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 갈란드

 

''' 주디 갈란드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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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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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주디 갈란드
JUDY GARLAND
'''
'''분야'''
'''영화, 음악'''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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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color=#dda0dd> '''{{{#ffd700 영화 : 1715 Vine Street
음악 : 6764 Hollywood Bl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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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주디 갈란드 (Judy Garland)
'''본명'''
프랜시스 에설 검 (Frances Ethel Gumm)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22년 6월 10일, 미네소타 주 그랜드래피즈
'''사망'''
1969년 6월 22일 (향년 47세), 잉글랜드 첼시
'''직업'''
배우, 가수, 뮤지컬 배우
'''활동'''
1924년 – 1969년 (가수)
1929년 – 1967년 (배우)
'''신체'''
151cm , AB형
'''부모'''
프랜시스 검(1886 ~ 1935)
에설 마리온 검(1893 ~ 1953)[1]
'''남편'''
데이비드 로즈 (1941 – 1944)
빈센트 미넬리 (1945 – 1951)
시드니 루프트 (1952 – 1965)
마크 헤론 (1965 – 1967)
미키 딘스 (1969)
'''자녀'''
장녀 라이자 미넬리[2](1946년생)
차녀 로나 루프트(1952년생)
장남 조이 루프트(1955년생)
1. 개요
2. 생애
3. 게이들이 좋아하는 여배우
4. 미디어매체의 주디 갈란드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


1940~1950년대 전성기를 누린 미국의 배우 겸 뮤지컬 배우.
전세계적으로 오즈의 마법사도로시로 유명하다. 대중적으로는 오즈의 마법사가 가장 유명하지만, 평론가들은 대체로 1954년 스타 탄생[3]을 주디 갈란드의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듯하다.
동나이대 스타들 중에서도 제일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개인사가 매우 불행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940년대의 마이클 잭슨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4]

2. 생애


인기 아역 스타로 시작하여,[5] 오즈의 마법사로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며, 얼굴이 그렇게 예쁘거나 섹시한 매력은 없지만 굉장히 훌륭한 가창력과 독특하고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유자라는 평을 들었다. 실력에서는 프레드 아스테어 등 당대의 유명 뮤지컬 스타들도 갈란드야 말로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뮤지컬 스타라고 인정할 정도다.
2세 때 소규모 무대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른 것을 시작으로, 3세 때부터 두 언니들과 함께 검 시스터즈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고,[6] 1935년 MGM 오디션에 합격해 전속 연예인으로 지원을 받는다. 다만 이때 아버지가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비참한 삶이 된 연기 생활이 시작된다.
흔히들 오즈의 마법사로 스타가 된 거라고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원래 또 다른 스타 아역배우이자 절친이었던 미키 루니[7] 함께 출연한 틴에이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 앤디 하디 시리즈 덕분에 인지도도 높았고 돈도 또래 배우들보다 훨씬 많이 벌고 있었으나 원탑 주연으로는 큰 성과를 못 내다가 오즈의 마법사의 대흥행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MGM은 처음 주디를 데려왔을 때부터 줄 역할이 없어서 당혹해 했다. 13살이란 나이가 어중간해서 아역을 줄 수도 없고 성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당시 영화들의 주연 배우들은 하나같이 섹시한 팜므 파탈 아니면 핀업 걸 스타일이었기에 키도 작고 귀여운 얼굴의 주디가 할 역할은 많지 않았다. 앤디 하디 시리즈로 뜨기 전까지는 스튜디오의 파티에 여러 번 불려다니며 노래를 하였고 작은 역할을 맡는 정도였다. 이때 프로듀서들과 감독들에게 성접대를 여러 번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도 엄마가 주선해서 말이다. 주디 갈란드의 엄마는 딸의 성공을 위해서는 약물에 성접대까지 종용하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아무리 부모가 권했다 해도, 미성년자의 성접대를 받았던 감독들과 당시 헐리우드 시스템이 더 큰 충격적이다.
앤디 하디 시리즈와 오즈의 마법사의 성공의 배후에는 스튜디오에서 종용한 약물남용이 있었다. 프로듀서들은 그녀가 촬영 중 졸려 하면 암페타민을 썼고 촬영이 끝나서 자야 하면 수면제를 먹게 했다. 또한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에게도 푸대접을 받은 것은 기본. 거기에 체중 조절이라는 명목으로 1일 1식에 '''담배 네 갑'''(당시 기준 80개비!)을 '''매일''' 주면서 흡연하라고 강요까지 했다. 오즈의 마법사를 촬영할 당시 그녀에게 그나마 친절하게 대한 배우는 마거릿 해밀턴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도로시가 물리치는 나쁜 서쪽의 마녀 역할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그녀가 어린 이미지로 인해 배역을 따지 못했다는 것인데 사실이 아니다. 그건 10대 초반의 일이고 10대 후반 오즈의 마법사의 성공 이후 성인 역할로의 전환도 셜리 템플같은 다른 아역 배우 스타들보다 빠른 편이었다. 오즈 이후 MGM에서 만드는 거의 모든 뮤지컬 드라마의 주연으로 그녀를 밀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대표적으로 20대 초반에 출연한 빈센테 미넬리 감독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나[8] 벅스비 버클리[9]가 감독하고 진 켈리와 출연한 For Me and My Gal이 있다. 탁월한 무대 센스와 가창력, 그리고 그걸 받쳐주는 연기력으로 인해 커리어 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으나 약물 남용과 본인의 상대적으로 평범한 외모로 인한 낮은 자존감이 문제였다. 원래는 집안의 막내에 검 시스터즈의 귀염둥이로 지내다가 영화사에 들어 가면서 또래의 배우들과 비교당하게 된 것. 다른 MGM배우들인 엘리자베스 테일러, 라나 터너, 에바 가드너 등등과 같은 학교를 다니며 생긴 열등감이[10] 첫사랑이었던 아티 쇼가 라나 터너와 양다리를 걸치다가 터너와 결혼하면서 더욱 심해진다. 라나 터너는 안 그래도 이전에 앤디 하디 시리즈에서 미키 루니의 첫사랑 역으로 나왔었고 주연인 갈란드는 루니를 짝사랑 하는 역할이었다.
외모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20대가 됨과 동시에 소속사인 MGM에서 당대 20대 주역급 여배우들과 마찬가지로 글래머러스한 이미지를 밀고자 했으나 이미 걸 넥스트 도어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박힌 바람에 이미지 변신이 힘들었다. 그리고 영화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에서 갈란드의 어려보이는 이미지를 바꿔 보고자 남편인 빈센트 미넬리에게 고용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눈썹과 이마의 헤어 라인 정리, 그리고 어려보이는 주 요인이었던 다소 두툼한 코를 메이크업을 통해 더 가늘고 높게 만들고 입술 라인도 좀더 날렵하게 다듬었다. 이 바뀐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갈란드는 이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MGM과 계약된 모든 영화에 대동하였다고 한다.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의 하일라이트인 명곡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 리메이크가 많이 되어서 주디 갈란드가 원곡을 불렀다는것을 모르는 사람도 리메이크 버젼 하나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빈센트 미넬리가 부인인 갈란드를 돋보이는 구도로 영화를 찍은 데다가 이 영화에서 부른 다른 두 곡인 "Trolly Song", "Meet Me in Saint Louis"까지 히트하면서 외모로나 실력으로나 주디 갈란드의 리즈 시절로 불린다. 실제로 미넬리와 결혼했을 시절이 주디 갈란드가 가장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시절이었다고 한다. 갈란드의 알콜 중독과 약물 남용 및 미넬리의 불륜 때문에 오래가진 못했지만.
가족이라도 서포트를 해줬다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그녀를 아꼈던 아버지는 갈란드가 13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딸의 배역을 위해 딸과 MGM 고위 관계자들과의 접대에 적극적인 인간 말종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에텔과 그녀의 아버지는 보드빌 공연자 출신인데 에텔은 본인이 이루지 못한 스타가 되는 꿈을 딸에게 투영하면서 무리한 스케줄을 소속사와 협조하며 딸에게 강요한다. 아직 어린데다가 자존감이 낮았던 갈란드는 이러한 무리한 요구들을 반항하지 못하고 따른다.
또 성인 연기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녀가 사람들에게 덜 휘둘렸던 건 아니었다. 약물 남용은 계속되었고 유부남 뮤지션 데이빗 로스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이혼하고 갈란드에게 가겠다던 데이빗은 약속을 어기고 갈란드를 버리고, 갈란드는 소속사와 어머니에 의해 반강제로 낙태를 당한다.
1945년에 빈센트 미넬리와 결혼한 이후에도 갈란드는 신경쇠약으로 여러번 입원하고 자살 시도를 했다. 그 와중에도 박스 오피스 성적은 좋아서 MGM은 잦은 스케줄 펑크를 감안하고 그녀에게 계속해서 큰 역할들을 맡긴다. 이즈음 해서 주디는 심한 알콜 홀릭에 모르핀 남용자가 되었다. 거기에 무리한 다이어트로 인한 건강 문제까지 겹쳐서 소속사가 그녀의 활동을 잠시 멈추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로 이때 3개월을 쉬었는데 출산 휴가를 제외하면 그녀가 20대에 이렇게 오래 쉰 적이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바빴다. 이후에도 MGM과의 히트작은 많았지만 약물과 알콜중독으로 인한 잦은 입원과 자살 소동들로 인해 1950년에 소속사와 헤어진다. 사실상 소속사가 버린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일이 '''겨우 28살 때까지 벌어진 일'''이다.
결국 갈란드와 그녀를 배우로 만들기 위해 지독한 강요를 한 어머니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으며 그녀도 이젠 어머니를 무시했기에 결국 어머니와 남남이 된다. 딸이 자신을 버렸다고 여긴건지, 이 지독한 엄마는 서서히 무너지더니 1953년 60세로 죽었다. 당시 베티 데이비스캐서린 헵번이 거대 스튜디오 시스템의 부조리에 맞서 싸워 권리를 쟁취한 여걸이라면, 그녀는 거대 상업 시스템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가혹한 대우, 가족 중 유일하게 아껴주었던 아버지와의 이른 이별, 그리고 다른 미녀 배우들과 끊임없이 외적으로 비교 당했던 어린 시절 덕분에 죽을 때까지 열등감과 애정 결핍에 시달렸다. 같이 일하는 관계자들은 끊임없이 갈란드가 얼마나 재능 있고 아름다운지 계속해서 말해줘야만 다음 스케줄 소화가 가능할 정도로 자존감이 낮았다고 한다. 애정 결핍 때문에 본인을 조금이라도 좋다고 하는 모든 남자를 결혼했건 안 했건 전부 받아들이면서 커리어 내내 스캔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후 그녀는 커리어를 티비로 선회하고 빙 크로스비 쇼 같은 인기 티비쇼에 나오거나 뮤지컬 콘서트 투어를 하기 시작한다. 원래 무대에서 시작한 커리어였기에 이런 전환이 순조로웠던 것이다.[11] 그리고 스타 탄생의 리메이크로 다시 한 번 영화계에 부활한다. 오즈의 마법사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지만 스타 탄생이 사실상 그녀의 인생 영화로서 가장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 자체도 엄청난 호평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아카데미 우승자로 점쳤지만 정작 수상자는 그레이스 켈리였다. 아직도 가장 공평하지 않은 수상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때 주디가 아이를 순산하고 병원에 입원한 상태라 아카데미를 올 수 없었다. 그녀가 우승할 거라 예상한 텔레비젼 스태프들이 그녀의 병실에 몰려 있었는데 그녀가 수상에 실패하자마자 순식간에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명화인 뉘른베르크 재판에 출연하고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에 여우조연상으로 노미네이트 되면서 뮤지컬이 아닌 영화에서도 출중한 연기를 보여준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쉽게도 1963년 (41세) 이후 영화 출연은 그만두었다.
이후 간간히 출연해오던 텔레비젼 출연으로 커리어를 완전히 선회했고 게스트로 출연한 쇼들은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다. 그 외에도 카네기 홀, 브로드웨이, 베가스 등등의 뮤지컬 쇼들로 높은 인기를 이어가는데 약물 남용과 알콜 중독은 더 심해진다. 그러던 와중 그녀의 이름을 내건 주디 갈랜드 쇼가 비평가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방영된 시간이 애매해서 시청률이 낮은 바람에 캔슬되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즈음에서 커리어가 끝났겠지만 주디 갈랜드는 처음에 그녀의 커리어가 시작된 무대로 돌아갔고 세계 각지에서 콘서트를 연다. 그녀의 콘서트 티켓은 거의 언제나 완매되었고 어찌나 인기가 좋았는지 티비에서도 그녀의 콘서트를 라이브로 방영해주었다. 자기 이름을 건 쇼는 그만 두었지만 한두 번씩 게스트로서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1961년에는 카네기 홀에서 개최한 콘서트의 실황을 녹음한 앨범인 '''Judy At Carnegie Hall'''로 제4회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한다. 비록 아카데미상에서는 주연상을 못 타봤지만 가수로서는 정점을 찍은 셈이다.
1960년대 후반 즈음해서 원래 굉장한 동안이었던 얼굴이 급속도로 노화하기 시작한다. 1954년에 출연한 스타 탄생에서의 아직도 앳된 얼굴과 비교하면 정말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얼굴이 많이 변했는데 아마도 약물과 스트레스로 인한 노화였을 것이다. 음주 콘서트하면 다들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생각하겠지만 주디 갈란드가 원조이다. 1964년 호주에서 연 콘서트에서는 시작 시간에 1시간이나 늦고서도 정줄을 놓은 진행을 간간히 보여 그녀의 이미지가 악화되는데 일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콘서트 계약이 잇달았던 이유는 그래도 일단 무대에 서면 노래를 잘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딸인 라이자 미넬리[12]도 어머니는 평소에 아무리 정신이 나간 것 같아도 무대에만 올라가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때 이미 4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 후였고 마지막으로 미키 딘스와 1969년에 결혼한다. 마지막 남편이 약물을 중단시키려고 그렇게 노력했지만 이전 남편들도 그러했듯이 실패한다.
(좌) 미키 딘스 [image] (우) 주디 갈란드
'''1969년 3월 15일 미키 딘스와 결혼식 당시 사진'''
당시 47세의 얼굴치곤 상당히 노안이 심하다
결국 1969년 6월 22일, 런던의 CadoganLane에 있는 그녀의 허름한 집 욕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사인은 '약물 과다' 그녀의 나이는 겨우 47세였다. 위에 나열한 모든 일이 영화 데뷔 이후 30여년 동안 일어난 일이다. 여러 모로 안타까운 죽음이다. 어머니의 과한 욕심+소속사의 혹사와 학대+주변 환경에 의한 낮은 자존감과 애정 결핍으로 인한 비극이라고 하겠다. 할리우드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에 가장 화려한 뮤지컬 영화들에 나왔던 주디 갈란드였지만 그 시절 가장 큰 희생자를 꼽자면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사람 역시 주디 갈란드이다. 이 부분은 2018년 1월 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참고로 주디 갈란드가 죽은 날 캔자스에는 엄청난 토네이도가 발생했다고 한다.

3. 게이들이 좋아하는 여배우


게이들이 좋아하는 여배우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당시 그녀가 뮤지컬계의 뛰어난 아티스트였기 때문이다.[13] 미국에선 뮤지컬은 게이, 유대인만 본다고 말할 정도로 강한 게이 스테레오타입이며, 현재도 뮤지컬 업계에 종사하거나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퀴어가 많다는 선입견이 은연중에 있을 정도다.[14] 그러니 뮤덕인 게이들이 주디를 칭송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또한 '''디바''' 이미지와 박복한 인생 역경 등이 게이들이 전형적으로 호응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전기 영화인 주디에서도 게이들이 주디에게 보낸 열광적인 지지를 묘사한다. 주디의 마지막 영국 공연에 매일 참석할 정도로 열성팬인 게이 커플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오로지 순수한 호의로 주디를 극진히 대접했으며, 동성애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힘겨운 삶 속에서 주디의 노래로 공감과 위안을 얻었음을 암시한다. [15]
1940~50년대 기준에서는 게이 문화가 곧 뮤지컬 문화였다. 현대의 뮤지컬은 게이 문화와의 접점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게이 코드는 뮤지컬의 한 중심축이다. 당장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의 유명 제작자, 작곡가, 각본가, 배우들 중 게이 비율이 엄청난 마당이니... 물론 현대로 오면서 이성애자인 뮤덕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 뮤덕들에게는 "뭐?"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소리이나, 이는 한국 뮤덕의 성비가 압도적으로 여성에 쏠린 여초 팬덤이기에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에 본질적으로 녹아있는 게이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 때문이 크다. 관객 외적인 이유로는 수입사에서 한국 프로덕션을 올릴 때 한국에는 낯선 게이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역하거나 터부시되는 사회 정서상 아예 잘라버리는 점도 있다. 다만 2010년대 즈음을 기점으로, 현재는 퀴어 코드 작품들이 삭제를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올라오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졌다.
네번째 남편 마크 헤론은 자신의 사위이자 라이자 미넬리의 남편이었던 가수 피터 알렌과 바람이 나서 사랑의 도피를 벌였다. 즉, 엄마와 딸 각각의 남편들이 서로 볼륜을 벌이는 대스캔들이 터져버렸고 결국 갈란드는 헤론과도 이혼하게 된다. 여튼 1969년에 다섯 번째로 미키 딘과 행복한 결혼식을 올린 주디 갈란드는 단 몇 주 후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47살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4. 미디어매체의 주디 갈란드


주디 라는 제목의 전기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르네 젤위거가 연기한다. 내용은 영국 런던에서의 마지막 콘서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그린다.예고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이미 확정적일만큼 명연기라는 후문이 있었고, 실제로 수상했다.
다만 해당 영화를 제작하면서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동의나 연락을 취하지 않아 주디 갈란드의 딸인 라이자 미넬리와 로나 러프트가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라이자 미넬리는 인터뷰를 통해 배우(르네 젤위거)에게 나쁜 감정은 없지만 해당 영화를 보는 것은 고통스러울 것이라며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했다. 로나 러프트는 방송에서 '진짜 그녀에 대해 알고 싶으면 생전에 남긴 음악과 영화를 보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가족들의 동의로 만들어진 작품으로는 드라마가 있다. 영화 "주디" 가 나오기전 ABC 체널에서 주디 갈란드의 둘째딸 로나 러프트가 쓴 주디갈란드 의 일생책 "Me and my shadows" 의 원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드라마 3편으로 제작 되었다.
2019년 11월9일, 국내 예능프로그램 차트를 달리는 남자 157회 '화려한 삶 뒤에 숨겨진 비극 불행한 삶을 산 스타들' 랭킹 1위에 올랐다.

5. 여담


그녀가 부른 Easter Parade라는 곡은 디즈니 매직 킹덤의 부활절 프리 퍼레이드 곡으로 쓰이고 있다.#
MGM 소속의 체격이 작은 아역배우라는 점에서 미키 루니와 비슷하다고도 한다.[16] 그러나 일찍 죽은 갈란드와는 달리 미키 루니는 엄청나게 오래 활동해서 온갖데 주, 조연 가리지 않고 다 나왔다.[17]

6. 관련 문서


[1] 딸을 연예계에 발 들이게 만든 인물이자 동시에 딸의 인생을 망친 막장 부모이기도 하다. [2] 라이자 미넬리 역시 1970년대 유명 배우로 명성을 떨쳤으며, 어머니와 똑같이 음악과 춤에 소질을 보여 뮤지컬계에서도 꽤나 잘 나갔다. 특히 1972년 뮤지컬 영화 카바레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3] 2018년 브래들리 쿠퍼, 레이디가가 주연의 스타 이즈 본과 같은 이야기이다.[4] 실제로 주디 갈란드의 인생사는 여자 버전 마이클 잭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사하며, 50세 전후에 죽은 것과 사인마저 약물과다로 같다.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부모님과 시스템에 의해 평생을 이용당한 점, 형제자매들 중 막내이며, 재능이 가장 뛰어나 한때 형제자매들과 그룹을 이뤄 활동하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 솔로 시절에 훨씬 유명해졌다는 점, 자신을 노리는 자들을 쳐내지 못하다가 크나큰 손해를 입었다는 점, 객관적으로 상당히 외모가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재능을 질투한 다른 사람들이 과도하게 외모를 깎아내려서 평생에 걸쳐서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존감이 낮아지게 된 등 굉장히 유사점이 많다.[5] 그녀의 부모가 연예계 종사자였다. 어머니는 당시로는 드물던 대본 작가로 자녀들을 유명한 스타로 만들 꿈으로 어릴 때부터 세 자매를 스테이지 가수로 데뷔시켰다. 그 중 가장 재능이 있는 막내 주디 갈란드에게 기대를 한 것은 당연. 자녀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는 평을 받은 어머니인데 아마 후술할 가족사와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6] 이때 이미 탁월한 가창력과 무대 매너로 세 자매중 가장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7] 갈란드와 여러 모로 매우 비슷한 경력(보더빌 출신 부모 밑에서 보더빌 무대 데뷔, 아역 배우로 영화 배우 커리어 시작, 브로드웨이에서의 성공 등등)의 아역 출신 배우로서 미국에서는 전설 취급을 받는 배우이다. 본인은 부정했지만 갈란드와 마찬가지로 아역 시절 약물 강요를 당했다는 것이 기정 사실로서 70대가 될 때까지 수면제를 끊지 못했다. 단지 여성이었기 때문에 온갖 희롱을 당한 갈란드에 비해 취급은 나은 편이었다. 갈란드와는 소울 메이트 수준으로 가까웠고 서로를 깊게 이해하는 관계였지만 이성적인 감정은 서로 전혀 없었다고 한다.[8] 그 유명한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가 나온다.[9] 전설적인 안무가이자 감독. 미국 50대 이상은 By a Waterfall 안무 감독이라고 하면 다 아는 사람이다.[10] 당시 스튜디오의 별명이 못생긴 아기 오리였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11] 50년대부터 텔레비젼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극장의 수입이 줄어들었고 이렇게 트랜지션을 이어가지 못한 대다수 배우들은 나이 먹고 배역이 떨어진 후 쓸쓸히 은퇴해야 했다. 비비안 리같은 원래 연극배우 출신 배우들은 사실 극장이 본업이었기에 별 타격이 없었지만 에바 가드너같은 연기력이 애매한 영화 배우들은 나이 먹고 그대로 은퇴라는 수순을 밟았다.[12] 잭 헤일리 2세와 결혼했다가 오래지 않아 이혼했다. 잭 헤일리 2세의 아버지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나무꾼 역할로 출연했던 잭 헤일리였다. 주디는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선배 배우와 사돈 관계가 된 셈이다. 하지만 딸이 헤일리 2세와 결혼했을 당시 주디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13]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도 같은 이유로 게이의 아이콘이기도 하다.[14] 심지어 2020년 개봉한 영화 더 프롬에서도 뮤지컬 스타인 디디(메릴 스트립 분)가 자신의 팬이라는 교장 선생에게 "이성애자 남자 팬은 처음이다"라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15] 극중 클라이막스인 Over the Rainbow 열창 중에 한계에 달한 주디가 탈진해버리자 관객들이 떼창으로 응원해주는데, 가장 먼저 떼창한 관객이 바로 이 게이 커플이다.[16] 둘이 함께 찍은 화보들이 많다.[17] 유명한 배역들 중 하나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의 일본인(...), 그리고 한참 뒤인 박물관에서 살아있다에서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