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
[image]
金基昶 (1913년 2월 18일 ~ 2001년 1월 23일)
1. 개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화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 미술계에서 커다란 족적과 영향을 남긴 거장이다. 청각장애를 딛고 피나는 노력 끝에 화가가 된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지만,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 활동을 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비판을 받는 등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1913년 2월 18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호는 원래 어머니가 지어준 아호 '운포(雲圃)'를 사용하다가 해방 직후 일제의 굴레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로 囗를 떼어버리고 '운보(雲甫)'로 바꿨다.
1920년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후천성 청각장애인이 되어 수년간 휴학했다가 복학했다. 이때부터 김기창은 평생 동안 청각장애인으로 살게 되었다. 고열에 시달릴 때 한방요법으로 외할머니가 해 준 인삼을 먹고 더 열이 올라 결국 귀가 멀게된 것이다. 이 부분은 김기창 본인이 쓴 수필에 잘 나와있다. '보약이라고 해서 외할머니가 인삼을 달여온 것을 먹고 나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열에 인삼이 나쁘다는 사실이라든지, 체질에 따라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라고. 어린 나이에 실청하면서 말하는 법도 잊어버렸으나 나중에 다시 배워 구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청각장애인 특유의 어눌한 발음이긴 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고.
어머니 한윤명 여사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손수 한글, 산수를 가르쳤고 김기창은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기억이 있어 쉽게 이해했다.[1] 또한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어, 선생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교실에서 혼자 교과서에 낙서를 하며 지냈다.
1930년 보통학교 졸업 후 어머니의 주선으로 이당 김은호의 화숙인 낙청헌(洛淸軒)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낙청헌에 입문한지 6개월만에 스승 김은호의 영향과 총애를 받아 1931년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판상도무(板上跳舞)[2] '를 출품해 입선했다. 아버지는 귀머거리지만 아들이 허우대가 크다고 해서 목수를 시키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그가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림을 배우게 했다.
당시 스승 김은호는 안중식과 조석진으로부터 그림을 배운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 교수로 있던 유키 소메이에게 수학하면서 섬세한 묘사에 기초한 일본화식 채색화법을 익혔으며,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해 중견작가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낙청헌에는 김은호를 사사하고자 김기창 외에 김인승, 장우성, 이유태, 백윤문, 이석호, 한유동, 장운봉 등이 동문수학했다. 이들은 1936년 1월 미술단체인 후소회를 창립하고, 10월 제1회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조선화단에서 유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중일전쟁부터 각종 미술대회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의 그림 여러작품들을 남겼다. 전시 체제 때 이러한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광복 이후 종래의 일본화의 경향에서 탈피한 작품들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같은 시기인 1946년 우향 박래현[3] 에게 서울 남산에서 고백해 결혼, 1947년 '운보-우향 부부전'을 시작으로 부부작가로 함께 미술 전시활동을 시작했다. 박래현 역시 일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화풍의 그림을 그렸지만 역시 일본화의 영향에서 벗어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상적인 광경을 그린 풍속도이면서도 공간을 분할하고 재조립한 화면 구성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김기창의 이런 입체주의적 그림은 아내 박래현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박래현은 입체파 작품 〈노점〉을 통해 1956년 제 5회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한동안 '남편 김기창의 영향을 받아 부부의 스타일이 너무 비슷해졌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입체주의에 영향을 받은 위의 그림들을 보면 피카소의 그림이랑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진짜 입체주의라고 말하기는 그런게 한쪽에서 볼 수 없는 양면을 보여주는게 입체파인데, 그런 모습은 안 보이고 형태만 유사하게 따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제가 한국적인 소재라서 나름 신선해 보이며, 거기에서 파생되는 독창성과 세련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을 그릴 때 어떤 양식으로 그리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양식을 어떤 주제를 가지고 조화롭게 적용시키느냐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들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군산으로 피란을 간 시기에 구상된 것들인데, 이 때의 또다른 작업으로는 1952~1953년의 <예수의 생애> 시리즈가 주목을 받았다. 예수의 출생에서부터 부활까지의 장면을 총 30점의 연작으로 제작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화풍뿐만 아니라 외모나 복장, 배경 등을 모두 조선조의 것으로 바꿔 그려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4] 종교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현지화하는 과정은 다른 종교 및 문화에서도 흔하지만, 한국에 유입된지 얼마 되지 않은 기독교 이야기를 이렇게 한국식으로 현지화한 것은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문자도나 동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특히 말을 좋아했다고.
이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작품 스타일이 완전히 추상 쪽으로 옮겨졌지만 얼마 되지 않아 추상이 아닌 작품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이 어떻게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김기창은 후천적 청각장애였기 때문에 음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당시 김기창이 깊이 매료되어 있었던 민화의 표현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화풍의 이른바 '바보산수'라고 불리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적인 작품들만을 그리던 초기의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 김기창 본인은 이런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엔 부인 박래현이 1976년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57세의 나이에 사망하면서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후에도 1980년대에는 푸른색을 산의 전면에 칠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청록산수' 연작을 그렸고, 1990년대 초반에는 고령의 나이를 무릅쓰고 봉걸레를 먹에다 찍어 대형 화폭에 그린 '점과 선 시리즈' 연작을 제작했다. 김기창은 일생 동안 작품세계가 자주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에 작품에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다양한 장르의 시도에서 모두 성과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망할 때까지 약 1만 5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1947년 자유신문 미술기자,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등을 지냈다. 196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62년부터 1974년까지 수도여자사범대학[5] 교수를 지냈고, 백양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70년 미술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화단과 교육계에서 커다란 활동을 했다. 1989년 예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그 외에도 1950~60년대 초반까지 만화가로 활동하여 <학원>이란 어린이 잡지에 이야기 그림 형식의 만화작품을 비롯해 어린이 만화책 <허생전>을 낸 바 있었다. 그런 연유로 1988년작 한국화 <까치 호랑이>는 만화가 시절에 다진 만화적 예술성을 정통 미술 기법에 대입한 것이다.
수상경력으로는 1971년 제12회 3.1 문화상이 있으며, 1972년과 1977년 3.1문화상 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또한 1977년 은관문화훈장, 1981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2년 중앙일보 중앙문화예술상 본상, 1983년 예술원상, 1986년 '5.16민족상과 서울시 문화상', '1987년 '색동회상'등을 두루 수상했다. 이외에도 1981년 한독미술가협회 회장, 1985년 후소회 회장,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동남아채묵전 추진위원장, 1988년 서울 올림픽 아트포스터 제작 작가로 선정되는 등 각종 여러 다채로운 경력으로 활동했다.
또한 박정희 정부의 민족정기 함양 정책에 따라 세종대왕, 을지문덕, 조헌, 신숭겸 등의 많은 역사인물의 표준영정과 민족기록화를 도맡아 그렸다. 특히 이 중에서 1973년에 그린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은 현재 한국은행 만원권 지폐의 도안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 이 부분이 상당히 논란이 많은데, 자세한 건 아래에 서술.
1984년 충북 청원군 북일면 형동리(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형동리)에 '운보의 집'을 완공해서 이 곳에서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말년인 1993년 예술의 전당에서 '운보 김기창 팔순 기념 대회고전'을 개최하고, 1994년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을 발간했다. 2000년 7월 개인전 '미수 기념 특별전'을 열었다.
한평생을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왔기에 장애인에 대한 처우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 장애인 미술지망생이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장애판정으로 진학을 못하자 격려의 말이 담긴 편지글을 보내고, 기부도 많이 했다.
말년에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시인하고 공개적으로 고백, 과거행적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자세도 보였다.#
1995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조용히 요양하다 2001년 1월 23일 사망했다. 당시 정부에서 그를 높이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사후 충북 청주시에 있던 '운보의 집'은 그의 그림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개조해서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김기창과 그의 아내 박래현의 묘소가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3. 친일행위
김기창은 일제강점기 때 여러 불명예 작품들을 남겼다. 1943년 8월 6일 매일신보에 게재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는 '축 입영( 祝 入營 )'이라는 어깨띠를 두른 학도병 좌우에, 갓 쓰고 안경을 낀 아버지와 수건을 머리에 쓴 어머니가 그려져 있는 삽화이다. 이는 1943년 8월부터 시행된 '조선 청년 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종군하게 되어 감격스러운 듯한 학도병의 진지함과 장한 아들을 굽어보는 아버지의 표정에 선전효과를 높이려는 의도가 다분히 베어 있다.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는 완전군장으로 간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김기창은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와 〈총후병사〉에 대해 “정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삽화에 불과해 친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면서 친일행위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김기창은 그의 스승 이당 김은호와 함께 대표적인 친일 화가로 의심을 받아왔고, 결국 김기창은 말년에 이러한 점에 대해 사죄를 하였다.
두레박}}}{{{#!wiki style="text-align:center"
운보 김기창 화백이 아들을 통해 『일제 말기 친일을 한 사실이 있으며,
민족과 역사앞에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회개의 뜻을 밝혀 이채.
운보를 대신해 충북도청 기자실을 찾은 외아들 김완씨(46. 한국청각장애자복지회 대표)는
『아버지는 과거의 친일 사실을 시인, 늘 반성하고 있다』고 전언.
김씨는 또 오는 10월 발간예정인 운보의 전작도록에
친일작품으로 꼽히는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등과
고해의 글을 실을 예정이라고 부언.
【청주 연합】
매일경제신문 1993년 7월 2일
'''하지만''', 김기창이 죽고난 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그 당시 조선미술전에 동양화, 서양화, 조각 三部(3부) 작가들을 모조리 동원해 총후미술전에 참가시켰고, 실력이 부족한 화가는 빠졌다. 여기 참가한 작가들은 강제적이었던지 아니었던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역시 그 중 한사람으로 사죄해야 한다. 다만 나는 귀가 먹고 판단을 못한 죄로 그런 본의아닌 죄를 저질렀다. 이 말은 변명이 아니고 사실인 것을 거듭 말한다. 1993. 7.13 운보 씀
" 해방후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을 때 그분들은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림세계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추천작가들은 강제적으로 작품을 내라고는 했지만 거부 못한 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1993.7.14"
"역사가 지난 지금은 신문 방송을 통해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겠지만 나의 주변에서는 독.립이란 단어를 듣기 힘들었고, 바로 엽동네(옆동네) 일들조차 귀먹은 나에게 이야기 해주는 사람조차 없었고 화단소식만이 나의 전부 엿다. 김기창 1993. 7.14. "
문소영기자의 개인 블로그에서.. # 1993년 충청도에 있던 그(김기창)의 화실에 찾아가 인터뷰하고 돌아온 뒤 나중에 받은 답장.
1944년 식민지 조선에서 대규모의 미술전시회가 열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 전시회 이름이 '결전(決戰) 미술전람회'였다. 여기에 김기창이 출품한 작품이 바로 저 작품으로 이름이 '적진육박'이다. 이 작품으로 그 당시 전람회에서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받았었다. 이는 수많은 친일 작품 중에서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광복 이후에도 '''그대로 똑같이 그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래 그림으로 1972년 베트남 전쟁 당시 638고지의 맹호부대의 용맹한 활약상을 그린 1972년도 민족기록화로 가로 2m, 세로 3m의 대작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무위원들이 구입해 국방부에 기증하였다. 이 그림이 위 그림을 그대로 보고 그린 것. 최고의 존경받는 화가가 1944년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그림을 광복 이후 정부 수립 이후에도 그대로 그렸다는 것이 미술계에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국가에서 주도한 민족기록화 사업에[6] , 자신의 친일작품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적진육박'을 그대로 베꼈다는 것은 '''실수이든 의도이든 간에'''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잘못. 더군다나 이 그림은 국방부 청사 현관에 오랫동안 걸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해당 그림은 2018년 3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서주석 국방부 차관의 지시로 장관에게 보고 없이 철거되었다.
4. 논란
1973년에 그린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충무공 이순신에 이은 표준영정 2호)은 이를 기반으로 만원권 지폐 등 세종대왕을 묘사한 각종 도안과 동상 등이 만들어졌는데, 김기창이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5. 여담
- 그의 동생 김기만은 월북작가로 북한에서 활동하며 성공을 하였고[7] 2000년 이산가족 상봉 때 병상에서 재회하였다. 당시 동생은 형에게 자신의 작품인 수묵화 난초를 선물했는데 해당 작품이 전시 중에 도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