울산(각 1석)에서 광역의회 의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울산에서는 28.7%의 득표로 새천년민주당의 8.6%를 관광 태우며 비례대표 3석 가운데 1석을 차지했다.
4.3.1. 광역의원
680명을 뽑는 광역의원에서는 한나라당이 467석, 새천년민주당이 143석, 자유민주연합이 32석, 한국미래연합[12] 이 2석[13] , 민주노동당이 11석, 무소속이 26석을 건졌다.
그야말로 수도권에서 한나라당의 대약진. 서울에서는 지역구 의원 92명 가운데 10곳에서만 민주당이 승리했고, 비례의석 10석은 한나라 5(51.8%) : 민주 4(37.0%) : 민노 1(6.06%)로 나눠서 가졌다.[14]
4.3.2. 광역비례 합산 전국 득표율
위에서 서술했듯이 광역의회(시·도의회)의 정당별 비례대표 의원을 직접 선출하기 시작한 선거였다.[15][16] 전국 정당별 비례 득표는 다음과 같았다.
4.3.3. 기초의원
기초의원에서는 정당공천제도가 실시되지 않아 별다르게 작성할 것이 없다. 지역 유지들이 나와서 소선거구제 선거를 통해 알아서 당선되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재보궐선거를 할 때마다 지나치게 작은 선거구들이 난립하게 되었고, 결국 2006년에는 중선거구제를 실시하면서 정당 공천제도가 실시된 것.
5. 격전지
5.1.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구세대를 대변하는 보수정당과 신세대를 대표하는 민주당계 정당의 세대대결의 씨앗이 된 선거였다.[19]
서울특별시장 선거도 격전을 벌였다. 386의 대표주자 중 한 명이었던 새천년민주당 김민석[20] 과 한나라당 이명박[21] 후보가 나와서 뜨겁게 맞붙었다.
당시 김민석은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대세론을 형성한 이인제와 격차를 좁힐 정도로 전도유망한 정치인이었다. 다만 나이가 적어 대선출마는 포기했고, 원래는 중앙정치계에 계속 머물 계획이었지만 고건이 불출마를 선언하고 난 이후 서울시장선거 여론조사에서 유일하게 이명박을 앞지르는 후보가 본인이어서 출마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민석 캠프는 당시로선 낯선 개념인 '생활 정치'를 표방하며 승기를 잡는가 했지만 곳 민주당 지도부의 비리가 탄루되어 대세를 굳히지 못했다. 결국 9% 차이로 졌지만, 여타 수도권 후보들이 20%대 차이로 줄줄이 패배한 것을 볼 때 석패한 셈.
당시 여론조사 초반에서부터 오차범위 내로 나타나 치열한 경합이었고, 선거전에 돌입하면서부터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되자 판세는 더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었다. 이명박 후보는 '''청계천 복원공사와 중앙버스전용차로 제도 시행'''을 내놓으면서 분위기를 잡았고, 김민석 후보는 이에 질세라 강남 강북을 비교하며 '''강북지역 재개발'''을 하고 이에 따른 재원은 지방세법 개정을 통해 세원을 마련하자고 주장했다.기사1 기사2 기사3 또한 김민석 후보는 이명박 후보의 각종 의혹들을 끊임없이 제기하며 이명박 후보를 공격했다.
그런데 정작 선거날에는 월드컵 분위기에 밀려서 투표율이 서울시에선 45.7%밖에 안 나왔고(...) 특히 민주당 우세지역인 강북지역 투표율은 40% 초반대에 머무르는 등 김민석 후보한테 유리할 수 있는 요인이 전부 떨어져나가버리고(...) 결국 이명박 후보가 52% vs 43%로 승리하였다.
마이너한 이야기지만 진보계열에서는 "옥석논쟁"도 있었다. 청렴한 공무원 출신의 이문옥 민주노동당 후보와 김민석 새천년민주당 후보 가운데 누구를 지지해야하냐는 이야기인데, 키워의 달인 진중권 씨와 강준만 교수(당시 인물과 사상 편집자)가 제대로 맞붙었다. 물론 이문옥 후보의 실제 득표는 2.52%(8만8천표)에 불과했다.
사회당의 원용수 후보 역시 TV토론에 나와 민노당과의 차이점을 부각시켰는데, 이때 이명박 후보는 "저는 사회주의잡니다"라는 원 후보의 말에 "이 얼마나 좋습니까? 토론도 하고."라는 발언으로 받아쳤다. 원 후보는 역대 선거를 통틀어 '종북'이란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5.2. '''울산광역시'''
이 선거의 최대 '''하이라이트''', 16년 후에 치른 선거와 같이 울산광역시로 유이하게 관심이 쏠린 선거다.[22]
울산시청 공무원 출신 한나라당의 박맹우 후보와 노동변호사였던 민주노동당 송철호 후보간 맞대결이 펼쳐졌다. 4년전 제2회 지방선거에서 심완구(한나라당) vs 송철호(무소속) 대결의 재현. 박맹우 vs 송철호 대결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이번에도 울산에 후보조차 못 냈다!'''[23] 사회당이 후보를 내긴 했지만 3%대에서 못 벗어났으니 논외.
영남지역의 한나라당 지역 버프가 있는 박맹우 후보와 울산광역시 지역 특유의 범 현대가 노동조합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송철호 후보는 여론조사에서도 '''예측을 불허'''하는 팽팽한 접전을 계속했다. 박맹우 후보는 송철호 후보가 앞서고 있다고 평가했고, 송철호 후보는 박맹우 후보가 앞서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두 후보 역시 박빙의 대결이었음을 인정.기사 이 기사에서는 한나라당의 분위기만 나왔는데, 민주노동당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여론조사에선 좀 앞섰지만 월드컵 때문에 투표율이 안 나올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노당 측에서도 자기네들이 불리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여간 박맹우 후보는 태화강 재생사업, 송철호 후보는 KTX 경부고속선 울산역 유치를 공약으로 들고나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접전을 펼쳤다. 박맹우 후보는 송철호 후보가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모르는 귀족 변호사인데다 전라북도 출신이라며 지역감정까지 듬뿍 담아 공격했고, 송철호 후보는 박맹우 후보야말로 중앙정부 낙하산 후보고 울산에서는 5년밖에 일 안 한 인간이 울산에서 15년동안 일한 사람을 지역드립 치면서 욕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이라며 맞불을 놨다. 송 후보는 마지막 출마라는 주장도 했다. # 울산 시민들은 두번째 도전에 나선 송철호 후보가 좀 더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봤는데... # 5일전 분위기[24] # 1일 전 예측
6월 13일 당일 월드컵 분위기에 휩쓸리는 바람에 울산 투표율이 52.3%밖에 안 나왔다. 민주노동당의 텃밭이자 구청장 배출에 성공한 동구와 북구는 60%에 가까운 투표율이 나왔지만 당시 한나라당의 텃밭이였던[25] 울주군이 58%가 나와버렸고, 경합지였던 중구, 남구에서 50%를 밑도는 투표율이 나와서 박맹우의 득표율이 60% 가까이 나왔다.
결국 낮은 투표율로 인한 민노당 조직력 약화로 인해 박맹우 후보가 53.07% vs 43.61%로 송철호 후보를 크게 누르고 막판 대역전을 벌여 당선되었다. 관련기사1 관련기사2 진보진영은 그야말로 멘붕#.
사실 민노당의 뒷심 부족은 여러면에서 드러났는데, 이때 울산시의회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이 동구에서 3석 가운데 2석을 한나라당과 무소속에게 석패로 내주고, 북구에서도 역시 제법 큰 차이로 2곳을 내주며 간신히 동구, 북구에서 1석 씩만을 차지했다. 신생정당인 탓도 있었지만 여하간 4년 뒤보다 못한 결과였다(4년 뒤에는 동구에서 2석을 얻어 4석.).
여담으로 송철호 후보는 본래 소속은 민주당(1991년)으로, 14대 총선~16대 총선도 출마했었다(16대는 무소속).[26] 이 당시에는 PD계열이었다. 송 후보는 이 선거 낙선 이후 민주노동당 내에서 입지가 좁아지자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으로 들어갔고,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19대 총선에서도 민주통합당으로 울산 중구에 출마하였으나 37.5%를 득표하며 고배를 마셨다. 울산시장 선거에 다시 나올 생각은 없는 듯 하고, 국회의원에 지속적으로 도전하고 있지만 2010년대 들어 울산에서 하도 야당 득표가 좋지 않아서 가끔씩 시장 감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중.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리벤지 매치가 벌어졌다. 그런데 결과는 10% 차이로 송철호 후보가 또 고배를 마셔야 했다. 20대 총선서도 또 고배를 마셨다. 그러다가 2018년 드디어 10% 이상 차이로 울산광역시장에 당선되었다.[27]
5.3. 제주도
전직 도지사였던 신구범 한나라당 후보와 현직 도지사였던 우근민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나와서 박빙의 경합을 펼쳤다. 다른 지역 개표가 거의 끝난 6월 14일 오전에도 개표가 안 끝나고 박빙의 경합을 펼쳤는데, 제주도가 경합인 건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부터 '''매번 그래왔던지라(...)''' 박빙의 경합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주목은 받지 못했다. 특히 울산광역시가 있어서(...)
하여간 우근민 후보가 신구범 후보를 아슬아슬하게 누르고 당선되었다. 기초단체장으로는 제주시장에 무소속 김태환(단독 출마), 북제주군은 한나라당 신철주, 서귀포시는 무소속 강상주(민주당 이영두를 꺾음), 남제주군은 새천년민주당 강기권(단독 출마) 후보가 당선 되었다.
이 선거는 제주시장과 서귀포시장을 선거로 뽑은 마지막 선거였다. 2006년부터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함에 따라 제주시와 서귀포시,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을 모두 폐지하고 통합 제주시와 통합 서귀포시를 설치하였는데 두 시 모두 행정시로 설치됨에 따라 시장 역시 임명직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시의회 역시 행정시 전환과 함께 해체되어 이 선거를 끝으로 더 이상 뽑지 않게 되었다.
6. 선거 이후
특이하게 이 선거로 당선된 '''남해안권 광역자치단체장들은[28] 2004년 총선 시즌을 앞두고 뇌물수수나 공직선거법 위반, '''성추행''', 자살 등으로 몽땅 단체장 직을 잃었다.(...)''' 결국 2004년 재보궐선거는 제1회 남해안권 시장 및 도지사 선거가 되었다.(...)
또한 이날은 경기도 양주시에서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이 발생하여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29]
[1]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2] 5월 30일로 선거날을 하루 땡길 수도 있었다. ~[3] 당시는 선거일이 당연공휴일이 아니라 대통령 지정 임시공휴일이었다. 당연공휴일이 된 건 2010년 지방선거 때 공직선거법이 바뀌면서부터이며, 선관위에 의해 선거공휴일을 달력에 반드시 휴일로 표기하도록 된 것은 2017년부터였다. 이틀 연속 공휴일이 되면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었다.[4] 하지만 정작 개막식은 임시 공휴일로 정해지지 않았고, 대신 4강 선전에 힘입어 정부는 7월 1일을 월드컵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물론 야당에서는 공휴일 남발이라며 반대했지만. 이는 선거를 제외하고는 1988년 9월 17일 이래 14년 만의 최초의 임시공휴일이었다. (이는 2002년이 어린이날과 부처님오신날 모두가 일요일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월드컵 개막 31일 임시공휴일 검토 # "월드컵 개막식 공휴일 아닙니다" 이후 역시 13년 뒤인 2015년 광복절 70주년까지 선거가 아닌 임시공휴일은 추가적으로 발생되지 않았다.[5] 결국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어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에 선거를 치르도록 변경되었다. 수요일로 바뀐 건 이 이유라기보다는 주5일제 시행으로 금요일에 휴가를 내고 연휴를 보내면서 투표일을 그냥 휴일로 보내려는 것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는 견해도 있다.[6] 여담으로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현충일이 수요일이라 이 해와 똑같이 6월 13일 당첨(...). (월드컵까지 겹치는데, 정확히는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개막일이 선거일 다음날이라 경기와 겹치지 않는다.)[7] 그 이전까지 전국에서 과반득표를 달성한 후보와 정당이 나온 것은 직접 선거로 따진다면 7대 대선이 마지막이었다. 2002년 제3회 지방선거 이전에는 한 정당이 압승을 거둔다해도 득표율은 40% 초반이 고작이었다.[8] 이때 출마한 김석준 후보가 12년 뒤 교육감 선거에 나와 드디어 당선되었다.[9] 이 선거 때는 그냥 제주도였고 제주시와 서귀포시, 북제주군, 남제주군 모두 기초자치단체였다.[10] 기초의회의 정당 공천과 비례대표의원 선출은 4년 뒤인 2006년부터이다.[11] 직전 지방선거에서는 비례대표 선거가 분리되지 않고, 지역구 결과의 따라 비례대표를 배정하였다.[12] 박근혜 부총재가 제16대 대통령 선거 경선 과정에 불만을 품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잠시 세웠던 정당. 당시 여권과의 연계를 노리고 심지어 김정일까지 만나러 방북까지 했다. 결국 지방선거 대차게 말아먹은 뒤인 2002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근혜는 스리슬쩍 한나라당에 복당한다. 이 정당도 그에 따라 소멸. [13] 고작 8% 득표로 대구와 경북에서 비례 의원만 확보. 하지만 비례의석이 3석인 대구에서는 7%의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제치고 의석을 차지했다![14] 후에 열린우리당 -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에서는 의원이 5:5(여기에 민주당적을 버릴 수 없는 비례 4명이 민주당에 추가되어 5:9)로 나뉘었는데, 민주당 성동구 시의원이 총선 나간다고 사퇴한 지역구를 열린우리당이 차지하고, 한나라당 4명이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해서 총선 후에는 5:9에서 10:8이 되었다.[15] 비례대표 광역의원은 1회 지방선거와 2회 지방선거 때도 광역구라는 개념으로 있었지만 독립적인 비례대표 투표를 통하여 선출하지는 않았다.[16] 2001년 헌법재판소에서 1인 1표제가 위헌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2년 후인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도 이 방식으로 투표하기 시작하였다.[17] 대구(8.25%), 인천(1.97%), 충남(6.02%), 경북(5.46%)에서만 출마. 대구의 경우 자민련이 출마하지 않은 반사이익도 있었을 것이다. 참고: 경북 자민련 득표율 4.41%[18] 경북에서만 비례 출마로 0.93% 득표.[19]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까지는 한나라당계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지역대결 양상이 강했다. 물론 1990년대 당대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세대대결이 없지는 않았지만 20대와 30대 표층이 민주당계 정당으로 한데 모아지지는 않았고, 제3후보로 갈라지는 경향도 같이 보였으며 영남과 충청, 호남에서는 젊은층이라도 지역정당에 동조화되는 경향을 보였기에 세대대결의 정도는 약해질수밖에 없었다. 이 2002년 서울시장 선거부터 싹트기 시작한 세대대결은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대결이 본격화된 선거는 2002년 12월에 이회창과 노무현이 맞붙었던 제16대 대통령 선거부터였다.[20] 철새라며 놀림받기 전의 김민석은 굉장한 정치인이었다. 30대였음에도 불구, 김대중과 민주당의 적자라는 호칭으로 불렸으며 차차기 지도자급 No.1이었다. 서울시장 선거 낙선 이후 후단협 과정에서의 엇박자로 김민'''새'''라고 놀림받으며 몰락했다가 서울시장 낙선 18년 후인 2020년 21대 총선에서 자신을 재선 국회의원으로 키워주었던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더불어민주당 공천을 따내 출마했다. 결국 영등포구 을에서 당선(3선)되어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21] 우리가 아는 '대통령' 이명박 맞다.[22] 참고로 이 선거에서 이 때 낙선한 후보가 울산광역시장으로 당선된다.[23] 심완구 시장이 재선 직후 새정치국민회의로 입당했다는걸 생각하면 놀라운 결정이다.[24] 현재 없어진 기사이다.[25] 지금이야 범서읍의 개발로 인하여 민주당계 지지층이 늘어나고 있지만, 당시엔 한나라당세가 가장 강한 지역이였다.[26] 15대 총선에서는 꼬마민주당(통합민주당)으로 35.7%를 득표했는데, 이는 신한국당 김태호 현역 의원과 2.5%(2400표)차였다. 3.45%를 득표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더하면 간발의 차로 이겼을 정도. 16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으로 38.2% 득표했으나 역시 김태호 후보에 밀려 낙선. 14대 총선에선 송철호 본인은 중구에서 3위를 기록했는데, 이때 고작 11표차로 1~2위 당락이 갈렸다. (당선자는 통일국민당 차화준 후보, 민자당 입당) 차화준 후보는 다른 의미로도 유명한 분이다(...) 14대 총선 항목 참조.[27] 송 후보의 무려 8전 9기만의 당선이었으며, 그것도 패한 8번중 7번이 35% 이상의 득표율을 얻어 2위를 기록하며 낙선했었다.[28] 부산광역시 안상영 시장(자살), 경상남도 김혁규(총선 출마 사퇴), 전라남도 박태영 도지사(자살), 제주도 우근민 도지사(지사직 상실)[29] 다만 사건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그해 말에 가해 미군들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진 후의 일이다.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