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티 데이비스
1. 개요
미국의 배우이자,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스타. 영화 역사상 가장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이에 못지않게 거침없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긍정적인 의미이자 부정적인 의미 모두에서 여러 논란의 중심에 있기도 한 배우였다.
2. 생애
1908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났다. 1915년 부모님의 이혼 후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미국 명문 고등학교 쿠싱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26년 배우를 지망하여 대학교 연극과에 입학했다. 1929년 《깨진 접시(Broken Dishes)》라는 연극 작품으로 브로드웨이에 정식 데뷔하였으며, 1930년에는 할리우드로 이동했지만 그녀를 마중 온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담당자가 너무 평범하다고 깔 정도로 이후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첫해였다.
1932년 유니버설과의 재계약 실패 후 뉴욕으로 돌아가려다 그녀를 눈여겨 본 워너 브라더스사와 5년간 계약을 맺고 계약 이후 작은 배역을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RKO사[1] 의 1934년작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에 출연하게 된다. 당시 악역은 캐릭터에 배우가 먹히는 경우가 많아 배우들은 악역을 맡기를 꺼렸으나, 베티 데이비스는 악역에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악역에 도전하였다. 처음엔 주변에서 풋내기 듣보라고 무시했으나 뛰어난 연기력으로 바로 인정받았으며,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베티 데이비스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인간의 굴레》에서의 뛰어난 연기로 베티 데이비스의 다음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이 유력시되었으나, 막상 여우주연상에서 후보 지명조차 받지도 못했고, 이로 인해 엄청난 논란이 일어났다. 당시 아카데미 협회는 자그마한 친목 사교 모임 정도였으나 이 스캔들로 일정한 자격을 갖춘 대규모 전문가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리고 베티 데이비스는 1936년 《댄저러스(Dangerous)》로 첫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녀는 할리우드 탑스타로 떠올랐지만 여전히 대우는 형편없었고, 이에 부당함을 느낀 베티 데이비스는 워너 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베티 데이비스의 소송은 당시에 주위의 지지를 못받았고 패소로 끝났지만, 이 일은 7년 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계약 무효 소송 승소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법이 하빌랜드 법인데, 이 법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되는데 일조하였다.
1938년 《제저벨(Jezebel)》로 윌리엄 와일러와 처음 작업을 합께 하면서 윌리엄 와일러의 초기 페르소나로 활동하였다. 베티 데이비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에서 탈락하고, 소속사인 워너에게서 일종의 보상으로 받은게 제저벨 역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역할과 제저벨에서의 역할이 너무 비슷해서 데이비스가 배역을 맡는걸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건 그저 루머에 불과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인 데이빗 O. 셀즈닉은 단 한번도 베티 데이비스를 스칼렛 오하라 역으로 고려해 본 적이 없으며 따라서 스크린 테스트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워너 브라더스가 영화 배급권을 자기들이 갖는 대신, 베티 데이비스, 에롤 플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역들로 빌려주겠다[2] 는 제안을 했으나, 셀즈닉은 스칼렛 오하라 역은 신인이거나 얼굴이 덜 알려진 배우이길 원해서 데이비스는 애초에 제외되었다. 워너에서 제안한 세 명 중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역을 따낸건 멜라니 역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유일하다.
우여곡절 끝에 작업하게 된 제저벨을 기점으로 베티 데이비스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우선 제저벨로 그녀는 두번째 오스카상을 수상하였고 1939년부터 1943년까지 5년 연속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가는 등 연기력이 활짝 꽃 핀 시기였다. 하지만 이와 함께 그녀의 커리어도 슬슬 하락세에 접어들기 시작했는데 우선, 1941년 여성으로선 최초이자 최연소로 아카데미 협회의 의장 직에 오르지만 결국 협회와의 불화로 사퇴하게 된다. 또한 베티 데이비스와 월리엄 와일러는 《제저벨》과 1940년작 《편지(The Letter)》 등을 연이어 성공시켰으나, 둘 사이의 불화로 인해 1941년작 《작은 여우들(The Little Foxes)》을 끝으로 같이 작업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인간의 굴레》 이후 흥행 연타를 치며 약 10여년간 여배우 원탑 자리를 유지해왔으나, 1946년작 《디셉션(Deception)》의 실패와 출산을 겪으며 본격적으로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참 하락세를 타던 중에 1950년작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에서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레전설급 연기를 펼치며 화려하게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다음해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수상이 유력시 되었으나, 《이브의 모든 것》에서 이브를 연기한 앤 백스터가 베티 데이비스와 함께 주연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같은 해 《선셋 대로》에서 글로리아 스완슨이 데이비스 못지 않게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레전설급 연기를 펼치면서 삼파전이 펼쳐지면서 막상 표가 갈리게 되었고, 어부지리로 제3자인 주디 홀리데이가 《귀여운 빌리(Born Yesterday)》에서의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3]
이후 다시 침체기를 겪다가 평소 앙숙지간[4] 이었던 조안 크로포드의 제안으로 1962년작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5] 에 출연하면서 다시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베티 데이비스의 레전설급 연기로 다음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이 확실시되었으나 정작 여우주연상을 받은건 《미라클 워커》에 출연하여 헬렌 켈러를 가르치는 설리반 선생역을 맡았던 앤 밴크로프트였다.[6]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에서, 두 주연 배우의 사이가 매우 안좋다는 점이 서로를 증오하는[7] 두 자매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영화 홍보에 은근히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이 영화가 워낙 기대작이었고 제작될 당시 둘의 커리어가 내리막길이라 이 영화까지 파토 나면 커리어가 작살 나기 때문에 촬영 기간에는 둘다 딱히 싸우는 일 없이 프로답게 행동했다고 한다.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의 성공 때문에 1960년대엔 미친 노파 역으로 주로 활동했다.
물론 영화 촬영이 끝난 이후로는 이 둘은 다시 앙숙으로 돌아갔고 서로의 인터뷰에서 서로를 깎아내리기로 바빴다. 프로모션 현장에 조안 크로포드가 불참한게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 내부 스크리닝 이후 의견을 물었던 크로포드에게 데이비스가 "나의 훌륭한 연기가 잘 담긴 영화다"라고만 하고 크로포드의 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아서 속으로 매우 실망한게 불참한 이유라고 후에 밝혔다. 다음해 베티 데이비스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자, 조안 크로포드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여배우들[8] 중 베티 데이비스를 제외한 네 명에게, 만약에 시상식에 못 가게 된다면 자신이 대리 수상을 해주겠다고 연락을 돌린다. 그리고 앤 밴크로프트가 시상식에 불참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시상식에서 앤 밴크로프트가 수상자로 발표되자 크로포드는 대리 수상을 하러 시상식 무대로 올라왔고 데이비스가 보는 앞에서 아주 보란듯이 수상을 할 수 있었다(대리 수상이긴 하지만). 이후 데이비스는 모든 인터뷰에서 크로포드가 자기가 상을 못받게 하기 위해서 로비를 했다고 말하며 분노했고(물론 크로포드는 부인하였다) 둘의 사이는 겉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 영화의 대성공 이후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의 감독인 로버트 알드리치는 전작과 비슷한 스토리의 사이코스릴러 영화인 1964년작 《허쉬... 허쉬, 스윗 샬롯(Hush...Hush, Sweet Charlotte)》을 만들게 되는데,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의 두 주역인 데이비스와 크로포드를 그대로 기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둘의 사이는 알드리치 감독이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안좋았고 데이비스는 캐스팅을 받아들이기 전에 감독에게 혹시 크로포드와 자는거 아니냐고 따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크로포드보다 촬영장에 먼저 도착한 데이비스가 모든 스태프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9] 크로포드를 왕따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10]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크로포드가 병가를 내고[11] 영화 촬영이 중단되자 제작사는 크로포드의 병원에 찾아가 그녀가 데이비스 때문에 꾀병을 부리는건 아닌지에 대해 뒷조사까지 했고 이후 영화 촬영을 더이상 지연 시킬 수 없다며 그녀의 배역을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로 교체해 버린다. 제작사가 관여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촬영장에서 데이비스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누가 그 뒤에 있었는지 대충 예상이 갈 것이다. 크로포드는 자신이 강판된 사실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았다고 한다. 이 둘의 사이는 이후에도 회자되어서 2017년에 수잔 서랜든과 제시카 랭이 출연한 미니 시리즈도 제작되었다.
베티 데이비스는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하다 1989년 암으로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3. 평가
남성 위주였던 당시 할리우드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캐서린 햅번과 함께 본인 의견을 강하게 주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다르게 말하면 엄청난 디바라서 커리어 중반 이후로는 제작사, 제작자, 감독, 동료배우 할것 없이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직언을 퍼부어서 많이들 껄끄러워 했다고 한다.
큰 눈으로 유명한데 처음 배우가 된 후 첫 소속사인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배역을 못맡아 거의 짤릴 뻔 했으나 촬영감독이 그 큰 눈이 카메라에 잘 받을거라며 한 영화에 추천했고 그 영화로 데뷔를 한 일화가 있다. 그녀의 눈이 워낙 유명해져서 대중 문화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1981년도에 빌보드 핫 100 9주 1위와 빌보드 연말 차트 1위를 기록한 킴 칸스의 "Bette Davis Eyes"라는 노래도 있다. 마돈나의 싱글인 보그의 가사에도 등장하기도 한다. 1980년대에는 젊은 시절의 악역 이미지와 더불어 말년에 자주하던 과장된 연기와 티비 인터뷰에서의 디바와 같은 태도가 일종의 밈이 되었는데, 이 덕분에 주디 갈란드와 함께 게이 아이콘으로도 유명했다. 나쁘게 말하면 성격이 좋은편은 아니었지만 여성 인권이 취약하던 시절에 주변에서 뭐라고 하던 독고다이였던 그녀의 태도가 소수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었을지도. 무엇보다 여신같은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연기력으로 모든것을 커버하며[12]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에 등장한 점이 후대에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4. 활동
5. 기타
-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2위에 선정되었다.
-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에 같이 출연했던 조안 크로포드와는 전성기 시절부터 지독한 앙숙으로 유명했다. 공식적으론 불화가 없다고 부정했으나 비공식적으론 암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고 한다. [13][14] 사례로, 펩시 사의 이사인 조안 크로포드를 엿먹이기 위해 베티 데이비스는 촬영장에 코카콜라 자판기를 설치했다. 그러자 열받은 조안 크로포드는 베티 데이비스가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끌고가는 씬을 촬영할 때 주머니에 무거운 추를 넣어놓았고, 그걸 몰랐던 베티 데이비스는 해당 씬을 촬영하다 등뼈를 다치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베티 데이비스는 조안 크로포드를 폭행하는 씬에서 정해진 것보다 그녀를 심하게 때려서 조안 크로포트를 다치게 만들기도 하였다.
- 말년에 대선배 릴리안 기쉬와 함께[15] 1987년작 《8월의 고래》를 찍으면서도, 툭하면 기시보다 돈 많이 달라고 하거나 기시에게 귀 먹었냐고 비아냥거려서 기시가 무척 언짢아했다고 한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기시는 병마를 앓고 있던 베티 데이비스를 가엾게 여겼다고.[16]
- 후배였던 카렌 블랙[17]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1976년작 《마리안의 욕망(Burnt Offerings)》이라는 공포 영화를 찍으면서 카렌 블랙의 연기에는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불화가 있었다고 한다.
- 아이러니하게도 조안 크로포드와 베티 데이비스는 모두 자신들의 딸과 불화가 심했고, 딸들은 어머니의 실체에 대해 폭로하는 책을 썼다.
- 캐서린 햅번과도 묘한 경쟁 구도였다. 그 예로 캐서린 햅번은 메릴 스트립을 계산적이고 기계적인 연기를 한다고 깠으나, 베티 데이비스는 메릴 스트립의 데뷔 초,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고는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라며 스트립에게 친필 편지까지 보내기도 하였다. 이때 인연으로 베티 데이비스 사후 다큐에 메릴 스트립이 출연하기도 하였다.
- 5년 연속(1939년~1943년)으로 아카데미 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최초의 배우이다. 이후 그리어 가슨이 타이 기록(1942년~1946년)을 냈다.
- 워너 브라더스 사와의 소송에서 패소했을 당시 배우 생명이 끊길 뻔 했으나, 그녀의 기지를 높게 평가한 워너 사의 사장 잭 워너는 이후 데이비스에게 최고의 대우를 보장해주었다.
- 영화계의 성차별이나 불합리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했고, 그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여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 동시에 인종차별 반대론자로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흑백 분리 정책에 저항했다.
- 1930년대 말 하워드 휴즈의 한때 연인이었다. 당시는 베티 데이비스의 이혼 전으로 침실에서 휴즈와 섹스하던 중에 데이비스의 남편이 쳐들어왔다. 화가 난 남편이 휴즈에게 입막음 댓가로 7만 달러를 요구하자, 베티 데이비스는 남편에게 미쳤다고 쌍욕하면서 서로 싸웠다고 한다. 아내와 남편이 벌이는 병림픽의 와중에 휴즈는 베티 데이비스의 슬리퍼 한쪽으로 가운데를 간신히 가리고 서서는 어쩔줄 모르고 당황해했다고..
- 아카데미 상을 2번이나 받았지만, 상운이 없는 배우로 분류된다. 그녀의 최고 연기 퍼포먼스는 1950년 이브의 모든 것[19] 내지 1962년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20] 두개가 가장 유명하지만 둘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타지 못했다. 그러나 1930~40년대에 두 번이나 탔고, 아카데미가 나이 든 배우를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비교적 노안인 편이었다. 동 시기에 동갑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제임스 스튜어트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노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21] 특히 이브의 모든 것에 나오는 앤 백스터가 무지무지한 동안이기에, 더욱 노안인게 부각된다.
[1]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의 제작사로 유명하다.[2] 이 당시 할리우드는 프로덕션 컴퍼니와 배우들이 전속 계약을 맺어서 다른 영화사의 영화에 나오려면 소속 프로덕션의 동의가 필요했다.[3] 어부지리라 서술되어 있긴 하지만, 주디 홀리데이의 연기도 역시나 대단한 명연기로 꼽힌다. 다만 경쟁자들이 워낙에 대단했을뿐...[4] 조안 크로포드가 베티 데이비스가 거절한 영화들에 나와서 줄줄이 죄다 히트함으로써 둘의 사이가 더더욱 안좋아졌다.[5] 한국에는 '''제인의 말로'''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6] 영화 졸업의 미세스 로빈슨 역으로도 유명한 배우. 밴크로프트 역시 미라클 워커에서 전설급 연기를 선보였고, 앞서 말했듯 두 명연기가 맞붙어 예상치도 못한 결과가 나온 것(...)[7] 정확하게 베티 데이비스의 베이비 제인 캐릭터가 조안 크로포드의 캐릭터를 질투하며 일방적으로 증오하는 역이었다.[8] 앤 밴크로프트, 제달린 페이지, 캐서린 햅번, 리 레믹과 베티 데이비스가 이 해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자였다.[9] 데이비스는 영화의 프로듀싱에도 관여했기에 영향력이 컸다[10] 사실 이건 조안 크로포드 잘못도 있다. 조안 크로포드는 영화 현장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폭군같은 행동으로 당시에도 악명이 높았고 결국에는 같이 일했던 스태프들조차도 등을 돌리게 되었다.[11] 처음엔 꾀병이었으나 나중에는 피로가 몰려와서 진짜로 몸이 아팠다고 한다[12]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을 연기하는 배우'''의 시초가 베티 데이비스였다. 커리어 초기에 당시 배우답지 않은 얼굴 때문에 퇴짜를 줄줄이 받았다.[13] 이 둘의 관계는 크로포드에 대한 데이비스의 질투에서부터 시작했다. 데이비스가 힘들게 오디션을 보면서 배역을 따는 무명배우의 삶을 살았을 당시 조안 크로포드는 전성기를 누렸는데, 데이비스는 무용수 출신 조안보다 연기학교에서 공부하며 커리어를 쌓은 자신이 더 뛰어난 배우라고 생각해 그녀를 질시했다. 함께 워너브라더스에서 뛸 당시 크로포드가 보낸 선물을 모두 돌려보냈는데, 이 일로 조안 크로포드 역시 베티 데이비스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다.[14] 결정적으로 조앤 크로포드가 1963 오스카에서 같은 영화에 출연한 베티 데이비스의 산을 넘고 수상한 앤 밴크로프트의 수상을 대신 해줬는데, 이 사건은 워낙에 유명한 사건이라 여전히 인구에 회자된다.[15] 무려 15살 차이가 난다.[16] 이때는 베티 데이비스가 사망하기 2년 전으로 한창 암투병할 시기였다.[17] 뉴 아메리칸 시네마와 70년대 미국 공포 영화를 이끌었던 배우. 로버트 알트만 영화에도 출연했다.[18] 사실 현대 할리우드는 민주당원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30~40년대에는 오히려 공화당원이 더 많았다. 아무래도 할리우드는 '자유'를 추구하는 집단이고 따라서 공산주의가 대두된 30~40년대에는 반공 보수파가 우세했지만 그 이후인 60년대부터는 진보적 가치가 대두되며 리버럴 세력이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반공 보수파가 일으킨 매카시즘이 워낙 큰 빅똥이어서...[19] 이 해는 역대급 여우주연상 레드오션이었는데, 같은 영화에 출연한 앤 백스터, 그리고 선셋 대로에 출연한 글로리아 스완슨 모두 역대급 연기를 하였다. 그러나 이 셋 모두 못 타고 주디 홀리데이가 대신 타버렸다. 주디 홀리데이또한 역대급 연기를 하기는 했다.[20] 여담으로 이 해 수상은 졸업의 로빈슨 부인 역으로 유명한 앤 밴크로프트가 탔는데, 시상자가 같이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에 나온 조앤 크로포드였다. 즉, 베티 데이비스를 이긴 여배우에게 베티 데이비스와 같은 영화에 출연한 조앤 크로포드가 대신 시상해준 것. 이는 베티 데이비스-조앤 크로포트 비프의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21] 1958년에 현기증 제작을 할 당시 영화가 망하자 스튜어트의 노안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이다. 스튜어트가 50년대 총합 흥행 1위배우임을 생각하면 그저 헛소리이지만.