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힝클리 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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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에게 체포된 직후 촬영한 머그샷.
John Warnock Hinckley Jr.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 범인. 1955년 5월 29일생. 미국 오클라호마 출신. 주로 자란 곳은 텍사스의 댈러스이다.
아버지 존 힝클리 시니어가 월드비전 미국의 대표였으며 밴더빌트 에너지 코퍼레이션[1] 의 이사장이기도 했다. 힝클리의 형제 스콧 힝클리는 밴더빌트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아버지의 회사에서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힝클리 본인은 고등학교까지 달라스에서 보냈는데 학생회장을 두 번 맡는 등 원만하게 보냈다. 19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아버지의 회사가 새로 진출한 콜로라도 주의 에버그린으로 옮겼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텍사스 공과대학교를 다니다 말다 했다. 1975년에는 가수가 되겠다며 로스앤젤레스로 갔지만, 실패로 끝나고 집의 경제적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그는 무기를 구입하고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1976년 개봉한 <택시 드라이버>를 보고 그는 조디 포스터에 집착했다. 포스터가 예일 대학에 입학하자 그는 코네티컷의 뉴헤이븐으로 옮겼다. 예일 대학의 글짓기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고 포스터의 방문 앞에 시와 편지를 남겨놓고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런 접촉은 포스터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힝클리는 관심을 끌기 위해 비행기 하이재킹을 하거나 포스터의 거처 앞에서 자살하는 등의 방안을 생각한다. 그러다가 대통령을 암살해야 그녀와 같은 급이 될 거라는 망상에 빠져 지미 카터를 암살하려고 쫓아다녔으나 테네시에서 무기 소지로 체포된다. 돈이 없던 그는 풀려난 뒤 집으로 돌아가 우울증 치료를 받지만 진전이 없고 1981년에 새로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을 타겟으로 바꾼다. 그는 존 F. 케네디를 암살했던 리 하비 오스왈드에 관한 자료를 수집한다.
그리고 그는 '''1981년 3월 30일'''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다. 이틀 전인 3월 28일 힝클리는 버스편으로 워싱턴 DC에 도착했고, 파크 센트럴 호텔에 투숙했다. 그리고 신문 워싱턴 스타를 보고 레이건의 동선을 파악하며 범행 계획을 짰다. 이틀 후인 30일에 레이건은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 미국 노동단체연합(AFL-CIO)의 대표들과 오찬을 가진 후 백악관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워싱턴 힐튼 호텔은 대통령 전용 출입구가 있었고, 이 출입구에서 주차 장소까지는 9 m밖에 되지 않았기에 레이건이나 다른 시크릿 서비스 요원들도 방탄조끼를 착용하지 않았다.
물론 거리가 9 m밖에 안 되어도 대통령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것은 뻔한 일이기에, 시크릿 서비스와 경찰 당국은 주변 검문검색을 철저히 해서 안전이 확인된 사람들만 통과시켰다. 그런데 일부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 군중 속에 섞여들었고, 그 중에는 힝클리도 끼어 있었다.
3월 30일, 힝클리는 .22 LR 실탄 여섯 발을 꽉 채운 Röhm RG-14 리볼버 권총을 숨긴 채로 군중 속으로 숨어들었고, 폴리스 라인 맨 앞까지 접근했다. 힝클리는 대통령 리무진과 불과 4.6 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오후 2시 27분, 오찬을 마친 레이건 대통령이 출구로 나왔고, 역시 폴리스 라인 바깥에 서 있던 기자들이 레이건에게 질문해댔고, 레이건은 답변을 위해 잠시 멈추었다. AP 통신의 마이크 푸첼 기자가 "대통령님(Mr. President)...."라고 질문의 서두를 말하는 순간, 힝클리는 권총을 꺼내 순식간에 여섯 발을 전부 쐈다. 첫 발은 백악관 대변인 제임스 브래디(James Brady)에게 맞았고, 총알은 왼쪽 눈 위 이마를 뚫고 들어가 뇌 아래쪽의 뇌 경계선 쪽에 박혔다. 첫 총소리를 들은 경찰관 토머스 델라한티(Thomas Delahanty)는 총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두 번째 총알이 그의 목 뒤에 맞았다. 총알은 그의 척추에 박혔다. 레이던 바로 옆에 있던 시크릿 서비스 요원 제리 파(Jerry Parr)는 총소리가 나는 즉시 대통령을 붙잡고 리무진에 강제로 밀어넣었고, 팀 맥카시(Tim McCarthy) 요원은 리무진 앞을 막아섰다. 이 바람에 세 번째 총알은 빗나가서 맞은편 길가에 있던 창문을 맞혔다. 네 번째 총알은 맥카시 요원에게 맞았고, 총알은 맥카시의 하복부에 명중하여 폐와 간을 관통하여 지나갔다. 다섯 번째 총알은 열려 있던 리무진 문의 방탄 유리에 맞았고, 여섯 번째 총알은 리무진 차체에 맞아서 빗나가나 했는데, 하필 리무진 차체가 방탄재질이라 튕겨나가면서 열려 있던 리무진 문으로 들어가 안에 있던 레이건의 왼쪽 겨드랑이에 명중했다. 이 총알은 폐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서 2.5 cm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현장은 수라장이 되었고, 근처에 있던 시크릿 서비스 요원들이 즉시 힝클리를 덮쳤다. 그러나 워낙 지근거리에서 총격을 가한 데다 힝클리가 1.7초만에 리볼버에 들어 있는 여섯 발을 전부 다 발사하는 바람에 대처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요원들에게 덮쳐진 힝클리는 바로 경찰차에 태워졌다[2] .
조사 과정에서 총기와 총알을 입수한 경로가 나왔는데, 텍사스 댈러스에 있는 총포상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그런데 구입한 총알이 문제였다. 문제의 총알은 .22 LR이었는데, 총알 중심부에 아지드화납(lead azide)이라는 폭발성 화합물을 집어넣은 특수한 총알이었다[3] . 폭발력은 크지 않지만 체내에서 폭발하면 그 힘으로 쪼개진 총알 조각이 전방위로 퍼져나가 인체 내부에서 큰 피해를 주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첫 번째 총알이 그렇게 폭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제임스 브래디의 뇌 아래쪽에 박힌 총알이 폭발하면서 뇌에도 피해를 입힌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델라한티 경관과 맥카시 요원, 레이건 대통령에게 박힌 총알은 폭발하지 않았고, 이걸 제거할 때는 의료진이 방탄조끼를 입고 수술을 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사망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 총알 제거 수술을 받고 살아남았으나, 제임스 브래디 대변인은 중태였고 대수술 끝에 겨우 살아남았다[4] . 그러나 브래디는 총상으로 인해 평생 하반신마비 판정을 받고 훨체어에 탄 채로 지내다가 2014년 8월 4일 74살 생일(8월 29일)을 얼마 안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의 영향인지 살아난 이후에는 총기규제 옹호론자가 되었고, 총기 규제 로비 그룹 브래디 캠페인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델라한티 경관은 총알이 척추를 관통하는 바람에 왼쪽 팔이 마비되었고, 결국 경찰에서 은퇴해야 했다. 맥카시 요원은 부상 후유증이 없었고, 가장 빨리 퇴원한 환자가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처음에는 총에 맞지 않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상술했듯이 파 요원이 레이건을 밀어붙이듯이 리무진에 태웠는데, 그 과정에서 갈비뼈가 부러져서 폐를 찌른 것으로 생각했다고. 그래서 처음에는 예정대로 백악관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레이건이 선홍색의 피를 토하고, 양복 밖으로 피가 배어 나오자 옆에 탄 파 요원이 총상을 확인했고, 차를 급히 조지 워싱턴 대학 병원으로 돌렸다. 4분만에 차는 병원에 도달했고, 이때까지 상태가 괜찮았는지 레이건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걸어들어가며 구경꾼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응급실로 들어선 뒤에 쓰러졌고, 2시간 가까운 수술 끝에 살아날 수 있었다. 거의 한 달이 다 된 4월 25일에야 레이건은 대통령 집무실에 돌아올 수 있었고, 그 뒤로는 절대 공항 활주로나 도로를 가로질러 걷지 않았다. 병원에서 퇴원해서 지지자들에게 인사할 때도 겉옷 안에 방탄조끼를 입었다고 한다.
힝클리는 바로 구속 및 기속되어 1982년에 13가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유죄가 인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심신상실상태로 평가받아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져 판사가 형사처벌하지 않고 대신 무기한 치료감호를 선고했다.[5] 그 뒤 워싱턴 DC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서 2015년까지 수용되어 있었는데, 현재 병원측에서 퇴원을 요구하는 상황. 하지만 위에 나온대로 대변인 브래디가 세상을 떠나면서 2014년 8월 8일 브래디 유족들은 힝클리 주니어를 고소하며 33년동안 브래디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가 세상을 떠났기에 이는 살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 측 변호사는 힝클리는 살인을 저질렀기에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한다며 판결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미국 법원에서 살인죄 적용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즉 살인죄로 다시 기소할 수 있다는 뜻. 다만 살인죄가 인정되더라도 사건 당시 제정신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유죄 판결이 가능하므로 큰 의미는 없다.
힝클리의 집안은 상당히 명문가였고 부시 가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기도 하다. 힝클리의 아버지 존 힝클리 시니어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의 1980년 공화당 경선 때 부시에게 정치헌금을 기부한 적도 있었다. 힝클리의 형제인 스콧 힝클리는 레이건 암살 미수 다음날 닐 부시[6] 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음모론자들은 부시 가와 레이건 암살이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016년, 힝클리가 34년만에 풀려나게 된다는 기사가 떴다. 그리고 9월 10일에 석방되었다. 대신 엄격한 보호관찰이 뒤따르는 건 물론 치료와 교화 프로그램 수강은 사실상 평생 해야 할 거라고 한다.
훗날 조디 포스터는 스스로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함으로써 존 힝클리 주니어의 헛된 짝사랑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게 되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암살범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발상의 뮤지컬 어쌔신(Assassins)에서 등장한다. 작중 묘사되는 모습은 딱 오덕후. 리넷 프롬(제럴드 포드 암살 미수범)과 함께 부르는 러브송 'Unworthy of Your Love'가 유명한 편이다.[7]
2016년 1월 10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왔다.
FBI에게 체포된 직후 촬영한 머그샷.
John Warnock Hinckley Jr.
1. 생애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 범인. 1955년 5월 29일생. 미국 오클라호마 출신. 주로 자란 곳은 텍사스의 댈러스이다.
아버지 존 힝클리 시니어가 월드비전 미국의 대표였으며 밴더빌트 에너지 코퍼레이션[1] 의 이사장이기도 했다. 힝클리의 형제 스콧 힝클리는 밴더빌트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아버지의 회사에서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힝클리 본인은 고등학교까지 달라스에서 보냈는데 학생회장을 두 번 맡는 등 원만하게 보냈다. 19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아버지의 회사가 새로 진출한 콜로라도 주의 에버그린으로 옮겼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텍사스 공과대학교를 다니다 말다 했다. 1975년에는 가수가 되겠다며 로스앤젤레스로 갔지만, 실패로 끝나고 집의 경제적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그는 무기를 구입하고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2. 조디 포스터에 집착
1976년 개봉한 <택시 드라이버>를 보고 그는 조디 포스터에 집착했다. 포스터가 예일 대학에 입학하자 그는 코네티컷의 뉴헤이븐으로 옮겼다. 예일 대학의 글짓기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고 포스터의 방문 앞에 시와 편지를 남겨놓고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런 접촉은 포스터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힝클리는 관심을 끌기 위해 비행기 하이재킹을 하거나 포스터의 거처 앞에서 자살하는 등의 방안을 생각한다. 그러다가 대통령을 암살해야 그녀와 같은 급이 될 거라는 망상에 빠져 지미 카터를 암살하려고 쫓아다녔으나 테네시에서 무기 소지로 체포된다. 돈이 없던 그는 풀려난 뒤 집으로 돌아가 우울증 치료를 받지만 진전이 없고 1981년에 새로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을 타겟으로 바꾼다. 그는 존 F. 케네디를 암살했던 리 하비 오스왈드에 관한 자료를 수집한다.
레이건 암살 기도 직전에 힝클리가 포스터에게 보낸 메시지이다.지난 7개월 동안 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시와 편지와 사랑의 메시지를 담아 보냈어. 내가 몇 번 전화를 하긴 했지만 난 너에게 다가가 내 자신을 소개할 만큼 강심장은 아니었어.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건 너에게 뭔가를 보여주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어서야.(Over the past seven months I've left you dozens of poems, letters and love messages in the faint hope that you could develop an interest in me. Although we talked on the phone a couple of times I never had the nerve to simply approach you and introduce myself.... The reason I'm going ahead with this attempt now is because I cannot wait any longer to impress you.)
3.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암살 시도
그리고 그는 '''1981년 3월 30일'''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다. 이틀 전인 3월 28일 힝클리는 버스편으로 워싱턴 DC에 도착했고, 파크 센트럴 호텔에 투숙했다. 그리고 신문 워싱턴 스타를 보고 레이건의 동선을 파악하며 범행 계획을 짰다. 이틀 후인 30일에 레이건은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 미국 노동단체연합(AFL-CIO)의 대표들과 오찬을 가진 후 백악관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워싱턴 힐튼 호텔은 대통령 전용 출입구가 있었고, 이 출입구에서 주차 장소까지는 9 m밖에 되지 않았기에 레이건이나 다른 시크릿 서비스 요원들도 방탄조끼를 착용하지 않았다.
물론 거리가 9 m밖에 안 되어도 대통령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것은 뻔한 일이기에, 시크릿 서비스와 경찰 당국은 주변 검문검색을 철저히 해서 안전이 확인된 사람들만 통과시켰다. 그런데 일부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 군중 속에 섞여들었고, 그 중에는 힝클리도 끼어 있었다.
3월 30일, 힝클리는 .22 LR 실탄 여섯 발을 꽉 채운 Röhm RG-14 리볼버 권총을 숨긴 채로 군중 속으로 숨어들었고, 폴리스 라인 맨 앞까지 접근했다. 힝클리는 대통령 리무진과 불과 4.6 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오후 2시 27분, 오찬을 마친 레이건 대통령이 출구로 나왔고, 역시 폴리스 라인 바깥에 서 있던 기자들이 레이건에게 질문해댔고, 레이건은 답변을 위해 잠시 멈추었다. AP 통신의 마이크 푸첼 기자가 "대통령님(Mr. President)...."라고 질문의 서두를 말하는 순간, 힝클리는 권총을 꺼내 순식간에 여섯 발을 전부 쐈다. 첫 발은 백악관 대변인 제임스 브래디(James Brady)에게 맞았고, 총알은 왼쪽 눈 위 이마를 뚫고 들어가 뇌 아래쪽의 뇌 경계선 쪽에 박혔다. 첫 총소리를 들은 경찰관 토머스 델라한티(Thomas Delahanty)는 총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두 번째 총알이 그의 목 뒤에 맞았다. 총알은 그의 척추에 박혔다. 레이던 바로 옆에 있던 시크릿 서비스 요원 제리 파(Jerry Parr)는 총소리가 나는 즉시 대통령을 붙잡고 리무진에 강제로 밀어넣었고, 팀 맥카시(Tim McCarthy) 요원은 리무진 앞을 막아섰다. 이 바람에 세 번째 총알은 빗나가서 맞은편 길가에 있던 창문을 맞혔다. 네 번째 총알은 맥카시 요원에게 맞았고, 총알은 맥카시의 하복부에 명중하여 폐와 간을 관통하여 지나갔다. 다섯 번째 총알은 열려 있던 리무진 문의 방탄 유리에 맞았고, 여섯 번째 총알은 리무진 차체에 맞아서 빗나가나 했는데, 하필 리무진 차체가 방탄재질이라 튕겨나가면서 열려 있던 리무진 문으로 들어가 안에 있던 레이건의 왼쪽 겨드랑이에 명중했다. 이 총알은 폐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서 2.5 cm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현장은 수라장이 되었고, 근처에 있던 시크릿 서비스 요원들이 즉시 힝클리를 덮쳤다. 그러나 워낙 지근거리에서 총격을 가한 데다 힝클리가 1.7초만에 리볼버에 들어 있는 여섯 발을 전부 다 발사하는 바람에 대처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요원들에게 덮쳐진 힝클리는 바로 경찰차에 태워졌다[2] .
조사 과정에서 총기와 총알을 입수한 경로가 나왔는데, 텍사스 댈러스에 있는 총포상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그런데 구입한 총알이 문제였다. 문제의 총알은 .22 LR이었는데, 총알 중심부에 아지드화납(lead azide)이라는 폭발성 화합물을 집어넣은 특수한 총알이었다[3] . 폭발력은 크지 않지만 체내에서 폭발하면 그 힘으로 쪼개진 총알 조각이 전방위로 퍼져나가 인체 내부에서 큰 피해를 주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첫 번째 총알이 그렇게 폭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제임스 브래디의 뇌 아래쪽에 박힌 총알이 폭발하면서 뇌에도 피해를 입힌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델라한티 경관과 맥카시 요원, 레이건 대통령에게 박힌 총알은 폭발하지 않았고, 이걸 제거할 때는 의료진이 방탄조끼를 입고 수술을 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사망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 총알 제거 수술을 받고 살아남았으나, 제임스 브래디 대변인은 중태였고 대수술 끝에 겨우 살아남았다[4] . 그러나 브래디는 총상으로 인해 평생 하반신마비 판정을 받고 훨체어에 탄 채로 지내다가 2014년 8월 4일 74살 생일(8월 29일)을 얼마 안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의 영향인지 살아난 이후에는 총기규제 옹호론자가 되었고, 총기 규제 로비 그룹 브래디 캠페인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델라한티 경관은 총알이 척추를 관통하는 바람에 왼쪽 팔이 마비되었고, 결국 경찰에서 은퇴해야 했다. 맥카시 요원은 부상 후유증이 없었고, 가장 빨리 퇴원한 환자가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처음에는 총에 맞지 않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상술했듯이 파 요원이 레이건을 밀어붙이듯이 리무진에 태웠는데, 그 과정에서 갈비뼈가 부러져서 폐를 찌른 것으로 생각했다고. 그래서 처음에는 예정대로 백악관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레이건이 선홍색의 피를 토하고, 양복 밖으로 피가 배어 나오자 옆에 탄 파 요원이 총상을 확인했고, 차를 급히 조지 워싱턴 대학 병원으로 돌렸다. 4분만에 차는 병원에 도달했고, 이때까지 상태가 괜찮았는지 레이건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걸어들어가며 구경꾼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응급실로 들어선 뒤에 쓰러졌고, 2시간 가까운 수술 끝에 살아날 수 있었다. 거의 한 달이 다 된 4월 25일에야 레이건은 대통령 집무실에 돌아올 수 있었고, 그 뒤로는 절대 공항 활주로나 도로를 가로질러 걷지 않았다. 병원에서 퇴원해서 지지자들에게 인사할 때도 겉옷 안에 방탄조끼를 입었다고 한다.
4. 암살 미수 이후
힝클리는 바로 구속 및 기속되어 1982년에 13가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유죄가 인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심신상실상태로 평가받아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져 판사가 형사처벌하지 않고 대신 무기한 치료감호를 선고했다.[5] 그 뒤 워싱턴 DC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서 2015년까지 수용되어 있었는데, 현재 병원측에서 퇴원을 요구하는 상황. 하지만 위에 나온대로 대변인 브래디가 세상을 떠나면서 2014년 8월 8일 브래디 유족들은 힝클리 주니어를 고소하며 33년동안 브래디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가 세상을 떠났기에 이는 살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 측 변호사는 힝클리는 살인을 저질렀기에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한다며 판결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미국 법원에서 살인죄 적용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즉 살인죄로 다시 기소할 수 있다는 뜻. 다만 살인죄가 인정되더라도 사건 당시 제정신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유죄 판결이 가능하므로 큰 의미는 없다.
힝클리의 집안은 상당히 명문가였고 부시 가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기도 하다. 힝클리의 아버지 존 힝클리 시니어는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의 1980년 공화당 경선 때 부시에게 정치헌금을 기부한 적도 있었다. 힝클리의 형제인 스콧 힝클리는 레이건 암살 미수 다음날 닐 부시[6] 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음모론자들은 부시 가와 레이건 암살이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016년, 힝클리가 34년만에 풀려나게 된다는 기사가 떴다. 그리고 9월 10일에 석방되었다. 대신 엄격한 보호관찰이 뒤따르는 건 물론 치료와 교화 프로그램 수강은 사실상 평생 해야 할 거라고 한다.
훗날 조디 포스터는 스스로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함으로써 존 힝클리 주니어의 헛된 짝사랑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게 되었다.
5. 창작물에서의 힝클리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암살범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발상의 뮤지컬 어쌔신(Assassins)에서 등장한다. 작중 묘사되는 모습은 딱 오덕후. 리넷 프롬(제럴드 포드 암살 미수범)과 함께 부르는 러브송 'Unworthy of Your Love'가 유명한 편이다.[7]
2016년 1월 10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왔다.
[1] 미국의 석유 회사.[2] 이 때 경찰차에 태워진 힝클리는 잡히는 과정에서 팔 한쪽이 부러졌는데 같이탄 경호원에게 "제 팔이 부러졌어요" 라고 읍소하자 그 경호원이 이렇게 화답해줬다. "너같은 XX는 팔 한쪽 부러진걸로 끝난것만 해도 행복한줄 알아!". 여담으로 이 장면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레이건 대통령의 일대기를 담은 드라마에도 그대로 나온다.[3] 범인이 개조한 것은 아니고 Devastator라는 상표로 나오는 기성품 총알이다.[4] 비슷한 사례로 먼 훗날 2011년 미국 민주당 국회의원 개브리엘 기퍼즈(Gabrielle Giffords) 도 관자놀이에 총탄이 직격당해 뇌를 관통하며 반대쪽 관자놀이로 관통한 완벽한 헤드샷을 당했음에도 살아남았다.[5] 대통령 암살범이기에 심신상실상태가 인정될 수밖에 없어서 인정됐다고 봐야 한다. 20여년 뒤 대통령인 조지 W 부시 암살을 계획했던 범인도 있는데, 힝클리처럼 시도도 없이 예비단계에서 잡혔지만 심신미약이 인정되지 않자마자 짤없이 징역 35년을 받았다.[6] 1955년생 미국의 사업가로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의 넷째 아들로 조지 워커 부시와 젭 부시의 동생.[7] 참고로 '러브송'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뮤지컬들과 달리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게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힝클리는 포스터에게, 프롬은 찰스 맨슨에게 자신의 사랑을 바친다는 내용인데, 멜로디는 아름답지만 잘 곱씹으면 가사에서 다소 섬뜩할 정도의 집착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